일반 6월 둘째 주간(성령강림후 둘째 주간) 한국샬렘 영성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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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1,987회 작성일 20-06-08 01:15본문
알아차림의 종교
이민재 목사(은명교회)
“눈치”라는 말이 있다. 눈치는 눈과 다르다. 눈은 대상의 겉을 보지만, 눈치는 속까지 알아차린다. 눈은 상황의 일부를 보지만 눈치는 상황의 전체 분위기를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눈치가 발달한 사람도 있고 무딘 사람도 있다. “눈치가 빠르면 절에 가도 새우젓 얻어먹는다”는 전자를, “눈치가 발바닥이다”는 후자를 일컫는다. 눈치를 너무 보면 부담스럽지만, 눈치가 너무 없어도 답답하다. 적당한 눈치는 일상생활이나 직장생활에 꼭 필요하다.
영성생활에도 눈치가 필요하다. 신성한 눈치랄까, 그것이 바로 “알아차림”이다. 알아차리는 능력이 발달하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낀다. 표면뿐 아니라 이면을 보며, 부분뿐 아니라 전체를 파악하며, 현상뿐 아니라 그 너머를 직관한다. 무엇보다 속(俗)에서 성(聖)을 감지한다. 그렇기에 알아차림의 능력이 발달하면 사물들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깨닫고, 사람들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보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성령의 작용을 포착한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노래하듯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알아차리고) /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알아차린다).”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는 『성사란 무엇인가』에서 무엇 때문에 사물들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성사(聖事)가 되는가, 라고 물으며 스스로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 내면의 눈길이 사물을 성사로 변화시킨다.” 이 “내면의 눈길”이 바로 알아차림이다. 결국 알아차림이 사물을 성사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알아차림”의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린이들은 물론 심지어 강아지에게도 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의 알아차림 능력은 심각하게 고장난 것 같다. 욕심에 뿌리내린 이기적인 행복프로그램과 거짓자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의 능력이 고장나면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 같은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동료인간들은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영혼을 가진 존엄한 존재이기를 멈추고,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어떤 식으로 처분해도 되는 물체로 전락한다. 온갖 몰상식한 일들을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하면서 동료인간들을 짜증나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보인다. 번영신앙의 탐욕과 교리신앙의 독단, 집단적 맹신의 광기가 그렇다. 이와는 달리 알아차림의 능력이 회복되고, 신성한 눈치가 생기면 우리의 믿음은 갑자기 풍요로워진다. 성사적 감각이 깨어나 성소에서 뿐 아니라, 모든 곳, 모든 것, 모든 만남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바울은 아레오바고 설교에서 “하나님은 우리 각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다”며 이런 말을 덧붙인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행 17:27) “더듬어 찾는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는 더듬어 찾는 것이 알아차림과 관계있다는 사실을 신시아 버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영적 알아차림을 “전체에 속해 있음을 직관하는 타고한 감각”(innate perception of belonging to the whole)이라면서 이런 비유를 든다.
“당신은 지금 배를 타고 5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폭포로 가려고 한다. 맑고 화창한 날이라면 폭포를 향해 곧장 노를 저어 갈 수 있다. 안개가 짙게 낀 날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당신은 당신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노를 젓는다. 출렁이는 파도와 가문비나무의 시큼한 냄새, 육지에 가까워짐에 따라 더욱 빠르게 출렁이는 물결 따위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인다. 당신은 당신이 있는 곳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들을 민감하게 감각적으로 느끼면서 길을 찾는다. 당신이 있는 ‘여기’가 점점 확장되며 당신을 인도한다.”!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을 우리는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안개 자욱한 날에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노를 젓듯” 더듬어 찾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있는 곳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들을 민감하게 감각적으로 느끼면서” “여기”를 확장한다. 이것이 더듬어 찾는 것이며, 알아차림이다. 구름과 흑암 속에 계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밖에 없다. 하지만 더듬어 찾으면서 여기를 확장하는 동안 알아차림은 더욱 민감하고 풍성해진다. 마침내 우리도 바울처럼 감탄스러워하며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행 17:28)
코로나19는 현대문명 전반에 대해 심각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교회를 향해서는 성전중심 또는 건물중심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재고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이것은 일상의 모든 곳, 모든 상황, 모든 현실, 모든 만남, 모든 관계 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차리는” 능력을 회복하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규칙적인 관상기도만큼 이를 돕는 수행도 드물다. 꾸준한 관상수련을 통해 알아차리는 능력을 회복하여 이러한 시대의 요청에 응답할 때 우리의 믿음은 더욱 풍요로워질 뿐 아니라,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기독교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과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이민재 목사(은명교회)
“눈치”라는 말이 있다. 눈치는 눈과 다르다. 눈은 대상의 겉을 보지만, 눈치는 속까지 알아차린다. 눈은 상황의 일부를 보지만 눈치는 상황의 전체 분위기를 직관적으로 파악한다. 눈치가 발달한 사람도 있고 무딘 사람도 있다. “눈치가 빠르면 절에 가도 새우젓 얻어먹는다”는 전자를, “눈치가 발바닥이다”는 후자를 일컫는다. 눈치를 너무 보면 부담스럽지만, 눈치가 너무 없어도 답답하다. 적당한 눈치는 일상생활이나 직장생활에 꼭 필요하다.
