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하나님의 영성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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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95회 작성일 23-06-15 22:48본문
주님께서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보아라.”
(창 15:5)
놀랍게도 바깥은 안이었던 것이다!
(본문 중에서)
신앙생활에도 계절이 있다. 하나님과의 사랑이 봄처럼 싹트는 때도 있고, 여름처럼 뜨거워지는 때도 있고, 가을처럼 깊어지는 때도 있다. 하지만 신앙의 겨울을 맞이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서먹하고 냉랭해진다. 문제가 해결되기를 부르짖어도 응답은 없고, 하나님의 침묵은 겨울밤처럼 길게만 느껴진다. 삶의 “하늘은 놋이 되어” 비를 내리지 않고, 삶의 “대지는 쇠가 되어” 모든 온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다. 하나님의 무능과 무언, 하나님의 부재만이 가뜩이나 공허한 가슴을 스산하게 한다.
실망
신앙의 겨울을 지날 때 하나님이 전능하다(창 17:1)는 신앙의 통념은 공허하다. 아브람이 그랬다. 그는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창 12:2)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 믿고 정든 고향 떠났었다.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려야 했던가. 평생 누려왔던 지위, 지인들과의 관계, 가문의 지지와 후원, 그런 것들에 기초한 삶의 안정 따위…. 생식이 불가능한 일흔다섯의 나이였지만 그래도 그는 하나님의 전능을 믿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약속이 이루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과 대화가 시작된다. 하나님이 먼저 말문을 여신다. “아브람아,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크다.” 그런데 아브람의 어조가 이상하다. 기뻐할 법도 한데 따지듯 되묻는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이어지는 볼멘소리가 퉁명스럽다. “저에게는 자식이 없습니다!” 이 한마디에는 자기에게 필요한 건 아들이지 방패 어쩌고 보상 어쩌며 말만 늘어놓는 게 아니라는 불만이 들어있다.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하나님이 못하면 자신이라도 방책을 세워야 했다. 그래서 아브람은 말했을 것이다. “저의 집에 있는 이 종(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기가 방책을 세워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 때문임을 분명히 밝힌다.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창 15:3a) 책임소재를 분명히 한 것이다.
이렇게 좌절과 불신 속에서 퉁명스럽게 하나님께 따지고, 불경스럽게 방책을 찾던 아브람이었지만 결말은 예상 밖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창 15:6) 분위기가 갑자기 화기애애해졌다. 아브람은 믿고, 하나님은 의롭다 여겨주시고…. 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브람의 불신이 믿음으로 변하는 과정에는 “하나님의 영성지도”가 있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셨고, 하늘을 보게 하셨으며, 별들을 세어보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성지도가 아브람의. 불신을 믿음으로 변형시켰다. 아주 시적이고 멋진 영성지도였다.
바깥
하나님은 아브람을 장막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장막이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익숙한 공간이라면 바깥은 일상을 벗어난 낯선 공간이다. 이러한 “바깥”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교회나 기도원이나 피정의 집이 그런 “바깥”이다. 어쩌다 오르는 산도, 이따금 떠나는 여행도 일상의 바깥이다. 휘몰아치는 업무에서 벗어나 잠시 머무는 조용한 찻집도 일상의 바깥일 수 있다.
하지만 바깥은 공간만이 아니다. 생명의 시작과 성장 자체가 바깥으로 나가는 과정이다. 씨앗은 땅 바깥으로 나가야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아기는 모태 바깥으로 나가야 태어나 자랄 수 있다. 사람의 성장과정은 끊임없이 바깥으로 나가는 과정이다.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고 학교에 들어가고 직장에 다니고 결혼하여 새가정을 꾸리는 것 모두가 바깥을 향한 여정이다. 바깥으로 나가는 용기가 없다면 성장은 멈추고 삶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모르는 “바깥”이 있다. 바깥이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익숙한 공간 너머의 낯선 어떤 곳이라면, 가장 낯선 곳이 있다. 그곳이 어딜까? “내면”이라는 바깥이다! 사람들은 우주라는 바깥은 알아도 내면이라는 바깥은 잘 모른다.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이 내면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익살스럽게 묘사한 우화가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모르는 “바깥”이 있다. 바깥이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익숙한 공간 너머의 낯선 어떤 곳이라면, 가장 낯선 곳이 있다. 그곳이 어딜까? “내면”이라는 바깥이다!
