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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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75회 작성일 25-03-06 16:47본문
너희의 원수를 사랑하여라.
(눅 6:27)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부담스러운 가르침이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씀은 자연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 아니다. 초인적으로 행동하라는 윤리적 요청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이 되라는 존재론적 요청이다. 원수를 사랑할 만큼 새로운!
인간에는 세 종류가 있다. 동물에 비유하자면 늑대 같은 인간, 원숭이 같은 인간, 사슴 같은 인간이 있다. 나는 늑대 같은 인간을 야만인이라고, 원숭이 같은 인간을 문명인 또는 현대인이라고 부르겠다. 그러면 사슴 같은 인간은?
늑대
늑대 유형의 야만인은 본능과 생존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따라서 본능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라면 타인을 희생시키는 것도 불사한다. 늑대처럼 집단을 이루기도 하지만, 그것은 상호 협력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다. 힘의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 위계적 군집(群集)일 뿐이다.
늑대 유형의 야만인은 인류의 역사 초기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발견된다. 부를 독점하려고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업가, 권력 유지를 위해 초법적으로 군림하려는 독재자, 폭력과 범죄를 통해 이기적 욕망을 실현하려는 깡패폭력배들은 모두 늑대 유형의 야만인이다. 이들은 “강약약강”(强弱弱强)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강자에는 약하고 약자에는 강하다. 야만인에게는 힘이 곧 정의다.
부를 독점하려고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업가, 권력 유지를 위해 초법적으로 군림하려는 독재자, 폭력과 범죄를 통해 이기적 욕망을 실현하려는 폭력배들은 모두 늑대 유형의 야만인이다.
야만인은 자기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끝없이 경쟁하고 싸운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말한 것처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 벌어진다. 이때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이런 사람들에겐 법과 도덕도 무용지물이다. 심지어 종교조차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용한다.
성경에도 늑대 유형의 야만인이 여럿 나온다. 아우 아벨이 못마땅하다고 들에서 돌로 쳐죽인 카인이 그렇고,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나를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창 4:24)라고 선언한 라멕이 그렇다. 권력 기반이 취약해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히브리 산파들에게 아들을 받을 때마다 죽이라고 명령한 이집트의 파라오도 그렇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 곧 아기 예수를 죽이겠다고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인” 헤롯(마 2:16)이 그렇다.
이런 유형의 인간을 요즘 우리는 계엄 정국에서 여실히 보고 있다. 그들의 살해 계획을 보면 그 잔인성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유형의 야만인을 늑대에 비유한 것이 늑대한테 미안할 정도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늑대 유형의 야만인이 판을 치고 있다. 투쟁을 선동하고 혐오를 조장하고 저주를 퍼부으며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게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는 자들 말이다. 아, 야만의 시대, 늑대들이 너무 많다!
원숭이
문명인은 원숭이 유형의 인간이다. 니체는 문명인들을 향해 이렇게 탄식한다. “그대들은 벌레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길을 걸어왔고, 많은 점에서 아직도 벌레다. 일찍이 그대들은 원숭이였고, 지금도 그 어떤 원숭이보다 더 원숭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원숭이는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물이며, 행동 방식도 인간과 비슷하다. 하지만 아직 인간은 아니다. 문명인이 그런 꼴이다. 문명인은 이미 인간이지만 아직 참자아를 각성하지 못해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했다.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타인의 시선과 기준에 갇혀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원숭이는 인간을 제외한 동물 중에서 가장 똑똑하다.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인지 능력도 뛰어나다. 문명인이 그렇지 않은가. 이성과 합리적 사고에 힘입어 과학 기술 문명을 이룰 정도로 똑똑하지 않은가. 그 덕에 머리는 바위만큼 커졌으나 안타깝게도 가슴은 콩알만큼 오그라들었다. 하여, 문명인은 참자아의 각성에서 오는 기쁨을 모르며, 영적 충만함에서 오는 환희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삶은 생기와 웃음과 춤을 잃었다. 아, 생각하는 원숭이의 비애여!
