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영성에세이) 마르다의 기도 마리아의 기도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08회 작성일 24-07-22 14:28

본문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눅 10:42)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마 11:28)
 
 

숨이 끊어지면 죽듯이, 영혼의 숨인 기도가 멈추면 영이 죽는다. 영이 죽으면 신학이나 설교는 생명의 궤도를 이탈하여 죽임의 도구가 된다. 하여, 어떤 기도든 시작하고 볼 일이다.

기도는 여러 가지다. 간구기도, 중보기도, 감사기도, 묵상기도 등…. 각각의 기도에는 나름의 색깔이 있다. 간구기도에는 원하는 것을 성취하려는 치열함이 있다. 중보기도에는 곤경에 처한 사람에 대한 간절함이 있다. 감사기도에는 응답에 대한 즐거움이 있다. 묵상기도에는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 다 소중한 기도들이다. 하지만 이런 기도들에는 한 가지가 부족하다. “현존”이 그것이다.




현존과 변형
물론 간구기도와 중보기도와 감사기도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고, 묵상기도는 하나님 안에서 하는 것이므로 모두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 이뤄진다. 하지만 이런 기도들의 목적은 현존이 아니다. 그래서 현존 경험은 피상적이거나 단편적이거나 무의식적이다.

관상기도는 다르다.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현존에 머무르려고 한다. 관상기도는 하나님의 현존에 현존하는 것이 전부인 기도다. 이러한 이중 현존 속에서 기도자는 비워지고 정화淨化된다. 정화되는 만큼 하나님을 위한 여백이 생긴다. 그 여백에 성령의 빛이 비친다. 이를 조명照明이라고 한다. 정화가 깊어지고 조명이 강해지는 만큼 하나님과의 일치一致도 깊어진다.

하나님의 현존에 머물면서(현존하면서) 정화되고, 성령의 조명을 받고, 하나님과 일치하는 과정에서 기도자는 새로워지며 변형된다. 생존・안전, 애정・존중, 힘・통제 같은 본능적 욕구에서 벗어나고, 그러한 욕구에 기반한 행복프로그램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현존에 머물면서 정화되고, 성령의 조명을 받고, 하나님과 일치하는 이 과정을 “변형일치tranformative unity”라고도 한다.




분노와 현존
“현존” 하면 마리아가 떠오른다. 마리아다. 언니 마르다가 예수님을 접대하는 일로 분주할 때 동생 마리아는 “주님의 발 곁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눅 10:39)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 현존했다. 마르다는 화가 났다. 그래서 예수님께 따지듯 물었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마리아가 이중 현존, 즉 주님의 현존과 그 현존에 머무르는 이중 현존 속에 있었다면, 마르다는 이중의 분노 속에 있다. 아무 일도 도와주지 않는 마리아를 향한 분노와 그런 마리아를 내버려두는 예수님에 대한 분노가 그것이다.

마르다의 심리현실(R2)은 복잡하다. 예수님을 집에 모신 것에 대한 자부심도 있고, 잘 대접하여 기쁘게 해드리고 싶은 열망도 있다. 그 바탕엔 인정받고 싶은 본능적 욕구도 깔려 있다. 그 욕구에 따라 행복프로그램이 작동하는데, 욕구가 해결되지 않자 마르다는 실망과 함께 분노를 터뜨린다. 그뿐 아니다. 분노는 예수님을 움직여 마리아를 통제하려고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예수님은 마르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얄밉게도 예수님은 마리아를 칭찬까지 하신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눅 10:41-42)

예수께서 말씀하신 “좋은 몫”이란 뭘까? 그게 바로 현존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현존을 칭찬한 것이다. 마르다가 분주함 속에서 들떠 있다면 마리아는 현존 속에서 평온하다. 마르다가 염려 속에서 분노한다면, 마리아는 평온 속에서 말씀을 경청한다. 깊은 경청을 통해 마리아는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되어간다.



