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관상적 시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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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18회 작성일 23-08-22 11:39본문
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마 6:22)
깡패들이 시비 걸 때 주로 하는 말이 있다.
“왜 꼬나봐?”
그런 다음 한 마디 덧붙이면서 도발한다.
“뜳어?”
관상적 시선
사람들은 자기를 쳐다보는 시선에 민감하다. 시선도 가지가지다. 좀팽이들의 기분 나쁜 시선이 있고, 갑질하는 못난이의 모멸감 가득한 시선이 있다. 사이코패스의 섬뜩한 시선도 있고 범죄자의 오싹한 시선도 있다. 반대로 엄마의 자애로운 시선도 있고, 연인의 사랑이 듬뿍 담긴 시선도 있다. 요즘 나를 행복하게 하는 시선은 장난기와 웃음기 가득한 손주의 시선이다.
벗들은 어떤 눈으로 사람을 보고, 어떤 시선으로 삶을 보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든 것을 “관상적 시선”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게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관상적 시선이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서 관상 상태에서 열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관상적 시선은 평상시의 시선과 완전히 다르다.
관상적 시선을 알려면 “관상적”이라는 말뜻을 먼저 새겨야 한다. 히브리서 12장 2절 잘 알려준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떼제 찬양에 이런 찬양이 있다. “우리는 예수를 바라봅니다. 우리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간단하다. 관상이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나는 하나님과 하나 되고, 하나님은 나와 하나 되신다. 이때 세례를 통해 우리 안에 이미 내재하시는 성령님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나는 성령 충만한 상태에 들어간다. 이게 바로 관상적인 상태다. 한 마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한 현존과 사랑의 친교 속에 참여하는 상태가 바로 관상 상태다.
한 마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한 현존과 사랑의 친교 속에 참여하는 상태가 바로 관상 상태다.
관상 상태에 있을 때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인식 능력도 새로워져서 이성을 초월한 직관 능력이 발달한다. 상상력도 달라진다. 모태에까지 펼쳐지고, 태초에까지 이르는 근원에 대한 상상력이 열린다. 모든 사물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알아차리는 성사적 상상력도 깨어난다. 내가 누군가의 기도로 영성생활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 중보적 상상력도 활성화된다.
관상 상태에서 직관 능력이 깨어나고 상상력이 정화되면 새로운 눈이 열린다. 다시 말해 관상 상태에서는 눈도 정화되고 깨끗해진다. 따라서 관상적 눈을 “세례받은 눈”이라고 할 수도 있다.
관상 상태에 있을 때의 눈과 관상 상태를 벗어났을 때의 그것은 완전히 다르다. 관상 상태를 벗어난 눈이 모든 것을 진부하고 상투적이고 지루하게 만든다면, 관상 상태의 눈은 모든 것을 새롭고 경이롭고 신비하게 만든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나님을 보듯, 관상 상태의 눈은 “세례받은-정화된-깨끗한” 눈으로 하나님을 보며, 더 나아가, “세례받은-정화된-깨끗한” 눈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 하나님의 눈으로(또는 예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 “관상적” 시선이다.
이콘 묵상
관상적 시선이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기독교 영성전통은 관상적 시선을 깨닫게 하려고 이콘 묵상을 발전시켜왔다. 아래 그림은 스페인 화가 키코 아르게요가 그린 예수 이콘이다. 이제 이 글을 읽던 눈으로 그림을 몇 분간 주의 깊게 바라보기 바란다. 무엇이 보이는가. 느낌을 적어보라.
icon of jesus, kiko arguello, 1939~현재
(첨부파일)
이제 본 것을 서로 나눠보라. 그러면 사람마다 본 것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눈이 슬프다고도 하고, 무심하다도 한다. 왼쪽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는 사람도 있고, 튀어난 광대뼈를 보는 사람도 있다. 콧날이 날카롭다고 한 사람도 있고, 오른쪽 볼에 난 대여섯 가닥의 수염을 보는 사람도 있다. 꽉 다문 입에서 어떤 굳은 의지를 보는 사람도 있고, 눈에 초점이 없는 것 같다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본 것이 다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건 모든 “내가” 그림을 보았다는 점이다. 그림을 보는 주체는 나이고, 그림의 예수는 나에 의해 “알려지는” 대상이다. 주체인 내가 대상인 그림의 예수를 볼 때 나는 대상에 대한 앎을 얻는다. 각 사람이 얻은 지식은 다르지만 그것을 모두 합하면 상당한 양의 지식이 된다.