그 덕에 머리는 바위만큼 커지지 않았는가. 안타깝게도 가슴은 콩알만큼 오그라들었지만. 하여, 문명인은 참자아의 각성에서 오는 기쁨을 모르며, 영적 충만함에서 오는 환희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삶은 생기와 웃음과 춤을 잃었다. 아, 생각하는 원숭이의 비애여!
무엇보다 원숭이는 모방능력이 뛰어나다. 다른 원숭이의 행동을 따라 할 뿐 아니라 인간의 행동도 보는 대로 흉내 낸다. 문명인이 그렇다. 끊임없이 타인을 흉내 내며 살아간다. 스스로 욕망을 형성하지 못한 채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캉) 각종 미디어, SNS, 광고를 통해 주입된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남들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해야 한다. 남이 먹는 것을 나도 먹어야 하고, 남이 입는 브랜드를 나도 입어야 하고, 남이 가진 것을 나도 가져야 한다. 완벽해 보이는 “타인의 삶”을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그대로 흉내 내려다 좌절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욕망을 조작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흉내 내기를 끊임없이 부추긴다. 남을 흉내 내야 문명인의 반열에 들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원숭이들을 양산하고 있다. 이들은 껍데기만 인간이지 정체성이 확고한 참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허울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원숭이에 가깝다.
성경에도 원숭이 유형의 인간이 나온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당대의 지성인이요 문명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전통과 관습을 흉내 내기에 급급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마 23:5)고 비판하셨다. 또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찼다”(마 23:25)라거나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마 23:27)라고 비꼬기도 하셨다.
사슴
사슴 유형은 어떤 사람일까? 시편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시 42:1) 사슴 유형의 인간은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메마른 시내에서 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이다. 마음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혼의 노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슴에 비유면서 사슴 같은 그리스도, 허나 사라지고 만 그리스도를 애타게 그리워한다.
아아 어디에 숨으셨나요?
사랑하는 님이여,
울음 속에 날 버려두시고
상처만 나에게 남기신 채
사슴마냥 가버리신 그대.
그대 뒤 외치며 나섰더니
벌써 가고 없구려.
예언자 하박국은 사슴의 경쾌한 몸짓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인의 자유와 기쁨을 본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신다.(합 3:17)
사슴은 가파른 절벽과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도 빠르고 경쾌하게 움직인다. 다윗도 노래했다. “하나님은 나의 발을 암사슴의 발처럼 빠르게 만드시고, 나를 높은 곳에 안전하게 세워주신다.”(시 18:33) 사슴은 모든 얽매임과 집착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을 상징한다.
솔로몬의 아가서에서 사슴은 임이다. 지극한 사랑의 대상이다.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사슴은 연인이다.
사랑하는 나의 임은 어린 사슴처럼 빠르구나. 벌써 우리 집 담 밖에 서서 창 틈으로 기웃거리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아가 2:9)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나의 임이여, 베데르 산의 날랜 사슴처럼 빨리 오세요.(아가 2:17)
임이여, 향내 그윽한 이 산의 어린 사슴처럼, 빨리 오세요.(아가 8:14)
사슴 유형의 인간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든, 사랑이 풍부하게 흘러넘치는 사람이다. 하여, 언제나 사랑을 베풀 준비가 된 사람이다. 이러한 사슴 유형의 인간을 우리는 “숨빛인”이라고 부른다.
숨빛인
사람이 사람다우려면 늑대에서 원숭이로, 원숭이에서 사슴으로 변모해야 한다.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야만인에서 문명인으로, 문명인에서 숨빛인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숨빛인은 야만인이 아니며, 문명인에 만족하지 않는다.
숨빛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초월을 향해 얼굴을 드는 사람이다. 숨빛인은 사람을 사랑하기에 역사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다. 숨빛인은 하나님이 부여한 삶을 사랑하며, 사람들과 함께 엮어가는 삶을 사랑한다.
