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대림절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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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7회 작성일 24-12-16 19:26본문
도끼를 이미 나무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눅 3:9)
도성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습 3:14)
“도끼를 이미 나무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를 향해 한 말이다. 도끼에서 풍기는 살벌한 이미지는 긴급한 심판을 상징한다. 그런데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 나뭇가지가 아니라 뿌리부터 찍어버린다는 것이니 심판이 그만큼 근본적이고 철저하다는 뜻이리라.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면, 슬퍼해야 할까, 기뻐해야 할까? 어떤 사람은 슬퍼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기뻐할 것이다. 심판을 받을 권력은 슬플 것이고, 권력의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은 기쁠 것이다. 체제 유지에 관심 있는 권력자나 부와 지위에 집착하는 기득권자들은 슬플 것이고, 불공정하고 광포한 권력의 종말을 바라는 사람들은 기쁠 것이다. 계엄을 일으켜 헌정질서를 교란한 사람이나 동조자들은 슬플 것이고, 그것을 온몸을 막으며 민주주의를 지킨 시민들은 기쁠 것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도끼를 이미 나무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이 섬뜩한 말을 하기 전에 요한은 무리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악담도 퍼붓는다.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기에 그런 것일까? 누가가 “무리”라고 뭉뚱그린 대목을 마태는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마 3:7)라고 서술한다. 무리 중에는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이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악담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을 지적하면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마 23:33)라고 저주를 퍼부은 것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바리새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은 법 해석과 적용의 전문가였다. 그들은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율법의 참된 정신인 사랑과 정의는 외면했다. 이런 위선적인 태도는 요즘의 법 전문가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물론 일부이긴 하지만, 그들은 법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 자기 이익에 맞게 비틀고 왜곡한다. 약자에게는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다. 어제(12.14) 탄핵당한 권력자가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에겐 가혹했고, 자기 가족의 비리엔 너그러웠다. 아내가 “박절하지 못해” 명품백을 어쩔 수 없이 받았다고 둘러댈 정도로.
사두개인은 사제 그룹이었다. 성전에서 제사와 종교의식을 주관하면서 부를 독점한 상류층이다. 그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로마 정권과 결탁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불의한 권력에 충성하고 아부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류 보수 대형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불의한 정권과 한통속이 되어 혐오와 배제의 정치에 집착하면서 포용과 화해의 복음을 철저하게 외면한다. 거짓자아의 전형적인 행태다.
어쨌거나 그런 사람들이 세례를 받겠다고 요한을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왜 세례받으려고 했을까?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닥쳐올 진노를 피하려고!” 그들에게 세례는 진노와 불운을 막아주는 부적 같은 것이었다. 그들에게 세례는 종교적 보험 같은 것이었으며,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그들에게 세례는 진노와 불운을 막아주는 부적 같은 것이었다. 그들에게 세례는 종교적 보험 같은 것이었으며,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요즘 한국교회에도 부적 신앙이 만연해 있다. 믿음이 천당 가는 부적이나 행운을 보장해주는 주술, 성공과 축복을 보장해주는 도깨비방망이로 전락한 지는 오래됐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사영리는 구원의 자동판매기가 돼버렸다. 부적, 주술, 도깨비방망이, 자동판매기…. 아, 한국교회는 본회퍼가 말한 “값싼 은혜”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다. 진실을 향한 열망도, 죄의 자각에 대한 깊이도, 구원을 갈망하는 진지함도 없이.
