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대림절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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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1회 작성일 24-12-24 16:06본문
태중의 아이가 기뻐서 뛰놀았습니다.
(눅 1:44)
군중은 잠들기도 하고 깨어나기도 한다. 군중이 잠들 때와 깨어날 때 벌어지는 현실은 아주 다르다. 잠들 때는 무의식과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 이기주의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소아(小兒)의 노예가 된다. 비판적 사고가 마비되기 때문에 억압적인 권력과 불의한 질서에 순응한다. 사회 현실에 대한 무관심이 역병처럼 퍼진다. 이러한 무관심을 이용해 권력층이나 지배계층은 불의한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한다. 불의와 부패가 만연하며, 구조적 불평등이 심화된다. 의지는 맹목적 충동으로 타락하며, 이성은 이기적 잔꾀로 전락한다. 잠든 군중은 무지와 두려움, 순응과 맹종 속에서 현실에 안주한다. 거짓자아의 전형적인 행태다.
하지만, 군중이 깨어나면 비판의식도 함께 깨어난다. 불의한 권력의 부조리와 불공정에 대한 의식이 확산된다. 각성한 군중은 진실을 통찰하고 불의에 맞서기 시작한다. 이성은 정의, 공정, 민주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인식하며, 의지는 그러한 가치를 성취하기 위한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열정으로 작용한다. 사익보다 공익을 앞세우며, 연대와 협력을 통해 공동체의 변화를 이루어낸다. 이렇게 역사 변혁의 창조적 주체가 된다. 참자아의 전형적인 현상이다.
이성은 정의, 공정, 민주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인식하며, 의지는 그러한 가치를 성취하기 위한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열정으로 작용한다. 사익보다 공익을 앞세우며, 연대와 협력을 통해 공동체의 변화를 이루어낸다. 이렇게 역사 변혁의 창조적 주체가 된다. 참자아의 전형적인 현상이다.
지난 열흘 남짓 대한민국의 광장들에서 일어난 일에서 이러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았다. 맨몸으로 장갑차를 막아서는 용기가 그렇고, 맨손으로 총부리를 휘어잡는 담대함도 그렇다. 선결제 문화가 그렇고, 집회 장소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 그렇다. 이처럼 군중이 깨어나면 정의롭고 아름다운 질서가 형성된다. 한마디로 말해 군중이 잠들면 거짓자아의 정치가 독버섯처럼 번지고, 군중이 깨어나면 참자아의 정치가 아침 햇살처럼 퍼진다.
성경은 아주 훌륭한 정치학 교과서다. 거짓자아의 정치학과 참자아의 정치학을 명료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거짓자아의 정치는 처음엔 그럴듯해 보여도 나중에는 비참하게 끝난다. 반대로 참자아의 정치는 고난과 역경을 겪지만, 결국에는 공동체를 굳건히 세운다. 거짓자아 정치학의 전형적인 인물은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었던 사울왕이며, 참자아 정치학의 모범적인 사례는 다윗왕이다.
거짓자아의 정치학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은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 없었다”(삼상 9:2)는 평을 받을 정도로 매력이 있었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예언을 하기도 했다.(삼상 10:10) 그는 겸손하기까지 했다. 왕이 되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 사람이 아닙니까?”(삼상 9:21)하고 사양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가 선택한 거짓자아의 정치는 그의 몰락을 재촉했다.
첫째, 불안의 정치. 사울은 블레셋 군대와의 전투를 앞두고 길갈에 진을 치고 있었다. 사울은 사무엘이 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주기를 기다렸다. 기대했던 시각에 사무엘이 도착하지 않자, 자신이 번제를 드려버렸다. 그 이유는 겁먹은 군인들이 “굴이나 숲이나 바위틈이나 구덩이나 웅덩이 속으로 기어들어가 숨었고”(삼상 13:7) “모두 벌벌 떨고 있었“으며, 백성은 사울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삼상 13:11) 사울은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 되지 못할 것입니다”(삼상 13:14)라는 경고를 받았고, 더욱 깊은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린다.