숨빛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초월을 향해 얼굴을 드는 사람이다. 숨빛인은 사람을 사랑하기에 역사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다. 숨빛인은 하나님이 부여한 삶을 사랑하며, 사람들과 함께 엮어가는 삶을 사랑한다.
숨빛인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이다. 참자아를 각성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늑대의 야만을 청산하고, 원숭이의 가면을 벗고, 사슴의 영혼으로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다.
숨빛인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에 “관해”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살아낸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처럼 사랑을 베푼다. 그러한 삶이야말로 숨빛인의 신존재 증명이다. 숨빛인에게 하나님은 단어나 개념이 아니다. 숨빛인의 삶에서 피어나는 친절함이며, 그의 눈빛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이다.
숨빛인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미 자기 내면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햇빛과 바람을 느끼는 감촉 속에, 새소리와 물소리를 듣는 귀 속에, 새싹과 아름드리 나무를 경이롭게 보는 눈 속에 언제나 현존하기 때문이다. 숨빛인은 기도하지 않는다. 숨 쉴 때마다 신성한 현존을 호흡할 뿐이다. 숨빛인은 부르짖지 않는다. 그는 침묵 속에 고요히 머문다. 침묵 속에서 숨빛인의 영혼에는 사랑이 고인다. 기쁨이 노래한다. 평화가 깃들고, 친절과 따뜻함이 미소 짓는다. 그는 언제나 베풀 준비가 되어 있다.
수술 피정
어제 향심기도 강사 모임이 있었다. 미국 관상지원단이 공인한 강사(commissioned presenter) 열두 명이 줌으로 모였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 각지에서(아틀란타에서, 뉴저지에서, 사우스 다코타에서, 사이판에서, 버지니아에서, 산 호세에서, 달라스 등)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었다. 소개하는 시간에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저는 은퇴한 목사의 사모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뵈니 반갑습니다. 감격스럽기까지 합니다. 제가 이 모임에 참석한 것, 아니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니까요.
수년 전 뇌종양이 발견되어 뇌 수술을 두 번 했습니다. 그런데 올 초에 또 발병하여 수술을 한 번 더 했어요. 이번엔 하나님이 데려가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수술이 잘 되어 오늘 여러분을 만나게 됐습니다.
이번에 수술하러 입원하면서 저는 피정에 참석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견디기가 훨씬 수월했어요.
이번에 수술 받으며 도움 됐던 것은 “환영기도”였어요. 전에도 했지만 이번만큼 간절히 한 적도 없었지요. 수술 전에도 수술 후 깨어나서도 입원하고 있는 동안에도 환영기도를 수없이 했어요. 정말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현존에 나를 엽니다. 그 안에 담겨진 치유하는 활동과 은총을 향해 나를 엽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어요. 그러니까 삶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저를 위해 기도하고 방문하는 모든 사람이 고맙고 사랑스러웠고요. 지금 데려가셔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퇴원하면서 마음먹었어요. ‘생명 다할 때까지 이 기도를 사람들에게 나눠야겠다.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닫게 해준 이 기도를.’
나는 그 사모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새롭게 깨달았다. 원수는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원수는 삶 자체다. 이따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과 시련을 주는 삶 말이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저주스러운 운명 말이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삶을 사랑하라”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 예수님은 지금 삶의 겉모습이 어떻더라도, 아무리 불행한 것 같고, 아무리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워도, 그 삶을, 원수처럼 괴롭히는 그 삶을 사랑하라고 요청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삶을 사랑하라”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 예수님은 지금 삶의 겉모습이 어떻더라도, 아무리 불행한 것 같고, 아무리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워도, 그 삶을, 원수처럼 괴롭히는 그 삶을 사랑하라고 요청하신 것이다.