세상 창조를 끝냈을 때 하나님은 만족스러웠다. “참 좋다!”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은 지치고 말았다. 꼭두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사람들이 몰려와 하소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자식이 없다고, 어떤 사람은 자식이 너무 많다며, 어떤 사람은 사랑에 빠졌는데 부모가 반대한다고, 어떤 사람은 더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며….
견딜 수 없던 하나님은 비서에게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나는 사람들에게 문제를 해결할 모든 지성과 능력을 주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든 책임을 나에게 돌리면서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조른다. 나는 쉴 수가 없다.”
그러자 비서가 하나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람들이 도저히 찾아오지 못할 장소가 한 곳 있습니다. 그리로 숨으십시오.” 그곳이 어디냐고 하나님이 묻자 비서가 대답했다. “사람들의 내면으로 숨으시면 됩니다. 그들은 당신을 찾으려고 온 세상을 뒤질 테지만, 내면으로는 절대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요.”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내면에 계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우화이지만, 내면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을 풍자한 우화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내면은 아주 낯선 영역이다. 낯설다는 점에서 내면이야말로 바깥이다. 놀랍게도 바깥은 안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내면은 아주 낯선 영역이다. 낯설다는 점에서 내면이야말로 바깥이다. 놀랍게도 바깥은 안이었던 것이다!
안이 바깥이 되다 보니 안은 찬밥 신세가 됐다. 내면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뜻이다. 이때 참담한 일이 벌어진다. 무관심을 틈타 안에 있는 것들이 제멋대로(무의식적으로) 바깥으로 나와 날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걸 심리학에서는 “투사”(投射)라 한다. 자기 내면에 있는 탐욕을 남에게 투사하여 타자를 비난한다.(정치가들) 자기 내면에 있는 불결을 남에게 투사하여 편을 가른다.(종교인들) 자기 내면의 그림자를 남에게 투사하여 마녀사냥에 광분한다.(바리새인들)
이런 맥락에서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은 내면의 탐욕, 내면의 불결, 내면의 그림자를 대면하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공중”이라는 메타포로 묘사한 심리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용기를 뜻한다.
하늘
내면이라는 바깥으로의 여정은 심리현실을 대면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직 가야 할 바깥, 또 다른 낯선 곳이 있다. 심리현실 너머에 있는 영성현실이 그것이다. 내면의 탐욕과 불결과 그림자 너머에 이미 현존하는 신성한 영역이다. 바울이 “하늘”이라는 메타포로 묘사한 현실로 하나님은 이곳에 현존하시며 이곳에서 활동하시며 이곳에서 휴식하신다.(엡 2:6)
바깥이라는 낯선 곳을 향한 여정은 영성현실을 자각할 때 완결된다. 영성현실 곧 내면의 하늘을 발견할 때, 겉사람은 속사람에 순종한다. 마음은 영의 다스림을 받는다. 생활현실은 악마의 영역인 “공중”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역인 “하늘”의 통치를 받는다. 육신의 정욕대로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던 “진노의 자식”(엡 2:3)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작품”(엡 2:10)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 실망과 불신에 빠져있던 아브람에게 하신 하나님의 두 번째 영성지도가 바로 영성현실을 각성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늘을 쳐다보라”(창 15:5)고 하셨던 것이다.
하늘을 쳐다볼 때 즉 영성현실을 자각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사고의 패러다임이 점사고에서 바탕사고로 바뀐다! 바탕사고란 무엇일까? 나는 언젠가 가족 단톡방에 올라온 글을 보고 바탕사고를 배웠다. 아마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글이었던 것 같은데 이런 내용이었다.
●
어느 날 선생님은 종이 한가운데에 검은 점이 찍혀 있는 종이를 나눠주면서 그림을 보고 느낀 것을 적으라고 했다. 학생들이 제출한 답안을 다 읽고 난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모두가 ‘검은 점’에만 집중했을 뿐 누구도 종이의 흰 여백에 대해 쓴 사람이 없네요.”
