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다시, 교회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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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70회 작성일 24-05-14 13:10본문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 15:12)
나는 선한 목자이다.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요 10:11)
“제사보다 사랑을 원하시는 주님, 언제까지 우리는 다른 견해를 틀렸다고 정죄하는 모습을 보아야 하나요? 창조과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교수에게 정직이라는 중징계를 내리는 것이 온당한가요? 주님, 이런 건 기독교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사랑의 하나님!” 지난 금요일 감신대 떼제예배 중보기도 시간에 드린 한 학생의 기도다. 그는 울먹이고 있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는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감리교에서는 성소수자 모임에서 축도한 목사를 출교시켰고, 장로교에서는 동성애를 연구한 교수를 출교시켰다. 그런데 이제는 창조과학을 비판한 교수에게 중징계를 내린 것이다. 성결교(서울신대)에서 일어난 일이다.
현대판 후미에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 보면 “후미에”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에도 시대 때 기독교 신자를 색출하기 위해 사용한 예수상이나 마리아상이 새겨진 동판이다. 후미에를 밟으면 살 수 있었고, 밟지 않으면 죽어야 했다. 이십 년(1614~1635) 동안 후미에를 밟지 않아 죽은 사람이 28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교회에서는 현대판 후미에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양심적인 신앙인들을 정죄하고 있다. 좌경 용공 딱지가 그렇고, 종교다원주의와 WCC 찬반이 그렇고, 요즘은 동성애 이슈가 그런 역할을 한다. 감리교에서는 〈자격심사위원회〉가 진급 중인 목회자들에게 동성애 찬반을 물으며 현대판 후미에를 밟게 한다. 조금이라도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면 진급에서 탈락할 각오를 해야 한다. 장신대는 신학교 입학 때부터 “동성애반대서약”을 한다고 한다. 이제는 창조과학도 후미에 대열에 합류했다.
한국교회는 왜 교리수호라는 명목으로 후미에에 집착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교리는 복음의 생명을 담는 그릇이다. 하지만 교리라는 그릇은 생명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다 담지 못한다. 이는 샘이 끊임없이 샘솟는 샘물을 다 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샘을 벗어나야 샘물은 시내를 이루고 강물이 되어 인간을 비롯한 삼라만상을 살린다. 샘에 갇히는 순간 샘물은 썩는다. 이때 샘은 죽음의 웅덩이가 되고 만다. 교리가 그렇다. 교리는 일시적으로 교회를 보호하고 이단으로부터 지켜주지만 시대정신에 응답하기 위해 교리를 초월하는 생명의 흐름을 차단할 때 생명을 잃는다. 교리에 집착하는 교회는 마침내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폐허로 변한다.
예수님이야말로 교리(율법)의 틀을 벗어나 넘쳐흐르는 생명의 물이었다. 그렇기에 그이를 만난 사람들은 풍부하게 생명을 공급받았다. 위로도 받고 치유도 받고 희망도 얻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교리나 율법의 필요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생명을 잃은 율법을 대체할 새로운 계명을 주셨을 뿐이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5:27)
복음의 생명은 “서로사랑”이다. 하지만 사랑이 고갈될 때 남는 건 교리뿐이다. 이때 교리에 집착하면서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 시작한다. 이런 사실을 사도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 3:6) 문자(교리, 율법)를 앞세우는 신앙은 생명을 죽이는 신앙이며, 예수님을 죽인 살벌한 신앙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교회는 바리사이적 교리주의의 덫에 갇혀 있다. 예수님 만나기 전 자기의自己義 에 빠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사울과 싱크로율이 거의 같다. 여기에 교조화된 유교의 권위주의와 가부장주의, 성차별주의가 혼합되어 한국교회는 이상한 종교가 되었다. 서로사랑이라는 복음의 생명이 고갈된 한국교회가 기독교회 맞냐고 묻는 건 당연하다.
