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삶) 거룩한 살, 거룩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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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837회 작성일 23-03-22 21:52본문
"이렇게 많은 증인들이 구름처럼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우리도 온갖 무거운 짐과 우리를 얽어매는 죄를 벗어버리고 우리가 달려야 할 길을 꾸준히 달려갑시다."
히브 12:1
순교자들은 진정한 부활과 행복에 이르는 길이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삶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증인들입니다. 그들의 삶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가치의 우선순위와 태도에 의문을 제기하고, 믿는 이들의 마음까지 습격합니다. 그들의 삶은 우리가 삶과 죽음을 하느님의 뜻 안에서 새롭게 이해하게 합니다. 박해시대를 살았던 초대교회 교부들은 이같은 믿음으로 온갖 박해의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고, 우리는 4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의 글에서 그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 중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순례입니다. 그것은 부패에서 영생의 삶으로, 필멸에서 불멸로, 불안에서 마음의 평온으로 가는 순례입니다. 죽음이라는 말을 두려워하지 말고 행복한 죽음에 뒤따르는 축복을 기뻐하십시오. 결국 죽음은 죄의 장사지냄과 선(善의) 수확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에 대한 초대교회의 이같은 관점은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축일이 생일이 아니라, 순교한 날로 기념하는 전통으로 자리잡게 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순교자들의 죽음을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나는 생일로 기념하였습니다. 박해시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위해 죽은 동료 신앙인들을 하느님 앞에서 기억하고, 그들의 증언과 순교의 상황을 기록하여, 믿는 이들에게 널리 알렸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이같은 믿음은 155년경 순교한 폴리갑Polycarp에 대한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석보다 더 귀하고, 정금보다 더 소중한 그의 뼈를 거두어 우리가 이미 따로 준비한 곳에 두었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신다면 그곳에서 우리는 그의 순교일을 큰 기쁨 가운데 생일로 축하할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보다 앞서 간 모든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역할을 하며, 우리 가운데 왕관을 예비할 수 있는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같은 순교의 믿음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사실을 3세기 초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모판’이라는 말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수난 이야기는 교회나 순교자가 매장된 무덤에서 그들의 믿음과 죽음을 기념하는 성찬례 중에 큰 소리로 낭독되었습니다. 그 성찬례에 참여한 신자들은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순교자들이 영광스럽게 누리고 있는 하늘잔치에 함께 참여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의 장벽을 넘어서는 상통과 연대의 영적 감각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니케아 신경과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성도聖徒들과의 상통’에 대한 믿음은 이같은 체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4세기에 들어 교회는 박해의 상황을 벗어나면서 순교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이해를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같은 변화의 흐름은 4세기 이탈리아 밀라노Milan의 주교였던 암브로스Ambrose의 설교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여러 종류의 박해가 있는 것처럼, 많은 형태의 순교가 있다’고 말하며, ‘매일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순교’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순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점차 순교자가 아닌 신앙의 모범들까지도 성인聖人으로 기념하는 전통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4세기 말 프랑스 투르의 마틴Martin of Tours은 그같은 사례의 첫 성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같은 변화 속에서도 5세기 히포의 주교였던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은 성인을 공경하고 기념하는 것은 그들의 모범을 따르고, 그들의 공로를 나누기 위함이며, 우리의 예배는 오직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이 매장된 성당에서도 순교자에게 제단을 세우지 않습니다... 예물은 순교자에게 관을 씌우신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우리는 여전히 하느님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성인들과 존경의 마음으로 사랑과 교제를 나누고, 그들을 공경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예배’는 하느님께만 드리도록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어거스틴과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까지 분명하였던 이같은 구분은 그 후 수 세기를 지나면서 대중들의 신심에서 점차 희미하게 되었습니다. 