요한이 생각하는 세례는 그런 게 아니었다. 세례에 대한 요한의 생각은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눅 3:8)라는 한 마디에 압축적으로 들어있다. 첫째, 세례란 회개다. 세례는 단순히 물로 씻는 외적 행위가 아니라는 뜻이다. 마음의 정화와 인격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둘째, 세례는 그것에 알맞은 열매를 맺을 때 완성된다. 옷이든 먹을 것이든 넉넉한 사람은 나눠주어야 한다. 정해진 것보다 세금을 더 많이 받아서는 안 된다. 이웃의 재산을 협박하거나 거짓 고소를 하거나 속여서 빼앗아서는 안 된다.(눅 3:10-14)
돌들로도
요한은 세례 받으러 자기에게 오는 무리에게 외쳤다.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하고 말하지 말아라.”(눅 3:8a)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근거로 자신들을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여겼다. 할례는 살에 새겨진 선민의 징표였다. 선민의식은 그처럼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런데 요한은 선민의식을 문제 삼는다. 유대인 특유의 특권의식에 도전한다. 요한 생각에 구원은 혈통이나 민족적 특권의식이 아니라 개인의 회개와 삶의 변화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특권의식은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무서운 질병이다. 대한민국도 다양한 특권의식이 얽히고설키면서 공동체를 병들게 하고 있다. 법률가들의 특권의식, 재벌들의 특권의식, 명문대 출신들의 특권의식, 상류층들의 특권의식, 도시인들의 특권의식, 젠더(가부장적) 특권의식 따위. 대형교회의 특권의식도 빼놓을 수 없다.
혈통에 대한 자부심과 선민이라는 특권의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요한은 단호하게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눅 3:8b) 돌들은 강가나 광야에 널려 있다. 돌들은 보석이 아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하찮은 것들이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돌들은 권력자도 부자도 식자(識者)도 아니다. 돌들은 배우지 못한 민초이며 가난한 민중이며 힘없는 무지렁이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신다.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든다는 말은 중의적(重義的)이다. 한편으로는, 특권의식에 젖어 있는 유대인을 돌처럼 하찮은 존재로 격하시킨다. 그들은 구원에서 배제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돌처럼 하찮은 사람들을 귀한 존재로 격상시킨다. 그들은 구원에 새롭게 편입된다.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든다는 말은 중의적(重義的)이다. 한편으로는, 특권의식에 젖어 있는 유대인을 돌처럼 하찮은 존재로 격하시킨다. 그들은 구원에서 배제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돌처럼 하찮은 사람들을 귀한 존재로 격상시킨다. 그들은 구원에 새롭게 편입된다.
이뿐 아니라, 돌들은 이방인을 뜻하기도 한다. 이방인들은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배제된 사람들이었다. 할례와 정결 예식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들이었다. 다신교적 신앙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우상숭배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식사도 하지 않았다. 성전에서도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방인의 뜰은 별도로 지정되어 있다. 이방인들은 개 취급받기도 했다.(마 15:26) 그런데 요한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즉 구원받는다고 선언한다. 유대인들이 들으면 까무러칠 선포다.
광장의 돌들
지난 열흘 남짓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광장들에서는 이러한 “돌들”이 소리 질렀다. 권력자도 아니고 부자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민중들이, 무지렁이들이. 아, 젊고 발랄한 돌들이. 그들은 나라가 가장 어두울 때 가장 밝은 것을 들고 광장에 나왔고, 함성으로 뭉쳤다. 돌들의 함성이 교만한 권력을 탄핵시켰다. 돌들의 함성이야말로 나무뿌리에 놓인 도끼였다. 그 도끼는 어떤 사람에겐 슬픈 일이었고, 어떤 사람에겐 기쁜 일이었다.
체제 유지에 관심 있는 권력자나 당리당략에 빠진 국회의원들과 정당에는 무서운 일이었고, 불공정하고 광포한 권력의 종말을 바랐던 사람에겐 즐거운 일이었다. 계엄을 선포하고 내란을 획책한 무리에겐 심판이었고, 그것을 막아낸 민중들과 민심에 귀 기울인 지도자들에겐 희망의 찬가였다.
법의 이름으로 불법을 자행하며 순진하고 약한 사람들 피눈물 흘리게 한 법꾸라지들에겐 하늘의 준엄한 심판이었고, 법 없이도 살아가는 무명의 민초들에겐 하늘의 기쁜 소식이었다. 값싼 은혜라는 부적으로 천당을 약속하고 권력을 누리고 부를 세습하는 종교 장사치들에겐 지옥의 함성이었고, 진실하고 진지하게 복음적 가치를 실천하려고 애쓰는 가난한 영혼들에겐 천국의 나팔소리였다.
아, 실망과 탄식 속에서도 자기 본분을 성실하게 다하며 꿋꿋이 대한민국을 지켜온 돌들의 함성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알리는 새 시대의 서곡이었다. 하여, 광장의 함성은 “네가 다시는 모욕을 받지 않게 하겠다”(습 3:18)는 하나님의 약속이, “내가 너희를 모든 민족 가운데서 칭송과 영예를 받게 하겠다”(습 3:19)는 하나님의 약속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하늘 소리였다.
