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헛발질과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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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72회 작성일 23-09-19 20:32본문
주님께서는 네가 헛발을 디디지 않게 지켜주신다.
(시 121:3)
나는 기도에 관한 이 글을 153개의 문장으로 나눴습니다. 당신께 복음의 향연을 보냅니다.
(에바그리우스)
며칠 전에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뎠다. 하마터면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뻔했는데 아직은 순발력이 있어서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았다. 발을 자주 헛디디는 것도 노화의 한 증상이다. 목욕하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는 어르신들 이야기가 남 얘기 같지 않다. 고관절이라도 부러지면 오래 병치레하다가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아버지가 그러셨다.
발을 헛디딘 다음 날 거룩한독서 시편 본문이 공교롭게도 121편이었다. 거기서 시인은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한다. “주님께서는 네가 헛발을 디디지 않게 지켜주신다.”(시 121:3) 발을 헛디디는 경험을 해선지 새삼스러웠다.
신앙의 헛발질
말씀 묵상은 신앙의 헛발질로 이어졌다. 몸의 차원에서 헛발을 딛는 것도 문제지만 신앙 차원에서 헛발을 딛는 것은 더 큰 문제다. 모든 것을 걸고 신앙생활했는데 그게 헛발질이었다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이따금 한국교회의 거대한 신앙의 헛발질을 볼 때면 마음이 무겁고 착잡하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심정이 그랬을까. “누가 발을 헛디디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고후 11:29)
얼마 전에 황당한 기사를 하나 읽었다. 부친상을 당한 여자친구가 화장장에서 눈물을 보였다는 이유로 폭행당했다는 기사였다. 여자를 때린 사람은 목사였다. 그는 다른 사람이 울어도 못 울게 해야 하는 사람이 울면 되겠냐며 주먹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그 목사는 내 또래였다. 적게 잡아도 수십 년을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했다는 뜻이다.
대체 아버지 장례 때 울어서는 안 되는 신앙은 어떤 신앙인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슬퍼도 울지 못하고, 울어도 숨어서 울어야 한다면 이런 비인간이 어디 있으며, 이런 몰상식이 어디 있는가.
예수님은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셨다. 사도 바울은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 울지도 못하게 하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인가. 기독교 신앙은 인간적인 희로애락의 감정을 말살하고 박제하는 신앙인가. 기독교 신앙은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 아니라 공감 능력이 마비된 괴물을 만들어내는 신앙인가. 우는 사람과 함께 우는 천사 같은 사람이 아니라 슬픔을 저주하는 악마 같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신앙인가.
아마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강변할지도 모른다. 죽으면 천국 가는데 왜 슬퍼하냐고. 믿지 않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어떤 기독교인들은─대개 한 신앙 한다는 사람들이─장례식을 공공연히 “천국환송예배”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가 죽어도 눈물을 보이는 것은 맞아도 싼 대죄다.
거대한 헛발질
신앙의 헛발질이 이뿐일까. 우리가 그동안 안타깝게 여긴 번영신앙의 탐욕과 율법신앙의 독선, 집단적 맹신의 광기는 한국교회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신앙의 거대한 헛발질이다. 번영신앙은 야훼 신앙을 바알의 종교로 변질시켰다. 율법신앙은 사랑의 복음을 혐오와 저주로 둔갑시켰다. 집단적 맹신의 광기는 건전한 상식을 초토화했다. 이건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내가 평생 믿고 평생 공부하고 평생 동행한 예수님은 번영신앙과 율법신앙, 그리고 집단적 맹신과 무관하다. 예수님은 이기적이며 세속적인 욕심과 거리가 멀다. 욕심이라니, 예수님의 공생애 첫 번째 설교는 “가난”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율법적인 정죄와 교리적인 혐오와도 거리가 멀다. 정죄라니, 예수님은 탕자를 용납하시는 아버지의 비유로 복음을 명백하게 밝혀주셨다. 혐오라니, 예수님은 세리 삭개오와 친구가 되셨고, 간음한 여인도 옹호하셨으며, 따돌림당하던 사마리아 여자의 비애를 함께 나누셨다.
