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삶) 일과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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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745회 작성일 23-03-22 21:53본문
쉬지 말고 기도하라?
샬렘영성훈련원(Shalem Institute)의 리즈 워드 Liz Ward가 한국을 방문 했을 때, 일간지 기자로 일하던 교우 한 분이 자신처럼 숨 돌릴 틈 없이 분주한 일상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당신이 어떤 일을 하던, 그 일을 하느님을 위해서 하면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딤전 5:17)는 사도 바오로의 권면이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대다수 현대인들에게 가능하려면, 일과 행동이 기도의 한 유형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17세기 가르멜 수도자 로렌스 형제 Br.Lawrence는 “우리는 기도할 때는 기도로, 행동할 때는 행동으로 하느님께 충실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 현존의 실천은 기도라는 특별한 시간에 시작되지만, 그것이 진정한 기도가 되려면 다른 모든 시간에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일이 기도가 되도록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을 위해 청소를 하고, 하느님을 위해 자녀를 돌보고, 하느님을 위해 손님을 맞이하고, 하느님을 위해 글을 쓸 수 있다면 모든 일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천사가 아니라 사람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먹고, 자고, 아이를 낳고, 일하며 우리의 물질적 필요를 위해 행동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이같은 행위들이 필요하도록 하신 목적은, 이로 인하여 우리의 온전함과 거룩함을 방해하고 장애를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단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일하지 않고 있을 때만이 아니라 일하고 있는 동안에도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일상의 작은 일들을 통해서도 우리가 온전함에 이를 수 있도록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이 시간들은 우리에게 거룩한 시간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에게도 거룩한 시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시간만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시간을 원하십니다. 그것은 마치 하느님께서 우리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의 전심(全心)을, 우리의 온 마음을 바라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직장 상사가 아니라 사랑이십니다.
신성한 일
간혹 그리스도인들 중에 일과 기도를 상반되는 무엇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가 증언하는 하느님은 흙으로 인간을 빚고, 숨을 불어 생기를 주시고, 에덴동산의 정원을 만드시는 노동자의 모습입니다. 구약의 하느님이 정원사라면, 신약의 하느님은 목수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양식은 하느님의 일(요한 4:34)이라고 하셨고,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며 ‘나의 일을 다 마쳤다’(요한 19:30)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일(은사)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하느님이 기뻐하실 삶을 위해 각 사람에게 주신 부르심을 그대로 행하라고(고전 7:17) 하였습니다. 바오로는 각자가 받은 은사로 서로를 섬김으로 이루는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한 도구이며, 동시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영국의 문필가 도로시 세이어즈 Dorothy L. Sayers는 그녀의 책 ‘창조자의 정신’에서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교회가 실업자와 장애우, 노인과 여성들의 일할 권리에 대하여 말할 때, 그것은 일과 노동이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하느님께 드리는 수단이며, 하느님 안에서 참 자아를 살아갈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는 신자들의 직업을 단순 노동을 뜻하는 아르바이트Arbeit가 아니라 소명(召命,vocation)을 뜻하는 독일어 ‘베루프beruf’로 번역하여 중세와 논쟁하였습니다. 그는 세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직업을 성소(聖召)로 번역하여 모든 세속의 직업과 노동이 당시 신령한 직분으로 여겨지던 성직자, 수도자들의 소명과 동일하다고 주장하였고, 일과 직업에 대한 이같은 이해는 그가 주장한 만인사제설(萬人司祭設)의 신학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던 그는 특정한 종교적 행위가 하느님의 사랑을 얻는데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늘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직업적인 성공에서 구원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시기를 바라시는 것처럼 우리가 일하시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리가 기도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위해 일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가지 모두 같은 이유로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작은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작은 것들 모두가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길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작은 것들은 모두 크고 위대한 것들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일들과 세속의 일들을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충실하며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직한 사람은 큰일에도 부정직할 것이다. 만약 너희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 데도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루가 16:10-11
활동/일과 관상
