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아름다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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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270회 작성일 24-08-26 14:36본문
너희 가운데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찾아 다니지 않겠느냐?
(눅 15:4)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김민기)
지난 6월, 샬렘친구회 피정에서 만난 노래하는 농부 손정희는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에 직접 곡을 붙인 노래를 들려줬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너도 그렇다” 부분에서는 집게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기분이 좋았다. 잠시 뜸을 들이는 듯 싶더니, 방긋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나도 그렇다!” 반전이었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긍정하는 노래로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빼놓을 수 없다. 안치환은 노래하면서 여러 차례 반복한다.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의기소침해 있다가도 용기가 나고, 미운 사람도 품을 너그러움이 생긴다. 안치환은 노래한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지독한 외로움과 슬픔에 쩔쩔매다가도 굴하지 않는다고, 비켜서지도 않는다고.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사랑을 키운다고, 그러다가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고. 그래서 아무리 외쳐도 지겹지 않다.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그가 갔다
지난 월요일(2024년 7월 22일), 먹구름 짙었다. 오랜만에 수락산에 올랐다가 비를 흠뻑 맞았다. 그날 김민기 사망 소식을 들었다. 그는 빼어난 노래꾼이었다. 노동자였고, 농부였다. 무엇보다 자신도 모르게 역사에 성육신한 시인이었다. 아니, 내가 보기에 그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문 비종교적 영성가였다.
그날, 그는 갔지만, 내 청춘은 다시 회상의 문을 두드렸다. 그의 죽음은 잊고 있었던 젊은 시절의 슬픔과 고뇌, 울분과 탄식, 주저와 방황을 소환했다. 그래도 그때는 김민기 같은 노래꾼이 있어서 좋았다. 그의 노래를 부를 때, 여과되지 않고 분출하는 거친 감정은 삶에 대한 사랑으로 변형됐고, 행동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겁먹은 진실은 타자에 대한 연민으로 승화됐다. 절창 “아름다운 사람”도 그중 하나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의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처마 밑에서 한 아이가 울고 서 있다. 외로워 보인다. 해는 이미 졌고, 비마저 내린다. 곧 어둠이 만상을 덮을 것이다. 아이는 갈 곳이 없다. 처마 밑, 그 아이가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외롭고 어두워 보여도 아이는 맑다. 그 눈에 빗물이, 아니 눈물이 고인다. 눈물 고인 맑은 눈으로 아이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불결한 시대에 순수를 동경하고 있었을까, 불의와 폭력이 난무하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고 있었을까.
세찬 바람 불어오면
벌판에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이 분다. 고통과 시련의 풍파일까. 불의한 시대의 광기일까. 시대의 광풍 정면으로 맞으며 한 아이 달려간다. 처마 밑에서 외롭게 울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세찬 바람 맞으며 시대의 벌판을 달려간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 잘 모르겠지만, 눈물 고인 맑은 눈으로 바라보던 곳임이 분명하다. 불의와 폭력이 사라진 새 하늘과 새 땅일까, 연대와 평화의 땅일까. 그래서인지 아이의 가슴은 덥다. 더운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 가슴으로 아이는 또 다른 바람을 안는다. 아니 이미 또 다른 바람이 그를 안았기에 아이는 벌판의 세찬 바람을, 시대의 광풍을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하늘 바람을 안았기에 가슴이 뜨거워졌을 것이다.
새하얀 눈 내려오면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그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어라
처마 밑에서 울던 아이, 벌판에 부는 세찬 바람 온몸에 맞으며 달려가던 아이, 이젠 산 위에 우뚝 서 있다. 새하얗게 눈 내리게 한 한겨울의 추위도 그를 어쩌지 못한다. 아이는 이제 그 무엇으로도 쓰러뜨리지 못할 큰 나무가 되었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우뚝 서서 눈 덮인 산을 지키는 큰 바위 얼굴 같다고나 할까. 아이에게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린다. 그래도 그의 마음은 곱다. 고운 마음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 노래가 처마 밑에 서 있는 아이처럼 외로운 영혼들을 위로한다. 세차게 바람 부는 삶의 벌판을 헤쳐나가야 하는 고단한 영혼들을 격려한다. 아, 아름다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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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아름다운 사람
김민기 1(1993) 수록김민기 사-곡기타-김민기리코더-조원익어두운 비 내려오면처마 밑에 하나이 울고 서 있네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세찬 바람 불어오면벌판에 하나이 달려가네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새하얀 눈 내려오면 ...
