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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삶) 아빌라의 데레사와 영혼의 성(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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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86회 작성일 23-03-22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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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성녀라고 불리는 아빌라의 데레사Teresa of Avila는 자신이 설립한 수도회 수녀들의 기도생활을 돕기 위하여 ‘완덕의 길’과 ‘영혼의 성’ 두 권의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영혼의 성은 그녀가 쓴 말년의 저술로 기도에 대한 가장 훌륭한 고전이 되었습니다. “영혼의 성城”은 데레사 성녀가 그녀의 영적지도 사제였고, 특별한 우정을 나누었던 발타자르 그라시안 Baltasar Gracian신부의 요청으로 1577년에 썼는데, 이 신비신학의 걸작은 묵상기도와 영적여정에 관한 성녀의 가르침을 종합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 데레사는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는 여정을 자신의 기도체험에 근거하여 일곱 개 궁방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설명에 의하면 영혼은 원 바깥에서 하느님과 완전히 합일하고, 그 분의 빛 안에, 그 분의 동의 아래 살기 위해 원의 중심으로 가야합니다.

첫 번째 방은 기도생활에 대한 갈망이 시작되는 가장 가장자리에 위치한 방입니다. 이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기도와 생각’입니다. 이 방은 기도를 시작하였지만 아직은 집착과 분심에 시달리는 단계입니다. 하지만 이 집착과 분심을 통하여 기도자는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알아가는 여정을 시작합니다. 기도 중에 세속(재산, 명예, 사소한 일들)에 빠져있는 자신과의 직면은 그로부터 떠나고픈 갈망을 동시에 일으키는데 이는 둘째 방으로 옮겨가기 위한 조건이 됩니다. 이 방에서 기도자는 자신의 비천함보다는 하느님의 능력을 우러러 봄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나갈 수 있으며, 겸손은 이 방에서 자기 지식의 성장으로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자신의 나약함과 죄를 보며 실망하지만 동시에 이를 초월하려는 갈망을 갖게 됩니다. 이 방에서는 주로 구송기도와 묵상기도를 함께 드립니다.

두 번째 방은 진지하게 기도를 시작한 사람들의 방이며, 첫째 방에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의 방입니다. 기도자는 기도 중에 거룩한 실재에 대한 감각(하느님의 사랑과 초대)을 체험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하는 자신을 슬퍼하면서 동시에 하느님을 그리워합니다. 이 방에서 하느님을 듣는 체험은 강의나 설교, 독서를 통해, 또는 삶의 고통과 기도 중에 하느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진리로 다가옵니다. 이 방에서 기도자는 하느님께 자신을 정직하게 드러내기 시작하며, 자신의 삶에서 기도가 보다 중요한 영역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 방에서 기도의 형태는 구송기도에서 묵상기도로 전환되는데. 영혼의 정원에 물을 주기 위해 자신의 힘으로 두레박질을 하던 단계에서 도르래를 사용하여 보다 쉽게 물을 깃는 단계로 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방에서는 기도자는 기도 중에  메마름을 경험하기 시작하는데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입니다. 이 메마름의 시기에 위안의 기억과 의지는 우리 영혼을 일깨우는 데 도움을 주며,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과의 관계와 만남이 중요해집니다. 