영성생활에도 눈치가 필요하다. 신성한 눈치랄까, 그것이 바로 “알아차림”이다. 알아차리는 능력이 발달하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낀다. 표면뿐 아니라 이면을 보며, 부분뿐 아니라 전체를 파악하며, 현상뿐 아니라 그 너머를 직관한다. 무엇보다 속(俗)에서 성(聖)을 감지한다. 그렇기에 알아차림의 능력이 발달하면 사물들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깨닫고, 사람들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보며, 평범한 일상 속에서 성령의 작용을 포착한다. 윌리엄 블레이크가 노래하듯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알아차리고) /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알아차린다).” 브라질의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는 『성사란 무엇인가』에서 무엇 때문에 사물들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성사(聖事)가 되는가, 라고 물으며 스스로 이렇게 대답한다. “인간 내면의 눈길이 사물을 성사로 변화시킨다.” 이 “내면의 눈길”이 바로 알아차림이다. 결국 알아차림이 사물을 성사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알아차림”의 능력은 누구에게나 있다. 어린이들은 물론 심지어 강아지에게도 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의 알아차림 능력은 심각하게 고장난 것 같다. 욕심에 뿌리내린 이기적인 행복프로그램과 거짓자아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알아차림의 능력이 고장나면 끔찍한 일들이 벌어진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나 공감 같은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동료인간들은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영혼을 가진 존엄한 존재이기를 멈추고,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어떤 식으로 처분해도 되는 물체로 전락한다. 온갖 몰상식한 일들을 신앙의 이름으로 자행하면서 동료인간들을 짜증나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욕보인다. 번영신앙의 탐욕과 교리신앙의 독단, 집단적 맹신의 광기가 그렇다. 이와는 달리 알아차림의 능력이 회복되고, 신성한 눈치가 생기면 우리의 믿음은 갑자기 풍요로워진다. 성사적 감각이 깨어나 성소에서 뿐 아니라, 모든 곳, 모든 것, 모든 만남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바울은 아레오바고 설교에서 “하나님은 우리 각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다”며 이런 말을 덧붙인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행 17:27) “더듬어 찾는다”는 건 어떤 것일까? 나는 더듬어 찾는 것이 알아차림과 관계있다는 사실을 신시아 버조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영적 알아차림을 “전체에 속해 있음을 직관하는 타고한 감각”(innate perception of belonging to the whole)이라면서 이런 비유를 든다.
“당신은 지금 배를 타고 5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폭포로 가려고 한다. 맑고 화창한 날이라면 폭포를 향해 곧장 노를 저어 갈 수 있다. 안개가 짙게 낀 날이라면 사정이 다르다. 당신은 당신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노를 젓는다. 출렁이는 파도와 가문비나무의 시큼한 냄새, 육지에 가까워짐에 따라 더욱 빠르게 출렁이는 물결 따위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인다. 당신은 당신이 있는 곳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들을 민감하게 감각적으로 느끼면서 길을 찾는다. 당신이 있는 ‘여기’가 점점 확장되며 당신을 인도한다.”!
절대 신비이신 하나님을 우리는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안개 자욱한 날에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에 최대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노를 젓듯” 더듬어 찾을 수밖에 없다. 우리가 “있는 곳과 직접 관련이 있는 것들을 민감하게 감각적으로 느끼면서” “여기”를 확장한다. 이것이 더듬어 찾는 것이며, 알아차림이다. 구름과 흑암 속에 계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밖에 없다. 하지만 더듬어 찾으면서 여기를 확장하는 동안 알아차림은 더욱 민감하고 풍성해진다. 마침내 우리도 바울처럼 감탄스러워하며 말한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행 17:28)
코로나19는 현대문명 전반에 대해 심각한 물음을 던지고 있다. 교회를 향해서는 성전중심 또는 건물중심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재고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다. 이것은 일상의 모든 곳, 모든 상황, 모든 현실, 모든 만남, 모든 관계 속에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알아차리는” 능력을 회복하라는 요청이기도 하다. 규칙적인 관상기도만큼 이를 돕는 수행도 드물다. 꾸준한 관상수련을 통해 알아차리는 능력을 회복하여 이러한 시대의 요청에 응답할 때 우리의 믿음은 더욱 풍요로워질 뿐 아니라, 포스트-코로나 시대의 기독교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과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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