예수님은 집단적 맹신의 광기와도 거리가 멀다. 집단적 광기라니, 오히려 예수님이 집단적 광기의 희생자였다. 군중의 광기가 예수를 죽였다. 광기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이 자기의(自己義)에 빠져있을 때 보여준 미친 모습일 뿐이다. “살기 등등하여” 자기와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려고 “날뛰었던” 비인간 사울 말이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엔 주류 보수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번영신앙의 탐욕과 율법신앙의 독선, 집단적 맹신의 광기가 난장을 치고 있다. 기독교교회협의회(NCC) 탈퇴 문제로, 세계교회협의회(WCC) 소속 문제로, 동성애 이슈로, 이념 갈등 따위로 흑백을 가르며 심판하는 무서운 종교로 변질됐다. 물론 그럴 자유는 있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민주국가니까. 다만 예수쟁이라는 소리만 하지 않으면 좋겠다.
기도의 헛발질
그러면 한국교회는 왜 이렇게 됐을까? 한국교회는 어떻게 하다가 거대한 신앙의 헛발질을 하게 된 것일까? 내 생각엔, 기도 때문이다! 기도의 헛발질 때문에 한국교회는 바알의 종교와 혐오의 종교, 그리고 광기의 종교로 타락한 것이다. 기도는 “담론-현실화 기제”mechanism of discourse-relization다. 다시 말해 기도는 모든 담론을 현실로 만드는 종교적 작용이다. 기도를 통해 담론은 실재가 된다.
이를테면, 번영신앙에 대한 설교(담론)만으로는 욕심쟁이가 될 수 없다. 허구한 날 세속적인 성공과 이기적인 축복을 달라고 부르짖은 결과 한국교회는 “실제로” 욕심쟁이들을 양산한 것이다. 율법이나 교리 대한 설교(담론)만으로는 독선적인 인간이 될 수가 없다. 허구한 날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악마의 자식이라고 저주하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지옥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르짖은 결과 “실제로” 얼음장같이 차가운 심장을 가진 괴물들이 출현한 것이다.
이뿐인가. 혼자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떼 지어 성공과 축복을 탐하고, 집단으로 모여 혐오와 저주의 독화살을 기도랍시고 쏟아낸 결과 “실제로” 집단적 맹신의 광기에 사로잡힌 악마 같은 존재가 되었다. 결국 한국교회의 거대한 헛발질은 기도의 헛발질이 만들어낸 자업자득이요 사필귀정인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교회 주류의 기도는 “기독교적인” 기도가 아니다. 소원성취를 위한 마술이요, 혐오와 저주의 주술일 뿐이다. 타종교인의 기도와 기독교인의 기도를 비교해 보면 이런 사실을 금세 확인할 수 있다. 무당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나 점치러 다니는 사람들, 또는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의 기도 제목을 기독교인의 그것과 비교해 보라. 만사형통, 무병장수, 입신양명을 비는 기도 일색이다. 욕망 수준에서 종교가 하나 된 것을 기뻐해야 할까.
기도, 복음의 향연
그러면 “기독교적인” 기도란 어떤 것일까? 4세기 사막 교부 에바그리우스는 『기도론 On Prayer』에서 “기독교적인” 기도가 어떤 것인지 아름답게 증언한다. 이 글은 에바그리우스가 스승 알렉산드리아의 마카리우스에게 보낸 서신인데 서문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나는 기도에 관한 이 글을 153개의 문장으로 나눴습니다. 당신께 복음의 향연을 보냅니다.” 이 한 문장은 에바그리우스가 기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에게 기도는 “복음의 향연”an evangelical feast이었던 것이다. 기도를 통한 복음의 향연을 그는 다음과 같이 펼친다.
“기도는 영혼이 하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3)
이 짧은 한 문장으로 에바그리우스는 기도의 본질이 하나님과 “사귀는 것”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 외에 무슨 다른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33)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다. 기도에는 이웃 사랑도 포함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하려면 아무도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20) 당연히 형제들에게 분노하는 것도 기도하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기도는 온유의 꽃이며, 분노로부터의 자유입니다.(14)
분노와 기도는 상극이다. “욕망은 분노의 연료입니다. 분노는 영적인 장님이 되게 하여 기도를 어지럽힙니다. 따라서 분노하지 않게 자신을 잘 지키면 어떤 종류의 욕망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26)
이웃 사랑은 자기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다. 진정한 기도는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도 배려한다. “다른 사람을 치료해주면서 자신을 치료하지 않으면 진정한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25) 그래서 기도는 자신의 존엄을 깨닫는 지름길이다.
