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예수님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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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36회 작성일 24-01-15 16:32본문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는 거짓이 없다.
(요 1:47)
땅에 사는 성도들에 관해 말하라면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 하겠습니다.
(시 16:3)
주님, 평화를 주소서.
내 속엔 평화가 있다.
아니, 나는 이미 평화다!
불안하거나 두려움에 휩싸일 때 우리는 평화를 달라고 기도한다.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평화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평화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평화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평화가 내 안에 있음을 “자각할 때” 우리는 조금씩 평화를 맛본다. 더 나아가 내가 평화라고 “확언할 때” 진정한 평화를 누린다.
내 안에 평화가 있음을 자각하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내가 이미 평화라고 “확언”하는 것은 더욱 드문 일이다. 그러려면 존재의 중심 또는 바탕에 이르러야 하고, 자신을 영적 존재(하나님의 형상, 참자아)로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심에서 나는 이미 평화다. 바탕에서 참자아 상태로 있을 때 나는 이미 평화다. 바다 표면이 파도에 흔들려도 심연은 고요한 것처럼!
내 존재의 중심도 그렇다. 그곳엔 삶의 풍파가 미치지 못한다. 풍파가 아무리 거세도 그곳은 고요하고 평온하다. 그 중심에서 나는 영적 존재인 참자아로 현존한다. 이때 나는 평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런 확언을 못 한다. 존재의 중심에 닿지 못하고, 영적 존재라는 자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의 풍파가 조금만 거세도 마구 흔들린다. 자기 확언을 통해 풍랑 속에서도 평정심을 가지려면, 중심에 닿아야 하고, 근본(참자아)을 자각해야 한다. 어떻게?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연천 착한 의견의 성모의 집 소성당에 있는 풍랑 속에서도 주무시는 예수님
간사함이 없다
나다나엘을 만났을 때 빌립이 말했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 예수입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며 냉소적으로 대꾸한다. 그러자 빌립은 말한다. “와서 보시오!”
나다나엘이 예수께로 가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개역 성경은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번역했다. 예수님은 겉이 아니라 “속”을 보셨다. 표면이 아니라 근본을 보셨다. 그뿐 아니라 그의 깊은 갈망도 보셨다. 나다나엘의 깊은 갈망은 무엇이었을까? 예수께서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시자 나다나엘은 놀라는 표정으로 묻는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그러자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답하신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열왕기상 5장 2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미가서에는 이런 말씀도 나온다.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미 3:3-4) 따라서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다는 것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이뤄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다나엘이 살던 시대는 평화 시대도 태평성대도 아니었다.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니 무슨 뜻일까? 이것은 나다나엘이 평화를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 행위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셨다. 이때 나다나엘은 중심의 갈망을 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보았다. 바로 이 시선, 겉이 아니라 속을 보고 중심의 갈망을 보는 예수님의 시선이 나다나엘의 시선을 변형시켰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며 빈정댔던 나다나엘이었다.
나사렛은 로마의 속주屬州로서 갈릴리 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레바논 산맥의 남쪽 끝자락, 해발 약 360m 되는 곳에 세워진 마을로서 동쪽 서쪽 북쪽,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였다. 주변에 주요 도로가 없어서 경제활동도 활발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나사렛은 촌구석이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는 나다나엘의 빈정거림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나다나엘은 보통사람들처럼 겉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의 시선이 달라졌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을 나사렛 촌뜨기로 보던 시선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왕”으로 본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의 근본을 보았을 때, 나다나엘도 예수님의 근본을 보았다. 중심은 중심을 자극하고, 근본은 근본과 교감하며, 본질은 본질에 조응한다.
중심은 중심을 자극하고,
근본은 근본과 교감하며,
본질은 본질에 조응한다.
더 큰 일
속을 보는 예수님의 시선을 통해 나다나엘은 사람의 중심과 근본을 보는 눈을 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더 큰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그것은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다.
중심과 근본을 보는 눈을 뜨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촌뜨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나 왕으로 보게 되는 것, 이런 기적도 없다. 그런데 더 큰 일은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나다나엘처럼 중심을 보고, 근본을 보는 눈을 뜨면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인자 곧 예수님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가 바로 영적 존재임을 깨닫고 참자아를 실현하는 사람이다. 매순간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존재로 나다나엘을 초대하신다. 이것이야말로 “더 큰 일”이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가 바로 영적 존재임을 깨닫고 참자아를 실현하는 사람이다. 매순간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다.