선생님은 이런 말도 덧붙였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아요. 늘 검은 점에만 몰두하면서 말예요. 건강이 나쁘다고 걱정하고, 돈이 없다고 불평하고, 상처가 아프다며 불행하게 살아가죠. 점들에 집착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선생님은 말을 이었다. “삶 전체는 아름다워요. 신비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부분에 사로잡혀 삶이 선물하는 은총을 누리지 못합니다. 삶은 경이로워요. 삶은 날마다 새로운 얼굴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자세히 보세요. 검은 점은 흰 여백이 상징하는 삶 전체에 비교하면 아주 작을 뿐이에요. 검은 점으로부터 흰 여백을 시선을 돌리세요. 그러면 삶이 선물하고 있는 기적과 신비를 매일 누릴 수 있을 거예요.”
자세히 보세요. 검은 점은 흰 여백이 상징하는 삶 전체에 비교하면 아주 작을 뿐이에요. 검은 점으로부터 흰 여백을 시선을 돌리세요. 그러면 삶이 선물하고 있는 기적과 신비를 매일 누릴 수 있을 거예요.”
하나님이 하신 일이 바로 점에서 흰 여백(하늘)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신 것이다. 알다시피 점(點)은 우리를 괴롭히는 수많은 삶의 문제들이다.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나 그로 인한 복잡한 감정과 숱한 번민일 수도 있다. 아브람에게는 나이가 들도록 대를 이을 자식이 없는 것이었으며, 그로 인한 실망과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었다. 이런 아브람을 하나님은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셨고, 하늘을 보라고 하신 것이다. 삶의 문제나 그로 인한 감정과 생각에 빠져있지 말고 바탕으로 나아가라는 초청이었다. 마음에서 영으로, 공중에서 하늘로, 심리현실에서 영성현실로 전향하라는 요청이었다.
바탕으로 나아간다고 해서 삶의 문제가 즉시 해결되거나 제거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점에 붙들려 있을 때와 바탕에 머물 때는 삶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진다. 점사고가 부분을 본다면 바탕사고는 전체를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밤하늘을 쳐다보며 영성현실이라는 바탕에 머물렀을 때 아브람은 하나님을 다시 믿을 수 있었고(창 15:6),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다.
수학적 언어로 말하면, 바탕사고는 “분모를 키우는 사고”다. 분모가 고정되고 분자가 커질수록 값은 커진다. 반대로 분자가 고정되고 분모가 커질수록 값은 작아진다. 분모가 무한대이면 분자가 아무리 커도 값은 영(zero)이다. 삶의 문제(P=Problem)를 분자, 의식(C=Consciousness)을 분모, 삶의 고통(S=Suffering)을 값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다음의 식이 성립한다.
P/C = S
그러면 삶의 고통(S)은 삶의 문제(P)와 의식의 수준(C)에 따라 달라진다. 의식(C)의 값이 고정되고 문제(P)의 값이 커지면 삶의 고통(S)도 그만큼 커진다. 의식의 값이 최소로 줄어들면(즉 의식의 수준이 낮아지면) 고통은 극대화된다. 반대로 삶의 문제(P)가 고정값이고, 의식이 커지면(즉 의식의 수준이 높아지면) 삶의 고통(S)은 줄어든다.
만일 의식이 영적 의식에 이르러 하나님과 합일하면 삶의 문제와 고통은 거의 사라진다. 고통에 대한 경험의 양상과 강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시 119:71)라는 시인의 고백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 8:28)라는 바울의 고백은 이런 경험을 반영한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나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만큼 의식의 수준이 높아지는 때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삶의 문제와 고통을 없애려고 애쓰는 종교가 아니다. 십자가를 제거하거나 피하는 종교도 아니다. 영성현실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어 십자가를 지는 종교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십자가가 상징하는 수많은 삶의 고통 앞에서 의연하다.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그리스도와 함께한다면(with Christ) 십자가를 지면서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기독교 신앙의 정수다.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간결하게 묘사한다. “우리는 이 모든 일(환난, 곤고,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협, 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롬 8:37)
별
하나님의 세 번째 영성지도는 밤하늘의 별을 세어보라고 하신 것이다. 별은 무엇을 상징할까? 삶의 문제들, 관계의 상처, 그로 인한 실패감이나 고통스러운 감정 속에 깃든 은총이다. 바깥으로 나가 하늘을 보면, 즉 내면으로 들어가 바탕에 머물면 삶의 문제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점사고가 부분을 본다면 바탕사고는 전체를 보기 때문이다.