잃은 양을 찾아서
양 백 마리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었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을 찾아다녔다. 양 한 마리가 대체 뭐길래?
나는 양 백 마리를 나에 대한 경험으로 읽는다. 나에 대한 나의 경험은 많다. 백 마리 양이 그것을 상징한다. 나는 목사다. 학교에서는 선생이고, 어떤 기관의 이사이고, 어떤 연구소의 운영위원장이다. 책 몇 권 번역한 번역가이고, 최근에 출판한 책의 저자다. 가족 관계에서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고, 아빠이고, 할아버지이고, 동생이고, 형이고, 삼촌이다. 나의 사회적 자아 곧 페르소나만 해도 이처럼 많다.
심리적 자아 경험도 있다. 열등감과 죄책감에 빠진 나. 뽐내고 싶어 하는 나, 오만한 나. 화를 내는 나. 분노하고 억울해하는 나. 시기하고 질투하는 나. 탐심에 사로잡히는 나. 음욕에 시달리는 나. 우울에서 허우적대는 나. 허영에 들떠 있는 나. 공허와 허무의 수렁에 빠진 나…. 참으로 못 마땅한 나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좀 더 “깊은” 나를 경험한다. 성경은 이 깊은 나를 속사람, 마음에 숨은 사람이라고 한다. 영적 차원에서 경험하는 나다. 그게 하나님의 형상이며 나의 참자아다. 내 존재의 심층에서 만나는 나다. 이 나는 순수하고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나”가 어린 양이다. 한때 잃어버렸던 나, 망각했던 나다. 하지만 나는 잃은 양을 포기하지 않았다. 찾을 때까지 찾아다녔다. 그게 내 젊은 날의 방황이었고, 목회 여정의 고뇌였다.
내 존재의 심층에서 만나는 나다. 이 나는 순수하고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나”가 어린 양이다. 한때 잃어버렸던 나, 망각했던 나다. 하지만 나는 잃은 양을 포기하지 않았다. 찾을 때까지 찾아다녔다. 그게 내 젊은 날의 방황이었고, 목회 여정의 고뇌였다.
나의 설교는 시종일관 잃은 양을 찾는 이야기이며 찾은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은 목자가 “벗과 이웃과 사람을 불러 모으고” 외친 것처럼 신앙 여정의 길벗들에게 외친다. “나와 함께 기뻐해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나는 믿는다, 참자아로 전향한 나, 회개한 죄인인 나를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더 기뻐하리라고!
나는 외친다. 참자아로 전향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참자아를 뺀 나머지 아흔아홉의 자아에 사로잡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외친다. 참자아를 각성조차 못하고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외친다. 돌아오라고. 그대들의 잃은 양을 찾으라고. 회개하라고. 참자아로 전향하라고. 어두운 심리현실의 깊은 협곡에서 떨고 있는 아름다운 사람(참자아)을 찾아 나서라고!
잃은 양을 찾고서
회개했다고 끝난 게 아니다. 잃은 양, 참자아를 찾았다고 끝난 게 아니다. 거쳐야 하는 과정이 더 있다. 첫째, “처마 밑에서 서 있는” 단계다. 참자아로 전향한 사람은 외롭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때로는 눈앞이 캄캄하다. 많은 사람에게 외면당하면서 눈물지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외로움과 밤의 경험을 통해 그의 영혼은 깨끗해진다. 정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맑은 두 눈에선 과거에 흘린 눈물과 차원이 다른 눈물이 흐른다. 감상적인 눈물이 아니라 천상의 눈물이.