나다나엘을 영적 존재로 초대하셨다면 주님은 우리도 초대하신다. 나의 하늘이 열리고, 내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하신다. 내가 나의 근본을 자각하고, 영적 존재임을 자각하게 하신다. 하지만 소심한 물음이 끈질기다. 내 위에도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할까? 그건 예수님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처럼 “속”을 보면 된다. 예수님처럼 내가 나의 중심을 보고 근본을 보면 된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따지기 전에 나의 진짜 모습을 보신다. 내 안에도 “간사함이 없다”는 것을 아신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내 존재의 중심에서 내가 이미 평화이기게 평화에 대한 갈망이 있음을 아신다.
나의 근본이 그토록 아름답건만,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바로 나다. 내 안에 간사함이 없음을 모르는 사람이 바로 나다. 나의 심연에 평화에 대한 갈망이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 바로 나다. 이미 평화이기에 평화를 갈망하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이 바로 나다.
하므로 나를 보되 예수님의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내 안에 죄의 먹구름이 가득해도 그 너머에 영의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음을 보아야 한다. 그 하늘을 볼 때 나에게 간사함이 없음을 깨닫는다. 내가 이미 평화이기에 평화를 갈망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나의 근본은 예수님의 근본과 같기 때문이다. 자기의 근본을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의 근본도 본다. 서로의 근본을 볼 때 사람 관계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분리와 배제의 차가운 시선이 용납과 포용의 따뜻한 가슴으로 바뀐다.
자기의 근본을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의 근본도 본다. 서로의 근본을 볼 때 사람 관계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분리와 배제의 차가운 시선이 용납과 포용의 따뜻한 가슴으로 바뀐다.
눈 이식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속”을 보지 않는다. 예수처럼 중심을 보지 않고, 근본을 보지 않고, 영적 본질을 보지 않는다. 자기의 근본을 보지 않으니 남의 근본도 보지 않는다. 자기를 영적 존재로 보지 않으니 다른 사람도 영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겉만 보면서 쉽게 판단한다. 부와 지위, 학벌과 스펙을 보면서 열등과 우월 사이에서 널뛰기한다. 근본과 근본의 만남에서 오는 환희를 맛보지 못하며, 영적 만남이 주는 희열을 누리지 못한다.
어찌하면 좋을까.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예수님의 눈도 이식받았을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눈을 이식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속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근본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눈을 이식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속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근본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우리 안에는 어둠이 있고 죄도 있다. 욕망도 있고 상처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시선으로 우리 자신을 보면 근본이 평화임을 깨닫는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뒤죽박죽인 마음의 검은 구름 너머에서 영의 하늘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 우리는 이미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고귀한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믿음을 통해 이식받은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사람이 아름다워 보인다. 참자아라는 근본,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근본을 보는 까닭이다. 이때 사람과 사람의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인다. 나의 하늘과 너의 하늘이 만나 가슴이 드넓어진다. 나의 근본과 너의 근본, 나의 중심과 너의 중심이 만나 사랑이 깊어진다. 나의 영과 너의 영이 만나 언제나 어디서나 신성으로 충만해진다.
나의 하늘과 너의 하늘이 만나 가슴이 드넓어진다. 나의 근본과 너의 근본, 나의 중심과 너의 중심이 만나 사랑이 깊어진다. 나의 영과 너의 영이 만나 언제나 어디서나 신성으로 충만해진다.
벗들, “너들의” 어둠만 보지 말자. “그들의” 죄만 보지 말자. “우리의” 타락만 주장하지 말자. 믿음을 통해 이식받은 예수님의 눈으로 서로의 속을, 서로의 하늘을, 서로의 천사를 보자! 그러면서 평화로 살아가자. 아, 시인과 함께 탄성을 지르자. “땅에 사는 성도들에 관해 말하라면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 하겠습니다!”(시 16:3)
- 이민재
(요 1:47)
땅에 사는 성도들에 관해 말하라면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 하겠습니다.
(시 16:3)
주님, 평화를 주소서.
내 속엔 평화가 있다.
아니, 나는 이미 평화다!
불안하거나 두려움에 휩싸일 때 우리는 평화를 달라고 기도한다.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평화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한, 평화는 쉽게 이뤄지지 않는다. 평화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다. 평화가 내 안에 있음을 “자각할 때” 우리는 조금씩 평화를 맛본다. 더 나아가 내가 평화라고 “확언할 때” 진정한 평화를 누린다.