중세에 이르면 성인들은 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로 숭배되기 시작하였고,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이르는데 성인들이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으로까지 변질되어 갔습니다. 대중들의 이같은 성인숭배신앙은 개혁의 외침을 피할 수 없었으며, 개혁자들은 하나같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오직 한 분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인들의 중보나 기적의 능력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거룩한 삶이 우리 신앙생활의 모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개혁교회들과 달리 성공회는 성인들을 신앙의 모범으로 받아들이며, 하느님 안에서 우리와 상통하며 우리의 신앙을 도울 수 있다는 초대교회의 믿음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17세기 영국 켈롤라인 신비전통Caroline Divines의 사제 토마스 트러헌Thomas Traherne은 성인들과의 상통에 대해 말하면서 성인들을 가리켜 ‘거룩한 하느님 말씀의 저장 창고’이며 ‘거룩한 영과의 연결 파이프’라고 하였습니다. 이같은 표현은 넓은 의미에서 성공회가 성인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달리 바티칸 식의 시성절차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공회는 각 나라마다, 관구차원의 절차를 거쳐 신앙의 모범이 되는 성인을 지정하고, 교회력에 맞추어 전례에서 기념하고 있습니다. 성공회는 로마 교회와 달리 기념하는 성인들을 정하는데 있어 교파를 초월하는 포괄성과 가까운 시대의 신앙적 모범들을 포함시키는 현대적 감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의 성공회 교회에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을 기념하고 있는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한국 성공회 교회력에 더 많은 한국의 성인들을 기념하는 축일이 지정되는 날을 기대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다른 개혁 교회들과 달리 성공회가 성인들을 기념하는 전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미국 샬렘영성훈련원의 모든 장기훈련과정(long term program)에서는 365일 동안 매일 한 사람의 거룩한 사람을 묵상할 수 있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성인聖人 연구자 로버트 엘스버그Robert Ellsberg의 책 ‘All Saints’ 읽으며 참여자들은 매일 한 사람의 성인을 묵상합니다. 추측컨대 이는 글이나 문자로 전달될 수 없는 신앙의 진리를 살아있는 인격과의 만남을 통해 배울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성인들은 분명 거룩한 삶의 스승들입니다. 우리는 성인이란 결점이 없고 기적을 행하고 기꺼이 고통을 겪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엘스버그는 우리가 성인에 대해 스테인드글라스나 상본에 그려진 것과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한 그들이 체득한 지혜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으며, 당혹스러운 것만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들이 성인이 된 것은 순교를 했거나, 환시를 보았거나, 놀라운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탁월한 사랑과 선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성공회 사제이며 영성가인 윌리엄 로우William Law는 자신의 글 ‘신실하고 거룩한 삶으로의 엄숙한 부름 A Serious Call to Devout and Holy Life’에서 성인들의 삶을 관통하는 공통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가장 많이 기도하거나 가장 많이 금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장 많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 사람은 항상 하느님께 감사하고,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을 자기 뜻으로 삼고, 항상 하느님을 찬양할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처음 교회는 믿는 이들을 성도聖徒라고 불렀습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거룩한 사람聖人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회력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모든 성인들을 기념하는 ‘모든 성인들의 날’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 모두의 진정한 정체성을 되새기며, 우리 모두가 거룩한 사람聖人들인 것을 기억하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행복이란 삶에서 가장 필요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며, 가장 필요한 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나머지 것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데, 바로 이 때 필요한 한 가지를 통해 다른 모든 것이 주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마다 다르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그 내용은 같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실현하는 것, 곧 하느님이 각 사람을 향해 바라시는 모습이 되는 것’일 것입니다.