둘째 단계는 삶의 벌판에서 유혹과 시련의 “세찬 바람을 맞는” 단계다.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했다고 만사가 형통하는 것은 아니다. 병에 걸리고, 실패를 맛보고, 예기치 않은 죽음을 겪는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삶이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 모든 불운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더욱 뜨거워진다.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질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가슴이 벅차다. 하늘 바람, 곧 성령이 그의 영혼을 휘감기 때문이다.
잃은 양(참자아)을 찾은 사람이 거치는 셋째 단계는 “산 위에 우뚝 서는” 단계다. 하늘 바람이 주는 힘과 지혜로 거센 바람을 뚫고 삶의 벌판을 달리는 동안 그는 성숙했다.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버리고 하나님의 참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존재로 변형됐다. 큰 바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큰 바위의 얼굴이 됐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다가 그리스도가 됐다. 그의 가슴은 온유하고 겸손하다. 부드럽고 자비롭다. 그 고운 가슴에서 노래가 흘러 나온다. 그 노래는 많은 외로운 영혼을 위로할 것이며, 시련과 유혹의 벌판을 헤쳐나가야 하는 이들의 가슴을 덥게, 뜨겁게 할 것이다.
마침내 그 노래는 시련과 유혹의 폭풍 몰아치는 삶의 벌판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산 위에 우뚝 서게 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로 인해 불의는 정의로, 증오는 자비로, 배제는 연대로 바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고운 마음으로 함께 부르는 노래가 닿는 곳에선 새 하늘과 새 땅의 향기 진동할 것이다.
- 이민재
(눅 15:4)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김민기)
지난 6월, 샬렘친구회 피정에서 만난 노래하는 농부 손정희는 나태주 시인의 시 “풀꽃”에 직접 곡을 붙인 노래를 들려줬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너도 그렇다” 부분에서는 집게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기분이 좋았다. 잠시 뜸을 들이는 듯 싶더니, 방긋 웃으며 한 마디 덧붙였다. “나도 그렇다!” 반전이었다.
인간의 아름다움을 긍정하는 노래로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를 빼놓을 수 없다. 안치환은 노래하면서 여러 차례 반복한다.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의기소침해 있다가도 용기가 나고, 미운 사람도 품을 너그러움이 생긴다. 안치환은 노래한다.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은 지독한 외로움과 슬픔에 쩔쩔매다가도 굴하지 않는다고, 비켜서지도 않는다고. 반짝이는 꽃눈을 닫고 우렁우렁 사랑을 키운다고, 그러다가 짙푸른 숲이 되고 산이 되어 메아리로 남는다고. 그래서 아무리 외쳐도 지겹지 않다.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그가 갔다
지난 월요일(2024년 7월 22일), 먹구름 짙었다. 오랜만에 수락산에 올랐다가 비를 흠뻑 맞았다. 그날 김민기 사망 소식을 들었다. 그는 빼어난 노래꾼이었다. 노동자였고, 농부였다. 무엇보다 자신도 모르게 역사에 성육신한 시인이었다. 아니, 내가 보기에 그는 이 시대에 보기 드문 비종교적 영성가였다.
그날, 그는 갔지만, 내 청춘은 다시 회상의 문을 두드렸다. 그의 죽음은 잊고 있었던 젊은 시절의 슬픔과 고뇌, 울분과 탄식, 주저와 방황을 소환했다. 그래도 그때는 김민기 같은 노래꾼이 있어서 좋았다. 그의 노래를 부를 때, 여과되지 않고 분출하는 거친 감정은 삶에 대한 사랑으로 변형됐고, 행동으로 표출하지 못하는 겁먹은 진실은 타자에 대한 연민으로 승화됐다. 절창 “아름다운 사람”도 그중 하나다.
어두운 비 내려오면
처마 밑의 한 아이 울고 서 있네
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처마 밑에서 한 아이가 울고 서 있다. 외로워 보인다. 해는 이미 졌고, 비마저 내린다. 곧 어둠이 만상을 덮을 것이다. 아이는 갈 곳이 없다. 처마 밑, 그 아이가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다. 외롭고 어두워 보여도 아이는 맑다. 그 눈에 빗물이, 아니 눈물이 고인다. 눈물 고인 맑은 눈으로 아이는 무엇을 보고 있었을까. 불결한 시대에 순수를 동경하고 있었을까, 불의와 폭력이 난무하는 역사의 한복판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고 있었을까.
