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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세이) 관계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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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6회 작성일 24-08-26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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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마 6:6)
 
 
내가 향심기도에 입문할 때 처음 들었던 말은 “관계의 기도”라는 말이었다. 물론 간구기도든 중보기도든 감사기도든 모든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제한다. 하지만 기도의 강조점은 응답에 있다. 간구기도의 목표는 원하는 것이 이뤄지는 것이다. 중보기도도 마찬가지다. 차이가 있다면 타인에게 필요한 것을 응답받는 것 정도랄까. 감사기도는 원하는 것이 응답된 것에 대한 기쁨의 표현이다.
 
관계의 기도
향심기도의 목표는 원하는 것을 응답받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고 친밀하게 하는 것이다! 향심기도는 하나님의 위로가 아니라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께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이 주시는 성공, 축복, 부흥, 성장이 아니라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가장 큰 갈망이다. 원래 기도는 이래야 한다. 순수한 사랑이 연인이 선물하는 보석이 아니라 연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듯 말이다. 이처럼 향심기도는 카시아누스나 에크하르트가 말한 “순수한 기도”다. 그런 의미에서 향심기도는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첫째 계명을 실천하는 가장 “복음적인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관계의 기도”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내가 아는, 그리고 해오던 기도는 기도 제목을 수없이 나열하면서 응답해달라고 부르짖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기도 제목은 응답을 요구하는 일종의 청구서였다. 다행스럽게도 응답을 경험하면 기뻤지만, 오랫동안 기도해도 응답받지 못하면 실망이 컸다. 사업에 실패한 성도를 위해 기도해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거나, 병에 걸린 교우를 위해 기도해도 병이 악화하면 허탈했다. 심지어 죽기까지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서먹해졌고, 기도의 동력은 떨어지기 일쑤였다. 기도는 할 수도 안 할 수도 없는 뜨거운 감자 같은 것이 되곤 했다. 무엇보다 삶과 목회의 위기로 인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간구 형식의 기도는 소용없었다. 아예 할 수가 없었다.

거듭 강조하지만 향심기도는 관계의 기도다. 하나님과의 교제, 사귐, 친교가 우선이다. 따라서 “기도합시다”라는 말은 “이제 하나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가집시다” 또는 “하나님과의 깊은 사귐과 친교에 마음의 문을 엽시다”라는 뜻이다. 관계는 둘 이상의 인격 사이에서 이뤄지는 소통communication에서 시작한다. 그 관계가 진정한 사랑의 관계라면 소통은 깊은 사귐communion으로, 깊은 사귐은 일치unity로 발전하여 궁극적 친밀함intimacy에 이른다.
그 관계가 진정한 사랑의 관계라면 소통은 깊은 사귐communion으로, 깊은 사귐은 일치unity로 발전하여 궁극적 친밀함intimacy에 이른다.
향심기도가 이렇다. 향심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뿐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사귐, 친교)와 친밀한 일치를 지향한다. 이러한 친밀한 일치 상태에서 향심기도 수행자는 생각과 감정을 비롯하여 자신의 존재와 삶 전체를 하나님께 열고 맡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친교에 참여하며, 그 신성한 사랑의 현존 안에서 편히 쉰다. 그런 의미에서 향심기도는 “쉬는 기도”다. 향심기도를 할 때 수행자는 “안식에 들어간다.”(히 4:3) 마침내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마 11:26)는 예수님의 말씀을 현실로 경험한다.