엘스버그는 행복의 추구는 진실한 삶에 대해 처음으로 느꼈던 갈망, 곧 사막 교부들에게서 현대의 탐구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성인들을 무기력하고 거짓된 약속으로 가득한 기존 문화에 저항하도록 이끌었던 충동에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갈망은 모든 것을 자유롭게 놓아버리고 열심히 일하며 고요히 머무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성인들이 전해주는 행복의 핵심은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삶과 조건에서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우리의 수도원이라고 말합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히브 12:1
순교자들은 진정한 부활과 행복에 이르는 길이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삶이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증인들입니다. 그들의 삶은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가치의 우선순위와 태도에 의문을 제기하고, 믿는 이들의 마음까지 습격합니다. 그들의 삶은 우리가 삶과 죽음을 하느님의 뜻 안에서 새롭게 이해하게 합니다. 박해시대를 살았던 초대교회 교부들은 이같은 믿음으로 온갖 박해의 어려움을 견딜 수 있었고, 우리는 4세기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of Alexandria의 글에서 그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 중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순례입니다. 그것은 부패에서 영생의 삶으로, 필멸에서 불멸로, 불안에서 마음의 평온으로 가는 순례입니다. 죽음이라는 말을 두려워하지 말고 행복한 죽음에 뒤따르는 축복을 기뻐하십시오. 결국 죽음은 죄의 장사지냄과 선(善의) 수확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에 대한 초대교회의 이같은 관점은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축일이 생일이 아니라, 순교한 날로 기념하는 전통으로 자리잡게 하였습니다. 초대교회는 순교자들의 죽음을 영원한 생명으로 태어나는 생일로 기념하였습니다. 박해시대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을 위해 죽은 동료 신앙인들을 하느님 앞에서 기억하고, 그들의 증언과 순교의 상황을 기록하여, 믿는 이들에게 널리 알렸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이같은 믿음은 155년경 순교한 폴리갑Polycarp에 대한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석보다 더 귀하고, 정금보다 더 소중한 그의 뼈를 거두어 우리가 이미 따로 준비한 곳에 두었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신다면 그곳에서 우리는 그의 순교일을 큰 기쁨 가운데 생일로 축하할 것입니다. 그의 죽음은 우리보다 앞서 간 모든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역할을 하며, 우리 가운데 왕관을 예비할 수 있는 사람들을 훈련시키는 역할을 할 것입니다.
이같은 순교의 믿음 위에 교회가 세워졌다는 사실을 3세기 초 교부 터툴리안Tertullian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모판’이라는 말로 증언하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수난 이야기는 교회나 순교자가 매장된 무덤에서 그들의 믿음과 죽음을 기념하는 성찬례 중에 큰 소리로 낭독되었습니다. 그 성찬례에 참여한 신자들은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순교자들이 영광스럽게 누리고 있는 하늘잔치에 함께 참여하였고,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의 장벽을 넘어서는 상통과 연대의 영적 감각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니케아 신경과 사도신경이 고백하는 ‘성도聖徒들과의 상통’에 대한 믿음은 이같은 체험에서 나온 것입니다.
4세기에 들어 교회는 박해의 상황을 벗어나면서 순교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이해를 발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이같은 변화의 흐름은 4세기 이탈리아 밀라노Milan의 주교였던 암브로스Ambrose의 설교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여러 종류의 박해가 있는 것처럼, 많은 형태의 순교가 있다’고 말하며, ‘매일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순교’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순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점차 순교자가 아닌 신앙의 모범들까지도 성인聖人으로 기념하는 전통으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4세기 말 프랑스 투르의 마틴Martin of Tours은 그같은 사례의 첫 성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같은 변화 속에서도 5세기 히포의 주교였던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은 성인을 공경하고 기념하는 것은 그들의 모범을 따르고, 그들의 공로를 나누기 위함이며, 우리의 예배는 오직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우리는 순교자들이 매장된 성당에서도 순교자에게 제단을 세우지 않습니다... 예물은 순교자에게 관을 씌우신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우리는 여전히 하느님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는 성인들과 존경의 마음으로 사랑과 교제를 나누고, 그들을 공경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예배’는 하느님께만 드리도록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합니다.