우리는 요즘 광장과 국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똑똑히 보았다. 첫째, 하나님은 혼자 일하시지 않는다. 불의한 권력을 끌어내릴 때 하나님은 “돌들”을 통해 일하신다. 돌들이 소리지르게 하신다.(눅 19:40) 하나님은 돌들을 통해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를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눅 3:9) 그래서 민심을 천심이라 한다. 그렇기에 민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망한다. 민심여부(民心如斧)다. 민심은 도끼다. 민심을 거스르는 정권은 반드시 찍혀 버려진다. 군주민수(君舟民水)다.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민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망한다. 민심여부(民心如斧)다. 민심은 도끼다. 민심을 거스르는 정권은 반드시 찍혀 버려진다. 군주민수(君舟民水)다.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
둘째, 하나님은 일하실 때 먼저 참자아를 일깨우신다. 물론 거짓자아에 사로잡혀 집단적으로 욕망을 추구할 때 무리(대중)는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이때 하나님의 일은 방해받거나 지연된다. 그 결과 민생은 파탄 나고 백성은 도탄에 빠진다. 그런 아픈 역사적 경험이 우리에게는 있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는 대중이 참자아를 각성할 때다. 소아(小我)에서 해방되어 대아(大我)가 깨어날 때다. 사적 이익보다 공적 대의를 먼저 추구할 때다. 욕망보다 가치가 우선할 때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본래 그런 사람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처럼 소아에서 벗어나 대아를 각성한 사람이다. 거짓자아를 해체하고 참자아를 실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한국교회가 몰상식하다고 비난받는 이유는 참자아를 각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요, 거짓자아의 정치학 즉 욕망의 정치학을 탐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참자아를 각성해야 한다.
대림절의 기쁨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기간이다. 교회력에 따라 기독교회는 대림절 네 주간 동안 촛불을 밝힌다. 첫째 주에는 “희망의 촛불”을 밝힌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기대하며 기다린다. 둘째 주에는 “평화의 촛불”을 밝힌다.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할 것을 기대하며 준비한다. 넷째 주에는 “사랑의 촛불”을 밝힌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드러날 것을 기다린다.
그러면 셋째 주에는? “기쁨의 촛불”을 밝힌다! 그래서 셋째 주 성서일과 제1 독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도성 시온아, 노래하여라. 이스라엘아. 즐거이 외쳐라. 도성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습 3:14) 제2 독서는 이렇게 노래한다. “너희가 구원의 우물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을 것이다.”(사 12:3) 서신서는 이렇게 권한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빌 4:4) 대림절 셋째 주에 찬송가 100장은 이렇게 노래한다.
미리암과 여인들이 춤을 추며 노래하고
전쟁무기 멀리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네
마리아는 이웃들과 기도하며 노래하고
비천함을 높이셨던 하나님을 기뻐하네
오랫동안 기다려온 백성들이 노래하고
구원실현 약속하신 하나님을 기뻐하네
2024년 대림절 셋째 주(12.15)에 우리는 기뻐할 이유가 분명히 있다. 2024년 대림절 셋째 주에 대한민국은 기뻐하고 또 기뻐할 이유가 분명히 있다. 2024년 대림절 셋째 주에 대한민국을 살리려고 스스로 나무뿌리에 놓인 도끼가 된 돌들은 충분히 기뻐할 자격이 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처럼 생생하게 보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 이민재
(눅 3:9)
도성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
(습 3:14)
“도끼를 이미 나무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를 향해 한 말이다. 도끼에서 풍기는 살벌한 이미지는 긴급한 심판을 상징한다. 그런데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여 있다. 나뭇가지가 아니라 뿌리부터 찍어버린다는 것이니 심판이 그만큼 근본적이고 철저하다는 뜻이리라.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면, 슬퍼해야 할까, 기뻐해야 할까? 어떤 사람은 슬퍼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기뻐할 것이다. 심판을 받을 권력은 슬플 것이고, 권력의 심판을 기다리는 사람은 기쁠 것이다. 체제 유지에 관심 있는 권력자나 부와 지위에 집착하는 기득권자들은 슬플 것이고, 불공정하고 광포한 권력의 종말을 바라는 사람들은 기쁠 것이다. 