둘째, 반율법의 정치. 사울이 사무엘 대신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제사장 고유의 권한을 침범했다는 뜻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예언자요 제사장이었다. 율법에 따르면,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나(신 18:20)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대신 하는 사람은 죽임을 당했다.(민 18:7)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통치 규범인 율법(요즘으로 치면 헌법)의 대리자였다. 하지만 백성들이 지지를 철회하자 사울은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신성한 율법을 어긴 것이다. 이러한 초법적 행위는 왕이라도 해서는 안 되는 대죄였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통치 규범인 율법(요즘으로 치면 헌법)의 대리자였다. 하지만 백성들이 지지를 철회하자 사울은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신성한 율법을 어긴 것이다. 이러한 초법적 행위는 왕이라도 해서는 안 되는 대죄였다.
셋째, 욕망의 정치. 아말렉과 싸울 때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전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그러나 사울은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서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만 골라서 진멸하였고, 가장 좋은 것들은 전리품으로 취했다. 그가 따른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욕망이었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다.(삼상 15:11) 사울의 욕망의 정치는 리더십을 상실하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넷째, 거짓말 정치.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사무엘은 “괴로운 마음으로 밤새도록 주님께 부르짖고” 나서 사울을 만났는데, 사울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나는 주님의 명령대로 하였습니다.”(삼상 15:13) 사무엘이 양 떼의 소리와 소 떼의 소리가 들린다고 하자 이렇게 둘러댔다.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가장 좋은 것들을 남겼다가 끌어왔습니다.” 사무엘이 거짓말하지 말라고 호통쳐도 사울은 계속 우겼다. “나는 주님께 순종하였습니다.” 이때 사무엘이 한 말이 저 유명한 말이다.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삼상 15:22)
다섯째, 질투의 정치. 다윗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개선할 때 여인들은 소구와 꽹과리를 들고나와 춤추며 노래했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네!” 사울은 몹시 언짢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올랐다.”(삼상 18:8)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기 시작하였다. 사울은 다윗을 정적으로 여겼고, 끊임없이 살해하려고 했다. 이러한 사울의 질투는 그의 정신적・정치적 몰락을 앞당기고 말았다.
여섯째, 주술 정치. 사무엘이 죽고 난 다음에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또 전쟁을 벌였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울이 하나님께 전쟁의 결과를 물었다. 그러나 아무 응답도 듣지 못하자 사울은 죽은 혼령을 불러내는 엔돌의 여자 무당에게 도움을 청했다.(삼상 28:7) 이것은 두려움을 주술로 해결하려는 미신적 행위였다.
하나님은 거짓자아의 정치에 집착하는 사울을 버리셨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도 사울은 회개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백성들에게도 버림받았다. 사울은 악령에 시달렸고, 극심한 불안과 극도의 분노에 휩싸였다. 정적 다윗을 향한 질투는 그의 정신을 황폐하게 했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분열로 몰아갔다. 급기야 사울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길보아 산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삼상 31:4)
참자아의 정치학
사울이 거짓자아 정치의 전형이라면, 그의 정적이었던 다윗은 참자아 정치의 모범이다. 다윗은 실패한 적도 있었으나, 깊은 성찰과 반성을 통해 참자아의 정치를 구현할 수 있었다.
첫째, 하나님 중심의 정치.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던 시절부터 왕으로서 통치할 때까지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했다. 그는 늘 향심(向心)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을 때도, “내가 감히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임금님을 치겠느냐?”(삼상 24:6)라고 하면서 자신의 권력욕을 최대한 억제했다. 질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모습이다.
둘째, 민중을 위한 정치.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동안에도 늘 민중과 함께했다. “압제를 받는 사람들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모두 다윗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삼상 22:2) 이들은 불의한 권력의 정치적 억압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이었고, 지배계급에 의해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사람들이었으며, 불공정한 권력자로부터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겪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다윗은 추종자들을 정치적 목표를 위해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람들과 고통과 희망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게 “아둘람 공동체”였다. 그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의 선구자였다.
다윗은 추종자들을 정치적 목표를 위해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람들과 고통과 희망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게 “아둘람 공동체”였다. 그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의 선구자였다.