기도는 영혼의 존엄함에 이르는 힘입니다. 기도는 [존엄한] 영혼이 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하고 순수한 일입니다.(84)
이로부터 우리는 에바그리우스가 왜 기도를 “복음의 향연”이라고 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사귀고, 형제를 사랑하고, 자신의 존엄을 깨닫는 기도야말로 예수님이 가장 크다고 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에바그리우스는 세속적이며 자기중심적인 기도, 소원성취가 목적인 이기적인 기도를 경계한다.
소원성취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소원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눅 22:42)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대가 구하는 것이 모두 그대에게 선하고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31)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는 복음적이지 않다. 타자를 배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기도가 아니다.
그렇다고 에바그리우스가 간구 기도를 금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간구하십시오. 첫째, 정념을 정화시켜 달라고. 둘째, 무지와 망각에서 구해달라고. 셋째, 유혹과 시련과 게으름에서 구해달라고.”(38)
중보기도도 마찬가지다. “그대의 정화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지인들이 정화되어 천사를 닮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39) 참기도는 의식의 수준을 욕망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않고 신성한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의식의 상승입니다.(36)
한국교회가 거대한 헛발질에서 벗어나려면 기도의 헛발질을 중단해야 한다. 소원성취의 마술로 타락한 바알의 기도를 멈추고, 혐오와 저주의 주술로 변질된 괴물의 기도를 멈춰야 한다. 그 대신 “복음의 향연”인 “기독교적인”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시급한 일이다.
주님, 우리의 생명을 붙들어 주셔서,
우리가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게 하소서.
(시 66:9)
- 이민재
(시 121:3)
나는 기도에 관한 이 글을 153개의 문장으로 나눴습니다. 당신께 복음의 향연을 보냅니다.
(에바그리우스)
며칠 전에 계단을 내려오다가 발을 헛디뎠다. 하마터면 시멘트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뻔했는데 아직은 순발력이 있어서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았다. 발을 자주 헛디디는 것도 노화의 한 증상이다. 목욕하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졌다는 어르신들 이야기가 남 얘기 같지 않다. 고관절이라도 부러지면 오래 병치레하다가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아버지가 그러셨다.
발을 헛디딘 다음 날 거룩한독서 시편 본문이 공교롭게도 121편이었다. 거기서 시인은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한다. “주님께서는 네가 헛발을 디디지 않게 지켜주신다.”(시 121:3) 발을 헛디디는 경험을 해선지 새삼스러웠다.
신앙의 헛발질
말씀 묵상은 신앙의 헛발질로 이어졌다. 몸의 차원에서 헛발을 딛는 것도 문제지만 신앙 차원에서 헛발을 딛는 것은 더 큰 문제다. 모든 것을 걸고 신앙생활했는데 그게 헛발질이었다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이따금 한국교회의 거대한 신앙의 헛발질을 볼 때면 마음이 무겁고 착잡하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바울의 심정이 그랬을까. “누가 발을 헛디디면 나도 애타지 않겠습니까?”(고후 11:29)
얼마 전에 황당한 기사를 하나 읽었다. 부친상을 당한 여자친구가 화장장에서 눈물을 보였다는 이유로 폭행당했다는 기사였다. 여자를 때린 사람은 목사였다. 그는 다른 사람이 울어도 못 울게 해야 하는 사람이 울면 되겠냐며 주먹을 휘둘렀다는 것이다. 그 목사는 내 또래였다. 적게 잡아도 수십 년을 그런 식으로 신앙생활 했다는 뜻이다.
대체 아버지 장례 때 울어서는 안 되는 신앙은 어떤 신앙인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지만 슬퍼도 울지 못하고, 울어도 숨어서 울어야 한다면 이런 비인간이 어디 있으며, 이런 몰상식이 어디 있는가.
예수님은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눈물을 흘리셨다. 사도 바울은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 울지도 못하게 하는 신앙이 기독교 신앙인가. 기독교 신앙은 인간적인 희로애락의 감정을 말살하고 박제하는 신앙인가. 기독교 신앙은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 아니라 공감 능력이 마비된 괴물을 만들어내는 신앙인가. 우는 사람과 함께 우는 천사 같은 사람이 아니라 슬픔을 저주하는 악마 같은 사람을 만들어내는 신앙인가.
