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삶) 기도, 관계로서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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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708회 작성일 23-03-22 21:36본문
기도는 “내 사랑 안에 머무르라”(요한 15:4)는 하느님 초대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며,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물면서 예수님께서 누리셨던 기쁨과 생명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돌과 땅이 하나인 것처럼 인간의 영혼과 하느님도 하나인데 돌을 땅의 중심부로 이끄는 것이 중력이라면 영혼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것은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영혼을 하느님께로 이끄시는 친밀함으로의 초대에 응답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그것을 삶의 공허함이나 불안으로 경험하기도 하고, 신비와 의미에 대한 답을 구하고자하는 갈망으로 경험하기도 하며, 때로는 일이나 어떤 관계, 혹은 사물에 대한 중독으로 경험하기도 합니다. 어거스틴St.Augustin은 이같은 자신의 경험을 후에 ‘고백록’을 통하여 아래와 같이 고백하였습니다.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
기도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가 기도에 대하여 가장 일반적으로 내리는 정의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는 모든 것을 포용하시고, 모든 것을 있게 해 주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존재와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대화와 소통’라는 기도에 대한 정의는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기도를 이해하고 있는지 잘 드러나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말이든, 추론이든, 기억이든, 상상이든 기도란 하느님과의 관계 가운데서 드려진다는 것입니다. 대화는 자신을 향한 몰두에 갇힌 독백과 달리 대상(하느님)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대화는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될 수 있는데 우리는 말하기, 묵상하기. 귀 기울이기, 글쓰기 등으로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고, 소통의 도구 역시 말과 언어만이 아니라 사고와 생각, 감정과 느낌으로도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걷기, 일어서기, 절하기, 무릎 꿇기, 팔을 들어 경배하기 등 우리 몸과 동작으로도 하느님께 우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이유로 요사이에는 기도의 ‘대화’라는 차원보다 ‘관계’라는 차원을 새롭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한편 그리스도교 관상전통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된 현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대화’라고 할 때, 거기에는 기도를 말로 표현된 생각이나 감정들로 한정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회 영성신학자 마틴 쏜톤Martin Thornton은 ‘관상적’이란 용어를 감정이입의 기도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하여 사용하였는데, 그는 공감 또는 감정이입을 뜻하는 ‘Empathy’란 단어를 옥스퍼드 사전을 이용하여 ‘마주 보고 있는 상대방 속으로 자신의 인격을 투사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리라는 희망 속에서 하느님의 창조를 관상하였고, 성경을 관상하였는데 그것은 단지 언어나 생각을 넘어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예술가의 작품을 보고 그 앞에서 무엇을 깨닫거나 해석할 수 없을지라도, 알 수 없는 감동에 탄성이 나왔다면, 탄성은 그 자체로 우리가 작품을 만든 예술가와 나눌 수 있는 해석보다 깊은 차원의 소통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중에 문득 다가 온 어느 구절이나 단어 속에서 깊은 평화와 위로를 느낀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훌륭한 기도입니다.
기도란 우리를 사랑의 관계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과 말, 감정을 넘어서서 하느님, 궁극적 신비를 향하여 정신과 마음, 즉 우리의 전존재를 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을 향하여 자신을 열고 단순히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관상’은 ‘대화’라는 개념으로 포괄하기 어려운 기도의 또 다른 차원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며, 기도에서 ‘관계’라는 차원을 강조하는 경향은 기도에서 ‘관상의 차원’을 회복시키기 위한 한 가지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상(contemplation)이라는 단어의 라틴어 어원은 이같은 특징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데 영어로 관상을 뜻하는 Contemplation은 라틴어 cum(with)과 templum(temple)의 합성어로서 ‘하느님의 성전에 함께 머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도의 여러 유형과 차원들
사람들이 맺는 관계에 여러 유형과 차원들이 존재하듯이 기도 중에 기도하는 사람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몇 가지 유형과 차원들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빈말의 기도’입니다. ‘빈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기도(마태 6:7-15)인데 기도하는 사람의 주의(attention)와 헌신(devotion)이 담겨있지 않는 기도입니다. 기도문을 읽으며 기도하는 내용에 우리의 주의와 헌신을 담아 기도하지 않고, 그저 입으로만 글을 읽고 있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겉보기에 아무리 화려하고 유창한 말로 기도하고 있을지라도 우리의 기도가 습관처럼 언어를 반복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빈말’입니다. 그래서 빈말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 스스로 기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위험한 기도는 두 번째 기도인데, 그것은 ‘독백의 기도’입니다. 독백의 기도는 일방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느님께 쏟아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제 하느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지 두고 보겠다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하고 싶은 말을 쏟아만 놓고, 자신의 기도에 대해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지는 않습니다. 이 단계의 기도가 위험한 것은 스스로 기도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가운데 아직 인격적인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간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느님께 쏟아 놓지만 하느님께서 자신을 향하여 들려주시고, 보여주시는 응답에 관심이 없거나,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대화의 기도’입니다. 이 단계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중에 하느님께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듣기도 합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시기도 하고, 새로운 의지를 불러일으키시어 충만함이나 평화, 기쁨을 주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어떤 이미지나 기억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독백의 단계에서는 기도의 초점이 자신이지만 대화의 단계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도 안에 현존하시며, 기도하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 소통과 친교가 시작됩니다. 이 단계에서부터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중에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하고, 하느님께서도 기도하는 사람의 삶과 문제들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시기 시작합니다. 이 단계의 기도를 하는 사람은 기도를 체계 있게 배우고, 자신에게 적합한 기도를 발견하여 꾸준히 실천하여야 합니다.