결국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삶을 사랑하라는 말이며, 숨빛인이 되라는 명령이다. 숨빛인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숨빛인은 삶을 사랑한다. 그는 삶을 조건 없이 받아들인다. 삶이 주는 선물과 상처를 가리지 않으며, 기쁨과 슬픔을 차별하지 않는다. 삶이 웃을 때 함께 웃고, 삶이 울 때 함께 운다. 그에게 삶은 저항해야 할 운명이 아니라 포용해야 할 신비인 것이다.
숨빛인은 삶과 싸우지 않는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환영하면서 삶과 함께 춤을 춘다. 삶을 받아들이되 그렇다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숨빛인은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만, 그 수용은 멈춤이 아니라 극복의 출발점이다. 그의 수용은 체념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창조하는 용기다.
원수를 사랑하라. 삶이 아무리 그대를 속이더라도 삶을 사랑하라. 늑대의 야만을 청산하고, 원숭이의 가면을 벗고, 사슴의 자유로운 영혼으로 삶을 사랑하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친절함과 따뜻함을 남에게 나눠라. 나누는 만큼 사랑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칠 정도로!”(눅 6:38) 지금 야만의 시대는, 모방의 시대는 숨빛인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 이민재
(눅 6:27)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부담스러운 가르침이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 말씀은 자연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말씀이 아니다. 초인적으로 행동하라는 윤리적 요청이 아니라, 새로운 인간이 되라는 존재론적 요청이다. 원수를 사랑할 만큼 새로운!
인간에는 세 종류가 있다. 동물에 비유하자면 늑대 같은 인간, 원숭이 같은 인간, 사슴 같은 인간이 있다. 나는 늑대 같은 인간을 야만인이라고, 원숭이 같은 인간을 문명인 또는 현대인이라고 부르겠다. 그러면 사슴 같은 인간은?
늑대
늑대 유형의 야만인은 본능과 생존을 최우선으로 삼는다. 따라서 본능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라면 타인을 희생시키는 것도 불사한다. 늑대처럼 집단을 이루기도 하지만, 그것은 상호 협력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다. 힘의 원리에 의해 작동하는 위계적 군집(群集)일 뿐이다.
늑대 유형의 야만인은 인류의 역사 초기뿐만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발견된다. 부를 독점하려고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업가, 권력 유지를 위해 초법적으로 군림하려는 독재자, 폭력과 범죄를 통해 이기적 욕망을 실현하려는 깡패폭력배들은 모두 늑대 유형의 야만인이다. 이들은 “강약약강”(强弱弱强)의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 강자에는 약하고 약자에는 강하다. 야만인에게는 힘이 곧 정의다.
부를 독점하려고 노동자를 착취하는 기업가, 권력 유지를 위해 초법적으로 군림하려는 독재자, 폭력과 범죄를 통해 이기적 욕망을 실현하려는 폭력배들은 모두 늑대 유형의 야만인이다.
야만인은 자기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끝없이 경쟁하고 싸운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말한 것처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Bellum omnium contra omnes)이 벌어진다. 이때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 이런 사람들에겐 법과 도덕도 무용지물이다. 심지어 종교조차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용한다.
성경에도 늑대 유형의 야만인이 여럿 나온다. 아우 아벨이 못마땅하다고 들에서 돌로 쳐죽인 카인이 그렇고, “가인을 해친 벌이 일곱 갑절이면 나를 해치는 벌은 일흔일곱 갑절이다”(창 4:24)라고 선언한 라멕이 그렇다. 권력 기반이 취약해질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히브리 산파들에게 아들을 받을 때마다 죽이라고 명령한 이집트의 파라오도 그렇고,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 곧 아기 예수를 죽이겠다고 “베들레헴과 그 가까운 온 지역에 사는 두 살짜리로부터 그 아래의 사내아이를 모조리 죽인” 헤롯(마 2:16)이 그렇다.
이런 유형의 인간을 요즘 우리는 계엄 정국에서 여실히 보고 있다. 그들의 살해 계획을 보면 그 잔인성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유형의 야만인을 늑대에 비유한 것이 늑대한테 미안할 정도다. 심지어 교회에서도 늑대 유형의 야만인이 판을 치고 있다. 투쟁을 선동하고 혐오를 조장하고 저주를 퍼부으며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게 늑대처럼 으르렁거리는 자들 말이다. 아, 야만의 시대, 늑대들이 너무 많다!
