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큰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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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156회 작성일 24-12-26 09:23본문
“주님께서 큰일을 하셨을 때에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시 126:3)
삶에는 어떤 흐름이 있다. 부산하고 어수선할 때에는 알아차릴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흐름이. 하지만 깊은 밤이나 이른 새벽, 어둠에 파묻혀 고요에 잠길 때, 돌같이 딱딱해진 감각이 아가의 살 같이 연해질 때, 그 흐름은 살며시, 때론 격하게 얼굴을 내민다.
어두운 흐름도 있고, 밝은 흐름도 있다. 어지러운 흐름도 있고, 평화로운 흐름도 있다. 앞 것은 마성적이고, 뒷 것은 신성하다. 마성적 흐름은 욕망을 부추겨 눈을 멀게 하고, 신성한 흐름은 영성을 일깨워 눈을 뜨게 한다. 마성적 흐름이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현실을 조장한다면, 신성한 흐름은 질서와 충만과 빛의 현실을 창조한다. 마성적 흐름이 악마의 현실을 퍼뜨린다면, 신성한 흐름은 하나님의 현실을 확장한다. 악마의 현실이 저주스러운 삶이라면, 하나님의 현실은 은총 가득한 삶이다.
마성적 흐름과 신성한 흐름, 악마의 현실과 하나님의 현실, 이 둘을 분별하는 것이 삶의 지혜다. 그래야 삶의 소중한 시간을 소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물론 우리는 더러 신성한 흐름을 따라 흘러갈 때도 있다. 그럴 때 삶은 의미와 보람으로 빛난다. 하지만 마성적 흐름에 휘말려 삶을 파괴할 때가 많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서 그런 모습을 자각하면 참 괴롭다.
신성한 흐름에 나를 온전히 맡겨 그 흐름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 삶을 아름답게 빚는 비결이다. 신성한 흐름에 나를 맡기면 마성적인 흐름이 멈춘다. 아니, 멈춘다기보다 변형된다. 신성한 흐름에 나를 맡기면 욕망의 거센 압력이 거룩한 갈망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신성한 흐름을 자각하는 여러 방법이 있다. 나의 경우, 음악이 그런 역할을 한다.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때 그런 경험을 종종하곤 했다. 그래서 젊은 시절엔 수업보다 음악감상실에 틀어박혀 있었던 적이 많았다. 종교음악도 좋지만, 현대음악도 좋다. 현대음악의 난해함을 따라가다 보면 정신이 고양된다. 윤이상의 음악이 그렇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비극적인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어떤 신성한 흐름이 느껴진다. 요즘은 에스토니아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을 많이 듣는다.
그림도 삶의 신성한 흐름을 드러내는 훌륭한 매개체다. 예를 들면 샤갈의 작품들.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강렬한 색채로 그려진 〈나와 마을〉을 보자. 거대한 소의 얼굴과 사람의 얼굴이 서로 바라보고 있다. 이 둘은 단순히 동물과 사람, 먹거리와 육식종(肉食種)이 아니다. 생명과 생명의 대등한 응시이며, 그러한 응시 속에서 어떤 신성한 것이 흐른다. 그래서 이 둘은 서로를 보며 웃고 있다.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새 하늘과 새 땅, 그 평화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떠올린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사 11:7)
음악이나 그림뿐 아니라 삶의 신성한 흐름을 알아차리는 데는 독서도 좋고, 산책도 좋다. 등산은 신성한 흐름을 알아차리기에 아주 좋은 활동이다. 요즘 유행하는 명상도 신성한 흐름을 자각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명상하는 동안 마성적 흐름에서 분출하는 욕망과 감정, 사념이 정화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방법들은 일시적이다. 신성한 흐름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으니까. 영적 감각이 웬만큼 깨어있지 않으면 아무리 음악을 듣고, 독서를 하고, 그림을 감상해도 신성한 흐름을 느낄 수 없다. 잠시 느꼈다가도 쉬 망각한다. 이때 신성한 흐름을 느끼게 했던 행위들은 그 흐름에서 분리되어, 그 자체의 의미에 갇히고 만다.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은 다독가 또는 독서광임을 자랑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오디오 마니아임을 뽐내거나 레코드 콜렉션을 자랑한다. 등산도 정복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명상도 한 철 유행으로 소비될 뿐이다.