넷째는 ‘듣는 기도’입니다. 이 단계에 들어 선 사람들은 기도 중에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와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시다는 믿음이 깊어지게 되고, 하느님께서 자녀인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믿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친교와 사랑 가운데 깊어진 신뢰와 믿음은 기도자로 하여금 청원보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선물에 귀 기울이는 것을 더욱 사모하게 합니다. 이때부터 기도자는 하느님으로부터 듣기를 더 갈망하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정직하여야 하며, 기도 중에 만나는 자신의 죄나 한계들을 용기 있게 직면하여야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자기직면은 자기초월과 성장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마지막은 ‘사랑의 기도’입니다. 이 단계에서 기도는 사랑으로 승화되어 매우 단순하고 명료해 지고, 기도는 삶 그 자체가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믿고 내어맡기고, 기도를 통해 사랑을 실천하고 자신을 나눠주고 봉헌합니다. 기도자는 기도 중에 이러 저러한 애기로 복잡한 말들을 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되고,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 안에 머물며, 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집착하고 만족할 수 있는 어떤 선물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는 천상에서나 지상에서나 진정한 단 한 가지 선물을 잘 받을 수 있도록 다른 모든 선물을 부수적으로 함께 주실 뿐입니다. 그 진정한 단 한 가지 선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느님 자신입니다. 비록 다른 선물도 주시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시기를 좋아하셔서 그걸 위해 온갖 것을 다 마련하십니다.”
- 마에스터 에크하르트 -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차원에서 하느님과 기도로 관계 맺으며 더 깊은 친밀함으로 인도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좋은 기도는 그것이 어떤 방법으로 드리는 기도이든 지금 우리를 하느님과의 더 깊은 친밀함으로 이끌어주는 기도입니다. 다만 우리의 기도가 진보하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징표는 가운데 하나는, 기도 중에 우리가 하는 역할이 작아지고, 성령님께서 하시는 역할이 커져가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St.Teresa of Avila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기도의 진보를 ‘영혼의 정원에 물을 주는 일’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녀는 첫째 단계를 어렵게 직접 물을 길어 올려 영혼의 정원으로 물을 길어 나르는 일에 비유하였습니다. 이 단계는 기도 중에 기도하는 사람이 하는 수고와 노력이 가장 많은 단계입니다. 둘째 단계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도르래를 이용하여 보다 쉽게 물을 길어 올려 정원에 물을 대는 단계인데 이 단계는 첫 번째 단계에 비하여 기도자의 노력이 줄어듭니다. 셋째 단계에서는 정원까지 물길을 내어 물이 저절로 흘러가도록 하는 단계입니다. 물길을 내는 수고를 마치고 나면 기도하는 사람이 하는 일이 없어져 둘째 단계보다 기도자의 수고와 노력이 적어집니다. 마지막 단계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단계인데, 이 단계에서 기도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멈추어 서서 비를 맞는 것입니다. 이같은 기도의 과정을 실재로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중에는 순차적으로 체험되기도 하고, 중첩되어 경험되기도 하며, 때로는 앞뒤를 오가며 경험하기도 합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당신은 우리 인간의 마음을 움직여 당신을 찬양하고 즐기게 하십니다. 당신은 우리를 당신을 향해서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쉴 때까지는 진정한 안식을 누릴 수 없습니다. “
기도란 무엇인가?