셋째, 진리와 양심의 정치. 다윗은 왕위에 오른 후 오벳에돔의 집에 있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가 들어 있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상징하며, 아론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위와 인도를 상징하며, 만나는 하나님의 공급과 돌봄을 상징하는 성사였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필요한 최고법(헌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약궤를 중시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즉 양심이 증거하는 보편적인 가치(진리)에 따라 정치를 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넷째, 회개와 성찰의 정치. 물론 다윗에게도 실패가 있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인 중대한 죄를 범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그는 즉시 회개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삼하 12:13)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통치자, 자신의 오류와 잘못을 성찰하지 않는 통치자는 아집과 교만에 빠진다. 이때 국민은 크게 실망한다. 참자아의 정치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성찰 능력이다. 지도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성찰하고 인정할 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국민들은 성찰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지도자를 신뢰한다.
다섯째, 겸손과 인간다움의 정치. 다윗의 겸손은 삶의 여러 순간에 두드러진다. 엔게디와 십 황무지에서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해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그를 죽이지 않았다. 자신이 심판의 주체가 되지 않겠다는 겸손한 태도다. 죄를 지적받았을 때도 왕으로서 오만하게 부정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했다. 겸손의 극치다.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기고 난 후 다윗은 백성들 앞에서 “맨살을 드러내고” 열정적으로 춤을 추었다. 이 모습을 아내 미갈이 보고 비난했을 때, 다윗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소. 나는 주님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삼하 6:21) 지위와 체통에 얽매이지 않는 소탈한 인간의 모습이다.
여섯째, 용기와 솔선수범의 정치. 거짓자아의 정치는 위기 상황에서 무책임하며 무능하다. 정책의 실패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 아랫사람이나 외부 요인에 책임을 전가한다. 다윗은 그러지 않았다.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그 누구보다 용기 있게 앞장섰다.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모욕하며 위협했을 때 사울은 두려워하면 움츠러들었지만, 소년 다윗은 거인 골리앗 앞에 용기 있게 나섰다.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하나님 곧 만군의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삼상 17:45) 위기를 직면하여 책임지는 용기야말로 참자아 정치의 꽃이다.
참자아 정치학의 완성
대림절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린다. 예수님은 다윗의 계보에서 태어나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다윗이 시작한 참자아의 정치를 완성하신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심으로써(막 1:15) “하나님 중심의 정치”를 완성하신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면서(마 12:20) “민중과 연대하는 정치”를 완성하신다. 말씀으로 성육신하시고 스스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진리와 양심의 정치”를 완성하신다. 죄가 없으니 회개조차 필요하지 않았으나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회개와 성찰의 정치”를 완성하신다. 하나님과 동등하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심으로써(빌 2:7) “겸손과 인간다움의 정치”를 완성하신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용기와 솔선수범의 정치”를 완성하신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이 시작한 새로운 정치가 있다.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의 정치”다. 마리아를 만났을 때 엘리사벳은 태중의 아이가 “기뻐서 뛰노는”(눅 1:44) 것을 느꼈다. 두 여자의 만남은 엄숙하지도 경건하지도 않다. 오히려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태중의 아가들이 서로 알아보며 기뻐하는 모습은 유머스럽기까지하다. 그렇다. 예수님이 시작하신 새로운 정치의 키워드는 기쁨과 유머다. 그게 하나님 나라다. 그곳은, 또는 그 상태는 혼인잔치처럼 기쁨이 가득하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과 즐거움의 정치는 우리가 서로에게 있는 참자아를 알아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요한이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예수를 알아본 것처럼! 여기에서 대림절의 정치학, 곧 참자아의 정치학이 싹튼다.
- 이민재
(눅 1:44)
군중은 잠들기도 하고 깨어나기도 한다. 군중이 잠들 때와 깨어날 때 벌어지는 현실은 아주 다르다. 잠들 때는 무의식과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 이기주의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소아(小兒)의 노예가 된다. 비판적 사고가 마비되기 때문에 억압적인 권력과 불의한 질서에 순응한다. 사회 현실에 대한 무관심이 역병처럼 퍼진다. 이러한 무관심을 이용해 권력층이나 지배계층은 불의한 질서를 더욱 공고히 한다. 불의와 부패가 만연하며, 구조적 불평등이 심화된다. 의지는 맹목적 충동으로 타락하며, 이성은 이기적 잔꾀로 전락한다. 잠든 군중은 무지와 두려움, 순응과 맹종 속에서 현실에 안주한다. 거짓자아의 전형적인 행태다.