골방 기도
사귐이든 교제든 관계가 이뤄지려면 “만남의 장소”가 필요하다. 만남의 장소가 없다면 사랑은 상상 속에 고립된다. 장소 없이 사랑은 실현되지 않는다. 장소 없는 사랑은 허구다. 하나님과의 사랑(교제, 사귐)도 장소가 필요하다. 어디가 좋은 만남의 장소일까?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성지를 순례한다. 심산유곡을 헤매고 사막으로 들어간다. 켈트 영성은 하늘과 땅이 맞닿은 “얇은 곳”thin places을 찾는다. 미국 애리조나 주의 셰도나는 지구에서 영빨(!)이 제일 강한 곳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최고의 장소가 있다. 예수님은 그곳을 알고 계셨다. 바로 “골방”이다. 골방이야말로 하나님을 만나 사랑의 교제를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 6:6) 골방은 내면의 중심을 상징한다.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며[현존], 거기서 하나님이 일하신다[활동]. 그래서 기도자는 언제나 중심을 향해야 한다. 다시 말해 “향심向心해야”centering 한다. 그런 뜻에서 향심기도는 “중심을 향하는 기도”다.
골방은 내면의 중심을 상징한다. 그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며[현존], 거기서 하나님이 일하신다[활동]. 그래서 기도자는 언제나 중심을 향해야 한다. 다시 말해 “향심向心해야”centering 한다. 그런 뜻에서 향심기도는 “중심을 향하는 기도”다.
하지만 사람들은 골방을, 마음의 중심을 향하지 않는다. 바깥에서만, 신성하다고 알려진 장소에서만 하나님을 찾으려 한다. 그런 장소를 떠나면 하나님과의 사귐은 금세 식는다. 하지만 골방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은 모든 곳에서 하나님을 만난다. “하늘에 올라가도 주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스올에다 자리를 펴더라도 주님은 거기에도 계십니다. 내가 저 동녘 너머로 날아가거나,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머무를지라도 거기에서도 주님의 손이 나를 인도하여 주시고, 주님의 오른손이 나를 힘있게 붙들어 주십니다.”(시 139:8-10) 이런 고백은 골방에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향심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골방을 자각하는 것이다. 골방은 깊은 곳이다. 마음의 중심이며 영혼의 심연이며 존재의 심층이다. 골방은 오감을 비롯한 기억, 상상, 이성, 의지를 넘어서는 영적 장소다. 요즘 유행하는 마이어-브릭스 유형지표(MBTI)는 이 차원에 이르지 못한다. 골방은 참자아의 내실이기 때문이다. 또 골방은 생활현실과 심리현실 너머에 있는 영성현실을 일컫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골방을 모른다. 알아도 그곳에 머물려고 하지 않는다. 당최 향심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내적 현존과 활동
이런 사정을 이야기하는 재미있는 우화가 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난 다음, 하나님은 처음 얼마 동안 사람들과 함께 사셨다. 하지만 결국 지치시고 말았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몰려와 하소연을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자식이 없다고, 어떤 사람은 자식이 속 썩인다고, 어떤 사람은 부모가 사랑을 반대한다고, 어떤 사람은 이혼하겠다고 하소연했다. 낮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한밤중에도 울부짖었다.

견디지 못한 하나님은 비서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사람들이 오만 가지 문제를 들고 찾아와 나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나는 그들에게 삶의 문제들을 해결할 지성과 능력을 주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든 책임을 나에게 돌리면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조른다. 나는 쉴 수가 없다.”

그러자 비서는 하나님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사람들이 도저히 찾아오지 못할 장소가 한 곳 있습니다. 그리로 숨으십시오.” 귀가 번쩍 뜨인 하나님이 어디냐고 묻자 비서는 대답했다. “사람들의 내면으로 숨으시면 됩니다. 그들은 당신을 찾아서 온 세상을 다 뒤질 것이지만, 내면으로는 결코 들어가지 않을 테니까요. 그곳에서 당신은 편히 쉴 수 있습니다.”

“향심”은 관상기도의 한 방법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마음가짐이다. 향심해야 골방에서 은밀하게 숨어계시는 하나님과 사귀는 기도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향심의 중요성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다.
나는 밖에서 당신을 찾았으나 내 마음 안의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였사오니 바다의 심연 속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 내 자신 안으로 돌아오라는 타이르심에 당신의 이끄심 따라 나의 가장 안으로 들어왔삽고, (안으로) 들어오고 나서 나는 상주불변의 빛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안으로 들어오라”고 타이르신다. 골방에서 사랑을 나누자고 유혹하신다. 그곳에서 맺어지는 사귐과 친교, 친밀한 합일로 초대하신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현존하시며, 그곳에서 활동하신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됐다는 것은 하나님의 내적 현존과 활동에 대한 인간학적 표현이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우리 안에 있다(갈 4:19)고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내적 현존을 강조하기도 한다.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성부・성자・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의 내적 현존과 활동은 향심기도의 기본 전제다.
 
 

 
 
주 
★ 수행을 위한 권고
 
이번 주에는 골방에 들어가는 수련을 합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골방으로 초대하십니다. 존재의 심층에서, 영혼의 심연에서 사랑을 나누자고 부르십니다. 친밀한 합일로 초대하십니다. 이런 사실을 묵상하며 매일 다음과 같이 수련합니다.
① 자세를 바르게 합니다. 자세를 바르게 하는 것만으로도 내면이 고요해집니다.
② 눈을 감습니다. 하나님의 절대 신비를 상징하는 어둠이 내면에 펼쳐집니다. 눈을 감을 때 외부세계를 향했던 주의, 시선, 에너지 흐름이 내면을 향하기 시작합니다.
③ 숨을 고르면서 평소보다 조금 천천히 그리고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쉽니다. 숨의 특징과 하나님의 속성은 동일합니다. 숨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골방에 들어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10번 정도 합니다.
④ 나를 둘러싸는 부드러운 침묵과 내면의 침묵을 느끼며 침묵 속에 고요히 현존합니다.(머무릅니다.)
⑤ 하루에 두 번 15~20분 이 리추얼처럼 실천합니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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