선한 목자
한국교회가 기독교회일까? 이 물음은 생명력을 잃은, “서로사랑”의 능력을 잃은 한국교회를 향해 던져야 하는 고통스러운 물음이다. 교회는 인간이 만든 교리로 운영되는 집단이 아니다. 교회의 운영체제는 다른 집단과 다르다. 사람이 만든 집단이 이익과 욕망을 중심으로 운영된다면, 교회의 중심은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며(골 1:18), 교회의 모퉁잇돌이며(엡 2:20), 교회의 머릿돌(행 4:11)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중심이다. 그래서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다.”(행 4:12)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이 없다”는 신앙고백이 “오직 예수”라는 교리적 구호로 탈바꿈하여 타종교를 악마화하고, 원주민들을 죽이고, 비기독교인들을 저주하는 후미에가 되어왔다. 하지만 이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니다.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이 없다”는 신앙고백의 참뜻은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이 없다”는 고백의 참뜻을 “선한 목자”라는 예수님의 자기 인식에서 발견한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요 10:11) 선한 목자는 예수님의 정체성이다. 그런데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요 10:11) 일반적으로 목자의 본분은 양들을 많이 번성시키는 것이다. 야곱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외삼촌 라반과 품삯을 흥정할 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제가 여기에 오기 전에는 장인어른의 소유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이제 떼가 크게 불어났습니다.”(창 30:30) 이건 라반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야곱은 “좋은” 목자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양 떼를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신다. 선한 목자는 떼를 불리는 것에 관심이 없다.
예수님은 양 떼를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신다. 선한 목자는 떼를 불리는 것에 관심이 없다.
선한 목자는 “자기 목숨을 버리는” 목자다. 목숨을 버린다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님의 “다의적” 언어사용법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물에 “생수” 또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이라는 의미를 덧붙이고, 빵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는 의미를 덧붙이신다. 성전도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 곧 인격을 의미한다. 탄생에는 생물학적인 탄생뿐 아니라 영적인 탄생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탄생도 있다. 목자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양들을 잘 돌보고 번성시키는 보통 목자에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καλός ποιμὴν)라는 의미를 덧붙이신다.
목숨을 버린다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목숨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프시케”(ψυχή)다. “심리학”(독어 psychologie, 영어 psychology)의 어원이 프시케임을 알면 “목숨”이 심리현실과 관련됨을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해 목숨은 심리현실에서 형성되는 거짓자아다. 거짓자아는 목숨처럼 소중하다. 생존의 추동력이며 자존심과 명예의 뿌리인 까닭이다.
선한 목자의 뜻이 분명해진다. 선한 목자는 자기중심적인 에고를 강화하는 거짓자아를 버리는 사람이다. 그래야 “서로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계명인 서로사랑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선한 목자는 거짓자아를 강화하는 율법도 교리도 기꺼이 버린다.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다. 예수님 만나기 전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다”고 자부할 정도로 종교적 에고가 강한 사람이었다.(빌 3:5-6)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율법의 의 곧 “자기의”自己義를 버렸다. 자신에게 “이로웠던 것”이었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겼고, 오물로 여겼다.”(빌 3:7-8) 이는 목숨을 버리는 일이었다. 한 번이 아니었다.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의 일상의 훈련이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전 15:31) 그렇게 바울은 예수님의 뒤를 잇는 기독교회 최고의 선한 목자가 되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고전 15:31)
선한 목자는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다. 왜 목숨을 버릴까? 그래야 생명 곧 “조에”(ζωή)를 얻기 때문이다. 생명의 장 안에서만 서로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거짓자아를 버리면 참자아가 깨어난다. 거짓자아를 버리고 참자아를 각성한 선한 목자는 양들도 거짓자아를 버리고 참자아를 각성하게 한다. 이때 선한 목자는 양들을 알고 양들은 목자를 안다. 이러한 앎은 참자아 차원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앎이다. 상대를 신성한 존재로 존중하는 거룩한 앎이요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행복한 앎이다. 목자와 양들 사이에 오해할 일도 없고 싸울 일도 없다. 남은 일은 “서로사랑”을 하는 것뿐이다.
선한 목자는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다. 왜 목숨을 버려야 할까? 그래야 생명 곧 “조에”(ζωή)를 얻기 때문이다. 생명의 장 안에서만 서로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라는 말의 의미가 분명해졌다. 이것은 “목숨을 버리고 참자아를 각성한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뜻이다. 특정 교단에 속하거나 명목상의 교인 되는 것이 구원의 보증수표는 아니다.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하여, 성경이나 교리나 율법이 거짓자아를 강화하고 “서로사랑”을 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을 버려야 한다. 아무리 목숨처럼 소중해도 버려야 한다. 삯꾼은 그렇지 않다. 삯꾼은 목숨을 버리지 않는다. 목숨을 버리지 못한 삯꾼들은 양을 함부로 대한다. 때로는 집단 린치를 가하기도 한다. 언제나 성경과 교리를 들이대면서….