그리스도교가 기도에 대하여 가장 일반적으로 내리는 정의는 ‘하느님과의 대화’입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는 모든 것을 포용하시고, 모든 것을 있게 해 주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존재와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대화와 소통’라는 기도에 대한 정의는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기도를 이해하고 있는지 잘 드러나 있는데 그것은 첫째로, 말이든, 추론이든, 기억이든, 상상이든 기도란 하느님과의 관계 가운데서 드려진다는 것입니다. 대화는 자신을 향한 몰두에 갇힌 독백과 달리 대상(하느님)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대화는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될 수 있는데 우리는 말하기, 묵상하기. 귀 기울이기, 글쓰기 등으로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고, 소통의 도구 역시 말과 언어만이 아니라 사고와 생각, 감정과 느낌으로도 소통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걷기, 일어서기, 절하기, 무릎 꿇기, 팔을 들어 경배하기 등 우리 몸과 동작으로도 하느님께 우리를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같은 이유로 요사이에는 기도의 ‘대화’라는 차원보다 ‘관계’라는 차원을 새롭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른 한편 그리스도교 관상전통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기 시작하면서부터 시작된 현상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기도를 ‘대화’라고 할 때, 거기에는 기도를 말로 표현된 생각이나 감정들로 한정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공회 영성신학자 마틴 쏜톤Martin Thornton은 ‘관상적’이란 용어를 감정이입의 기도를 가리키는 말로 해석하여 사용하였는데, 그는 공감 또는 감정이입을 뜻하는 ‘Empathy’란 단어를 옥스퍼드 사전을 이용하여 ‘마주 보고 있는 상대방 속으로 자신의 인격을 투사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전통적으로 하느님을 만나리라는 희망 속에서 하느님의 창조를 관상하였고, 성경을 관상하였는데 그것은 단지 언어나 생각을 넘어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의미하였습니다. 우리가 어떤 예술가의 작품을 보고 그 앞에서 무엇을 깨닫거나 해석할 수 없을지라도, 알 수 없는 감동에 탄성이 나왔다면, 탄성은 그 자체로 우리가 작품을 만든 예술가와 나눌 수 있는 해석보다 깊은 차원의 소통이 됩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중에 문득 다가 온 어느 구절이나 단어 속에서 깊은 평화와 위로를 느낀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훌륭한 기도입니다.
기도란 우리를 사랑의 관계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우리가 ‘생각과 말, 감정을 넘어서서 하느님, 궁극적 신비를 향하여 정신과 마음, 즉 우리의 전존재를 여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느님을 향하여 자신을 열고 단순히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는 관상’은 ‘대화’라는 개념으로 포괄하기 어려운 기도의 또 다른 차원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며, 기도에서 ‘관계’라는 차원을 강조하는 경향은 기도에서 ‘관상의 차원’을 회복시키기 위한 한 가지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상(contemplation)이라는 단어의 라틴어 어원은 이같은 특징을 잘 드러내 주고 있는데 영어로 관상을 뜻하는 Contemplation은 라틴어 cum(with)과 templum(temple)의 합성어로서 ‘하느님의 성전에 함께 머무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도의 여러 유형과 차원들
사람들이 맺는 관계에 여러 유형과 차원들이 존재하듯이 기도 중에 기도하는 사람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몇 가지 유형과 차원들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빈말의 기도’입니다. ‘빈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지 말라고 하신 기도(마태 6:7-15)인데 기도하는 사람의 주의(attention)와 헌신(devotion)이 담겨있지 않는 기도입니다. 기도문을 읽으며 기도하는 내용에 우리의 주의와 헌신을 담아 기도하지 않고, 그저 입으로만 글을 읽고 있다면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빈말입니다. 겉보기에 아무리 화려하고 유창한 말로 기도하고 있을지라도 우리의 기도가 습관처럼 언어를 반복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빈말’입니다. 그래서 빈말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 스스로 기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위험한 기도는 두 번째 기도인데, 그것은 ‘독백의 기도’입니다. 독백의 기도는 일방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느님께 쏟아놓고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이제 하느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실지 두고 보겠다는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입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하고 싶은 말을 쏟아만 놓고, 자신의 기도에 대해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듣지는 않습니다. 이 단계의 기도가 위험한 것은 스스로 기도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 단계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가운데 아직 인격적인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간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느님께 쏟아 놓지만 하느님께서 자신을 향하여 들려주시고, 보여주시는 응답에 관심이 없거나, 응답을 기다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대화의 기도’입니다. 이 단계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중에 하느님께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을 듣기도 합니다. 기도 중에 하느님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에게 새로운 깨달음을 주시기도 하고, 새로운 의지를 불러일으키시어 충만함이나 평화, 기쁨을 주시기도 합니다. 때로는 어떤 이미지나 기억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도 하십니다. 독백의 단계에서는 기도의 초점이 자신이지만 대화의 단계에서는 하느님께서 기도 안에 현존하시며, 기도하는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 소통과 친교가 시작됩니다. 이 단계에서부터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 중에 하느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기 시작하고, 하느님께서도 기도하는 사람의 삶과 문제들에 대하여 영향력을 행사하시기 시작합니다. 이 단계의 기도를 하는 사람은 기도를 체계 있게 배우고, 자신에게 적합한 기도를 발견하여 꾸준히 실천하여야 합니다.