계엄을 일으켜 헌정질서를 교란한 사람이나 동조자들은 슬플 것이고, 그것을 온몸을 막으며 민주주의를 지킨 시민들은 기쁠 것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도끼를 이미 나무뿌리에 갖다 놓으셨다.” 이 섬뜩한 말을 하기 전에 요한은 무리에게 “독사의 자식들아”라는 악담도 퍼붓는다. 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기에 그런 것일까? 누가가 “무리”라고 뭉뚱그린 대목을 마태는 “요한은 많은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세례를 받으러 오는 것을 보고…”(마 3:7)라고 서술한다. 무리 중에는 바리새파 사람과 사두개파 사람이 섞여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그들을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악담하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을 지적하면서,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심판을 피하겠느냐?”(마 23:33)라고 저주를 퍼부은 것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바리새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은 법 해석과 적용의 전문가였다. 그들은 율법을 엄격히 준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율법의 참된 정신인 사랑과 정의는 외면했다. 이런 위선적인 태도는 요즘의 법 전문가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물론 일부이긴 하지만, 그들은 법을 해석하고 적용할 때 자기 이익에 맞게 비틀고 왜곡한다. 약자에게는 엄격하게 적용하면서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다. 어제(12.14) 탄핵당한 권력자가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를 비판하는 사람에겐 가혹했고, 자기 가족의 비리엔 너그러웠다. 아내가 “박절하지 못해” 명품백을 어쩔 수 없이 받았다고 둘러댈 정도로.
사두개인은 사제 그룹이었다. 성전에서 제사와 종교의식을 주관하면서 부를 독점한 상류층이다. 그들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로마 정권과 결탁하기도 했다. 우리 사회에도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불의한 권력에 충성하고 아부하는 사람들이 많다. 주류 보수 대형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불의한 정권과 한통속이 되어 혐오와 배제의 정치에 집착하면서 포용과 화해의 복음을 철저하게 외면한다. 거짓자아의 전형적인 행태다.
어쨌거나 그런 사람들이 세례를 받겠다고 요한을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왜 세례받으려고 했을까?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닥쳐올 진노를 피하려고!” 그들에게 세례는 진노와 불운을 막아주는 부적 같은 것이었다. 그들에게 세례는 종교적 보험 같은 것이었으며,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그들에게 세례는 진노와 불운을 막아주는 부적 같은 것이었다. 그들에게 세례는 종교적 보험 같은 것이었으며,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다.
요즘 한국교회에도 부적 신앙이 만연해 있다. 믿음이 천당 가는 부적이나 행운을 보장해주는 주술, 성공과 축복을 보장해주는 도깨비방망이로 전락한 지는 오래됐다. “예수님을 영접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사영리는 구원의 자동판매기가 돼버렸다. 부적, 주술, 도깨비방망이, 자동판매기…. 아, 한국교회는 본회퍼가 말한 “값싼 은혜”에 중독되어 있는 것이다. 진실을 향한 열망도, 죄의 자각에 대한 깊이도, 구원을 갈망하는 진지함도 없이.
요한이 생각하는 세례는 그런 게 아니었다. 세례에 대한 요한의 생각은 “회개에 알맞은 열매를 맺어라”(눅 3:8)라는 한 마디에 압축적으로 들어있다. 첫째, 세례란 회개다. 세례는 단순히 물로 씻는 외적 행위가 아니라는 뜻이다. 마음의 정화와 인격의 변화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둘째, 세례는 그것에 알맞은 열매를 맺을 때 완성된다. 옷이든 먹을 것이든 넉넉한 사람은 나눠주어야 한다. 정해진 것보다 세금을 더 많이 받아서는 안 된다. 이웃의 재산을 협박하거나 거짓 고소를 하거나 속여서 빼앗아서는 안 된다.(눅 3:10-14)
돌들로도
요한은 세례 받으러 자기에게 오는 무리에게 외쳤다. “너희는 속으로 ‘아브라함은 우리의 조상이다’하고 말하지 말아라.”(눅 3:8a) 이스라엘 사람들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근거로 자신들을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여겼다. 할례는 살에 새겨진 선민의 징표였다. 선민의식은 그처럼 깊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런데 요한은 선민의식을 문제 삼는다. 유대인 특유의 특권의식에 도전한다. 요한 생각에 구원은 혈통이나 민족적 특권의식이 아니라 개인의 회개와 삶의 변화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특권의식은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무서운 질병이다. 대한민국도 다양한 특권의식이 얽히고설키면서 공동체를 병들게 하고 있다. 법률가들의 특권의식, 재벌들의 특권의식, 명문대 출신들의 특권의식, 상류층들의 특권의식, 도시인들의 특권의식, 젠더(가부장적) 특권의식 따위. 대형교회의 특권의식도 빼놓을 수 없다.