데레사는 이 방에서의 기도 체험을 분별하는 데 있어, 자신이 체험한 내용이 성경의 말씀과 가르침에 일치하는지, 힘이 있고 삶에 변화를 일으키는지, 평화롭고 고요한 마음을 주는지,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 기억하기 쉬운지, 체험이 진실되게 느껴지는지, 생각하지 못하였던 놀라움과 통찰이 있는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깊은 만남이 있는지, 쓰인 글 너머 깊은 진실과의 만남이 있는지, 자신을 겸손하게 하고,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며, 하느님을 섬기고 싶은 갈망으로 자신을 이끄는지를 살피며 분별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세 번째 방에서 기도자는 더 많은 위안을 체험합니다. 이 방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도생활에서 얻는 위로에 자족하거나 영적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합니다. 은둔생활이나 고행 같은 자신의 수행이나 그로부터 얻는 위로에 자족하지 않는 겸손과 경외심을 간직하여야 합니다. 이 방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집착하던 것들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동안 자신과 동일시하던 집단의 가르침이나 규율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시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우리를 채우시길 원하지만 우리는 먼저 그것을 받을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이 방에서 기도자에게 가장 필요 것은 힘을 다하여 하느님께 복종하는 것입니다. 이 방은 첫째 방과 가까이에 있어서 언제든 뒤로 돌아가기 쉬운 단계이지만 더 깊은 영적여정으로 가기 위한 중요한 디딤돌이 되는 방이기도 합니다. 때문에 이 단계의 여정에 있는 기도자는 영적지도를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네 번째 궁방은 기도의 주도성이 기도자에게서 하느님께로 넘어가는 단계이며, 기도의 형태가 묵상기도에서 관상의 초입단계로 넘어가는 단계라고 할 수 있는데 데레사는 이 방부터는 자신의 체험을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기도자는 자기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강력함을 의식하기는 하지만 무엇을 하시는지를 알 수는 없습니다. 데레사는 이 방에서 누리는 위안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표현하였는데, 사랑의 열매로 그것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방에서의 묵상에 대해 데레사는 “묵상은 많이 생각하는 데 있지 않고 많이 사랑하는데 있으며, 사랑은 맛이 더한데 있지 않고 오직 더한 결심에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 궁방은 영혼의 정원으로 물을 끌어드리기 위해 강물로부터 정원으로 물고랑을 내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고랑을 내고 나면 물이 저절로 정원으로 흘러들어 오듯 기도 중에 기도자의 역할이 더욱 더 줄어듭니다. 이 방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생각이나 사고를 사용하는 기능이 약화되고 기도에서 사랑과 갈망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전에 느끼던 위안의 체험이 줄어들면서 많은 사람들은 이 단계에서 감각의 어둔 밤을 경험하게 됩니다. 어둔 밤에 경험하는 메마름은 기도하는 사람 스스로 하느님과 동일시하였던 하느님에 대한 자기 이미지, 지식, 감정적 체험들을 무너뜨리고 더 크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기도자의 영혼을 성장시켜 줍니다. 때로 사람들은 이 어둔 밤의 경험과 우울증을 혼동하는데 이 둘을 구분하는 가장 결정적인 기준은 메마름에도 불구하고 기도자의 내면에서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 강하게 타오르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이 방에 있는 사람들의 영적 진보를 위해 요청되는 것들은 첫째, 하느님을 어떤 이익을 넘어 사랑하는 것, 둘째 우리의 섬김을 통하여 은혜 받으려는 것을 포기하는 겸손, 셋째 맛이 아니라 주님을 본받고 주님과 함께 괴로움을 겪으려는 의지, 넷째 은혜를 주시는 하느님의 자유로우심에 대한 순종입니다. 여기서는 물이 부어지는 대로 물이 빠져나가는 뜰채를 물에 던지듯 하느님께 온전히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다섯째 방부터 데레사는 그것을 단순히 언어로 표현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단계는 기도자의 지성/기억/의지가 고요해 지고 넷째 방과 달리 상상이나 분심이 들어올 수 없는 방입니다. 데레사는 이 방에서 체험하는 하느님의 은혜를 분별하는 징표를 의심 없이 하느님께서 기도자 안에, 기도자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확신하는 것이고, 은혜 없이 몇 년이 지나도 한 번 체험한 은혜를 잊을 수도, 의심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방은 넷째 궁방에서 느꼈던 모든 의심들이 사라지고 하느님을 향한 더 깊은 신뢰가 쌓이는 방입니다. 성녀는 이 방을 하느님과의 합일에 이르는 과정의 초입이며 청혼(맞선)의 방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영혼은 자기가 맞아들일 신랑을 여기서 살짝 엿볼 수 있습니다. 매우 영적인 이 단계에서 기도자는 여전히 길을 잃을 위험을 가지고 있고, 자기집착과 사랑은 언제든지 기도를 그릇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 우리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을 자기 안에서 보게 되는데, 만일 그런 성장을 하지 못하면 심각하게 그릇된 길로 빠질 수 있습니다.