신성한 흐름을 자각하는 결정적인 방법이 있다. 삶의 신성한 흐름(하나님의 현실)을 볼 수 있게 하고, 만질 수 있게 하면 된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신성한 흐름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현실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더는 삶을 삼키지 못할 것이며, 삶은 질서와 충만과 빛으로 풍요로울 것이다. 아, 마침내 삶의 저주는 삶의 은총으로 바뀔 것이다. 시편 시인의 노래는 나의 노래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시 30:11)
그런데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나님의 현실을 보고 만지는 일이 가능할까? 아니, 가능한지를 따지기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어떨까? 그것도 아주 오래전, 2천 년 전에. 눈이 번쩍 떠지지 않을까? 귀를 쫑긋 세우게 되지 않을까? 가슴은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을까?
2024년 성탄절을 맞이하는 나의 눈이, 나의 귀가, 나의 가슴이 그렇다.
아, 예수가 그런 분이었구나!
예수, 그는 누구인가?
아가의 몸으로 태어난 삶의 신성한 흐름이다. 물질을 입은 하나님의 현실이다. 이 아가 예수로 인해 인류는 신성한 흐름을 볼 수 있게 됐다. 더 나아가 예수는 하나님의 현실이 인간의 살(肉)로 나타난 존재다. 예수로 인해 인류는 하나님의 현실을 만질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예수를 보면 신성한 흐름이 보이고, 하나님의 현실이 만져진다. 보이지 않아 신성한 흐름을 잊어버리는 것, 만질 수 없어 하나님의 현실을 망각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이게 기독교다. 강생의 기적이며, 성육신의 신비이다. 하여, 나는 날마다 강생의 신비 속에서 살아간다. 성육신의 기적을 경험한다. 어떻게? 간단하다. 구유의 예수와 함께 웃고 십자가의 예수와 함께 아파한다. 에고가 깨지고 거짓자아가 죽는 아픔.
아, 그리고 성만찬에서 그 살을 만진다. 심지어 먹는다. 그는 소화되고 해체되어 내 몸 곳곳에 스며든다. 혈관에 세포에 신경조직에. 시나브로 마성적 삶의 흐름은 신성한 흐름으로 바뀌며, 악마의 현실은 하나님의 현실로 변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몸에 임한다. 그 흐름, 그 현실, 그 나라에서 나는 날마다 부활한다.
심리현실의 악취는 영성현실의 향기에 밀려나고, 영성현실의 향기가 스민 생활현실에선 하나님의 현실이 윤슬처럼 반짝인다. 빛이 입자와 파동으로 온 누리에 퍼지듯 하나님의 현실이 생활현실 전체에 퍼져나간다. 삶은 저주의 옷을 벗고 은총의 옷을 입는다. 나는 노래한다.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갈아입히셨습니다.”
심리현실의 악취는 영성현실의 향기에 밀려나고, 영성현실의 향기가 스민 생활현실에선 하나님의 현실이 윤슬처럼 반짝인다.
큰 일!
우리 말에서 “큰 일”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부정적 의미로도 긍정적 의미로도 사용된다. “큰 일 났어! 계엄령이 선포됐대!” 이것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 경우다. “근데 국회에서 계엄령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켰대.” “그래? 국회가 큰 일 했네!” 이것은 긍정적으로 의미로 사용된 경우다.
