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삶) 습관으로서의 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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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744회 작성일 23-03-22 21:46본문
이냐시오는 분별의 무게중심을 우리의 태도와 덕, 죄와 일반적인 삶의 상태를 관찰하던 것에서 우리의 행동을 살피는 것으로 옮겨 좀 더 실재적으로 행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와 함께 무슨 일을 하도록 부름 받았는가에 관심하였고,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도록 하는 것에 주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냐시오를 해석하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냐시오의 분별전통은 사막으로부터 보존되어 온 좀 더 직접적이고 직관적이며 은사적인 형태와는 다른 이성적 구조화의 과정으로 흐르는 경향을 띠게 되었습니다.
반면 동방교회와 퀘이커의 전통은 앞서 ‘앎의 네 가지 차원’에서 설명한 즉각적 인식과 임재의 특징을 지지합니다. 즉 습관적으로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 내면의 영들에 마음을 쏟되, 그 심연에 있는 하느님 사랑을 신뢰하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열망을 반영하여 우리의 열망도 변형되기를 원하는 일들을 계속하려고 노력합니다. 이같은 전통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신뢰하고, 갈망하면서 그 안에 거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어느 순간 우리 안에서 성령의 바람이 강하게 불어 우리가 깨달음의 자리로 인도함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명확함보다 일이 진척됨에 따라 성령님께서 우리가 볼 필요가 있는 것이라면 충분히 보여주실 것이라는 믿음에 의지하며 분별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냐시오 분별전통과 동방교회/퀘이커의 분별 전통이 서로 대립되거나 배타적이어서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유념적 전통이 모든 구체적인 형태들을 통해 임하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다면, 무념적 전통은 형상이 없으시지만 형태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들 가운데서 인식할 수 있는 하느님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 두 가지 접근이 모두 받아들여질 때 우리는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생명체들과 그들을 둘러싼 텅 빈 공간, 그리고 소리와 침묵 모두에 하느님께서 잠잠히 계시며 일하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두 분별전통은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한 개인의 삶 속에서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더 적합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별전통을 사용할 수 있도록 주어진 풍요로운 선물입니다.
습관으로서의 분별
이냐시오는 분별과 결정을 영성형성(spiritual formation), 즉 영적 마음을 형성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따라서 분별이란 선택과 결정이라는 삶의 특정한 순간이나 일부 영역만이 아니라 늘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여는 습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택과 결정은 우리에게 분별의 습관을 갖도록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분별은 선택과 결정, 그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성이 형성되는 과정이며, 인식이 성장하는 과정이고, 거룩한 현존에 대한 경험을 알아차리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충분한 분별력에는 연습된 영적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조율되어 야합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그 말씀을 따라가는 단순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진정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완전한 모양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생활과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에 의해 길러지고 완전해 집니다.
어네스트 라킨(Ernest Larkin)
누구나 처음 분별을 접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저런 분별의 방법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분별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분별은 습관이며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택과 결정이 우리의 ‘분별하는 가슴(Heart)’을 길러주는 역할을 하지만, ‘분별하는 가슴’이야말로 분별의 중심이며, 우리의 모든 삶을 지지해줍니다. 로즈메리 도어티는 앞서 언급한 그녀의 책 ‘분별’에서 분별이란 늘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여는 습관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분별하는 습관은 삶의 모든 면에서 하느님께 귀 기울이는 태도라고 하였습니다. 분별하는 습관은 가슴의 귀를 정교하게 조율시켜, 삶의 매 순간에 내재하고 있는 사랑의 초대를 더 분명히 들을 수 있게 합니다. 분별하는 습관이 생기면 이 초대에 응답하는 우리의 선택이 계속 정교해집니다. 우리는 점차 사랑과 조화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은총으로 그 초대에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게 됩니다.
평소 자주 만나며 친밀한 교제를 나눈 사람은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첫 인사 소리만 듣고도 우리는 쉽게 그 사림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음성의 톤으로도 상대의 마음상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앎은 어떤 방법이나 정보의 습득으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그 사람과 나누어 온 친교를 통해 얻어지는 앎이며, 습관처럼 반복되는 친밀한 교제를 통해 형성되는 분별력입니다. 늦은 밤 잠 자리에 누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녀들의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어머니의 분별력처럼 분별은 분석과 추론보다 사랑으로 아는 앎입니다.