여섯 째 방은 약혼의 방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데레사는 여기서 경험하는 기도체험의 분별과 관련하여 가장 길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방에서 기도자는 영혼의 어둔 밤을 경험하게 됩니다. 데레사는 많은 사람들이 이 단계의 경험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인도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자신의 영적지도 사제에게 하느님을 향한 자신의 사랑과 갈망이 강렬함에도 불구하고 오랜 기간 동안 기도 중에 하느님 체험이 없는 메마름을 경험하고 있다고 하소연하였던 편지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 단계는 기도자가 이해할 수 없는 깊은 무지의 시간이며, 기도자를 위하여 더 많은 격려가 필요한 시간입니다.   

맞선을 통하여 자신을 살짝 보여준 신랑은 약혼을 서두르는 영혼의 열렬한 마음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최대의 행복을 얻기 위하여 약간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여기서 받는 고통을 자신이 경험한 모함과 비방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녀가 이같은 고통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들에 대해 데레사는 첫째로, 좋다, 나쁘다는 사람들의 반응을 관심 밖에 둘 것, 둘째, 자신에게 있는 좋은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알고 찬미할 것, 셋째, 자신의 덕행이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에서 온다는 것을 믿을 것, 넷째, 자신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광과 존영만을 구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합일의 은혜를 받은 이후에도 자신이 40년 동안 이런 저런 고통 속에 있었음을 고백하며, 이러한 역경 속에서는 오직 하느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녀는 여섯 째 방에서 하느님이 영혼을 깨우쳐 주는 방법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첫째, 번개처럼 순간적으로 사무치게 다가오는 깨달음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감미로운 상처에 대해 말합니다. 여기서 영혼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 것을 알지만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여주려 하시지 않습니다. 묵상기도가 더 이상 되지 않는 까닭은 이미 정신능력이 모두 무력하게 되었기 때문인데 이 경우 무엇보다 해로운 것은 고독입니다. 그녀는 이같은 고통을 없애는 방법을 모른다고 고백하며, 다만 견딜 수 있는 방법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기다리라’고 충고합니다. 이 여정은 깊은 무지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 단계에 있는 기도자는 하느님과 온전하게 일치하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원치 않습니다. 또한 기도자는 자신이 하느님의 광대한 사랑 앞에 얼마나 부족하게 응답하며 살아 왔는지 깨닫습니다. 기도자는 하느님의 현존을 깨닫지만 그를 바라볼 수 없는데 그것은 기도자에게 달콤한 고통입니다.

