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영성에세이) 중보적 상상력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71회 작성일 23-09-01 00:00

본문

이렇게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으니…
(히 12:1)

나도 기도합니다만,
여러분도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해 주십시오.
(롬 15:30)
 


 

인간의 정신에는 다른 생명체에 없는 뛰어난 기능이 있다. “상상력”이 그것이다. 인간을 이성적인 동물이라고 하지만, 상상력은 이성보다 더 중요하다. 이성은 상상한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논리적으로 체계화하고, 실현할 방법을 찾는다. 상상력이 이성의 주인이라면 이성은 상상력의 시종이다.

상상력의 질은 삶의 질을 결정한다. 삶의 행복도 상상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현대인이 누리는 편리한 삶은 과학적 상상력이 제공한 것이다. 인문학적 상상력도 행복한 삶의 필수 요소다. 상상력 없다면 한 편의 시도 지을 수 없고 한 폭의 그림도 그릴 수 없다. 상상력이 있기에 독서도 가능하다. 책에 기록된 문자들은 상상력을 통해 재구성되어 독자를 찾아간다.

기억이 주로 과거의 경험과 관련된다면 상상력은 아직 경험하지 않은 것, 아직 이뤄지지 않은 것,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도 상상한다. 심지어 죽음 이후의 세계도 넘나들며, 태초와 영원과 무한도 상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따라서 “상상력이 없다면 영혼의 삶도 없다.”(앤 율라노프) 성경에 나오는 모든 구원 언어는 상상력을 통해 살아난다.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천국과 하나님 나라, 영생과 부활,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꾼다. 거룩한 상상력이 공급하는 힘으로 악의 유혹을 이기고, 자신을 지키며, 절망 속에서도 하늘과 새 땅을 희망한다.

하지만 인간 정신의 경이로운 능력인 상상력은 위험하기도 하다. 요즘 우리가 경험하는 탐식과 음욕과 탐욕의 시대를 보라. 저급한 욕망은 순간적이며 즉흥적인 쾌락에 관한 상상을 끊임없이 쏟아낸다. 게걸스럽고 음란하고 탐욕스러운 판타지가 난무한다. 욕망에 오염되어 “잔꾀”로 전락한 이성은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추잡한 판타지를 실현하는 길을 찾는다. 그 과정에서 어린이나 여성같이 힘없고 연약한 존재들이 더러운 상상력의 제물이 된다. 상상력의 정화는 구원의 첫 번째 과업이다.



 
관상적 상상력
그동안 나는 “관상적” 상상력, 즉 관상상태에서 정화된 상상력을 주제로 몇 차례 글을 썼다. “성령과 상상력”, “기도와 상상력”, “근원에 대한 상상력”, “성사적 상상력” 등이 그것이다. 성령체험은 세속의 상상력이 신성한 상상력으로 변형되는 체험이다. 그래서 성령이 임하면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본다.” 기도도 상상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간구기도는 욕망이 실현되는 것을 상상하지만 관상기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의 친교에 참여하는 것을 상상한다.

모태에까지 이르는, 아니 태초에까지 이르는 근원에 대한 상상력은 내가 하나님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는 고귀하고 보배로운 존재라는 “원형적” 진실을 깨닫게 한다. 성사적 상상력은 만물萬物과 만인萬人과 만사萬事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감지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통찰하며,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예감한다. 관상적 상상력은 이렇게 삶을 신성하게 만든다.

그런데 나의 관상 여정은 상상력의 또 다른 차원을 알아차리게 했다. 그것은 내가 누군가의 기도로 오늘을 살아간다는 영적 인식과 관련된다. 물론 이전에도 나는 누군가의 기도에 힘입어 살아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엄마의 기도는 오늘의 나를 만든 결정적 밑거름이었다. 나는 지금도 하늘나라에서 나를 위해 기도하는 엄마를 상상한다.

엄마뿐이 아니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구름 떼와 같이 수많은 증인(그리스도인)들이”(히 12:1)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는 것을 상상한다. 이런 상상력이 바로 “중보적 상상력”이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에겐 명료한 “영적 사실”spiritual fact이다. 이것은 관상수련이 선물한 또 하나의 은총으로서 근원에 대한 상상력과 성사적 상상력에 이어 내가 깨달은 세 번째 “관상적” 상상력이다.