일과 기도에 대하여 말할 때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복음서 이야기는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마리아를 기도와 관상의 상징으로, 마르타를 일과 활동의 상징으로 대비시키고, 마리아(관상)를 마르타(활동) 비하여 우월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현대 영성가들은 활동과 관상을 대비시키기보다 ‘활동 중의 관상 Contemplation in Action’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합니다. 행동과 관상은 마치 일과 휴가를 나누는 식으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관상은 사람들의 필요와 문제들에 우리가 더 깊이 다가설 수 있도록 돕고, 올바른 행동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활동이냐, 기도냐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고, 그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 나누어지지 않은 온전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나 계신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잠시 멈출 수 있고, 다시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들 삶의 많은 부분은 내적으로, 혹은 외적으로부터 주어지는 자극들에 대한 무의식적 반작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떤 자극이 내부나 외부로부터 주어질 때, 우리는 자기 내면의 깊은 참자아로 부터가 아니라 자극에 대한 조건반사적 반응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반응의 대부분이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우리의 깊은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남이 어떻게 우리를 규정하고, 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초조한 해석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의 삶은 대상들의 세계에 갇힌 죄수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일하며 살아갑니다. 그것들은 모두 필요하고 소중한 일들이지만, 그 일들이 우리 깊은 참 자아와 영적인 가슴에 의해 이끌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반작용의 삶 이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주한 일상과 삶 속에서도 순간, 순간 자신을 다시 하느님과 연결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들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미국 샬렘에서는 한동안 사무실 전화벨이 울리면 벨이 세 번 울릴 때까지 아무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밀레의 그림 만종(晩鐘)에서 교회의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들판에서 잠시 멈추어 기도하는 부부처럼, 사무실 스텝들 모두 전화벨 소리를 들으며 잠시 멈추어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필자가 알고 있는 지인들 가운데 몇 분은 휴대폰 알람을 맞추어 두고, 알람 벨이 울리는 순간, 언제 어디서든 잠시 멈추어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노트북 패스워드를 ‘샬롬’ 또는 ‘주님’처럼 거룩한 단어로 만들어 패스워드를 칠 때마다 마음을 하느님께 향하도록 합니다. 주머니에 묵주를 넣고 길을 걷거나, 멈추어 있을 때 묵주를 돌리며 기도하거나, 길을 걸을 때는 걸음에 주의를 모으고 마치 하느님께로 향하듯 걸음을 걷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일상 속 기도의 모범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분은 아마도 앞서 언급한 부활의 로렌스형제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일상 가운데 기도할 수 있는 네 가지 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는 내적인 바라봄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하고 있든 내적으로 하느님께로 반복적으로 돌아가고, 하느님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하느님을 상기시키는 단어나 이미지를 가슴에 담고 반복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단어를 반복하거나 거룩한 이미지를 마음으로 떠올리며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언제 어디에서나 하느님과 대화하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사랑의 눈으로 어디에나 계신 하느님을 응시하는 일입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느님을 신뢰하는 마음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들 가운데 계신 하느님을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깨어있는 열린 마음의 실천이야말로 분별의 마음을 훈련하는 가장 좋은 길일 것입니다.
제럴드 메이Gerald G. May는 우리가 일상 가운데 관상적으로 현존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섯 가지를 제안하였는데 첫째는 ‘멈추기’입니다. 무엇을 하기 전에, 혹은 하던 중에 잠시 멈추고, 숨을 깊게 쉰 후에 하느님을 경청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알아차리기’입니다. 그 순간 자신의 영적상태와 경험을 잠시 돌아보고 자신의 감정과 느낌과 생각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셋째는 ‘마음 열기’입니다.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지금의 순간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다른 어느 곳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하는 일입니다. 넷째는 ‘확장하기 그리고 따라가기’입니다. 지금 이 순간 감정이나 가능한 모든 것이 떠오르게 허락하여 자신의 의식을 확장시키고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어떤 거룩한 초대를 분별하고 따라가는 일입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제한된 하느님에 대한 관념이나 이미지에 갇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과 자신의 삶을 향한 하느님의 크신 비젼을 따르는 일입니다. 다섯 번째로 반응하기입니다. 여기서는 열린 마음과 근본적인 받아들임이 지향성 안에서 함께 만납니다.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오늘.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무슨 일을 하도록 초대받고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고 있는가? 