마르다와 마리아


두 유형
마르다와 마리아 자매 이야기를 기도에 적용하면 기도의 두 유형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간단히 말해 기도에는 마르다 유형과마리아 유형이있다. 마르다 유형의 기도가 “염려의 기도”라면, 마리아 유형의 기도는 “현존의 기도”다. 한국교회가 치열하게 하는 기도는 예외 없이 “염려의 기도”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와 관련된 간구기도가 그렇고, 중보기도도 그렇다. 취업에 관한 것이든 치유에 관한 것이든 중보기도야말로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염려에서 나오는 기도 아닌가.

마리아 유형의 기도는 다르다. 그저 주님의 발치에 앉아 주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다. 마리아의 기도의 핵심은 “현존”과 “경청” 두 가지다. 마리아는 주님의 현존에 고요히 현존하면서(머무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경청한다. 이때 현존이란 참자아의 원형이신 그리스도의 존재의 장 안에, 참자아의 신성의 향기 안에 고요히 머무르는 것이다. 그러한 이중 현존 속에서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사귐이 깊어진다.

이때의 경청은 단순히 공기를 진동시키는 말이나, 단어와 문장으로 구성된 말을 듣는 데 그치지 않는다. 마리아는 귀로 들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서 듣고 있다. 마리아의 경청을 토머스 키팅은 “영적 기능들(기억, 상상, 이성, 의지 등)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과 공명할 때 이뤄지는” 경청이라고 묘사한다. 말씀을 경청한다는 것은 “말해지는 것보다는 존재의 깊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현존이 선사하는 체험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Thomas Keating, The Better Part)

이때 듣는 이는 단어와 문장과 소리로 이뤄진 말씀들이 아니라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즉 그리스도)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동화된다. 이것이 우리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만든다. 동시에 우리가 참자아 안에서 기도한다.



listening carefully

현존과 쉼
정리하자. 우리가 그리스도의 현존에 현존하고, 그분의 말씀을 경청할 때 변형일치의 과정에 들어간다. 첫째, 정화가 시작되며, 정화가 진행되는 만큼 하나님을 위한 여백이 생긴다.[비움] 둘째, 그 여백에 신성의 빛이 비친다.[채움] “조명 상태에서는 추론 이성이 물러가고, 그 자리에 직관과 예수님의 신성한 현존이 들어선다.”

셋째, 신성의 조명이 강렬해질수록 그리스도와의 일치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일치가 깊어진다. 이 신성한 일치 속에서 우리는 새로워진다. 진정한 “나”가 된다. 그뿐 아니라, 내주하시는 성령이 숨을 쉬면서 새로운 기도가 시작된다. 성령의 기도다. 바울은 이러한 기도의 경지를 알고 있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 8:26)

기도가 변한다. 간구기도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달라는 기도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기를 바라는 기도로 바뀐다. 중보기도는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닮아간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않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요17:21) 감사기도는 기도의 응답에 대한 감사에서 조건을 초월한 감사로 바뀐다. 묵상은 이성의 추리 과정을 벗어나 직관 차원에서 더욱 깊어진다.

생각하지 못한 은총이 임한다. 마침내 우리는 생의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난다. 주님의 말씀이 내면에 울려 퍼진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요 14:27b) 참된 평화가 영혼의 심연에 깃든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다. 이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요 14:27) 우리의 영혼은 비로소 쉼을 얻는다. 이러한 쉼은 휴가지 같은 환경이 제공하는 “들뜬” 쉼과 다르다. 그야말로 깊은 고요 속에서 누리는 그윽한 쉼이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는 말씀을 경험으로 맛본다.





우정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안에서 쉼을 얻는다. 현존과 경청을 통해 우리 내면에 하나님을 위한 여백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현존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리스도인의 우정이 시작된다. 시토회 수사 성 베르나르도는 그리스도인의 우정을 이렇게 노래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 마음속에서 쉬고 있듯이,
우리도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쉽시다.
그는 사랑을 쉼으로 이해한다. 사랑이란 서로의 마음속에서 쉬는 것이다. 사랑은 열정에서 시작하지만, 열정은 사랑의 이름으로 상대를 포획하려고 한다. 쉼은 사라지고 시달림이 시작된다. 서로를 쉬게 하는 사랑이 성숙한 사랑이다. 쉼 속에서 열정은 생기로 변형되어 사랑하는 두 사람을 서로 살린다.
 

- 이민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