어거스틴과 동시대의 사람들에게 까지 분명하였던 이같은 구분은 그 후 수 세기를 지나면서 대중들의 신심에서 점차 희미하게 되었습니다. 중세에 이르면 성인들은 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들로 숭배되기 시작하였고, 사람들이 하늘나라에 이르는데 성인들이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믿음으로까지 변질되어 갔습니다. 대중들의 이같은 성인숭배신앙은 개혁의 외침을 피할 수 없었으며, 개혁자들은 하나같이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오직 한 분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위치를 분명히 하였습니다. 그들은 성인들의 중보나 기적의 능력은 인정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거룩한 삶이 우리 신앙생활의 모본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개혁교회들과 달리 성공회는 성인들을 신앙의 모범으로 받아들이며, 하느님 안에서 우리와 상통하며 우리의 신앙을 도울 수 있다는 초대교회의 믿음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17세기 영국 켈롤라인 신비전통Caroline Divines의 사제 토마스 트러헌Thomas Traherne은 성인들과의 상통에 대해 말하면서 성인들을 가리켜 ‘거룩한 하느님 말씀의 저장 창고’이며 ‘거룩한 영과의 연결 파이프’라고 하였습니다. 이같은 표현은 넓은 의미에서 성공회가 성인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달리 바티칸 식의 시성절차를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성공회는 각 나라마다, 관구차원의 절차를 거쳐 신앙의 모범이 되는 성인을 지정하고, 교회력에 맞추어 전례에서 기념하고 있습니다. 성공회는 로마 교회와 달리 기념하는 성인들을 정하는데 있어 교파를 초월하는 포괄성과 가까운 시대의 신앙적 모범들을 포함시키는 현대적 감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많은 나라의 성공회 교회에서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나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을 기념하고 있는 것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필자는 한국 성공회 교회력에 더 많은 한국의 성인들을 기념하는 축일이 지정되는 날을 기대하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다른 개혁 교회들과 달리 성공회가 성인들을 기념하는 전통을 지키고 있다는 것이 오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유익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미국 샬렘영성훈련원의 모든 장기훈련과정(long term program)에서는 365일 동안 매일 한 사람의 거룩한 사람을 묵상할 수 있도록 추천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성인聖人 연구자 로버트 엘스버그Robert Ellsberg의 책 ‘All Saints’ 읽으며 참여자들은 매일 한 사람의 성인을 묵상합니다. 추측컨대 이는 글이나 문자로 전달될 수 없는 신앙의 진리를 살아있는 인격과의 만남을 통해 배울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배려라고 생각합니다.
성인들은 분명 거룩한 삶의 스승들입니다. 우리는 성인이란 결점이 없고 기적을 행하고 기꺼이 고통을 겪다가 일찍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엘스버그는 우리가 성인에 대해 스테인드글라스나 상본에 그려진 것과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한 그들이 체득한 지혜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으며, 당혹스러운 것만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들이 성인이 된 것은 순교를 했거나, 환시를 보았거나, 놀라운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탁월한 사랑과 선함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일깨워 주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성공회 사제이며 영성가인 윌리엄 로우William Law는 자신의 글 ‘신실하고 거룩한 삶으로의 엄숙한 부름 A Serious Call to Devout and Holy Life’에서 성인들의 삶을 관통하는 공통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가장 많이 기도하거나 가장 많이 금식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장 많은 자선을 베푸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 사람은 항상 하느님께 감사하고, 모든 일에서 하느님의 뜻을 자기 뜻으로 삼고, 항상 하느님을 찬양할 마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처음 교회는 믿는 이들을 성도聖徒라고 불렀습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거룩한 사람聖人들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교회력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모든 성인들을 기념하는 ‘모든 성인들의 날’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 모두의 진정한 정체성을 되새기며, 우리 모두가 거룩한 사람聖人들인 것을 기억하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은 “행복이란 삶에서 가장 필요한 한 가지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이며, 가장 필요한 것을 찾아내기만 하면 나머지 것들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데, 바로 이 때 필요한 한 가지를 통해 다른 모든 것이 주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마다 다르게 표현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그 내용은 같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을 실현하는 것, 곧 하느님이 각 사람을 향해 바라시는 모습이 되는 것’일 것입니다.
엘스버그는 행복의 추구는 진실한 삶에 대해 처음으로 느꼈던 갈망, 곧 사막 교부들에게서 현대의 탐구자에 이르기까지 많은 성인들을 무기력하고 거짓된 약속으로 가득한 기존 문화에 저항하도록 이끌었던 충동에서 시작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갈망은 모든 것을 자유롭게 놓아버리고 열심히 일하며 고요히 머무는 법을 배우게 합니다. 성인들이 전해주는 행복의 핵심은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주어진 삶과 조건에서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길’이며, 지금 이 순간이 바로 우리의 수도원이라고 말합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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