내가 하느님과 나의 소명에 더욱 충실해 질수 있도록 돕는 어떤 초대가 있는가? 이같은 질문들을 기도 가운데 물으며 성령의 초대에 반응하는 일입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샬렘영성훈련원(Shalem Institute)의 리즈 워드 Liz Ward가 한국을 방문 했을 때, 일간지 기자로 일하던 교우 한 분이 자신처럼 숨 돌릴 틈 없이 분주한 일상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의 대답은 ‘당신이 어떤 일을 하던, 그 일을 하느님을 위해서 하면 당신이 하는 모든 일이 기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딤전 5:17)는 사도 바오로의 권면이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대다수 현대인들에게 가능하려면, 일과 행동이 기도의 한 유형이 되어야만 합니다. ‘하느님의 임재연습’이라는 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17세기 가르멜 수도자 로렌스 형제 Br.Lawrence는 “우리는 기도할 때는 기도로, 행동할 때는 행동으로 하느님께 충실할 의무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 현존의 실천은 기도라는 특별한 시간에 시작되지만, 그것이 진정한 기도가 되려면 다른 모든 시간에로 확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의 일이 기도가 되도록 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을 위해 청소를 하고, 하느님을 위해 자녀를 돌보고, 하느님을 위해 손님을 맞이하고, 하느님을 위해 글을 쓸 수 있다면 모든 일은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천사가 아니라 사람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먹고, 자고, 아이를 낳고, 일하며 우리의 물질적 필요를 위해 행동하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이같은 행위들이 필요하도록 하신 목적은, 이로 인하여 우리의 온전함과 거룩함을 방해하고 장애를 주시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수단이 되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일하지 않고 있을 때만이 아니라 일하고 있는 동안에도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일상의 작은 일들을 통해서도 우리가 온전함에 이를 수 있도록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이 시간들은 우리에게 거룩한 시간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하느님에게도 거룩한 시간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시간만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모든 시간을 원하십니다. 그것은 마치 하느님께서 우리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의 전심(全心)을, 우리의 온 마음을 바라시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직장 상사가 아니라 사랑이십니다.
신성한 일
간혹 그리스도인들 중에 일과 기도를 상반되는 무엇으로 오해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서가 증언하는 하느님은 흙으로 인간을 빚고, 숨을 불어 생기를 주시고, 에덴동산의 정원을 만드시는 노동자의 모습입니다. 구약의 하느님이 정원사라면, 신약의 하느님은 목수로 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의 양식은 하느님의 일(요한 4:34)이라고 하셨고,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며 ‘나의 일을 다 마쳤다’(요한 19:30)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성령의 일(은사)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하느님이 기뻐하실 삶을 위해 각 사람에게 주신 부르심을 그대로 행하라고(고전 7:17) 하였습니다. 바오로는 각자가 받은 은사로 서로를 섬김으로 이루는 하느님 나라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는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한 도구이며, 동시에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영국의 문필가 도로시 세이어즈 Dorothy L. Sayers는 그녀의 책 ‘창조자의 정신’에서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교회가 실업자와 장애우, 노인과 여성들의 일할 권리에 대하여 말할 때, 그것은 일과 노동이 단순히 생계를 위한 수단만이 아니라 인간이 자신을 하느님께 드리는 수단이며, 하느님 안에서 참 자아를 살아갈 수 있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는 신자들의 직업을 단순 노동을 뜻하는 아르바이트Arbeit가 아니라 소명(召命,vocation)을 뜻하는 독일어 ‘베루프beruf’로 번역하여 중세와 논쟁하였습니다. 그는 세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직업을 성소(聖召)로 번역하여 모든 세속의 직업과 노동이 당시 신령한 직분으로 여겨지던 성직자, 수도자들의 소명과 동일하다고 주장하였고, 일과 직업에 대한 이같은 이해는 그가 주장한 만인사제설(萬人司祭設)의 신학적 근거가 되었습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믿었던 그는 특정한 종교적 행위가 하느님의 사랑을 얻는데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오늘 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직업적인 성공에서 구원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기도하시기를 바라시는 것처럼 우리가 일하시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우리가 기도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위해 일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두 가지 모두 같은 이유로 우리에게 허락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작은 것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아가도록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작은 것들 모두가 우리가 하느님께로 가는 길이 되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길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작은 것들은 모두 크고 위대한 것들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은 일들과 세속의 일들을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일에 충실한 사람은 큰일에도 충실하며 지극히 작은 일에 부정직한 사람은 큰일에도 부정직할 것이다. 만약 너희가 세속의 재물을 다루는 데도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참된 재물을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루가 16:10-11