첫째, 문제의 원인과 해결이 보인다. 십자가처럼 무겁게 느껴지던 문제가 새로운 희망을 잉태하고 있음을 깨닫고, 저주스러운 운명 속에 행복의 씨앗이 싹트고 있음을 깨닫는다. 십자가와 부활은 교리가 아니라 삶의 신비임을 깨닫는다. 이제 삶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 담담하게 바라보며 담대하게 마주한다. 삶의 문제가 축복의 통로임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둘째, 관계도 새로워진다. 내면으로 들어가 바탕에 머물면 타인의 심리현실이 보인다. 당연히 그 사람(아버지, 어머니, 형, 언니, 아우, 동생, 친구)의 고뇌가 느껴진다. 차마 꺼내지 못하는 심연의 아픔이 보이기도 하고, 참고 있는 신음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그동안 눈치채지 못한 사랑도 깨닫는다. 그 사람 탓으로 돌렸던 가슴의 응어리가 봄눈 녹듯 녹는다. 타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이 겹칠 때마다 눈시울이 젖는다.
셋째, 내면의 하늘인 바탕(영성현실)에 머물면 어떤 흐름이 보인다. “섭리”라는 삶의 신성한 배열이 보인다. 지금 겪는 삶의 문제들도, 불편한 관계들도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사실은 하나님의 섬세한 삶의 배열(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임을 깨닫는다. 고통스러웠던 삶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마음엔 감사의 물결이 일렁인다. 조건이나 환경을 초월한 기쁨이 샘솟는다.
바탕에 머물 때는 삶의 질문도 달라진다. “나에게 왜(why)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십니까”라는 질문은 “나에게 무슨(what) 일을 하시려는 겁니까” 하는 질문으로 바뀐다. 이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왜냐고 묻지 않는 삶”(life without why)이 시작된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 너머에서 또 다른 일을 발견한다. 인간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발견한다. 마침내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 너머에서 또 다른 일을 발견한다. 인간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발견한다. 마침내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다.
바깥으로 나가고, 하늘을 우러르고, 별들을 헤아리는 것이 담론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음식에 관한 담론이 허기진 배를 채워주지 않고, 운동에 관한 담론이 건강을 보장하지 않듯, 담론 자체로는 사람도 현실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담론을 현실로 만드는 구체적인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수행”이다. 해서,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설교가 아니라 실제로 바깥으로 나가는 수행이 필요하다. 바탕(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설교가 아니라 실제로 바탕에 머무르는 수행이 필요하다. 하늘에서 별들을 헤아려야 한다는 설교가 아니라 실제로 은총의 별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필요하다. 그런 수행이 바로 관상기도다.
그러니 내면이라는 바깥으로 나아가려거든 하늘나라가 네 안에 있다고 하신 예수의 이름을 불러라! 생각과 감정과 상처라는 점에서 벗어나 광활하고 고요한 바탕으로 나아가려거든 마음이 가난하고 깨끗하신 무심 예수의 이름을 불러라! 바탕이라는 내면의 하늘에서 은총의 별들을 발견하려거든 무의식의 어둠을 밝히는 샛별 예수의 이름을 불러라. 영성현실에서 펼쳐지는 섭리의 흐름을 보며 겸허히 소명을 받들려거든 영이신 아버지와 온전히 하나이신 예수의 이름을 불러라!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 이민재
(창 15:5)
놀랍게도 바깥은 안이었던 것이다!
(본문 중에서)
신앙생활에도 계절이 있다. 하나님과의 사랑이 봄처럼 싹트는 때도 있고, 여름처럼 뜨거워지는 때도 있고, 가을처럼 깊어지는 때도 있다. 하지만 신앙의 겨울을 맞이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서먹하고 냉랭해진다. 문제가 해결되기를 부르짖어도 응답은 없고, 하나님의 침묵은 겨울밤처럼 길게만 느껴진다. 삶의 “하늘은 놋이 되어” 비를 내리지 않고, 삶의 “대지는 쇠가 되어” 모든 온세상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다. 하나님의 무능과 무언, 하나님의 부재만이 가뜩이나 공허한 가슴을 스산하게 한다.