넷째는 ‘듣는 기도’입니다. 이 단계에 들어 선 사람들은 기도 중에 하느님과 나누는 친교와 사랑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시다는 믿음이 깊어지게 되고, 하느님께서 자녀인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깨달아 알고, 믿게 됩니다. 하느님과의 친교와 사랑 가운데 깊어진 신뢰와 믿음은 기도자로 하여금 청원보다 오히려 하느님께서 주시는 말씀과 선물에 귀 기울이는 것을 더욱 사모하게 합니다. 이때부터 기도자는 하느님으로부터 듣기를 더 갈망하게 됩니다. 이 단계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 정직하여야 하며, 기도 중에 만나는 자신의 죄나 한계들을 용기 있게 직면하여야 합니다. 하느님 안에서의 자기직면은 자기초월과 성장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마지막은 ‘사랑의 기도’입니다. 이 단계에서 기도는 사랑으로 승화되어 매우 단순하고 명료해 지고, 기도는 삶 그 자체가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모든 것을 믿고 내어맡기고, 기도를 통해 사랑을 실천하고 자신을 나눠주고 봉헌합니다. 기도자는 기도 중에 이러 저러한 애기로 복잡한 말들을 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되고, 하느님을 바라보고, 하느님 안에 머물며, 쉬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집착하고 만족할 수 있는 어떤 선물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는 천상에서나 지상에서나 진정한 단 한 가지 선물을 잘 받을 수 있도록 다른 모든 선물을 부수적으로 함께 주실 뿐입니다. 그 진정한 단 한 가지 선물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느님 자신입니다. 비록 다른 선물도 주시지만 하느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주시기를 좋아하셔서 그걸 위해 온갖 것을 다 마련하십니다.”
- 마에스터 에크하르트 -
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다양한 차원에서 하느님과 기도로 관계 맺으며 더 깊은 친밀함으로 인도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좋은 기도는 그것이 어떤 방법으로 드리는 기도이든 지금 우리를 하느님과의 더 깊은 친밀함으로 이끌어주는 기도입니다. 다만 우리의 기도가 진보하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징표는 가운데 하나는, 기도 중에 우리가 하는 역할이 작아지고, 성령님께서 하시는 역할이 커져가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St.Teresa of Avila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기도의 진보를 ‘영혼의 정원에 물을 주는 일’에 비유하였습니다. 그녀는 첫째 단계를 어렵게 직접 물을 길어 올려 영혼의 정원으로 물을 길어 나르는 일에 비유하였습니다. 이 단계는 기도 중에 기도하는 사람이 하는 수고와 노력이 가장 많은 단계입니다. 둘째 단계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도르래를 이용하여 보다 쉽게 물을 길어 올려 정원에 물을 대는 단계인데 이 단계는 첫 번째 단계에 비하여 기도자의 노력이 줄어듭니다. 셋째 단계에서는 정원까지 물길을 내어 물이 저절로 흘러가도록 하는 단계입니다. 물길을 내는 수고를 마치고 나면 기도하는 사람이 하는 일이 없어져 둘째 단계보다 기도자의 수고와 노력이 적어집니다. 마지막 단계는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단계인데, 이 단계에서 기도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멈추어 서서 비를 맞는 것입니다. 이같은 기도의 과정을 실재로 우리가 기도를 드리는 중에는 순차적으로 체험되기도 하고, 중첩되어 경험되기도 하며, 때로는 앞뒤를 오가며 경험하기도 합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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