그런데 긍정적인 정도가 아니라 경이로울 정도로 큰 일이 있다.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릴 정도로[驚天動地] 큰 일이다. 그것은 지고・지엄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그것도 호화로운 왕궁이 아니라 짐승 먹이통에서, 그것도 근엄하고 엄숙한 얼굴이 아니라 방긋 웃는 아가의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소식이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던 삶의 신성한 흐름, 저 하나님의 현실을 이제 보고, 듣고, 만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없었고, 귀로 들을 수 없었고, 손으로 만질 수 없었던 신성한 흐름, 저 하나님의 현실을 보고 듣고 만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성탄절 아침, 아기 예수께 무릎을 꿇는다. 그의 눈동자를 보면서 하나님을 보며, 그의 살을 만지면서 하나님의 살을 만진다. 그 아기를 보고, 그 아기를 만질 때 삶의 신성한 흐름이 그토록 생생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현실이 그토록 구체적일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토록 가까울 수가 없다.
마음에 충동이 인다. 아기 예수와 함께 그 흐름에 나를 온통 맡기고 싶다는 충동이. 그 흐름과 함께 하염없이 흘러가고 싶다는 충동이. 흘러, 흘러, 흘러 신성의 대양에 푹 잠기고 싶다는 충동이.
그런 소망을 품기만 했는데도, 벌써 내 삶의 슬픔이 미소 짓기 시작한다. 내 마음의 어둠이 밝아지기 시작한다. 내 생의 외로웠던 세월들이 위로 받기 시작한다. 나를 오염시키고 타락시켰던 마성적 흐름이 나를 정화하고 치유하는 신성한 흐름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래서 내 입에서는 노래가 나온다. “주님께서 큰일을 하셨을 때에 우리는(나는) 얼마나 기뻤던가!”(시 126:3)
예수, 그는 누구인가?
“아, 큰 일 이다!”
- 이민재
우리는 얼마나 기뻤던가!”
(시 126:3)
삶에는 어떤 흐름이 있다. 부산하고 어수선할 때에는 알아차릴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흐름이. 하지만 깊은 밤이나 이른 새벽, 어둠에 파묻혀 고요에 잠길 때, 돌같이 딱딱해진 감각이 아가의 살 같이 연해질 때, 그 흐름은 살며시, 때론 격하게 얼굴을 내민다.
어두운 흐름도 있고, 밝은 흐름도 있다. 어지러운 흐름도 있고, 평화로운 흐름도 있다. 앞 것은 마성적이고, 뒷 것은 신성하다. 마성적 흐름은 욕망을 부추겨 눈을 멀게 하고, 신성한 흐름은 영성을 일깨워 눈을 뜨게 한다. 마성적 흐름이 혼돈과 공허와 어둠의 현실을 조장한다면, 신성한 흐름은 질서와 충만과 빛의 현실을 창조한다. 마성적 흐름이 악마의 현실을 퍼뜨린다면, 신성한 흐름은 하나님의 현실을 확장한다. 악마의 현실이 저주스러운 삶이라면, 하나님의 현실은 은총 가득한 삶이다.
마성적 흐름과 신성한 흐름, 악마의 현실과 하나님의 현실, 이 둘을 분별하는 것이 삶의 지혜다. 그래야 삶의 소중한 시간을 소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물론 우리는 더러 신성한 흐름을 따라 흘러갈 때도 있다. 그럴 때 삶은 의미와 보람으로 빛난다. 하지만 마성적 흐름에 휘말려 삶을 파괴할 때가 많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면서 그런 모습을 자각하면 참 괴롭다.
신성한 흐름에 나를 온전히 맡겨 그 흐름과 함께 흘러가는 것이 삶을 아름답게 빚는 비결이다. 신성한 흐름에 나를 맡기면 마성적인 흐름이 멈춘다. 아니, 멈춘다기보다 변형된다. 신성한 흐름에 나를 맡기면 욕망의 거센 압력이 거룩한 갈망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신성한 흐름을 자각하는 여러 방법이 있다. 나의 경우, 음악이 그런 역할을 한다.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때 그런 경험을 종종하곤 했다. 그래서 젊은 시절엔 수업보다 음악감상실에 틀어박혀 있었던 적이 많았다. 종교음악도 좋지만, 현대음악도 좋다. 현대음악의 난해함을 따라가다 보면 정신이 고양된다. 윤이상의 음악이 그렇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 비극적인 그의 생애를 관통하는 어떤 신성한 흐름이 느껴진다. 요즘은 에스토니아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의 음악을 많이 듣는다.