서방 수도회의 아버지로 불리는 베네딕트는Benedict 그것을 “마음의 귀로” 경청하는 일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기도어린 집중의 삶입니다, 퀘이커Quaker 교도인 토마스 켈리Thomas Kelly 는 그것을 “단순화”라고 하였는데 그는 이 단순화를 “하느님께 온전히 굴복한 상태로…거룩한 중심으로부터 … 한 가지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같은 경청의 삶을 살게 될 때 분별은 습관이 되며, 우리의 생활양식이 됩니다,
습관으로서의 분별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차원은 분별하는 사람의 고유성에 대한 존중입니다. 훌륭한 영성가의 분별과 관련한 이론과 가르침들이 우리에게 그들의 경험을 전해 주고, 우리의 분별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분별은 결국 각 사람을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고유한 방식에 대한 감각을 기르고, 각자의 삶에서 발견해 온 지혜와 분별의 방식을 함양하는 과정을 통해 습득해 나가는 여정입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분별력이 하느님과 교제하는 각 사람의 고유한 영적수행과 기도어린 경청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면,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도와 영적수행 중에 하느님께서 각자를 대하시는 특별한 방식을 점차적으로 알아가게 됩니다. 이 여정에서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서 하느님과 가장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되며, 하느님께서 자신과 어떻게 채널을 맞추시는지를 알게 되는데, 이같은 습관과 생활양식은 하느님께서 각 사람과 맺는 고유한 친교와 소통방식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것은 마치 처음 기도를 배우는 사람이 몸의 자세와 기도의 방법에 대해 매뉴얼화 된 안내를 받으며 기도를 시작하지만, 점차 그 기도를 자신의 몸과 기질에 맞추어 고유한 방식으로 체화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도하게 되듯이, 분별 또한 하느님께서 각 사람과 나누시는 고유한 소통의 방식을 체득하는 과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이 우리의 분별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분별을 대신 하여 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내가 나 자신으로서 하느님과 함께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주어진 순간에 무엇이 요구되지 깨닫기 위해 나는 몇 번이고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더 이상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곳에 살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 과정은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으로부터 솟아나올 것이며, 어쩌면 각각의 시간에 각각의 형식을 취하지만, 항상 하느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반영할 것입니다."
- 로즈메리 도어티 Rose Mary Dougherty, 분별 중에서 -
틸든 에드워드Tilden Edward는 습관으로서의 분별을 살아가기 위하여 분별하는 태도를 함양하여야 하는데, 이를 위한 세 가지 길을 다음과 같이 추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일상적인 침묵의 영성훈련을 실천하는 것이고, 둘째는 매일의 의식성찰을 통해 일상의 하느님 체험을 분별하는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적지도를 받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역으로 분별하는 태도를 함양하는데 두 가지 방해물이 있는데 제럴드 메이Gerald May는 그것을 집착과 무감각이라고 하였습니다.
분별의 기초, 신뢰와 갈망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분별하는 삶을 생각할 때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첫 번째 중요한 진실은 분별은 언제 어디에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향한 신뢰에 기초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기자는 하느님의 계명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다 건너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아주 가까이에, 우리 입에,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알 수 있다’(신명기 30:11)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고, 만일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멀리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가까이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임스 반 버스트James Van Vurst는 분별은 건초더미에서 필사적으로 바늘을 찾는 것이 아니라 건초더미 전체를 우리 삶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으로 보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 삶의 복잡성과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숨겨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별이란 우리가 하는 모든 것과 우리가 관련된 모든 것에 내포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그는 믿음에 기초하며,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실수하지 않으려고 순간마다, 단계마다 조심스럽게 하느님 뜻을 찾기보다는 참으로 자신의 손 안에 우리를 붙들고 계신 하느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들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이 낙심하여 길을 걷는 동안에 자신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는 나란히 걷고 계신 주님을 몰랐지만, 그 순간에도 제자들에게는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제임스 반 버스트는 말합니다. “하느님을 알아낼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을 믿으며 신뢰 가운데 살 것인가?... 사실 하느님의 뜻을 모두 알아내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노력하되 하느님께서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진실을 신뢰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정이 어떤 의심이나 불확실함 없이 분명한 때는 드믑니다. 하여 분별에서 깊이 요청되는 것은 신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최선의 선택에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실수하고, 그릇된 선택을 한 그곳에도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던, 그 선택의 바탕에 늘 하느님이 현존하심을 신뢰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릇된 선택을 깨닫는 순간, 그곳에서 또 다시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분별에서 가장 중요한 또 다른 한 가지를 꼽아야 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하느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하느님을 찾으려는 갈망, 하느님의 뜻을 구하려는 갈망, 하느님의 뜻을 살려고 하는 갈망이 없다면, 우리는 분별을 위해 단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할 것입니다. 갈망이야말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엔진이며, 분별을 삶으로 완성하도록 하는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인용하는 토마스 머튼의 기도는 우리에게 분별이 무엇인지를 마음 깊이 새기고 묵상하도록 돕습니다.