세찬 바람 불어오면
벌판에 한 아이 달려가네
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세찬 바람이 분다. 고통과 시련의 풍파일까. 불의한 시대의 광기일까. 시대의 광풍 정면으로 맞으며 한 아이 달려간다. 처마 밑에서 외롭게 울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세찬 바람 맞으며 시대의 벌판을 달려간다. 어디를 향해 가는지 잘 모르겠지만, 눈물 고인 맑은 눈으로 바라보던 곳임이 분명하다. 불의와 폭력이 사라진 새 하늘과 새 땅일까, 연대와 평화의 땅일까. 그래서인지 아이의 가슴은 덥다. 더운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 가슴으로 아이는 또 다른 바람을 안는다. 아니 이미 또 다른 바람이 그를 안았기에 아이는 벌판의 세찬 바람을, 시대의 광풍을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하늘 바람을 안았기에 가슴이 뜨거워졌을 것이다.
새하얀 눈 내려오면
산 위에 한 아이 우뚝 서있네
그 고운 마음에 노래 울리면
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그이는 아름다운 사람이어라
처마 밑에서 울던 아이, 벌판에 부는 세찬 바람 온몸에 맞으며 달려가던 아이, 이젠 산 위에 우뚝 서 있다. 새하얗게 눈 내리게 한 한겨울의 추위도 그를 어쩌지 못한다. 아이는 이제 그 무엇으로도 쓰러뜨리지 못할 큰 나무가 되었다. 살을 에는 추위에도 우뚝 서서 눈 덮인 산을 지키는 큰 바위 얼굴 같다고나 할까. 아이에게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린다. 그래도 그의 마음은 곱다. 고운 마음에서 노래가 흘러나온다. 그 노래가 처마 밑에 서 있는 아이처럼 외로운 영혼들을 위로한다. 세차게 바람 부는 삶의 벌판을 헤쳐나가야 하는 고단한 영혼들을 격려한다. 아, 아름다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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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아름다운 사람
김민기 1(1993) 수록김민기 사-곡기타-김민기리코더-조원익어두운 비 내려오면처마 밑에 하나이 울고 서 있네그 맑은 두 눈에 빗물 고이면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세찬 바람 불어오면벌판에 하나이 달려가네그 더운 가슴에 바람 안으면음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새하얀 눈 내려오면 ...
잃은 양을 찾아서
양 백 마리가 있었다. 그 가운데서 한 마리를 잃었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잃은 양을 찾아다녔다. 양 한 마리가 대체 뭐길래?
나는 양 백 마리를 나에 대한 경험으로 읽는다. 나에 대한 나의 경험은 많다. 백 마리 양이 그것을 상징한다. 나는 목사다. 학교에서는 선생이고, 어떤 기관의 이사이고, 어떤 연구소의 운영위원장이다. 책 몇 권 번역한 번역가이고, 최근에 출판한 책의 저자다. 가족 관계에서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고, 아빠이고, 할아버지이고, 동생이고, 형이고, 삼촌이다. 나의 사회적 자아 곧 페르소나만 해도 이처럼 많다.
심리적 자아 경험도 있다. 열등감과 죄책감에 빠진 나. 뽐내고 싶어 하는 나, 오만한 나. 화를 내는 나. 분노하고 억울해하는 나. 시기하고 질투하는 나. 탐심에 사로잡히는 나. 음욕에 시달리는 나. 우울에서 허우적대는 나. 허영에 들떠 있는 나. 공허와 허무의 수렁에 빠진 나…. 참으로 못 마땅한 나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좀 더 “깊은” 나를 경험한다. 성경은 이 깊은 나를 속사람, 마음에 숨은 사람이라고 한다. 영적 차원에서 경험하는 나다. 그게 하나님의 형상이며 나의 참자아다. 내 존재의 심층에서 만나는 나다. 이 나는 순수하고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나”가 어린 양이다. 한때 잃어버렸던 나, 망각했던 나다. 하지만 나는 잃은 양을 포기하지 않았다. 찾을 때까지 찾아다녔다. 그게 내 젊은 날의 방황이었고, 목회 여정의 고뇌였다.