그림도 삶의 신성한 흐름을 드러내는 훌륭한 매개체다. 예를 들면 샤갈의 작품들. 초현실적인 이미지와 강렬한 색채로 그려진 〈나와 마을〉을 보자. 거대한 소의 얼굴과 사람의 얼굴이 서로 바라보고 있다. 이 둘은 단순히 동물과 사람, 먹거리와 육식종(肉食種)이 아니다. 생명과 생명의 대등한 응시이며, 그러한 응시 속에서 어떤 신성한 것이 흐른다. 그래서 이 둘은 서로를 보며 웃고 있다. 나는 예언자 이사야의 새 하늘과 새 땅, 그 평화의 나라에 대한 비전을 떠올린다. “암소와 곰이 서로 벗이 되며…”(사 11:7)
음악이나 그림뿐 아니라 삶의 신성한 흐름을 알아차리는 데는 독서도 좋고, 산책도 좋다. 등산은 신성한 흐름을 알아차리기에 아주 좋은 활동이다. 요즘 유행하는 명상도 신성한 흐름을 자각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명상하는 동안 마성적 흐름에서 분출하는 욕망과 감정, 사념이 정화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방법들은 일시적이다. 신성한 흐름은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으니까. 영적 감각이 웬만큼 깨어있지 않으면 아무리 음악을 듣고, 독서를 하고, 그림을 감상해도 신성한 흐름을 느낄 수 없다. 잠시 느꼈다가도 쉬 망각한다. 이때 신성한 흐름을 느끼게 했던 행위들은 그 흐름에서 분리되어, 그 자체의 의미에 갇히고 만다.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은 다독가 또는 독서광임을 자랑하고,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은 오디오 마니아임을 뽐내거나 레코드 콜렉션을 자랑한다. 등산도 정복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변질되고, 명상도 한 철 유행으로 소비될 뿐이다.
신성한 흐름을 자각하는 결정적인 방법이 있다. 삶의 신성한 흐름(하나님의 현실)을 볼 수 있게 하고, 만질 수 있게 하면 된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언제 어디서나 신성한 흐름을 자각하고 하나님의 현실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 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더는 삶을 삼키지 못할 것이며, 삶은 질서와 충만과 빛으로 풍요로울 것이다. 아, 마침내 삶의 저주는 삶의 은총으로 바뀔 것이다. 시편 시인의 노래는 나의 노래가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내 통곡을 기쁨의 춤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시 30:11)
그런데 그런 일이 가능할까? 하나님의 현실을 보고 만지는 일이 가능할까? 아니, 가능한지를 따지기 전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어떨까? 그것도 아주 오래전, 2천 년 전에. 눈이 번쩍 떠지지 않을까? 귀를 쫑긋 세우게 되지 않을까? 가슴은 뜨겁게 달아오르지 않을까?
2024년 성탄절을 맞이하는 나의 눈이, 나의 귀가, 나의 가슴이 그렇다.
아, 예수가 그런 분이었구나!
예수, 그는 누구인가?
아가의 몸으로 태어난 삶의 신성한 흐름이다. 물질을 입은 하나님의 현실이다. 이 아가 예수로 인해 인류는 신성한 흐름을 볼 수 있게 됐다. 더 나아가 예수는 하나님의 현실이 인간의 살(肉)로 나타난 존재다. 예수로 인해 인류는 하나님의 현실을 만질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예수를 보면 신성한 흐름이 보이고, 하나님의 현실이 만져진다. 보이지 않아 신성한 흐름을 잊어버리는 것, 만질 수 없어 하나님의 현실을 망각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하다.