나의 주 하느님,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저는 모르옵니다.
제 앞에 놓여있는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길이 어디에서 끝나는지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저 자신을 진실로 잘 알지도 못하고,
제가 당신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이
실제로 제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갈망이
사실상 당신을 기쁘게 해드린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모든 일에서 그러한 갈망을 갖기 원합니다.
그러한 갈망에서 멀어지는 어떤 일도 결코 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제가 그렇게 하면 제가 아무 것도 모를지라도
당신께서 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을 저는 압니다.
그러므로 제가 길을 잃은 듯이 보이고 죽음의 그늘이진 곳에 있을지라도
저는 언제나 당신을 믿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항상 저와 함께 계시고,
당신은 제가 온갖 위험을 홀로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니
저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 토마스 머튼의 기도 -
- 김홍일 (기도하는 삶)
반면 동방교회와 퀘이커의 전통은 앞서 ‘앎의 네 가지 차원’에서 설명한 즉각적 인식과 임재의 특징을 지지합니다. 즉 습관적으로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 내면의 영들에 마음을 쏟되, 그 심연에 있는 하느님 사랑을 신뢰하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열망을 반영하여 우리의 열망도 변형되기를 원하는 일들을 계속하려고 노력합니다. 이같은 전통에서는 우리가 하느님을 신뢰하고, 갈망하면서 그 안에 거하기 위해 노력한다면 어느 순간 우리 안에서 성령의 바람이 강하게 불어 우리가 깨달음의 자리로 인도함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명확함보다 일이 진척됨에 따라 성령님께서 우리가 볼 필요가 있는 것이라면 충분히 보여주실 것이라는 믿음에 의지하며 분별하게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냐시오 분별전통과 동방교회/퀘이커의 분별 전통이 서로 대립되거나 배타적이어서 둘 중 하나만을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의 유념적 전통이 모든 구체적인 형태들을 통해 임하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다면, 무념적 전통은 형상이 없으시지만 형태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들 가운데서 인식할 수 있는 하느님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이 두 가지 접근이 모두 받아들여질 때 우리는 알고 있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 생명체들과 그들을 둘러싼 텅 빈 공간, 그리고 소리와 침묵 모두에 하느님께서 잠잠히 계시며 일하고 계심을 깨닫게 됩니다. 두 분별전통은 둘 중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한 개인의 삶 속에서 상황에 따라 자신에게 더 적합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분별전통을 사용할 수 있도록 주어진 풍요로운 선물입니다.
습관으로서의 분별
이냐시오는 분별과 결정을 영성형성(spiritual formation), 즉 영적 마음을 형성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따라서 분별이란 선택과 결정이라는 삶의 특정한 순간이나 일부 영역만이 아니라 늘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여는 습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택과 결정은 우리에게 분별의 습관을 갖도록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분별은 선택과 결정, 그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성이 형성되는 과정이며, 인식이 성장하는 과정이고, 거룩한 현존에 대한 경험을 알아차리는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충분한 분별력에는 연습된 영적마음이 필요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조율되어 야합니다. 그리고 사랑 안에서 그 말씀을 따라가는 단순한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진정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완전한 모양으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생활과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에 의해 길러지고 완전해 집니다.