하지만, 군중이 깨어나면 비판의식도 함께 깨어난다. 불의한 권력의 부조리와 불공정에 대한 의식이 확산된다. 각성한 군중은 진실을 통찰하고 불의에 맞서기 시작한다. 이성은 정의, 공정, 민주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인식하며, 의지는 그러한 가치를 성취하기 위한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열정으로 작용한다. 사익보다 공익을 앞세우며, 연대와 협력을 통해 공동체의 변화를 이루어낸다. 이렇게 역사 변혁의 창조적 주체가 된다. 참자아의 전형적인 현상이다.
이성은 정의, 공정, 민주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인식하며, 의지는 그러한 가치를 성취하기 위한 능동적이며 창조적인 열정으로 작용한다. 사익보다 공익을 앞세우며, 연대와 협력을 통해 공동체의 변화를 이루어낸다. 이렇게 역사 변혁의 창조적 주체가 된다. 참자아의 전형적인 현상이다.
지난 열흘 남짓 대한민국의 광장들에서 일어난 일에서 이러한 모습을 생생하게 보았다. 맨몸으로 장갑차를 막아서는 용기가 그렇고, 맨손으로 총부리를 휘어잡는 담대함도 그렇다. 선결제 문화가 그렇고, 집회 장소의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 그렇다. 이처럼 군중이 깨어나면 정의롭고 아름다운 질서가 형성된다. 한마디로 말해 군중이 잠들면 거짓자아의 정치가 독버섯처럼 번지고, 군중이 깨어나면 참자아의 정치가 아침 햇살처럼 퍼진다.
성경은 아주 훌륭한 정치학 교과서다. 거짓자아의 정치학과 참자아의 정치학을 명료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거짓자아의 정치는 처음엔 그럴듯해 보여도 나중에는 비참하게 끝난다. 반대로 참자아의 정치는 고난과 역경을 겪지만, 결국에는 공동체를 굳건히 세운다. 거짓자아 정치학의 전형적인 인물은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이었던 사울왕이며, 참자아 정치학의 모범적인 사례는 다윗왕이다.
거짓자아의 정치학
이스라엘의 초대 임금 사울은 꽤 괜찮은 사람이었다. “그보다 더 잘생긴 사람이 없었다”(삼상 9:2)는 평을 받을 정도로 매력이 있었고,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예언을 하기도 했다.(삼상 10:10) 그는 겸손하기까지 했다. 왕이 되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이스라엘 지파들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 사람이 아닙니까?”(삼상 9:21)하고 사양했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가 선택한 거짓자아의 정치는 그의 몰락을 재촉했다.
첫째, 불안의 정치. 사울은 블레셋 군대와의 전투를 앞두고 길갈에 진을 치고 있었다. 사울은 사무엘이 와서 번제와 화목제를 드려주기를 기다렸다. 기대했던 시각에 사무엘이 도착하지 않자, 자신이 번제를 드려버렸다. 그 이유는 겁먹은 군인들이 “굴이나 숲이나 바위틈이나 구덩이나 웅덩이 속으로 기어들어가 숨었고”(삼상 13:7) “모두 벌벌 떨고 있었“으며, 백성은 사울왕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삼상 13:11) 사울은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사울은 사무엘로부터 “임금님의 왕조가 더 이상 계속 되지 못할 것입니다”(삼상 13:14)라는 경고를 받았고, 더욱 깊은 불안과 두려움에 시달린다.
둘째, 반율법의 정치. 사울이 사무엘 대신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제사장 고유의 권한을 침범했다는 뜻이다. 사무엘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예언자요 제사장이었다. 율법에 따르면,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나(신 18:20) 제사장만이 할 수 있는 일을 대신 하는 사람은 죽임을 당했다.(민 18:7)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통치 규범인 율법(요즘으로 치면 헌법)의 대리자였다. 하지만 백성들이 지지를 철회하자 사울은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신성한 율법을 어긴 것이다. 이러한 초법적 행위는 왕이라도 해서는 안 되는 대죄였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통치 규범인 율법(요즘으로 치면 헌법)의 대리자였다. 하지만 백성들이 지지를 철회하자 사울은 상황을 통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빠져 신성한 율법을 어긴 것이다. 이러한 초법적 행위는 왕이라도 해서는 안 되는 대죄였다.