원숭이
문명인은 원숭이 유형의 인간이다. 니체는 문명인들을 향해 이렇게 탄식한다. “그대들은 벌레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길을 걸어왔고, 많은 점에서 아직도 벌레다. 일찍이 그대들은 원숭이였고, 지금도 그 어떤 원숭이보다 더 원숭이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원숭이는 인간과 유전적으로 가장 가까운 동물이며, 행동 방식도 인간과 비슷하다. 하지만 아직 인간은 아니다. 문명인이 그런 꼴이다. 문명인은 이미 인간이지만 아직 참자아를 각성하지 못해 온전한 인간이 되지 못했다. 자기 정체성을 확립하지 못한 채 타인의 시선과 기준에 갇혀 전전긍긍한다.
하지만 원숭이는 인간을 제외한 동물 중에서 가장 똑똑하다. 도구를 사용할 줄 알고, 인지 능력도 뛰어나다. 문명인이 그렇지 않은가. 이성과 합리적 사고에 힘입어 과학 기술 문명을 이룰 정도로 똑똑하지 않은가. 그 덕에 머리는 바위만큼 커졌으나 안타깝게도 가슴은 콩알만큼 오그라들었다. 하여, 문명인은 참자아의 각성에서 오는 기쁨을 모르며, 영적 충만함에서 오는 환희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삶은 생기와 웃음과 춤을 잃었다. 아, 생각하는 원숭이의 비애여!
그 덕에 머리는 바위만큼 커지지 않았는가. 안타깝게도 가슴은 콩알만큼 오그라들었지만. 하여, 문명인은 참자아의 각성에서 오는 기쁨을 모르며, 영적 충만함에서 오는 환희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삶은 생기와 웃음과 춤을 잃었다. 아, 생각하는 원숭이의 비애여!
무엇보다 원숭이는 모방능력이 뛰어나다. 다른 원숭이의 행동을 따라 할 뿐 아니라 인간의 행동도 보는 대로 흉내 낸다. 문명인이 그렇다. 끊임없이 타인을 흉내 내며 살아간다. 스스로 욕망을 형성하지 못한 채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라캉) 각종 미디어, SNS, 광고를 통해 주입된 “타인의 욕망”을 자신의 욕망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남들이 원하는 것을 나도 원해야 한다. 남이 먹는 것을 나도 먹어야 하고, 남이 입는 브랜드를 나도 입어야 하고, 남이 가진 것을 나도 가져야 한다. 완벽해 보이는 “타인의 삶”을 인스타그램에서 보고 그대로 흉내 내려다 좌절하기도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의 욕망을 조작하는 시스템을 만들어 흉내 내기를 끊임없이 부추긴다. 남을 흉내 내야 문명인의 반열에 들 수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며 원숭이들을 양산하고 있다. 이들은 껍데기만 인간이지 정체성이 확고한 참 인간이 아니다. 인간이라는 허울을 쓰고 있지만 실상은 원숭이에 가깝다.
성경에도 원숭이 유형의 인간이 나온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당대의 지성인이요 문명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전통과 관습을 흉내 내기에 급급했다. 예수님은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마 23:5)고 비판하셨다. 또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찼다”(마 23:25)라거나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마 23:27)라고 비꼬기도 하셨다.
사슴
사슴 유형은 어떤 사람일까? 시편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 사슴이 시냇물 바닥에서 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내 영혼이 주님을 찾아 헐떡입니다.”(시 42:1) 사슴 유형의 인간은 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메마른 시내에서 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이다. 마음과 힘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혼의 노래』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사슴에 비유면서 사슴 같은 그리스도, 허나 사라지고 만 그리스도를 애타게 그리워한다.
아아 어디에 숨으셨나요?