실망
신앙의 겨울을 지날 때 하나님이 전능하다(창 17:1)는 신앙의 통념은 공허하다. 아브람이 그랬다. 그는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창 12:2)는 하나님의 약속 하나 믿고 정든 고향 떠났었다. 얼마나 많은 것을 버려야 했던가. 평생 누려왔던 지위, 지인들과의 관계, 가문의 지지와 후원, 그런 것들에 기초한 삶의 안정 따위…. 생식이 불가능한 일흔다섯의 나이였지만 그래도 그는 하나님의 전능을 믿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약속이 이루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과 대화가 시작된다. 하나님이 먼저 말문을 여신다. “아브람아, 나는 너의 방패다. 네가 받을 보상이 크다.” 그런데 아브람의 어조가 이상하다. 기뻐할 법도 한데 따지듯 되묻는다. “주 나의 하나님, 주님께서는 저에게 무엇을 주시렵니까?” 이어지는 볼멘소리가 퉁명스럽다. “저에게는 자식이 없습니다!” 이 한마디에는 자기에게 필요한 건 아들이지 방패 어쩌고 보상 어쩌며 말만 늘어놓는 게 아니라는 불만이 들어있다. “큰 민족이 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했다.
하나님이 못하면 자신이라도 방책을 세워야 했다. 그래서 아브람은 말했을 것이다. “저의 집에 있는 이 종(다마스쿠스 녀석 엘리에셀)이 저의 상속자가 될 것입니다.” 아브람은 자기가 방책을 세워야 하는 이유가 하나님 때문임을 분명히 밝힌다. “주님께서 저에게 자식을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창 15:3a) 책임소재를 분명히 한 것이다.
이렇게 좌절과 불신 속에서 퉁명스럽게 하나님께 따지고, 불경스럽게 방책을 찾던 아브람이었지만 결말은 예상 밖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는 아브람의 그런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창 15:6) 분위기가 갑자기 화기애애해졌다. 아브람은 믿고, 하나님은 의롭다 여겨주시고…. 둘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아브람의 불신이 믿음으로 변하는 과정에는 “하나님의 영성지도”가 있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데리고 바깥으로 나가셨고, 하늘을 보게 하셨으며, 별들을 세어보라고 하셨던 것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영성지도가 아브람의. 불신을 믿음으로 변형시켰다. 아주 시적이고 멋진 영성지도였다.
바깥
하나님은 아브람을 장막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셨다. 장막이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익숙한 공간이라면 바깥은 일상을 벗어난 낯선 공간이다. 이러한 “바깥”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교회나 기도원이나 피정의 집이 그런 “바깥”이다. 어쩌다 오르는 산도, 이따금 떠나는 여행도 일상의 바깥이다. 휘몰아치는 업무에서 벗어나 잠시 머무는 조용한 찻집도 일상의 바깥일 수 있다.
하지만 바깥은 공간만이 아니다. 생명의 시작과 성장 자체가 바깥으로 나가는 과정이다. 씨앗은 땅 바깥으로 나가야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아기는 모태 바깥으로 나가야 태어나 자랄 수 있다. 사람의 성장과정은 끊임없이 바깥으로 나가는 과정이다. 엄마의 품에서 벗어나고 학교에 들어가고 직장에 다니고 결혼하여 새가정을 꾸리는 것 모두가 바깥을 향한 여정이다. 바깥으로 나가는 용기가 없다면 성장은 멈추고 삶 자체가 이뤄지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모르는 “바깥”이 있다. 바깥이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익숙한 공간 너머의 낯선 어떤 곳이라면, 가장 낯선 곳이 있다. 그곳이 어딜까? “내면”이라는 바깥이다! 사람들은 우주라는 바깥은 알아도 내면이라는 바깥은 잘 모른다. 아예 관심조차 없는 것 같다. 사람들이 내면에 대해 얼마나 무지한지를 익살스럽게 묘사한 우화가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모르는 “바깥”이 있다. 바깥이 일상생활이 이루어지는 익숙한 공간 너머의 낯선 어떤 곳이라면, 가장 낯선 곳이 있다. 그곳이 어딜까? “내면”이라는 바깥이다!