셋째, 욕망의 정치. 아말렉과 싸울 때 하나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전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리셨다. 그러나 사울은 양 떼와 소 떼 가운데서 쓸모없고 값없는 것들만 골라서 진멸하였고, 가장 좋은 것들은 전리품으로 취했다. 그가 따른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욕망이었다. 하나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것을 후회하셨다.(삼상 15:11) 사울의 욕망의 정치는 리더십을 상실하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넷째, 거짓말 정치.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사무엘은 “괴로운 마음으로 밤새도록 주님께 부르짖고” 나서 사울을 만났는데, 사울은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나는 주님의 명령대로 하였습니다.”(삼상 15:13) 사무엘이 양 떼의 소리와 소 떼의 소리가 들린다고 하자 이렇게 둘러댔다. “예언자께서 섬기시는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가장 좋은 것들을 남겼다가 끌어왔습니다.” 사무엘이 거짓말하지 말라고 호통쳐도 사울은 계속 우겼다. “나는 주님께 순종하였습니다.” 이때 사무엘이 한 말이 저 유명한 말이다. “잘 들으십시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습니다.”(삼상 15:22)
다섯째, 질투의 정치. 다윗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개선할 때 여인들은 소구와 꽹과리를 들고나와 춤추며 노래했다. “사울은 수천 명을 죽이고, 다윗은 수만 명을 죽였네!” 사울은 몹시 언짢았다.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어올랐다.”(삼상 18:8)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하기 시작하였다. 사울은 다윗을 정적으로 여겼고, 끊임없이 살해하려고 했다. 이러한 사울의 질투는 그의 정신적・정치적 몰락을 앞당기고 말았다.
여섯째, 주술 정치. 사무엘이 죽고 난 다음에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또 전쟁을 벌였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울이 하나님께 전쟁의 결과를 물었다. 그러나 아무 응답도 듣지 못하자 사울은 죽은 혼령을 불러내는 엔돌의 여자 무당에게 도움을 청했다.(삼상 28:7) 이것은 두려움을 주술로 해결하려는 미신적 행위였다.
하나님은 거짓자아의 정치에 집착하는 사울을 버리셨다. 하지만 그것을 알고도 사울은 회개하지 않았다. 마침내 그는 백성들에게도 버림받았다. 사울은 악령에 시달렸고, 극심한 불안과 극도의 분노에 휩싸였다. 정적 다윗을 향한 질투는 그의 정신을 황폐하게 했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분열로 몰아갔다. 급기야 사울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후 길보아 산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것이다.(삼상 31:4)
참자아의 정치학
사울이 거짓자아 정치의 전형이라면, 그의 정적이었던 다윗은 참자아 정치의 모범이다. 다윗은 실패한 적도 있었으나, 깊은 성찰과 반성을 통해 참자아의 정치를 구현할 수 있었다.
첫째, 하나님 중심의 정치.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던 시절부터 왕으로서 통치할 때까지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했다. 그는 늘 향심(向心)하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을 때도, “내가 감히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임금님을 치겠느냐?”(삼상 24:6)라고 하면서 자신의 권력욕을 최대한 억제했다. 질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다윗을 죽이려고 했던 사울과 극명하게 대조되는 모습이다.
둘째, 민중을 위한 정치.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동안에도 늘 민중과 함께했다. “압제를 받는 사람들과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과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 모두 다윗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삼상 22:2) 이들은 불의한 권력의 정치적 억압으로 고통받던 사람들이었고, 지배계급에 의해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사람들이었으며, 불공정한 권력자로부터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겪은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다윗은 추종자들을 정치적 목표를 위해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람들과 고통과 희망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게 “아둘람 공동체”였다. 그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의 선구자였다.
다윗은 추종자들을 정치적 목표를 위해 이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람들과 고통과 희망을 함께 나누는 공동체를 만들었다. 그게 “아둘람 공동체”였다. 그는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의 선구자였다.