토머스 머튼의 중보적 상상력
나에게 중보적 상상력의 문을 열어준 사람은 토머스 머튼이다. 『토머스 머튼의 시간』이라는 책에서 이런 문장을 읽으면서였다. “누군가의 기도가 있었기에 다시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는 은총이 주어진 것이다.” 머튼은 자기가 누리는 기도의 은총이 자기-의지의 선택이 아니라 누군가의 기도에 의한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는 “중보적” 상상력을 다음과 같이 펼친다.
“친구들의 선함과 사랑과 베풂이 없었다면 하느님께서는 오래전에 우리를 포기하고 우리한테서 얼굴을 돌리며 우리를 죽음의 구렁에서 허우적거리도록 내버려두셨을 것이다. 의식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들은 하느님께 우리를 변호해주고 우리가 죽음의 구렁에서 벗어나도록 기도로 우리를 응원한다.”

머튼은 친구들의 기도가 없었다면 우리가 “죽음의 구렁에서 허우적”대고 있었을 거라면서, 친구들의 기도가 “우리를 죽음의 구렁에서 벗어나도록” 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서 다른 곳에서는 또 이렇게 고백한다. “오로지 그리스도만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 모두가 나를 위해 피를 흘려 희생한 것이다.” 이어서 그의 중보적 상상력은 자기를 사랑했던 선한 친구들뿐 아니라 기독교 역사를 기웃거린다.
초대교회 성인들의 기도로 나의 온 생애가 이루어지고, 그들의 기도로 내가 그 모자이크 성당을 좋아하게 되어 기도하고 성경을 읽도록 이끌어주신 것인지도 모른다.
머튼의 중보적 상상력은 친구들의 기도에서 성인들의 기도로 초점이 옮겨졌다. 하지만 그의 중보적 상상력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상상력은 낯선 사람의 기도에까지 펼쳐진다.
아마도 누군가 기도에서 나를 언급했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영혼, 지하철에서 지나친 낯선 사람이거나 어린아이일 수도 있다. 선한 누군가가 나를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이 기도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 이름을 부르며 기도한 것이 하느님 마음을 움직여 내게 다시 기도하는 은총을 주셨는지도 모른다.
머튼의 중보적 상상력은 “누군가가”,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영혼”이, “지하철에서 지나친 낯선 사람”이나 심지어 “어린아이”가 기도에서 자기를 언급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바로 이런 사람의 중보기도 덕에 자기 마음이 움직여 기도하게 됐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것이다. 하지만 머튼의 중보적 상상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의 중보적 상상력은 타종교의 기도하는 사람에까지 미친다.
어쩌면 동양에서 온 브라마차리가 신비한 언어로 드린 기도가 주님 마음을 움직여 내가 다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일들은 무척 신비롭다. (…) 그리스도교에 대해 알지 못하는 유다인이나 힌두인들의 기도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머튼이 말하는 “브라마차리”Brahmachary란 “범행”(梵行) 즉 “더러움이 없는(梵) 행위”를 추구하는 힌두교 자이나교 불교 등의 금욕가를 말한다. 머튼의 중보적 상상력은 그들의 기도가 주님의 마음을 움직여 자기가 기도하게 되었을지고 모른다고 상상한다. 이어서 상상을 초월하는 상상을 펼친다. “유다인이나 힌두인들의 기도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 어찌 알겠는가.” 타종교를 악마시하는 근본주의자에겐 뒤로 자빠질 망측한 이야기겠지만, 깨어있는 사람들에겐 참으로 신묘막측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느 날의 성사적 상상력
토머스 머튼을 통해 중보적 상상력이라는 개념을 얻었다면, 지난여름 피정은 중보적 상상력을 실제로 경험한 시간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성사적 상상력을 통해 중보적 상상력이 깨어났다고나 할까.

피정 때면 으레 둘째 날 정오부터 셋째 날 정오까지 “대침묵” 시간을 갖는다. 대침묵 시간에는 걸어가다가 다른 사람과 마주쳐도 아는체하지 않는다. 밥도 침묵 속에서 먹는다. 침묵 식사는 처음엔 어색해도 “음식 묵상”을 할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그리고 음식 묵상은 하나님을 만나는 좋은 통로다.

나도 밥을 먹을 때마다 음식에 대해 묵상했다. 음식을 먹을 때마다 나에게 음식이 제공되기까지 수고한 사람들을 떠올렸다. 음식 재료를 생산한 사람들, 유통한 상인들과 배달한 노동자들, 판매・가공・조리 과정에 참여한 사람들, 그리고 이들에 배후에서 함께 일하신 하나님을!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감사기도가 절로 나온다.