어네스트 라킨(Ernest Larkin)
누구나 처음 분별을 접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이런 저런 분별의 방법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분별을 하겠지만, 궁극적으로 분별은 습관이며 삶의 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택과 결정이 우리의 ‘분별하는 가슴(Heart)’을 길러주는 역할을 하지만, ‘분별하는 가슴’이야말로 분별의 중심이며, 우리의 모든 삶을 지지해줍니다. 로즈메리 도어티는 앞서 언급한 그녀의 책 ‘분별’에서 분별이란 늘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자신을 여는 습관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분별하는 습관은 삶의 모든 면에서 하느님께 귀 기울이는 태도라고 하였습니다. 분별하는 습관은 가슴의 귀를 정교하게 조율시켜, 삶의 매 순간에 내재하고 있는 사랑의 초대를 더 분명히 들을 수 있게 합니다. 분별하는 습관이 생기면 이 초대에 응답하는 우리의 선택이 계속 정교해집니다. 우리는 점차 사랑과 조화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우리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은총으로 그 초대에 자유롭게 응답할 수 있게 됩니다.
평소 자주 만나며 친밀한 교제를 나눈 사람은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첫 인사 소리만 듣고도 우리는 쉽게 그 사림이 누구인지 알 수 있습니다.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음성의 톤으로도 상대의 마음상태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앎은 어떤 방법이나 정보의 습득으로 터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그 사람과 나누어 온 친교를 통해 얻어지는 앎이며, 습관처럼 반복되는 친밀한 교제를 통해 형성되는 분별력입니다. 늦은 밤 잠 자리에 누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녀들의 발자국 소리만 듣고도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어머니의 분별력처럼 분별은 분석과 추론보다 사랑으로 아는 앎입니다.
서방 수도회의 아버지로 불리는 베네딕트는Benedict 그것을 “마음의 귀로” 경청하는 일이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하느님을 향한 기도어린 집중의 삶입니다, 퀘이커Quaker 교도인 토마스 켈리Thomas Kelly 는 그것을 “단순화”라고 하였는데 그는 이 단순화를 “하느님께 온전히 굴복한 상태로…거룩한 중심으로부터 … 한 가지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우리가 이같은 경청의 삶을 살게 될 때 분별은 습관이 되며, 우리의 생활양식이 됩니다,
습관으로서의 분별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다른 차원은 분별하는 사람의 고유성에 대한 존중입니다. 훌륭한 영성가의 분별과 관련한 이론과 가르침들이 우리에게 그들의 경험을 전해 주고, 우리의 분별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분별은 결국 각 사람을 인도하시는 하느님의 고유한 방식에 대한 감각을 기르고, 각자의 삶에서 발견해 온 지혜와 분별의 방식을 함양하는 과정을 통해 습득해 나가는 여정입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분별력이 하느님과 교제하는 각 사람의 고유한 영적수행과 기도어린 경청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라면,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기도와 영적수행 중에 하느님께서 각자를 대하시는 특별한 방식을 점차적으로 알아가게 됩니다. 이 여정에서 우리는 자신이 어디에서 하느님과 가장 진정한 관계를 맺게 되며, 하느님께서 자신과 어떻게 채널을 맞추시는지를 알게 되는데, 이같은 습관과 생활양식은 하느님께서 각 사람과 맺는 고유한 친교와 소통방식을 알아차릴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것은 마치 처음 기도를 배우는 사람이 몸의 자세와 기도의 방법에 대해 매뉴얼화 된 안내를 받으며 기도를 시작하지만, 점차 그 기도를 자신의 몸과 기질에 맞추어 고유한 방식으로 체화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기도하게 되듯이, 분별 또한 하느님께서 각 사람과 나누시는 고유한 소통의 방식을 체득하는 과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이 우리의 분별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의 분별을 대신 하여 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내 마음 속 깊은 곳에 내가 나 자신으로서 하느님과 함께 있는 장소가 있습니다. 주어진 순간에 무엇이 요구되지 깨닫기 위해 나는 몇 번이고 그곳으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하지만 언젠가는 더 이상 그곳으로 돌아가는 것의 문제가 아닐 수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곳에 살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그 과정은 더 이상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으로부터 솟아나올 것이며, 어쩌면 각각의 시간에 각각의 형식을 취하지만, 항상 하느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반영할 것입니다."