사랑하는 님이여,
울음 속에 날 버려두시고
상처만 나에게 남기신 채
사슴마냥 가버리신 그대.
그대 뒤 외치며 나섰더니
벌써 가고 없구려.
예언자 하박국은 사슴의 경쾌한 몸짓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신앙인의 자유와 기쁨을 본다.
주 하나님은 나의 힘이시다.
나의 발을 사슴의 발과 같게 하셔서
산등성이를 마구 치닫게 하신다.(합 3:17)
사슴은 가파른 절벽과 험준한 산악 지형에서도 빠르고 경쾌하게 움직인다. 다윗도 노래했다. “하나님은 나의 발을 암사슴의 발처럼 빠르게 만드시고, 나를 높은 곳에 안전하게 세워주신다.”(시 18:33) 사슴은 모든 얽매임과 집착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영혼을 상징한다.
솔로몬의 아가서에서 사슴은 임이다. 지극한 사랑의 대상이다. 하나님이든 사람이든 남자든 여자든 사슴은 연인이다.
사랑하는 나의 임은 어린 사슴처럼 빠르구나. 벌써 우리 집 담 밖에 서서 창 틈으로 기웃거리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구나.(아가 2:9)
날이 저물고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나의 임이여, 베데르 산의 날랜 사슴처럼 빨리 오세요.(아가 2:17)
임이여, 향내 그윽한 이 산의 어린 사슴처럼, 빨리 오세요.(아가 8:14)
사슴 유형의 인간은 한 마디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든, 사람을 향한 사랑이든, 사랑이 풍부하게 흘러넘치는 사람이다. 하여, 언제나 사랑을 베풀 준비가 된 사람이다. 이러한 사슴 유형의 인간을 우리는 “숨빛인”이라고 부른다.
숨빛인
사람이 사람다우려면 늑대에서 원숭이로, 원숭이에서 사슴으로 변모해야 한다. 인간이 인간다우려면 야만인에서 문명인으로, 문명인에서 숨빛인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숨빛인은 야만인이 아니며, 문명인에 만족하지 않는다.
숨빛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초월을 향해 얼굴을 드는 사람이다. 숨빛인은 사람을 사랑하기에 역사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다. 숨빛인은 하나님이 부여한 삶을 사랑하며, 사람들과 함께 엮어가는 삶을 사랑한다.
숨빛인은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초월을 향해 얼굴을 드는 사람이다. 숨빛인은 사람을 사랑하기에 역사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는 사람이다. 숨빛인은 하나님이 부여한 삶을 사랑하며, 사람들과 함께 엮어가는 삶을 사랑한다.
숨빛인은 자기 정체성이 분명한 사람이다. 참자아를 각성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늑대의 야만을 청산하고, 원숭이의 가면을 벗고, 사슴의 영혼으로 자유롭게 사는 사람이다.
숨빛인은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에 “관해”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살아낸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처럼 사랑을 베푼다. 그러한 삶이야말로 숨빛인의 신존재 증명이다. 숨빛인에게 하나님은 단어나 개념이 아니다. 숨빛인의 삶에서 피어나는 친절함이며, 그의 눈빛에서 전해지는 따뜻함이다.
숨빛인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미 자기 내면에 현존하기 때문이다. 햇빛과 바람을 느끼는 감촉 속에, 새소리와 물소리를 듣는 귀 속에, 새싹과 아름드리 나무를 경이롭게 보는 눈 속에 언제나 현존하기 때문이다. 숨빛인은 기도하지 않는다. 숨 쉴 때마다 신성한 현존을 호흡할 뿐이다. 숨빛인은 부르짖지 않는다. 그는 침묵 속에 고요히 머문다. 침묵 속에서 숨빛인의 영혼에는 사랑이 고인다. 기쁨이 노래한다. 평화가 깃들고, 친절과 따뜻함이 미소 짓는다. 그는 언제나 베풀 준비가 되어 있다.