셋째, 진리와 양심의 정치. 다윗은 왕위에 오른 후 오벳에돔의 집에 있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는 일에 전력을 다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이 새겨진 두 돌판과 아론의 싹 난 지팡이,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가 들어 있었다. 십계명은 하나님의 말씀과 언약을 상징하며, 아론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권위와 인도를 상징하며, 만나는 하나님의 공급과 돌봄을 상징하는 성사였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이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필요한 최고법(헌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약궤를 중시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법에 따라, 즉 양심이 증거하는 보편적인 가치(진리)에 따라 정치를 하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넷째, 회개와 성찰의 정치. 물론 다윗에게도 실패가 있었다.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우리야를 죽인 중대한 죄를 범했다. 그러나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그는 즉시 회개했다.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습니다.”(삼하 12:13) 죄를 짓고도 회개하지 않는 통치자, 자신의 오류와 잘못을 성찰하지 않는 통치자는 아집과 교만에 빠진다. 이때 국민은 크게 실망한다. 참자아의 정치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성찰 능력이다. 지도자도 인간이기 때문에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을 성찰하고 인정할 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국민들은 성찰하고,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줄 아는 지도자를 신뢰한다.
다섯째, 겸손과 인간다움의 정치. 다윗의 겸손은 삶의 여러 순간에 두드러진다. 엔게디와 십 황무지에서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해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그를 죽이지 않았다. 자신이 심판의 주체가 되지 않겠다는 겸손한 태도다. 죄를 지적받았을 때도 왕으로서 오만하게 부정하지 않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했다. 겸손의 극치다.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기고 난 후 다윗은 백성들 앞에서 “맨살을 드러내고” 열정적으로 춤을 추었다. 이 모습을 아내 미갈이 보고 비난했을 때, 다윗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렇소. 나는 주님 앞에서 그렇게 춤을 추었소.”(삼하 6:21) 지위와 체통에 얽매이지 않는 소탈한 인간의 모습이다.
여섯째, 용기와 솔선수범의 정치. 거짓자아의 정치는 위기 상황에서 무책임하며 무능하다. 정책의 실패에 대해 책임지지 않고, 아랫사람이나 외부 요인에 책임을 전가한다. 다윗은 그러지 않았다.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그 누구보다 용기 있게 앞장섰다.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모욕하며 위협했을 때 사울은 두려워하면 움츠러들었지만, 소년 다윗은 거인 골리앗 앞에 용기 있게 나섰다. “너는 칼을 차고 창을 메고 투창을 들고 나에게로 나왔으나, 나는 하나님 곧 만군의 주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너에게로 나왔다.”(삼상 17:45) 위기를 직면하여 책임지는 용기야말로 참자아 정치의 꽃이다.
참자아 정치학의 완성
대림절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린다. 예수님은 다윗의 계보에서 태어나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다윗이 시작한 참자아의 정치를 완성하신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심으로써(막 1:15) “하나님 중심의 정치”를 완성하신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면서(마 12:20) “민중과 연대하는 정치”를 완성하신다. 말씀으로 성육신하시고 스스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 14:6)이라고 선언하심으로써 “진리와 양심의 정치”를 완성하신다. 죄가 없으니 회개조차 필요하지 않았으나 인간의 죄를 대신 짊어지심으로써 “회개와 성찰의 정치”를 완성하신다. 하나님과 동등하지만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취하심으로써(빌 2:7) “겸손과 인간다움의 정치”를 완성하신다.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용기와 솔선수범의 정치”를 완성하신다.
이뿐 아니라 예수님이 시작한 새로운 정치가 있다.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의 정치”다. 마리아를 만났을 때 엘리사벳은 태중의 아이가 “기뻐서 뛰노는”(눅 1:44) 것을 느꼈다. 두 여자의 만남은 엄숙하지도 경건하지도 않다. 오히려 즐거움으로 가득하다. 태중의 아가들이 서로 알아보며 기뻐하는 모습은 유머스럽기까지하다. 그렇다. 예수님이 시작하신 새로운 정치의 키워드는 기쁨과 유머다. 그게 하나님 나라다. 그곳은, 또는 그 상태는 혼인잔치처럼 기쁨이 가득하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과 즐거움의 정치는 우리가 서로에게 있는 참자아를 알아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요한이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예수를 알아본 것처럼! 여기에서 대림절의 정치학, 곧 참자아의 정치학이 싹튼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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