내 존재의 심층에서 만나는 나다. 이 나는 순수하고 아름답다. 이 아름다운 “나”가 어린 양이다. 한때 잃어버렸던 나, 망각했던 나다. 하지만 나는 잃은 양을 포기하지 않았다. 찾을 때까지 찾아다녔다. 그게 내 젊은 날의 방황이었고, 목회 여정의 고뇌였다.
나의 설교는 시종일관 잃은 양을 찾는 이야기이며 찾은 이야기이다. 여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나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은 목자가 “벗과 이웃과 사람을 불러 모으고” 외친 것처럼 신앙 여정의 길벗들에게 외친다. “나와 함께 기뻐해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나는 믿는다, 참자아로 전향한 나, 회개한 죄인인 나를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더 기뻐하리라고!
나는 외친다. 참자아로 전향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참자아를 뺀 나머지 아흔아홉의 자아에 사로잡혀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외친다. 참자아를 각성조차 못하고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외친다. 돌아오라고. 그대들의 잃은 양을 찾으라고. 회개하라고. 참자아로 전향하라고. 어두운 심리현실의 깊은 협곡에서 떨고 있는 아름다운 사람(참자아)을 찾아 나서라고!
잃은 양을 찾고서
회개했다고 끝난 게 아니다. 잃은 양, 참자아를 찾았다고 끝난 게 아니다. 거쳐야 하는 과정이 더 있다. 첫째, “처마 밑에서 서 있는” 단계다. 참자아로 전향한 사람은 외롭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때로는 눈앞이 캄캄하다. 많은 사람에게 외면당하면서 눈물지을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외로움과 밤의 경험을 통해 그의 영혼은 깨끗해진다. 정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 맑은 두 눈에선 과거에 흘린 눈물과 차원이 다른 눈물이 흐른다. 감상적인 눈물이 아니라 천상의 눈물이.
둘째 단계는 삶의 벌판에서 유혹과 시련의 “세찬 바람을 맞는” 단계다.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했다고 만사가 형통하는 것은 아니다. 병에 걸리고, 실패를 맛보고, 예기치 않은 죽음을 겪는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하는 삶이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 모든 불운에도 불구하고 그의 가슴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으로 더욱 뜨거워진다. 정의와 평화가 이루어질 세상에 대한 희망으로 가슴이 벅차다. 하늘 바람, 곧 성령이 그의 영혼을 휘감기 때문이다.
잃은 양(참자아)을 찾은 사람이 거치는 셋째 단계는 “산 위에 우뚝 서는” 단계다. 하늘 바람이 주는 힘과 지혜로 거센 바람을 뚫고 삶의 벌판을 달리는 동안 그는 성숙했다. 구습을 쫓는 옛사람을 버리고 하나님의 참 의로움과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존재로 변형됐다. 큰 바위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큰 바위의 얼굴이 됐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다가 그리스도가 됐다. 그의 가슴은 온유하고 겸손하다. 부드럽고 자비롭다. 그 고운 가슴에서 노래가 흘러 나온다. 그 노래는 많은 외로운 영혼을 위로할 것이며, 시련과 유혹의 벌판을 헤쳐나가야 하는 이들의 가슴을 덥게, 뜨겁게 할 것이다.
마침내 그 노래는 시련과 유혹의 폭풍 몰아치는 삶의 벌판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산 위에 우뚝 서게 할 것이다. 그런 사람들로 인해 불의는 정의로, 증오는 자비로, 배제는 연대로 바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고운 마음으로 함께 부르는 노래가 닿는 곳에선 새 하늘과 새 땅의 향기 진동할 것이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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