혈통에 대한 자부심과 선민이라는 특권의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요한은 단호하게 말한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다.”(눅 3:8b) 돌들은 강가나 광야에 널려 있다. 돌들은 보석이 아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하찮은 것들이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돌들은 권력자도 부자도 식자(識者)도 아니다. 돌들은 배우지 못한 민초이며 가난한 민중이며 힘없는 무지렁이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신다.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든다는 말은 중의적(重義的)이다. 한편으로는, 특권의식에 젖어 있는 유대인을 돌처럼 하찮은 존재로 격하시킨다. 그들은 구원에서 배제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돌처럼 하찮은 사람들을 귀한 존재로 격상시킨다. 그들은 구원에 새롭게 편입된다.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든다는 말은 중의적(重義的)이다. 한편으로는, 특권의식에 젖어 있는 유대인을 돌처럼 하찮은 존재로 격하시킨다. 그들은 구원에서 배제된다. 다른 한편으로는, 돌처럼 하찮은 사람들을 귀한 존재로 격상시킨다. 그들은 구원에 새롭게 편입된다.
이뿐 아니라, 돌들은 이방인을 뜻하기도 한다. 이방인들은 율법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사에서 배제된 사람들이었다. 할례와 정결 예식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부정한 사람들이었다. 다신교적 신앙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우상숭배자로 낙인찍힌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방인과 식사도 하지 않았다. 성전에서도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방인의 뜰은 별도로 지정되어 있다. 이방인들은 개 취급받기도 했다.(마 15:26) 그런데 요한은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즉 구원받는다고 선언한다. 유대인들이 들으면 까무러칠 선포다.
광장의 돌들
지난 열흘 남짓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광장들에서는 이러한 “돌들”이 소리 질렀다. 권력자도 아니고 부자도 아닌 평범한 사람들이. 민중들이, 무지렁이들이. 아, 젊고 발랄한 돌들이. 그들은 나라가 가장 어두울 때 가장 밝은 것을 들고 광장에 나왔고, 함성으로 뭉쳤다. 돌들의 함성이 교만한 권력을 탄핵시켰다. 돌들의 함성이야말로 나무뿌리에 놓인 도끼였다. 그 도끼는 어떤 사람에겐 슬픈 일이었고, 어떤 사람에겐 기쁜 일이었다.
체제 유지에 관심 있는 권력자나 당리당략에 빠진 국회의원들과 정당에는 무서운 일이었고, 불공정하고 광포한 권력의 종말을 바랐던 사람에겐 즐거운 일이었다. 계엄을 선포하고 내란을 획책한 무리에겐 심판이었고, 그것을 막아낸 민중들과 민심에 귀 기울인 지도자들에겐 희망의 찬가였다.
법의 이름으로 불법을 자행하며 순진하고 약한 사람들 피눈물 흘리게 한 법꾸라지들에겐 하늘의 준엄한 심판이었고, 법 없이도 살아가는 무명의 민초들에겐 하늘의 기쁜 소식이었다. 값싼 은혜라는 부적으로 천당을 약속하고 권력을 누리고 부를 세습하는 종교 장사치들에겐 지옥의 함성이었고, 진실하고 진지하게 복음적 가치를 실천하려고 애쓰는 가난한 영혼들에겐 천국의 나팔소리였다.