데레사는 하느님께서 영혼을 깨우쳐주시는 또 다른 방법으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영혼에게 하시는 말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무엇을 보았다 혹은 들었다 하는 체험들을 언급하면서 그 체험 자체를 대단히 여기는 것도, 혹은 악마의 장난이라고 치부하는 것도 경계하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는 분별이 매우 중요한데 그것이 기쁨을 주건, 잘못을 깨우쳐 주건, 기도자 자신과의 관계에 한정된 것이라면 대수롭게 여기지 말고, 그 체험으로 자신이 더 나아졌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합니다. 더욱이 들은 말씀이 다른 사람들과 관계된 것이라면 영적지도자나 공동체의 분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마음속으로부터 들려오든, 위나 밖에서 들려오든 하느님의 말씀이기는 마찬가지인데 그것을 분별하는 징표는 첫째, 그 말씀의 위력과 권위로 말함과 동시에 역사함이 일어납니다, ‘슬퍼하지 말라’는 한 마디 소리가 들리자마자 모든 슬픔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평화와 광명이 가득 차게 됩니다. 둘째 징표는 영혼 안에 남아있는 깊은 고요, 경건하고 평온하며 차분한 마음, 하느님을 찬미하려고 준비된 마음입니다. 셋째는 시간이 오래 지나도 지워지지 않고, 그 중에 어떤 것은 영영 잊혀지지 않습니다. 들은 말씀이 상상력의 소산이라면 이상에서 언급한 표징은 하나도 없으며, 마음 속 평화와 기쁨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말씀하시는 또 다른 방법은 지각적인 봄(seeing)입니다. 그것은 상상이 아니라 지성의 봄입니다. 이 경우 영혼은 하느님 말씀을 마치 자기 귀로 듣듯이 똑똑하게 그리고 신비롭게 느낍니다. 그것이 상상력의 소산이 아니라면 첫째로 말씀이 명료합니다. 둘째는 들리는 말씀이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들립니다, 셋째로, 상상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씀을 한 마디씩 엮어 나가지만 하느님의 말씀은 기도자가 철저하게 듣는 자리에서 듣습니다. 넷째로 하느님의 말씀은 단 한마디라도 인간의 재간으로 그토록 빨리 지어낼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이 말씀하실 때는 소리 나는 말보다 소리 없는 말로 더 많은 것을 깨우쳐 주십니다.

데레사는 여섯째 방에서 탈혼에 대하여 언급하며 이 단계에서 주어지는 은총을 첫째로, 하느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인식과 깊어지는 깨달음, 둘째는 자아인식과 겸손, 그리고 셋째로 세상 일체를 가볍게 여겨 하느님을 섬기는 일과 관계없는 일들을 무용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일곱째 방에 대하여 데레사는 무지의 여섯째 궁방과 마지막 일곱 번째 방 사이에는 닫혀 있지 않은 문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 방은 영적 결혼의 방이라고도 하는데 하느님과의 일치로 인한 기쁨이 넘치는 방입니다. 하느님께서 영혼에게 결혼의 신비로운 은혜를 주시려고 할 때 먼저 영혼을 그 방에 들게 하시는데 여섯째 방처럼 탈혼에 들게 하시지는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영혼을 장님과 벙어리로 만드시어 누리는 은혜가 무엇이며, 어떠한가를 통 느끼지 못하게 하십니다. 이 방에서 영혼은 하느님과 연합하여, 변화되고 세상 가운데서 행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사역에 참여하게 됩니다. 하늘에서 강이나 우물로 떨어지는 물이 똑같은 물이 되어 강물과 떨어진 물을 나눌 수도, 갈라놓을 수도 없듯이 하느님과 영혼은 가를 수 없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고백처럼 주님과 결합하는 사람은 그분과 한 영이 됩니다.(고전 6:17) 이 방에서의 체험이 주는 열매들이 있는데 첫째는 나에 대한 잊음이고 둘째는 하느님을 위해 괴로움을 많이 받겠다는 갈망입니다. 이 방의 색다름은 다른 방들에 있던 마음의 메마름이나 시끄러움이 거의 없고, 항상 고요하며 잔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상태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이같은 체험을 지속시키지 않고 거두시는 이유는 겸손과 하느님께 의지하는 갈망을 꺼뜨리지 않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일치의 은혜는 하느님과 이웃사랑으로 우리 영혼을 더 깊이 초대하시기 위함이라 결혼은 언제나 실천을 낳습니다. 이웃사랑은 이 방에서의 일치를 분별하는 기준입니다. 데레사에게 신비적 관상 기도의 절정은 사도적 열정으로 마무리됩니다. 데레사는 그것을 ‘마르타와 마리아가 함께 일하게 된다’고 표현하였습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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