아마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강변할지도 모른다. 죽으면 천국 가는데 왜 슬퍼하냐고. 믿지 않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는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다. 그래서 어떤 기독교인들은─대개 한 신앙 한다는 사람들이─장례식을 공공연히 “천국환송예배”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니 사랑하는 이가 죽어도 눈물을 보이는 것은 맞아도 싼 대죄다.
거대한 헛발질
신앙의 헛발질이 이뿐일까. 우리가 그동안 안타깝게 여긴 번영신앙의 탐욕과 율법신앙의 독선, 집단적 맹신의 광기는 한국교회가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신앙의 거대한 헛발질이다. 번영신앙은 야훼 신앙을 바알의 종교로 변질시켰다. 율법신앙은 사랑의 복음을 혐오와 저주로 둔갑시켰다. 집단적 맹신의 광기는 건전한 상식을 초토화했다. 이건 기독교 신앙이 아니다.
내가 평생 믿고 평생 공부하고 평생 동행한 예수님은 번영신앙과 율법신앙, 그리고 집단적 맹신과 무관하다. 예수님은 이기적이며 세속적인 욕심과 거리가 멀다. 욕심이라니, 예수님의 공생애 첫 번째 설교는 “가난”에 관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율법적인 정죄와 교리적인 혐오와도 거리가 멀다. 정죄라니, 예수님은 탕자를 용납하시는 아버지의 비유로 복음을 명백하게 밝혀주셨다. 혐오라니, 예수님은 세리 삭개오와 친구가 되셨고, 간음한 여인도 옹호하셨으며, 따돌림당하던 사마리아 여자의 비애를 함께 나누셨다.
예수님은 집단적 맹신의 광기와도 거리가 멀다. 집단적 광기라니, 오히려 예수님이 집단적 광기의 희생자였다. 군중의 광기가 예수를 죽였다. 광기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이 자기의(自己義)에 빠져있을 때 보여준 미친 모습일 뿐이다. “살기 등등하여” 자기와 신념이 다른 사람들을 박해하려고 “날뛰었던” 비인간 사울 말이다.
그런데 요즘 한국교회엔 주류 보수 대형교회를 중심으로 번영신앙의 탐욕과 율법신앙의 독선, 집단적 맹신의 광기가 난장을 치고 있다. 기독교교회협의회(NCC) 탈퇴 문제로, 세계교회협의회(WCC) 소속 문제로, 동성애 이슈로, 이념 갈등 따위로 흑백을 가르며 심판하는 무서운 종교로 변질됐다. 물론 그럴 자유는 있다. 대한민국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민주국가니까. 다만 예수쟁이라는 소리만 하지 않으면 좋겠다.
기도의 헛발질
그러면 한국교회는 왜 이렇게 됐을까? 한국교회는 어떻게 하다가 거대한 신앙의 헛발질을 하게 된 것일까? 내 생각엔, 기도 때문이다! 기도의 헛발질 때문에 한국교회는 바알의 종교와 혐오의 종교, 그리고 광기의 종교로 타락한 것이다. 기도는 “담론-현실화 기제”mechanism of discourse-relization다. 다시 말해 기도는 모든 담론을 현실로 만드는 종교적 작용이다. 기도를 통해 담론은 실재가 된다.
이를테면, 번영신앙에 대한 설교(담론)만으로는 욕심쟁이가 될 수 없다. 허구한 날 세속적인 성공과 이기적인 축복을 달라고 부르짖은 결과 한국교회는 “실제로” 욕심쟁이들을 양산한 것이다. 율법이나 교리 대한 설교(담론)만으로는 독선적인 인간이 될 수가 없다. 허구한 날 자기와 다른 사람을 이단으로 정죄하고, 악마의 자식이라고 저주하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지옥에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르짖은 결과 “실제로” 얼음장같이 차가운 심장을 가진 괴물들이 출현한 것이다.