셋째 날 아침엔 식사하는데─아침 식사는 늘 빵이다─감정이 복받쳤다. 눈물이 나더니 콧물도 흘렀다. 주위 사람들에게 티가 날까 봐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했다. 서둘러 식사를 마치고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서 느낌을 적어 내려갔다.
오늘 아침 식사를 하는데, 밥이 모자랐던 첫째 날 저녁에 미안해하시던 수녀님의 얼굴이 떠오르다. 수녀님의 얼굴과 내 접시에 담겨있는 수녀님의 정성이 자꾸 겹치다. 그래, 이 빵을, 이 떡을, 이 소시지를, 이 햄을, 이 샐러드를, 이 소스를, 이 수프를, 이 우유를 수녀님이 손수 준비했겠지, 이번에도 모자라지나 않을까 염려하면서 준비했겠지, 하는 생각에 미치자 수녀님의 삶이 상상 속에서 펼쳐지다.

수녀님은 누군가의 딸이었을 거야, 여느 집 딸처럼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를 거쳐 받아야 할 교육을 받았겠지. 그러다가 생의 어느 길목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거고, 하나님의 강렬한 부름을 외면할 수 없었겠지. 그렇다고 냉큼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이어서 고민과 고뇌의 밤이 점점 많아졌겠지. 그러다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던 어느 날 부모님께 말씀드렸겠지.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입을 다물 수 없었겠지.

이러한 부름은 인간의 의지로 거부할 수 없는 일이어서 거대한 신비의 힘에 이끌려 집을 나왔겠지, 고향을 떠났겠지. 고된 수련 기간을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이겨내고, 환속의 유혹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버텨내고 마침내 종신서원을 했을 거고, 그렇게 주님의 정배(淨配)가 되었겠지.

기쁨의 날들도 많았을 거야. 영원한 님과의 은밀한 사귐의 기쁨을 세상의 누가 알겠어? 하지만 외로운 날은 더 많았을 거야. 엄마가 보고 싶은 밤도,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날도 많았을 거야.

여기까지 상상하자 내 속에서 계속 틈을 엿보던 눈물이 소리 없이 터져 나오다. 둥그런 식탁에서 함께 식사하던 사람들이 볼까봐 민망한 마음으로 허공을 쳐다보는데 창문 쪽 벽에 걸려있던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아기 예수의 이콘이 눈에 들어오다.

그래 예수도 집을 떠났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엄마의 품과 집을 떠날 때 예수의 마음은 어땠을까. 첫아들을 떠나보내는 젊은 엄마의 심정은 어땠을까. 2천 년 전에 태어난 저 아이를 2천 년 후에 태어난 나는 어떻게 알게 됐을까. 나는 어떻게 저이 없으면 인간이 인간다울 수 없고, 삶이 살만하지 못하다는 얘기를 허구한 날 천연덕스럽게 하게 됐을까.

예수 아기와 나, 엄청난 세월의 간격을 채우고도 남는 하나님의 사랑을 묵상하며 감격하다. 그러다가 그 아가를 안고 있는 성녀의 품에 나도 안기도 싶어졌는데, 그래서 그 품에 안기는 것을 상상하기 시작했는데,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실제로 나를 안다, 품다, 포옹하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을 때 한 길벗이 서 있었는데, 눈물 콧물을 들킬까 봐 이내 얼굴을 돌리다.
 여기까지 적어 내려갔는데 마침 볼펜이 다 닳아 더 쓸 수 없었다. 음식 묵상을 하다가 수녀님의 정성이 떠올랐고, 그 정성을 음미하다가, 수녀님의 생을 상상했고, 수녀님의 생을 상상하다가, 그 배후에 계신 예수님과 하나님을 만났다.





성사적 상상력에서 중보적 상상력으로
음식이 성사적 상상력을 자극한 건데 내 상상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새로운 상상이 시작됐다. 그 수녀님과 〈피정의집〉에서 함께 섬기는 아홉 명의 수녀님들, 수녀님들이 속한 〈스승예수의제자수녀회〉 모든 구성원, 내가 만난 적 없는 기독교 역사 속 무명의 수도자들…. 그런데 이상했다.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위한 기도가 나오기 시작했다. “주님, 저들에게 소명을 감당할 힘을 주소서!”