활동/일과 관상
일과 기도에 대하여 말할 때 사람들이 자주 인용하는 복음서 이야기는 ‘마리아와 마르타’ 이야기입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마리아를 기도와 관상의 상징으로, 마르타를 일과 활동의 상징으로 대비시키고, 마리아(관상)를 마르타(활동) 비하여 우월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현대 영성가들은 활동과 관상을 대비시키기보다 ‘활동 중의 관상 Contemplation in Action’이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합니다. 행동과 관상은 마치 일과 휴가를 나누는 식으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관상은 사람들의 필요와 문제들에 우리가 더 깊이 다가설 수 있도록 돕고, 올바른 행동으로 반응할 수 있도록 인도합니다. 활동이냐, 기도냐의 문제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고, 그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 나누어지지 않은 온전한 마음입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나 계신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잠시 멈출 수 있고, 다시 하느님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들 삶의 많은 부분은 내적으로, 혹은 외적으로부터 주어지는 자극들에 대한 무의식적 반작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어떤 자극이 내부나 외부로부터 주어질 때, 우리는 자기 내면의 깊은 참자아로 부터가 아니라 자극에 대한 조건반사적 반응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 반응의 대부분이 우리가 누구이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우리의 깊은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남이 어떻게 우리를 규정하고, 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초조한 해석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한 우리의 삶은 대상들의 세계에 갇힌 죄수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일하며 살아갑니다. 그것들은 모두 필요하고 소중한 일들이지만, 그 일들이 우리 깊은 참 자아와 영적인 가슴에 의해 이끌리지 못한다면, 그것은 반작용의 삶 이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분주한 일상과 삶 속에서도 순간, 순간 자신을 다시 하느님과 연결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들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미국 샬렘에서는 한동안 사무실 전화벨이 울리면 벨이 세 번 울릴 때까지 아무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밀레의 그림 만종(晩鐘)에서 교회의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들판에서 잠시 멈추어 기도하는 부부처럼, 사무실 스텝들 모두 전화벨 소리를 들으며 잠시 멈추어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필자가 알고 있는 지인들 가운데 몇 분은 휴대폰 알람을 맞추어 두고, 알람 벨이 울리는 순간, 언제 어디서든 잠시 멈추어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노트북 패스워드를 ‘샬롬’ 또는 ‘주님’처럼 거룩한 단어로 만들어 패스워드를 칠 때마다 마음을 하느님께 향하도록 합니다. 주머니에 묵주를 넣고 길을 걷거나, 멈추어 있을 때 묵주를 돌리며 기도하거나, 길을 걸을 때는 걸음에 주의를 모으고 마치 하느님께로 향하듯 걸음을 걷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일상 속 기도의 모범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분은 아마도 앞서 언급한 부활의 로렌스형제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기도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일상 가운데 기도할 수 있는 네 가지 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는 내적인 바라봄입니다. 그것은 무엇을 하고 있든 내적으로 하느님께로 반복적으로 돌아가고, 하느님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하느님을 상기시키는 단어나 이미지를 가슴에 담고 반복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거룩한 단어를 반복하거나 거룩한 이미지를 마음으로 떠올리며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언제 어디에서나 하느님과 대화하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사랑의 눈으로 어디에나 계신 하느님을 응시하는 일입니다. 아니 계신 곳이 없으신 하느님을 신뢰하는 마음의 눈으로 세상과 사람들 가운데 계신 하느님을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깨어있는 열린 마음의 실천이야말로 분별의 마음을 훈련하는 가장 좋은 길일 것입니다.
제럴드 메이Gerald G. May는 우리가 일상 가운데 관상적으로 현존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섯 가지를 제안하였는데 첫째는 ‘멈추기’입니다. 무엇을 하기 전에, 혹은 하던 중에 잠시 멈추고, 숨을 깊게 쉰 후에 하느님을 경청하는 일입니다. 둘째는 ‘알아차리기’입니다. 그 순간 자신의 영적상태와 경험을 잠시 돌아보고 자신의 감정과 느낌과 생각을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셋째는 ‘마음 열기’입니다. 어떤 판단도 하지 않고 지금의 순간을 경험하는 일입니다. 다른 어느 곳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여기에 존재하는 일입니다. 넷째는 ‘확장하기 그리고 따라가기’입니다. 지금 이 순간 감정이나 가능한 모든 것이 떠오르게 허락하여 자신의 의식을 확장시키고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어떤 거룩한 초대를 분별하고 따라가는 일입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는 제한된 하느님에 대한 관념이나 이미지에 갇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과 자신의 삶을 향한 하느님의 크신 비젼을 따르는 일입니다. 다섯 번째로 반응하기입니다. 여기서는 열린 마음과 근본적인 받아들임이 지향성 안에서 함께 만납니다. 지금 이 순간 그리고 오늘. 나는 하느님으로부터 무슨 일을 하도록 초대받고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고 있는가? 내가 하느님과 나의 소명에 더욱 충실해 질수 있도록 돕는 어떤 초대가 있는가? 이같은 질문들을 기도 가운데 물으며 성령의 초대에 반응하는 일입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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