도망자
헨리 나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에 어린 도망자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어린 도망자 한 명이 적군에게 쫓겨 마을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도망자를 환대했고 묵을 곳도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군인들이 찾아와 동트기 전까지 도망자를 내놓지 않으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자 마을은 공포에 휩싸였다.
마을 사람들은 목사를 찾아가 지혜를 구했다. 목사는 기도하며 성경을 읽었다. 새벽녘에 성경 한 구절이 목사의 눈에 띄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편이 낫다.” 목사는 군인들을 불러 소년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 주었고, 군인들은 소년 도망자를 끌고 가 처형했다.
목숨을 건진 마을 사람들은 축제를 벌였다. 하지만 목사는 괴로웠다. 그날 밤 천사가 찾아와 물었다.
“너는 무슨 일을 했는가?”
“도망자를 적군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네가 메시아를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목사는 고통스러워하며 반문했다.
“제가 무슨 수로 그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천사가 말했다.
“성경을 읽는 대신 한 번만이라도 소년을 찾아가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면 너는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 이 구절은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를 죽일 명분으로 한 말이다. 결국 잘못 이해한 성경이 또 한 번 예수를 죽였다. 그리스도라면 틀림없이 자신과 동일시했을 그 연약한 지체를 말이다! 목사는 성경을 여는 대신 연민의 눈을 열어야 했다.
성경과 교리로 사람을 죽이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서로사랑”을 망각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 이민재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 15:12)
나는 선한 목자이다.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
(요 10:11)
“제사보다 사랑을 원하시는 주님, 언제까지 우리는 다른 견해를 틀렸다고 정죄하는 모습을 보아야 하나요? 창조과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교수에게 정직이라는 중징계를 내리는 것이 온당한가요? 주님, 이런 건 기독교가 아닌 것 같습니다. 저희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사랑의 하나님!” 지난 금요일 감신대 떼제예배 중보기도 시간에 드린 한 학생의 기도다. 그는 울먹이고 있었다.
요즘 한국교회에서는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감리교에서는 성소수자 모임에서 축도한 목사를 출교시켰고, 장로교에서는 동성애를 연구한 교수를 출교시켰다. 그런데 이제는 창조과학을 비판한 교수에게 중징계를 내린 것이다. 성결교(서울신대)에서 일어난 일이다.
현대판 후미에
엔도 슈사쿠의 『침묵』에 보면 “후미에” 이야기가 나온다. 일본 에도 시대 때 기독교 신자를 색출하기 위해 사용한 예수상이나 마리아상이 새겨진 동판이다. 후미에를 밟으면 살 수 있었고, 밟지 않으면 죽어야 했다. 이십 년(1614~1635) 동안 후미에를 밟지 않아 죽은 사람이 28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교회에서는 현대판 후미에가 다양한 얼굴을 하고 양심적인 신앙인들을 정죄하고 있다. 좌경 용공 딱지가 그렇고, 종교다원주의와 WCC 찬반이 그렇고, 요즘은 동성애 이슈가 그런 역할을 한다. 감리교에서는 〈자격심사위원회〉가 진급 중인 목회자들에게 동성애 찬반을 물으며 현대판 후미에를 밟게 한다. 조금이라도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면 진급에서 탈락할 각오를 해야 한다. 장신대는 신학교 입학 때부터 “동성애반대서약”을 한다고 한다. 이제는 창조과학도 후미에 대열에 합류했다.
한국교회는 왜 교리수호라는 명목으로 후미에에 집착할까? 이유는 간단하다.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교리는 복음의 생명을 담는 그릇이다. 하지만 교리라는 그릇은 생명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다 담지 못한다. 이는 샘이 끊임없이 샘솟는 샘물을 다 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샘을 벗어나야 샘물은 시내를 이루고 강물이 되어 인간을 비롯한 삼라만상을 살린다. 샘에 갇히는 순간 샘물은 썩는다. 이때 샘은 죽음의 웅덩이가 되고 만다. 교리가 그렇다. 교리는 일시적으로 교회를 보호하고 이단으로부터 지켜주지만 시대정신에 응답하기 위해 교리를 초월하는 생명의 흐름을 차단할 때 생명을 잃는다. 교리에 집착하는 교회는 마침내 생명이 자라지 못하는 폐허로 변한다.