이게 기독교다. 강생의 기적이며, 성육신의 신비이다. 하여, 나는 날마다 강생의 신비 속에서 살아간다. 성육신의 기적을 경험한다. 어떻게? 간단하다. 구유의 예수와 함께 웃고 십자가의 예수와 함께 아파한다. 에고가 깨지고 거짓자아가 죽는 아픔.
아, 그리고 성만찬에서 그 살을 만진다. 심지어 먹는다. 그는 소화되고 해체되어 내 몸 곳곳에 스며든다. 혈관에 세포에 신경조직에. 시나브로 마성적 삶의 흐름은 신성한 흐름으로 바뀌며, 악마의 현실은 하나님의 현실로 변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내 몸에 임한다. 그 흐름, 그 현실, 그 나라에서 나는 날마다 부활한다.
심리현실의 악취는 영성현실의 향기에 밀려나고, 영성현실의 향기가 스민 생활현실에선 하나님의 현실이 윤슬처럼 반짝인다. 빛이 입자와 파동으로 온 누리에 퍼지듯 하나님의 현실이 생활현실 전체에 퍼져나간다. 삶은 저주의 옷을 벗고 은총의 옷을 입는다. 나는 노래한다.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기쁨의 나들이옷을 갈아입히셨습니다.”
심리현실의 악취는 영성현실의 향기에 밀려나고, 영성현실의 향기가 스민 생활현실에선 하나님의 현실이 윤슬처럼 반짝인다.
큰 일!
우리 말에서 “큰 일”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부정적 의미로도 긍정적 의미로도 사용된다. “큰 일 났어! 계엄령이 선포됐대!” 이것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 경우다. “근데 국회에서 계엄령 해제 결의안을 통과시켰대.” “그래? 국회가 큰 일 했네!” 이것은 긍정적으로 의미로 사용된 경우다.
그런데 긍정적인 정도가 아니라 경이로울 정도로 큰 일이 있다.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릴 정도로[驚天動地] 큰 일이다. 그것은 지고・지엄하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그것도 호화로운 왕궁이 아니라 짐승 먹이통에서, 그것도 근엄하고 엄숙한 얼굴이 아니라 방긋 웃는 아가의 모습으로 태어났다는 소식이다.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 들을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던 삶의 신성한 흐름, 저 하나님의 현실을 이제 보고, 듣고, 만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눈으로 볼 수 없었고, 귀로 들을 수 없었고, 손으로 만질 수 없었던 신성한 흐름, 저 하나님의 현실을 보고 듣고 만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여, 나는 성탄절 아침, 아기 예수께 무릎을 꿇는다. 그의 눈동자를 보면서 하나님을 보며, 그의 살을 만지면서 하나님의 살을 만진다. 그 아기를 보고, 그 아기를 만질 때 삶의 신성한 흐름이 그토록 생생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현실이 그토록 구체적일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토록 가까울 수가 없다.
마음에 충동이 인다. 아기 예수와 함께 그 흐름에 나를 온통 맡기고 싶다는 충동이. 그 흐름과 함께 하염없이 흘러가고 싶다는 충동이. 흘러, 흘러, 흘러 신성의 대양에 푹 잠기고 싶다는 충동이.
그런 소망을 품기만 했는데도, 벌써 내 삶의 슬픔이 미소 짓기 시작한다. 내 마음의 어둠이 밝아지기 시작한다. 내 생의 외로웠던 세월들이 위로 받기 시작한다. 나를 오염시키고 타락시켰던 마성적 흐름이 나를 정화하고 치유하는 신성한 흐름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래서 내 입에서는 노래가 나온다. “주님께서 큰일을 하셨을 때에 우리는(나는) 얼마나 기뻤던가!”(시 126:3)
예수, 그는 누구인가?
“아, 큰 일 이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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