이 그림을 보는 다른 방법이 있다. 이제 이콘의 눈을 바라보면서, 이콘의 눈 즉 예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본다. 자신이 보는 주체가 되어 이콘이라는 대상에 “대해” 무언가 알려고 하는 충동이 일어나면 흘려보낸다. 그렇게 눈을 고요하게 만든 다음, 다시 예수님의 눈을 통해 자신을 본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눈을 통해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본다. 이때 보는 주체는 예수님이고, 자신은 예수님이 보시는 대상이 된다. 시선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이러한 시선의 변화야말로 이콘 묵상의 커다란 은총이다. 이건 혁명이다! 삶의 모든 것이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이콘의 시선으로 자신을 20분 정도 바라본다. 바라보는 동안 판단하는 마음, 거리끼는 마음, 경직된 느낌, 호기심, 불신감 같은 것들이 일어나면 부드럽게 흘려보낸다. 이콘의 눈을 통해 지극한 사랑으로 여러분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계속 알아차린다. 하나님의 수용적 시선에서 벗어나 숨겨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한다. 모든 비밀이 깨끗해지고 치유되며 환히 빛을 받도록 모든 것을 활짝 열어젖힌다.
이런 식으로 이콘 묵상을 하게 되면 내가 예수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인식한다. 나는 “아는 자”가 아니라 “알려지는 자”가 된다. 예수님이 인식하는 주체이며 나는 인식되는 대상이다. 이때 “하나님께 알려지는 것”이 나의 인식작용을 채우기 시작한다. 마침내 나는 이분법적인 주관/객관의 인식틀을 벗어나 상호-인식mutual knowing의 상태에 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이콘 묵상을 하게 되면 내가 예수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인식한다. 나는 “아는 자”가 아니라 “알려지는 자”가 된다.
이뿐 아니라 나는 예수님의(그리고 하나님의) 순수한 바라봄의 시선을 덧입으며, 예수님과(그리고 하나님과) 상호내재적 현존 상태에 들어간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관상 상태에 이르게 된다.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그냥 고요하고 개방되고 순수한 존재로 있으면서 단순한 마음의 눈eye of heart을 유지하면 된다.
이콘 묵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제 눈을 감고 이콘의 느낌을 마음에 간직한다. 그런 다음 이콘의 형체를 흘려보내 사라지게 한다. 이콘의 눈이 자신의 눈이 되는 것을 고요히 지켜본다. 하나님이 그 눈으로, 즉 예수님의 눈이 된 자신의 눈으로 사람을, 삶을, 세상을 보신다고 상상한다. 자신이 이콘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신을, 타인을, 삶을, 세상을 신성의 충만함 속에서 바라보며, 하나님처럼 자신을, 타인을, 삶을, 세상을 사랑한다.
이콘의 눈이 자신의 눈이 되는 것을 고요히 지켜본다. 하나님이 그 눈으로, 즉 예수님의 눈이 된 자신의 눈으로 사람을, 삶을, 세상을 보신다고 상상한다. 자신이 이콘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관상적 시선의 기적
관상적 시선으로 사람을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기적이 일어난다. 고민투성이, 문제투성이, 걱정투성이, 불안투성이인 내가 “세상의 빛”으로 변형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무지렁이들을, 상처 입은 짐승 같은 나를 그렇게 보신 것처럼 말이다.
관상적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이다. 이때 나는 세속이나 악마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 “너는 나의 것이다.”(사 43:1) 조롱과 멸시를 받아 마땅한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사랑하는”(사 43:4) 고귀한 존재가 된다. “주님께서 네게 지어주신 새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될 것이다.”(사 62:2-3)
관상적 시선으로 남을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남은 더 이상 경쟁자가 아니다. 비교의 대상도 아니다. 욕망 충족의 도구도 아니다. 친구가 되며, 길벗이 된다. 혈연과 지연과 학연을 넘어선 새로운 인연이 생긴다. 영적 인연이요, 소울프렌드가 된다. 취미가 같은 동호인들이나 동업관계에 있는 사업파트너나 경험이 비슷한 동창이나 고통을 함께 나눈 군대 동기나 심지어 피를 나눈 가족에게서 볼 수 없는 깊고 신비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사랑과 신뢰, 공감과 배려, 존중과 환대의 관계가 형성된다.
관상적 시선으로 삶을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일상이 신비와 신성으로 풍요로워진다. 섭리의 눈으로 삶을 보기 때문에 삶에서 “신성한 삶의 배열”을 읽는다. 하여, 지금 여기에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관상적 시선으로 삶을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일상이 신비와 신성으로 풍요로워진다. 섭리의 눈으로 삶을 보기 때문에 삶에서 “신성한 삶의 배열”을 읽는다. 하여, 지금 여기에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은총의 눈으로 삶을 보기 때문에 살면서 겪은 삶의 모든 고통이 보석처럼 빛나기 시작한다.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 내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기에 하나님 경험도 풍부해진다. 하나님 경험이 풍부해지는 만큼 삶이 더욱 신성해진다.