아, 실망과 탄식 속에서도 자기 본분을 성실하게 다하며 꿋꿋이 대한민국을 지켜온 돌들의 함성은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를 알리는 새 시대의 서곡이었다. 하여, 광장의 함성은 “네가 다시는 모욕을 받지 않게 하겠다”(습 3:18)는 하나님의 약속이, “내가 너희를 모든 민족 가운데서 칭송과 영예를 받게 하겠다”(습 3:19)는 하나님의 약속이 허언(虛言)이 아님을 깨닫게 하는 하늘 소리였다.
우리는 요즘 광장과 국회에서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똑똑히 보았다. 첫째, 하나님은 혼자 일하시지 않는다. 불의한 권력을 끌어내릴 때 하나님은 “돌들”을 통해 일하신다. 돌들이 소리지르게 하신다.(눅 19:40) 하나님은 돌들을 통해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를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눅 3:9) 그래서 민심을 천심이라 한다. 그렇기에 민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망한다. 민심여부(民心如斧)다. 민심은 도끼다. 민심을 거스르는 정권은 반드시 찍혀 버려진다. 군주민수(君舟民水)다.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민심에 귀 기울이지 않는 권력은 반드시 망한다. 민심여부(民心如斧)다. 민심은 도끼다. 민심을 거스르는 정권은 반드시 찍혀 버려진다. 군주민수(君舟民水)다.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뒤집을 수도 있다.
둘째, 하나님은 일하실 때 먼저 참자아를 일깨우신다. 물론 거짓자아에 사로잡혀 집단적으로 욕망을 추구할 때 무리(대중)는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이때 하나님의 일은 방해받거나 지연된다. 그 결과 민생은 파탄 나고 백성은 도탄에 빠진다. 그런 아픈 역사적 경험이 우리에게는 있다. 하나님이 일하실 때는 대중이 참자아를 각성할 때다. 소아(小我)에서 해방되어 대아(大我)가 깨어날 때다. 사적 이익보다 공적 대의를 먼저 추구할 때다. 욕망보다 가치가 우선할 때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그리스도인은 본래 그런 사람이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 2:20)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처럼 소아에서 벗어나 대아를 각성한 사람이다. 거짓자아를 해체하고 참자아를 실현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통해 일하신다. 한국교회가 몰상식하다고 비난받는 이유는 참자아를 각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아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요, 거짓자아의 정치학 즉 욕망의 정치학을 탐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참자아를 각성해야 한다.
대림절의 기쁨
대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기간이다. 교회력에 따라 기독교회는 대림절 네 주간 동안 촛불을 밝힌다. 첫째 주에는 “희망의 촛불”을 밝힌다.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을 기대하며 기다린다. 둘째 주에는 “평화의 촛불”을 밝힌다.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할 것을 기대하며 준비한다. 넷째 주에는 “사랑의 촛불”을 밝힌다. 하나님의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드러날 것을 기다린다.
그러면 셋째 주에는? “기쁨의 촛불”을 밝힌다! 그래서 셋째 주 성서일과 제1 독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도성 시온아, 노래하여라. 이스라엘아. 즐거이 외쳐라. 도성 예루살렘아, 마음껏 기뻐하며 즐거워하여라.”(습 3:14) 제2 독서는 이렇게 노래한다. “너희가 구원의 우물에서 기쁨으로 물을 길을 것이다.”(사 12:3) 서신서는 이렇게 권한다. “주님 안에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다시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빌 4:4) 대림절 셋째 주에 찬송가 100장은 이렇게 노래한다.
미리암과 여인들이 춤을 추며 노래하고
전쟁무기 멀리하고 하나님을 기뻐하네
마리아는 이웃들과 기도하며 노래하고
비천함을 높이셨던 하나님을 기뻐하네
오랫동안 기다려온 백성들이 노래하고
구원실현 약속하신 하나님을 기뻐하네
2024년 대림절 셋째 주(12.15)에 우리는 기뻐할 이유가 분명히 있다. 2024년 대림절 셋째 주에 대한민국은 기뻐하고 또 기뻐할 이유가 분명히 있다. 2024년 대림절 셋째 주에 대한민국을 살리려고 스스로 나무뿌리에 놓인 도끼가 된 돌들은 충분히 기뻐할 자격이 있다.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일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처럼 생생하게 보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인가!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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