수술 피정
어제 향심기도 강사 모임이 있었다. 미국 관상지원단이 공인한 강사(commissioned presenter) 열두 명이 줌으로 모였다. 한국뿐 아니라 미국 각지에서(아틀란타에서, 뉴저지에서, 사우스 다코타에서, 사이판에서, 버지니아에서, 산 호세에서, 달라스 등)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었다. 소개하는 시간에 나이가 제일 많아 보이는 분이 이런 이야기를 나눴다.
저는 은퇴한 목사의 사모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뵈니 반갑습니다. 감격스럽기까지 합니다. 제가 이 모임에 참석한 것, 아니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니까요.
수년 전 뇌종양이 발견되어 뇌 수술을 두 번 했습니다. 그런데 올 초에 또 발병하여 수술을 한 번 더 했어요. 이번엔 하나님이 데려가실 줄 알았어요. 그런데 수술이 잘 되어 오늘 여러분을 만나게 됐습니다.
이번에 수술하러 입원하면서 저는 피정에 참석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니 견디기가 훨씬 수월했어요.
이번에 수술 받으며 도움 됐던 것은 “환영기도”였어요. 전에도 했지만 이번만큼 간절히 한 적도 없었지요. 수술 전에도 수술 후 깨어나서도 입원하고 있는 동안에도 환영기도를 수없이 했어요. 정말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현존에 나를 엽니다. 그 안에 담겨진 치유하는 활동과 은총을 향해 나를 엽니다.”
이렇게 기도하며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어요. 그러니까 삶이 너무 아름다운 거예요! 저를 위해 기도하고 방문하는 모든 사람이 고맙고 사랑스러웠고요. 지금 데려가셔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퇴원하면서 마음먹었어요. ‘생명 다할 때까지 이 기도를 사람들에게 나눠야겠다. 사람들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깨닫게 해준 이 기도를.’
나는 그 사모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새롭게 깨달았다. 원수는 나에게 해를 입힌 사람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원수는 삶 자체다. 이따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통과 시련을 주는 삶 말이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저주스러운 운명 말이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삶을 사랑하라”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 예수님은 지금 삶의 겉모습이 어떻더라도, 아무리 불행한 것 같고, 아무리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워도, 그 삶을, 원수처럼 괴롭히는 그 삶을 사랑하라고 요청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삶을 사랑하라”라는 뜻이 된다. 그렇다. 예수님은 지금 삶의 겉모습이 어떻더라도, 아무리 불행한 것 같고, 아무리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워도, 그 삶을, 원수처럼 괴롭히는 그 삶을 사랑하라고 요청하신 것이다.
결국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삶을 사랑하라는 말이며, 숨빛인이 되라는 명령이다. 숨빛인이야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고,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숨빛인은 삶을 사랑한다. 그는 삶을 조건 없이 받아들인다. 삶이 주는 선물과 상처를 가리지 않으며, 기쁨과 슬픔을 차별하지 않는다. 삶이 웃을 때 함께 웃고, 삶이 울 때 함께 운다. 그에게 삶은 저항해야 할 운명이 아니라 포용해야 할 신비인 것이다.
숨빛인은 삶과 싸우지 않는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환영하면서 삶과 함께 춤을 춘다. 삶을 받아들이되 그렇다고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숨빛인은 삶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만, 그 수용은 멈춤이 아니라 극복의 출발점이다. 그의 수용은 체념이 아니라 더 나은 삶을 창조하는 용기다.
원수를 사랑하라. 삶이 아무리 그대를 속이더라도 삶을 사랑하라. 늑대의 야만을 청산하고, 원숭이의 가면을 벗고, 사슴의 자유로운 영혼으로 삶을 사랑하라. 그 사랑에서 나오는 친절함과 따뜻함을 남에게 나눠라. 나누는 만큼 사랑은 더욱 풍성해질 것이다. “되를 누르고 흔들어서 넘칠 정도로!”(눅 6:38) 지금 야만의 시대는, 모방의 시대는 숨빛인의 출현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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