내 안에 평화가 있음을 자각하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내가 이미 평화라고 “확언”하는 것은 더욱 드문 일이다. 그러려면 존재의 중심 또는 바탕에 이르러야 하고, 자신을 영적 존재(하나님의 형상, 참자아)로 인식해야 하기 때문이다. 중심에서 나는 이미 평화다. 바탕에서 참자아 상태로 있을 때 나는 이미 평화다. 바다 표면이 파도에 흔들려도 심연은 고요한 것처럼!
내 존재의 중심도 그렇다. 그곳엔 삶의 풍파가 미치지 못한다. 풍파가 아무리 거세도 그곳은 고요하고 평온하다. 그 중심에서 나는 영적 존재인 참자아로 현존한다. 이때 나는 평화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그런 확언을 못 한다. 존재의 중심에 닿지 못하고, 영적 존재라는 자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의 풍파가 조금만 거세도 마구 흔들린다. 자기 확언을 통해 풍랑 속에서도 평정심을 가지려면, 중심에 닿아야 하고, 근본(참자아)을 자각해야 한다. 어떻게?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연천 착한 의견의 성모의 집 소성당에 있는 풍랑 속에서도 주무시는 예수님
간사함이 없다
나다나엘을 만났을 때 빌립이 말했다. “모세가 율법책에 기록하였고, 예언자들이 기록한 그분을 우리가 만났습니다. 그분은 나사렛 출신 예수입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며 냉소적으로 대꾸한다. 그러자 빌립은 말한다. “와서 보시오!”
나다나엘이 예수께로 가자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다.” 개역 성경은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번역했다. 예수님은 겉이 아니라 “속”을 보셨다. 표면이 아니라 근본을 보셨다. 그뿐 아니라 그의 깊은 갈망도 보셨다. 나다나엘의 깊은 갈망은 무엇이었을까? 예수께서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고 하시자 나다나엘은 놀라는 표정으로 묻는다. “어떻게 나를 아십니까?” 그러자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답하신다.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열왕기상 5장 25절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솔로몬이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평안히 살았더라.” 미가서에는 이런 말씀도 나온다. “그가 많은 민족들 사이의 일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이라.”(미 3:3-4) 따라서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다는 것은 전쟁이 끝나고 평화가 이뤄졌다는 뜻이다.
그런데 나다나엘이 살던 시대는 평화 시대도 태평성대도 아니었다. 로마의 식민통치를 받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니 무슨 뜻일까? 이것은 나다나엘이 평화를 갈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 행위이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셨다. 이때 나다나엘은 중심의 갈망을 보시는 예수님의 시선을 보았다. 바로 이 시선, 겉이 아니라 속을 보고 중심의 갈망을 보는 예수님의 시선이 나다나엘의 시선을 변형시켰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며 빈정댔던 나다나엘이었다.
나사렛은 로마의 속주屬州로서 갈릴리 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레바논 산맥의 남쪽 끝자락, 해발 약 360m 되는 곳에 세워진 마을로서 동쪽 서쪽 북쪽,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였다. 주변에 주요 도로가 없어서 경제활동도 활발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나사렛은 촌구석이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는 나다나엘의 빈정거림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나다나엘은 보통사람들처럼 겉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던 그의 시선이 달라졌다. “선생님, 선생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을 나사렛 촌뜨기로 보던 시선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과 이스라엘의 왕”으로 본다. 예수님이 나다나엘의 근본을 보았을 때, 나다나엘도 예수님의 근본을 보았다. 중심은 중심을 자극하고, 근본은 근본과 교감하며, 본질은 본질에 조응한다.
중심은 중심을 자극하고,
근본은 근본과 교감하며,
본질은 본질에 조응한다.
더 큰 일
속을 보는 예수님의 시선을 통해 나다나엘은 사람의 중심과 근본을 보는 눈을 떴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더 큰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보다 더 큰 일을 네가 볼 것이다.” 그것은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다.
중심과 근본을 보는 눈을 뜨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촌뜨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나 왕으로 보게 되는 것, 이런 기적도 없다. 그런데 더 큰 일은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나다나엘처럼 중심을 보고, 근본을 보는 눈을 뜨면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인자 곧 예수님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된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가 바로 영적 존재임을 깨닫고 참자아를 실현하는 사람이다. 매순간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존재로 나다나엘을 초대하신다. 이것이야말로 “더 큰 일”이다.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그가 바로 영적 존재임을 깨닫고 참자아를 실현하는 사람이다. 매순간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람이다.