세상 창조를 끝냈을 때 하나님은 만족스러웠다. “참 좋다!”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님은 지치고 말았다. 꼭두새벽부터 한밤중까지 사람들이 몰려와 하소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자식이 없다고, 어떤 사람은 자식이 너무 많다며, 어떤 사람은 사랑에 빠졌는데 부모가 반대한다고, 어떤 사람은 더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며….
견딜 수 없던 하나님은 비서에게 물었다. “어찌하면 좋겠는가? 나는 사람들에게 문제를 해결할 모든 지성과 능력을 주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든 책임을 나에게 돌리면서 문제를 해결해달라고 조른다. 나는 쉴 수가 없다.”
그러자 비서가 하나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람들이 도저히 찾아오지 못할 장소가 한 곳 있습니다. 그리로 숨으십시오.” 그곳이 어디냐고 하나님이 묻자 비서가 대답했다. “사람들의 내면으로 숨으시면 됩니다. 그들은 당신을 찾으려고 온 세상을 뒤질 테지만, 내면으로는 절대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요.”
이 이야기는 하나님이 내면에 계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우화이지만, 내면에 대한 사람들의 무관심을 풍자한 우화이기도 하다. 사람들에게 내면은 아주 낯선 영역이다. 낯설다는 점에서 내면이야말로 바깥이다. 놀랍게도 바깥은 안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에게 내면은 아주 낯선 영역이다. 낯설다는 점에서 내면이야말로 바깥이다. 놀랍게도 바깥은 안이었던 것이다!
안이 바깥이 되다 보니 안은 찬밥 신세가 됐다. 내면에 대해 무관심하다는 뜻이다. 이때 참담한 일이 벌어진다. 무관심을 틈타 안에 있는 것들이 제멋대로(무의식적으로) 바깥으로 나와 날뛰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걸 심리학에서는 “투사”(投射)라 한다. 자기 내면에 있는 탐욕을 남에게 투사하여 타자를 비난한다.(정치가들) 자기 내면에 있는 불결을 남에게 투사하여 편을 가른다.(종교인들) 자기 내면의 그림자를 남에게 투사하여 마녀사냥에 광분한다.(바리새인들)
이런 맥락에서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은 내면의 탐욕, 내면의 불결, 내면의 그림자를 대면하고,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공중”이라는 메타포로 묘사한 심리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용기를 뜻한다.
하늘
내면이라는 바깥으로의 여정은 심리현실을 대면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직 가야 할 바깥, 또 다른 낯선 곳이 있다. 심리현실 너머에 있는 영성현실이 그것이다. 내면의 탐욕과 불결과 그림자 너머에 이미 현존하는 신성한 영역이다. 바울이 “하늘”이라는 메타포로 묘사한 현실로 하나님은 이곳에 현존하시며 이곳에서 활동하시며 이곳에서 휴식하신다.(엡 2:6)
바깥이라는 낯선 곳을 향한 여정은 영성현실을 자각할 때 완결된다. 영성현실 곧 내면의 하늘을 발견할 때, 겉사람은 속사람에 순종한다. 마음은 영의 다스림을 받는다. 생활현실은 악마의 영역인 “공중”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역인 “하늘”의 통치를 받는다. 육신의 정욕대로 이 세상 풍조를 따라 살던 “진노의 자식”(엡 2:3)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작품”(엡 2:10)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 실망과 불신에 빠져있던 아브람에게 하신 하나님의 두 번째 영성지도가 바로 영성현실을 각성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늘을 쳐다보라”(창 15:5)고 하셨던 것이다.
하늘을 쳐다볼 때 즉 영성현실을 자각할 때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사고의 패러다임이 점사고에서 바탕사고로 바뀐다! 바탕사고란 무엇일까? 나는 언젠가 가족 단톡방에 올라온 글을 보고 바탕사고를 배웠다. 아마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글이었던 것 같은데 이런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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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선생님은 종이 한가운데에 검은 점이 찍혀 있는 종이를 나눠주면서 그림을 보고 느낀 것을 적으라고 했다. 학생들이 제출한 답안을 다 읽고 난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모두가 ‘검은 점’에만 집중했을 뿐 누구도 종이의 흰 여백에 대해 쓴 사람이 없네요.”