상상은 이어졌다. 피정에 참석한 신학생들이 떠오르다가, 감신대에서 만난 신학생들이 떠오르다가, 그들을 지도하는 교수님들이 떠오르다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부모님들과 섬기는 교회의 성도들이 떠오르다가,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오지에서 사역하는 무명의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이 떠오르다가, 박해 시대에 목숨을 바쳐 믿음을 지킨 고백자들과 순교자들이 떠오르다가, 지금도 숨어서 예배드리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이 떠오르다가, 은명교회를 지켜온 길벗들이 떠오르다가…. 아, 이들의 배후에도 하나님이 계셨다. 또 기도가 흘러나왔다. “저들의 헌신과 희생이 열매 맺게 하소서!”

지인과 낯선 사람을 가리지 않고,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넘나들던 상상력은 급기야 첫 목회지에서 만난 이수현 할머니를 떠오르게 했다. 오십이 넘은 아들과 함께 돌투성이 황무지를 일구며 가난하게 살아가던 분이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치마저고리를 입고 쪽 지은 머리에 비녀를 꽂고 단정하게 앉아 예배드렸다. 할머니는 “단아함”이라는 단어에 꼭 어울렸다.

할머니에 대해서는 특별한 기억이 있다. 아내가 진통을 시작해서 병원에 입원한 날이 수요일이었다. 수요저녁예배를 마치고 부리나케 병원에 가려는 나를 할머니가 주저하는 기색으로 불렀다. “저, 전도사님…” 치마를 들치더니 속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내 손에 쥐여 주며 한 마디하고는 도망치듯 가셨다. “전도사님, 잘 다녀오세요. 순산을 기도할게요.” 나중에 보았더니 천 원짜리 다섯 장을 세 번 접은 돈뭉치(?)였다. 가슴이 먹먹했다. 그 당시 칠십을 훨씬 넘었으니 지금은 천국에서 사실 것이다. 천국에 사시는 할머니를 위한 기도가 흘러나왔다. “슬픔도 고통도 없는 주님의 나라에서 영생복락 누리소서!”




이수현 할머니에 대한 상상은 하늘나라에 계신 엄마 아버지를 생각나게 했고, 엄마 아버지와 함께 하늘의 찬양을 부르고 있을 믿음을 지킨 성도들을 상상하게 했다. 정말이지 “구름 떼처럼 많은” 신앙의 증인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었다. 성 패트릭의 기도가 생각났다. “나 오늘 일어납니다. 믿음의 조상들의 기도에 힘입어!” 그래, 내가 살아가면서 진실을 지키고, 본질을 갈망하며, 실재를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먼저 그 길을 걸어간 믿음의 조상들의 기도에 힘입은 것이었다.

중보적 상상력은 내 존재와 내 삶이 누군가의 기도로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는 결코 원자같이 고립된 존재가 아니었다. 수없이 많은 “너”들로부터 분리된 존재도 아니었다. 내가 먹는 밥 한 숟가락에도, 내가 입는 옷 한 벌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의 삶이 들어있었다.

영적으로는 더욱 연결되어 있었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고, 계시록의 저자가 “네 생물” “이십사 장로” 등으로 형상화한 신령한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고, 구름 떼처럼 많은 신앙의 증인들과 연결되어 있었다. 비르질 게오르규가 『25시에서 영원으로』에서 한 말이 떠올랐다.
고립된 그리스도인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첫 번째 사람, 모든 시대의 사람, 그리고 이 땅 모든 곳의 사람과 동시대인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세상에 홀로 있지 않다. 어떤 그리스도인도 어떤 한 시대, 어떤 한 시기, 어떤 한 장소에 홀로 살았거나 살거나 살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시대,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동시에 산다. 세상 창조의 칠일과 부활을 통해 실현된 새 창조의 제8요일의 역사를 살아간다.
이 말이 관념이 아니라 현실로 느껴졌다.

아마 홀로 존재할 수 없음을 잘 알았기에, 누군가의 기도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기에 바울은 그렇게 간절하게 부탁했던 모양이다.
 
    “나도 기도합니다만,
    여러분도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해 주십시오.”(롬 15:30)
 
누군가의 기도로 지금 여기에 있는 벗들, 하나님 우러러 기도하면서 숨빛인의 삶을 살아가는 벗들, 우리도 서로를 위하여, 누군가를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자. 그 기도가 지루하거나 버거운 삶의 날들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실현된 새창조의 제8요일”로 만들 것이니!

- 이민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