- 로즈메리 도어티 Rose Mary Dougherty, 분별 중에서 -
틸든 에드워드Tilden Edward는 습관으로서의 분별을 살아가기 위하여 분별하는 태도를 함양하여야 하는데, 이를 위한 세 가지 길을 다음과 같이 추천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일상적인 침묵의 영성훈련을 실천하는 것이고, 둘째는 매일의 의식성찰을 통해 일상의 하느님 체험을 분별하는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영적지도를 받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역으로 분별하는 태도를 함양하는데 두 가지 방해물이 있는데 제럴드 메이Gerald May는 그것을 집착과 무감각이라고 하였습니다.
분별의 기초, 신뢰와 갈망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분별하는 삶을 생각할 때 우리가 기억하여야 할 첫 번째 중요한 진실은 분별은 언제 어디에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향한 신뢰에 기초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명기 기자는 하느님의 계명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바다 건너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아주 가까이에, 우리 입에, 마음에 있어서 하려고만 하면 언제든지 알 수 있다’(신명기 30:11)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고, 만일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멀리 있어서가 아니라 너무 가까이 계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제임스 반 버스트James Van Vurst는 분별은 건초더미에서 필사적으로 바늘을 찾는 것이 아니라 건초더미 전체를 우리 삶과 함께 하시는 하느님으로 보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 삶의 복잡성과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숨겨진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분별이란 우리가 하는 모든 것과 우리가 관련된 모든 것에 내포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의 일부라는 것입니다.
그는 믿음에 기초하며, 믿음으로 사는 삶이란 실수하지 않으려고 순간마다, 단계마다 조심스럽게 하느님 뜻을 찾기보다는 참으로 자신의 손 안에 우리를 붙들고 계신 하느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들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일하십니다.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이 낙심하여 길을 걷는 동안에 자신들과 이야기를 나누시는 나란히 걷고 계신 주님을 몰랐지만, 그 순간에도 제자들에게는 동행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제임스 반 버스트는 말합니다. “하느님을 알아낼 것인가? 아니면 하느님을 믿으며 신뢰 가운데 살 것인가?... 사실 하느님의 뜻을 모두 알아내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노력하되 하느님께서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진실을 신뢰하며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결정이 어떤 의심이나 불확실함 없이 분명한 때는 드믑니다. 하여 분별에서 깊이 요청되는 것은 신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최선의 선택에만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실수하고, 그릇된 선택을 한 그곳에도 계십니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던, 그 선택의 바탕에 늘 하느님이 현존하심을 신뢰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릇된 선택을 깨닫는 순간, 그곳에서 또 다시 하느님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분별에서 가장 중요한 또 다른 한 가지를 꼽아야 한다면, 그것은 단연코 ‘하느님을 향한 갈망’입니다. 하느님을 찾으려는 갈망, 하느님의 뜻을 구하려는 갈망, 하느님의 뜻을 살려고 하는 갈망이 없다면, 우리는 분별을 위해 단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할 것입니다. 갈망이야말로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끄는 엔진이며, 분별을 삶으로 완성하도록 하는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인용하는 토마스 머튼의 기도는 우리에게 분별이 무엇인지를 마음 깊이 새기고 묵상하도록 돕습니다.
나의 주 하느님, 제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저는 모르옵니다.
제 앞에 놓여있는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길이 어디에서 끝나는지도 확실히 알 수 없습니다.
또한 저 자신을 진실로 잘 알지도 못하고,
제가 당신의 뜻을 따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실이
실제로 제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는 갈망이
사실상 당신을 기쁘게 해드린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제가 하는 모든 일에서 그러한 갈망을 갖기 원합니다.
그러한 갈망에서 멀어지는 어떤 일도 결코 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제가 그렇게 하면 제가 아무 것도 모를지라도
당신께서 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을 저는 압니다.
그러므로 제가 길을 잃은 듯이 보이고 죽음의 그늘이진 곳에 있을지라도
저는 언제나 당신을 믿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항상 저와 함께 계시고,
당신은 제가 온갖 위험을 홀로 당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니
저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 토마스 머튼의 기도 -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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