예수님이야말로 교리(율법)의 틀을 벗어나 넘쳐흐르는 생명의 물이었다. 그렇기에 그이를 만난 사람들은 풍부하게 생명을 공급받았다. 위로도 받고 치유도 받고 희망도 얻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교리나 율법의 필요성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생명을 잃은 율법을 대체할 새로운 계명을 주셨을 뿐이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 15:27)
복음의 생명은 “서로사랑”이다. 하지만 사랑이 고갈될 때 남는 건 교리뿐이다. 이때 교리에 집착하면서 견해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기 시작한다. 이런 사실을 사도 바울은 잘 알고 있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영은 사람을 살립니다.”(고후 3:6) 문자(교리, 율법)를 앞세우는 신앙은 생명을 죽이는 신앙이며, 예수님을 죽인 살벌한 신앙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교회는 바리사이적 교리주의의 덫에 갇혀 있다. 예수님 만나기 전 자기의自己義 에 빠져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던 사울과 싱크로율이 거의 같다. 여기에 교조화된 유교의 권위주의와 가부장주의, 성차별주의가 혼합되어 한국교회는 이상한 종교가 되었다. 서로사랑이라는 복음의 생명이 고갈된 한국교회가 기독교회 맞냐고 묻는 건 당연하다.
선한 목자
한국교회가 기독교회일까? 이 물음은 생명력을 잃은, “서로사랑”의 능력을 잃은 한국교회를 향해 던져야 하는 고통스러운 물음이다. 교회는 인간이 만든 교리로 운영되는 집단이 아니다. 교회의 운영체제는 다른 집단과 다르다. 사람이 만든 집단이 이익과 욕망을 중심으로 운영된다면, 교회의 중심은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며(골 1:18), 교회의 모퉁잇돌이며(엡 2:20), 교회의 머릿돌(행 4:11)이다. 그리스도가 교회의 중심이다. 그래서 “이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은 없다.”(행 4:12)
그런데 안타깝게도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이 없다”는 신앙고백이 “오직 예수”라는 교리적 구호로 탈바꿈하여 타종교를 악마화하고, 원주민들을 죽이고, 비기독교인들을 저주하는 후미에가 되어왔다. 하지만 이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게 아니다.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이 없다”는 신앙고백의 참뜻은 그런 게 아니다.
나는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이 없다”는 고백의 참뜻을 “선한 목자”라는 예수님의 자기 인식에서 발견한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요 10:11) 선한 목자는 예수님의 정체성이다. 그런데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요 10:11) 일반적으로 목자의 본분은 양들을 많이 번성시키는 것이다. 야곱이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서 외삼촌 라반과 품삯을 흥정할 때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제가 여기에 오기 전에는 장인어른의 소유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이제 떼가 크게 불어났습니다.”(창 30:30) 이건 라반도 인정하는 사실이었다. 야곱은 “좋은” 목자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양 떼를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신다. 선한 목자는 떼를 불리는 것에 관심이 없다.
예수님은 양 떼를 불리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신다. 선한 목자는 떼를 불리는 것에 관심이 없다.
선한 목자는 “자기 목숨을 버리는” 목자다. 목숨을 버린다는 의미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예수님의 “다의적” 언어사용법을 기억해야 한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물에 “생수” 또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물”이라는 의미를 덧붙이고, 빵에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는 의미를 덧붙이신다. 성전도 건물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 곧 인격을 의미한다. 탄생에는 생물학적인 탄생뿐 아니라 영적인 탄생 곧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탄생도 있다. 목자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양들을 잘 돌보고 번성시키는 보통 목자에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선한 목자”(καλός ποιμὴν)라는 의미를 덧붙이신다.
목숨을 버린다
목숨을 버린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목숨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프시케”(ψυχή)다. “심리학”(독어 psychologie, 영어 psychology)의 어원이 프시케임을 알면 “목숨”이 심리현실과 관련됨을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해 목숨은 심리현실에서 형성되는 거짓자아다. 거짓자아는 목숨처럼 소중하다. 생존의 추동력이며 자존심과 명예의 뿌리인 까닭이다.