선생님은 이런 말도 덧붙였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는 것 같아요. 늘 검은 점에만 몰두하면서 말예요. 건강이 나쁘다고 걱정하고, 돈이 없다고 불평하고, 상처가 아프다며 불행하게 살아가죠. 점들에 집착하면서 살아가는 겁니다.”
선생님은 말을 이었다. “삶 전체는 아름다워요. 신비하지요. 그런데 우리는 부분에 사로잡혀 삶이 선물하는 은총을 누리지 못합니다. 삶은 경이로워요. 삶은 날마다 새로운 얼굴로 우리를 찾아옵니다. 자세히 보세요. 검은 점은 흰 여백이 상징하는 삶 전체에 비교하면 아주 작을 뿐이에요. 검은 점으로부터 흰 여백을 시선을 돌리세요. 그러면 삶이 선물하고 있는 기적과 신비를 매일 누릴 수 있을 거예요.”
자세히 보세요. 검은 점은 흰 여백이 상징하는 삶 전체에 비교하면 아주 작을 뿐이에요. 검은 점으로부터 흰 여백을 시선을 돌리세요. 그러면 삶이 선물하고 있는 기적과 신비를 매일 누릴 수 있을 거예요.”
하나님이 하신 일이 바로 점에서 흰 여백(하늘)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신 것이다. 알다시피 점(點)은 우리를 괴롭히는 수많은 삶의 문제들이다. 인간관계에서 받은 상처나 그로 인한 복잡한 감정과 숱한 번민일 수도 있다. 아브람에게는 나이가 들도록 대를 이을 자식이 없는 것이었으며, 그로 인한 실망과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었다. 이런 아브람을 하나님은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셨고, 하늘을 보라고 하신 것이다. 삶의 문제나 그로 인한 감정과 생각에 빠져있지 말고 바탕으로 나아가라는 초청이었다. 마음에서 영으로, 공중에서 하늘로, 심리현실에서 영성현실로 전향하라는 요청이었다.
바탕으로 나아간다고 해서 삶의 문제가 즉시 해결되거나 제거되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점에 붙들려 있을 때와 바탕에 머물 때는 삶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진다. 점사고가 부분을 본다면 바탕사고는 전체를 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밤하늘을 쳐다보며 영성현실이라는 바탕에 머물렀을 때 아브람은 하나님을 다시 믿을 수 있었고(창 15:6),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었다.
수학적 언어로 말하면, 바탕사고는 “분모를 키우는 사고”다. 분모가 고정되고 분자가 커질수록 값은 커진다. 반대로 분자가 고정되고 분모가 커질수록 값은 작아진다. 분모가 무한대이면 분자가 아무리 커도 값은 영(zero)이다. 삶의 문제(P=Problem)를 분자, 의식(C=Consciousness)을 분모, 삶의 고통(S=Suffering)을 값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다음의 식이 성립한다.
P/C = S
그러면 삶의 고통(S)은 삶의 문제(P)와 의식의 수준(C)에 따라 달라진다. 의식(C)의 값이 고정되고 문제(P)의 값이 커지면 삶의 고통(S)도 그만큼 커진다. 의식의 값이 최소로 줄어들면(즉 의식의 수준이 낮아지면) 고통은 극대화된다. 반대로 삶의 문제(P)가 고정값이고, 의식이 커지면(즉 의식의 수준이 높아지면) 삶의 고통(S)은 줄어든다.
만일 의식이 영적 의식에 이르러 하나님과 합일하면 삶의 문제와 고통은 거의 사라진다. 고통에 대한 경험의 양상과 강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시 119:71)라는 시인의 고백이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롬 8:28)라는 바울의 고백은 이런 경험을 반영한다. 하나님을 사랑할 때나 하나님의 뜻을 따를 때만큼 의식의 수준이 높아지는 때가 없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삶의 문제와 고통을 없애려고 애쓰는 종교가 아니다. 십자가를 제거하거나 피하는 종교도 아니다. 영성현실에서 하나님과 하나 되어 십자가를 지는 종교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십자가가 상징하는 수많은 삶의 고통 앞에서 의연하다.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그리스도와 함께한다면(with Christ) 십자가를 지면서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게 기독교 신앙의 정수다.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바울은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간결하게 묘사한다. “우리는 이 모든 일(환난, 곤고, 박해, 굶주림, 헐벗음, 위협, 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롬 8:37)
별
하나님의 세 번째 영성지도는 밤하늘의 별을 세어보라고 하신 것이다. 별은 무엇을 상징할까? 삶의 문제들, 관계의 상처, 그로 인한 실패감이나 고통스러운 감정 속에 깃든 은총이다. 바깥으로 나가 하늘을 보면, 즉 내면으로 들어가 바탕에 머물면 삶의 문제를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점사고가 부분을 본다면 바탕사고는 전체를 보기 때문이다.