이뿐인가. 혼자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떼 지어 성공과 축복을 탐하고, 집단으로 모여 혐오와 저주의 독화살을 기도랍시고 쏟아낸 결과 “실제로” 집단적 맹신의 광기에 사로잡힌 악마 같은 존재가 되었다. 결국 한국교회의 거대한 헛발질은 기도의 헛발질이 만들어낸 자업자득이요 사필귀정인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국교회 주류의 기도는 “기독교적인” 기도가 아니다. 소원성취를 위한 마술이요, 혐오와 저주의 주술일 뿐이다. 타종교인의 기도와 기독교인의 기도를 비교해 보면 이런 사실을 금세 확인할 수 있다. 무당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나 점치러 다니는 사람들, 또는 절에 가서 불공을 드리는 사람들의 기도 제목을 기독교인의 그것과 비교해 보라. 만사형통, 무병장수, 입신양명을 비는 기도 일색이다. 욕망 수준에서 종교가 하나 된 것을 기뻐해야 할까.
기도, 복음의 향연
그러면 “기독교적인” 기도란 어떤 것일까? 4세기 사막 교부 에바그리우스는 『기도론 On Prayer』에서 “기독교적인” 기도가 어떤 것인지 아름답게 증언한다. 이 글은 에바그리우스가 스승 알렉산드리아의 마카리우스에게 보낸 서신인데 서문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나는 기도에 관한 이 글을 153개의 문장으로 나눴습니다. 당신께 복음의 향연을 보냅니다.” 이 한 문장은 에바그리우스가 기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에게 기도는 “복음의 향연”an evangelical feast이었던 것이다. 기도를 통한 복음의 향연을 그는 다음과 같이 펼친다.
“기도는 영혼이 하나님과 사귀는 것입니다.”(3)
이 짧은 한 문장으로 에바그리우스는 기도의 본질이 하나님과 “사귀는 것”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이유는 간단하다. “하나님 외에 무슨 다른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33)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첫째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다. 기도에는 이웃 사랑도 포함된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를 하려면 아무도 슬프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20) 당연히 형제들에게 분노하는 것도 기도하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기도는 온유의 꽃이며, 분노로부터의 자유입니다.(14)
분노와 기도는 상극이다. “욕망은 분노의 연료입니다. 분노는 영적인 장님이 되게 하여 기도를 어지럽힙니다. 따라서 분노하지 않게 자신을 잘 지키면 어떤 종류의 욕망에도 굴복하지 않습니다.”(26)
이웃 사랑은 자기 사랑을 배제하지 않는다. 진정한 기도는 다른 사람뿐 아니라 자신도 배려한다. “다른 사람을 치료해주면서 자신을 치료하지 않으면 진정한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다.”(25) 그래서 기도는 자신의 존엄을 깨닫는 지름길이다.
기도는 영혼의 존엄함에 이르는 힘입니다. 기도는 [존엄한] 영혼이 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하고 순수한 일입니다.(84)
이로부터 우리는 에바그리우스가 왜 기도를 “복음의 향연”이라고 했는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사귀고, 형제를 사랑하고, 자신의 존엄을 깨닫는 기도야말로 예수님이 가장 크다고 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에바그리우스는 세속적이며 자기중심적인 기도, 소원성취가 목적인 이기적인 기도를 경계한다.
소원성취를 위해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대의 소원이 언제나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여 주십시오’(눅 22:42)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대가 구하는 것이 모두 그대에게 선하고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31)
소원성취를 위한 기도는 복음적이지 않다. 타자를 배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어긋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기도가 아니다.
그렇다고 에바그리우스가 간구 기도를 금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간구하십시오. 첫째, 정념을 정화시켜 달라고. 둘째, 무지와 망각에서 구해달라고. 셋째, 유혹과 시련과 게으름에서 구해달라고.”(38)
중보기도도 마찬가지다. “그대의 정화만을 위해 기도하지 말고 지인들이 정화되어 천사를 닮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39) 참기도는 의식의 수준을 욕망 수준으로 끌어내리지 않고 신성한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의식의 상승입니다.(36)
한국교회가 거대한 헛발질에서 벗어나려면 기도의 헛발질을 중단해야 한다. 소원성취의 마술로 타락한 바알의 기도를 멈추고, 혐오와 저주의 주술로 변질된 괴물의 기도를 멈춰야 한다. 그 대신 “복음의 향연”인 “기독교적인”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시급한 일이다.
주님, 우리의 생명을 붙들어 주셔서,
우리가 실족하여 넘어지지 않게 하소서.
(시 66:9)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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