선한 목자의 뜻이 분명해진다. 선한 목자는 자기중심적인 에고를 강화하는 거짓자아를 버리는 사람이다. 그래야 “서로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계명인 서로사랑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선한 목자는 거짓자아를 강화하는 율법도 교리도 기꺼이 버린다.
바울이 그런 사람이었다. 예수님 만나기 전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다”고 자부할 정도로 종교적 에고가 강한 사람이었다.(빌 3:5-6)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율법의 의 곧 “자기의”自己義를 버렸다. 자신에게 “이로웠던 것”이었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겼고, 오물로 여겼다.”(빌 3:7-8) 이는 목숨을 버리는 일이었다. 한 번이 아니었다.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의 일상의 훈련이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전 15:31) 그렇게 바울은 예수님의 뒤를 잇는 기독교회 최고의 선한 목자가 되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고전 15:31)
선한 목자는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다. 왜 목숨을 버릴까? 그래야 생명 곧 “조에”(ζωή)를 얻기 때문이다. 생명의 장 안에서만 서로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거짓자아를 버리면 참자아가 깨어난다. 거짓자아를 버리고 참자아를 각성한 선한 목자는 양들도 거짓자아를 버리고 참자아를 각성하게 한다. 이때 선한 목자는 양들을 알고 양들은 목자를 안다. 이러한 앎은 참자아 차원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앎이다. 상대를 신성한 존재로 존중하는 거룩한 앎이요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행복한 앎이다. 목자와 양들 사이에 오해할 일도 없고 싸울 일도 없다. 남은 일은 “서로사랑”을 하는 것뿐이다.
선한 목자는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다. 왜 목숨을 버려야 할까? 그래야 생명 곧 “조에”(ζωή)를 얻기 때문이다. 생명의 장 안에서만 서로사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 밖에는 다른 아무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라는 말의 의미가 분명해졌다. 이것은 “목숨을 버리고 참자아를 각성한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뜻이다. 특정 교단에 속하거나 명목상의 교인 되는 것이 구원의 보증수표는 아니다. 목숨을 버리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하여, 성경이나 교리나 율법이 거짓자아를 강화하고 “서로사랑”을 하지 못하게 한다면 그것을 버려야 한다. 아무리 목숨처럼 소중해도 버려야 한다. 삯꾼은 그렇지 않다. 삯꾼은 목숨을 버리지 않는다. 목숨을 버리지 못한 삯꾼들은 양을 함부로 대한다. 때로는 집단 린치를 가하기도 한다. 언제나 성경과 교리를 들이대면서….
도망자
헨리 나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에 어린 도망자 이야기가 나온다. 어느 날 어린 도망자 한 명이 적군에게 쫓겨 마을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도망자를 환대했고 묵을 곳도 마련해주었다. 그런데 군인들이 찾아와 동트기 전까지 도망자를 내놓지 않으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자 마을은 공포에 휩싸였다.
마을 사람들은 목사를 찾아가 지혜를 구했다. 목사는 기도하며 성경을 읽었다. 새벽녘에 성경 한 구절이 목사의 눈에 띄었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편이 낫다.” 목사는 군인들을 불러 소년이 숨어 있는 곳을 알려 주었고, 군인들은 소년 도망자를 끌고 가 처형했다.
목숨을 건진 마을 사람들은 축제를 벌였다. 하지만 목사는 괴로웠다. 그날 밤 천사가 찾아와 물었다.
“너는 무슨 일을 했는가?”
“도망자를 적군에게 넘겨주었습니다.”
“네가 메시아를 넘겨주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목사는 고통스러워하며 반문했다.
“제가 무슨 수로 그것을 알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자 천사가 말했다.
“성경을 읽는 대신 한 번만이라도 소년을 찾아가 그 눈을 들여다보았다면 너는 그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낫다.” 이 구절은 대제사장 가야바가 예수를 죽일 명분으로 한 말이다. 결국 잘못 이해한 성경이 또 한 번 예수를 죽였다. 그리스도라면 틀림없이 자신과 동일시했을 그 연약한 지체를 말이다! 목사는 성경을 여는 대신 연민의 눈을 열어야 했다.
성경과 교리로 사람을 죽이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서로사랑”을 망각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니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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