첫째, 문제의 원인과 해결이 보인다. 십자가처럼 무겁게 느껴지던 문제가 새로운 희망을 잉태하고 있음을 깨닫고, 저주스러운 운명 속에 행복의 씨앗이 싹트고 있음을 깨닫는다. 십자가와 부활은 교리가 아니라 삶의 신비임을 깨닫는다. 이제 삶의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 담담하게 바라보며 담대하게 마주한다. 삶의 문제가 축복의 통로임을 경험하기 시작한다.
둘째, 관계도 새로워진다. 내면으로 들어가 바탕에 머물면 타인의 심리현실이 보인다. 당연히 그 사람(아버지, 어머니, 형, 언니, 아우, 동생, 친구)의 고뇌가 느껴진다. 차마 꺼내지 못하는 심연의 아픔이 보이기도 하고, 참고 있는 신음소리가 들리기도 한다. 그동안 눈치채지 못한 사랑도 깨닫는다. 그 사람 탓으로 돌렸던 가슴의 응어리가 봄눈 녹듯 녹는다. 타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이 겹칠 때마다 눈시울이 젖는다.
셋째, 내면의 하늘인 바탕(영성현실)에 머물면 어떤 흐름이 보인다. “섭리”라는 삶의 신성한 배열이 보인다. 지금 겪는 삶의 문제들도, 불편한 관계들도 충분한 이유가 있으며, 사실은 하나님의 섬세한 삶의 배열(섭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임을 깨닫는다. 고통스러웠던 삶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마음엔 감사의 물결이 일렁인다. 조건이나 환경을 초월한 기쁨이 샘솟는다.
바탕에 머물 때는 삶의 질문도 달라진다. “나에게 왜(why) 이런 일이 일어나게 하십니까”라는 질문은 “나에게 무슨(what) 일을 하시려는 겁니까” 하는 질문으로 바뀐다. 이때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왜냐고 묻지 않는 삶”(life without why)이 시작된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 너머에서 또 다른 일을 발견한다. 인간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발견한다. 마침내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할 일과 할 수 있는 일 너머에서 또 다른 일을 발견한다. 인간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발견한다. 마침내 “소명”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이다.
바깥으로 나가고, 하늘을 우러르고, 별들을 헤아리는 것이 담론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음식에 관한 담론이 허기진 배를 채워주지 않고, 운동에 관한 담론이 건강을 보장하지 않듯, 담론 자체로는 사람도 현실도 변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담론을 현실로 만드는 구체적인 과정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수행”이다. 해서, 바깥으로 나가야 한다는 설교가 아니라 실제로 바깥으로 나가는 수행이 필요하다. 바탕(하늘)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설교가 아니라 실제로 바탕에 머무르는 수행이 필요하다. 하늘에서 별들을 헤아려야 한다는 설교가 아니라 실제로 은총의 별을 알아차리는 수행이 필요하다. 그런 수행이 바로 관상기도다.
그러니 내면이라는 바깥으로 나아가려거든 하늘나라가 네 안에 있다고 하신 예수의 이름을 불러라! 생각과 감정과 상처라는 점에서 벗어나 광활하고 고요한 바탕으로 나아가려거든 마음이 가난하고 깨끗하신 무심 예수의 이름을 불러라! 바탕이라는 내면의 하늘에서 은총의 별들을 발견하려거든 무의식의 어둠을 밝히는 샛별 예수의 이름을 불러라. 영성현실에서 펼쳐지는 섭리의 흐름을 보며 겸허히 소명을 받들려거든 영이신 아버지와 온전히 하나이신 예수의 이름을 불러라!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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