나다나엘을 영적 존재로 초대하셨다면 주님은 우리도 초대하신다. 나의 하늘이 열리고, 내 위에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하신다. 내가 나의 근본을 자각하고, 영적 존재임을 자각하게 하신다. 하지만 소심한 물음이 끈질기다. 내 위에도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할까? 그건 예수님에게나 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 예수님처럼 “속”을 보면 된다. 예수님처럼 내가 나의 중심을 보고 근본을 보면 된다. 예수님은 나의 죄를 따지기 전에 나의 진짜 모습을 보신다. 내 안에도 “간사함이 없다”는 것을 아신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은 내 존재의 중심에서 내가 이미 평화이기게 평화에 대한 갈망이 있음을 아신다.
나의 근본이 그토록 아름답건만,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바로 나다. 내 안에 간사함이 없음을 모르는 사람이 바로 나다. 나의 심연에 평화에 대한 갈망이 있음을 모르는 사람이 바로 나다. 이미 평화이기에 평화를 갈망하는 것임을 모르는 사람이 바로 나다.
하므로 나를 보되 예수님의 시선으로 보아야 한다. 내 안에 죄의 먹구름이 가득해도 그 너머에 영의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음을 보아야 한다. 그 하늘을 볼 때 나에게 간사함이 없음을 깨닫는다. 내가 이미 평화이기에 평화를 갈망하는 것임을 깨닫는다. 나의 근본은 예수님의 근본과 같기 때문이다. 자기의 근본을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의 근본도 본다. 서로의 근본을 볼 때 사람 관계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분리와 배제의 차가운 시선이 용납과 포용의 따뜻한 가슴으로 바뀐다.
자기의 근본을 본 사람은 다른 사람의 근본도 본다. 서로의 근본을 볼 때 사람 관계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분리와 배제의 차가운 시선이 용납과 포용의 따뜻한 가슴으로 바뀐다.
눈 이식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속”을 보지 않는다. 예수처럼 중심을 보지 않고, 근본을 보지 않고, 영적 본질을 보지 않는다. 자기의 근본을 보지 않으니 남의 근본도 보지 않는다. 자기를 영적 존재로 보지 않으니 다른 사람도 영적 존재로 보지 않는다. 겉만 보면서 쉽게 판단한다. 부와 지위, 학벌과 스펙을 보면서 열등과 우월 사이에서 널뛰기한다. 근본과 근본의 만남에서 오는 환희를 맛보지 못하며, 영적 만남이 주는 희열을 누리지 못한다.
어찌하면 좋을까.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이다. 예수님을 영접했으니 예수님의 눈도 이식받았을 게 틀림없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눈을 이식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속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근본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눈을 이식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시선으로 자신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속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시선으로 근본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우리 안에는 어둠이 있고 죄도 있다. 욕망도 있고 상처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시선으로 우리 자신을 보면 근본이 평화임을 깨닫는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으로 뒤죽박죽인 마음의 검은 구름 너머에서 영의 하늘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음을 깨닫는다. 아, 우리는 이미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고귀한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믿음을 통해 이식받은 예수님의 눈으로 보면, 사람이 아름다워 보인다. 참자아라는 근본,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근본을 보는 까닭이다. 이때 사람과 사람의 하늘이 열리고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보인다. 나의 하늘과 너의 하늘이 만나 가슴이 드넓어진다. 나의 근본과 너의 근본, 나의 중심과 너의 중심이 만나 사랑이 깊어진다. 나의 영과 너의 영이 만나 언제나 어디서나 신성으로 충만해진다.
나의 하늘과 너의 하늘이 만나 가슴이 드넓어진다. 나의 근본과 너의 근본, 나의 중심과 너의 중심이 만나 사랑이 깊어진다. 나의 영과 너의 영이 만나 언제나 어디서나 신성으로 충만해진다.
벗들, “너들의” 어둠만 보지 말자. “그들의” 죄만 보지 말자. “우리의” 타락만 주장하지 말자. 믿음을 통해 이식받은 예수님의 눈으로 서로의 속을, 서로의 하늘을, 서로의 천사를 보자! 그러면서 평화로 살아가자. 아, 시인과 함께 탄성을 지르자. “땅에 사는 성도들에 관해 말하라면 ‘성도들은 존귀한 사람들이요, 나의 기쁨이다’ 하겠습니다!”(시 16:3)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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