노동도 새로워진다. 나의 노동을 통해 누군가의 생명이 유지됨을 알기에 소명감을 갖게 된다. 모든 노동 속에는 누군가의 기도(노동자 자신의 기도, 노동자를 위한 부모의 기도, 아내의 기도, 남편의 기도, 아이들의 기도)가 들어있음을 깨닫기에 노동이 거룩해진다. 지겹고 고달팠던 노동은 마침내 거룩한 하나님의 일Officium Divinum[성무일도], Liturgia Honarum[시간전례])이 된다.
성찬의 신비
왜 관상기도를 할까?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타자를 보기 위해서다. “실제로” 하나님의 눈으로 삶을 보고, 섭리를 깨닫고, 은총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선이라 해도 좋고, 그리스도의 시선이라고 해도 좋은 것을 굳이 “관상적” 시선이라고 한 것이다. 관상기도 수련을 꾸준히 하면 “실제로” 눈의 정화, 곧 시선의 혁명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최고의 관상은 무엇일까? 바로 성찬례다. 성찬례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살을 상징하는 떡을 먹고,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마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들어와 소화과정을 거쳐 분해되고 해체된다. 신경 조직에 퍼지고, 혈관에 흐르며, 몸에 두루 스며든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몸이 되고,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가 된다.
이것이 성찬의 신비다. 성찬례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될 때 우리의 모든 지체 중 하나요, 예수께서 “몸의 등불”이라고 하신(마 6:22)인 눈도 그리스도의 눈이 된다. 나와 너의 온 몸이, 너와 너의 온 맘이, 나와 너가 만나는 온 사람이, 나와 너가 빚어가는 온 삶이 찬란한 천상의 빛으로 밝아진다. 아, 경이롭고 아름다운 성찬의 신비여!
- 이민재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네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마 6:22)
깡패들이 시비 걸 때 주로 하는 말이 있다.
“왜 꼬나봐?”
그런 다음 한 마디 덧붙이면서 도발한다.
“뜳어?”
관상적 시선
사람들은 자기를 쳐다보는 시선에 민감하다. 시선도 가지가지다. 좀팽이들의 기분 나쁜 시선이 있고, 갑질하는 못난이의 모멸감 가득한 시선이 있다. 사이코패스의 섬뜩한 시선도 있고 범죄자의 오싹한 시선도 있다. 반대로 엄마의 자애로운 시선도 있고, 연인의 사랑이 듬뿍 담긴 시선도 있다. 요즘 나를 행복하게 하는 시선은 장난기와 웃음기 가득한 손주의 시선이다.
벗들은 어떤 눈으로 사람을 보고, 어떤 시선으로 삶을 보는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든 것을 “관상적 시선”으로 보자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게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관상적 시선이란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서 관상 상태에서 열리는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관상적 시선은 평상시의 시선과 완전히 다르다.
관상적 시선을 알려면 “관상적”이라는 말뜻을 먼저 새겨야 한다. 히브리서 12장 2절 잘 알려준다.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떼제 찬양에 이런 찬양이 있다. “우리는 예수를 바라봅니다. 우리의 주님을 바라봅니다,” 간단하다. 관상이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나는 하나님과 하나 되고, 하나님은 나와 하나 되신다. 이때 세례를 통해 우리 안에 이미 내재하시는 성령님이 활발하게 활동하며, 나는 성령 충만한 상태에 들어간다. 이게 바로 관상적인 상태다. 한 마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한 현존과 사랑의 친교 속에 참여하는 상태가 바로 관상 상태다.
한 마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한 현존과 사랑의 친교 속에 참여하는 상태가 바로 관상 상태다.
관상 상태에 있을 때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인식 능력도 새로워져서 이성을 초월한 직관 능력이 발달한다. 상상력도 달라진다. 모태에까지 펼쳐지고, 태초에까지 이르는 근원에 대한 상상력이 열린다. 모든 사물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알아차리는 성사적 상상력도 깨어난다. 내가 누군가의 기도로 영성생활을 하고 있음을 깨닫는 중보적 상상력도 활성화된다.
관상 상태에서 직관 능력이 깨어나고 상상력이 정화되면 새로운 눈이 열린다. 다시 말해 관상 상태에서는 눈도 정화되고 깨끗해진다. 따라서 관상적 눈을 “세례받은 눈”이라고 할 수도 있다.
관상 상태에 있을 때의 눈과 관상 상태를 벗어났을 때의 그것은 완전히 다르다. 관상 상태를 벗어난 눈이 모든 것을 진부하고 상투적이고 지루하게 만든다면, 관상 상태의 눈은 모든 것을 새롭고 경이롭고 신비하게 만든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나님을 보듯, 관상 상태의 눈은 “세례받은-정화된-깨끗한” 눈으로 하나님을 보며, 더 나아가, “세례받은-정화된-깨끗한” 눈은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 하나님의 눈으로(또는 예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 “관상적” 시선이다.
이콘 묵상
관상적 시선이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기독교 영성전통은 관상적 시선을 깨닫게 하려고 이콘 묵상을 발전시켜왔다. 아래 그림은 스페인 화가 키코 아르게요가 그린 예수 이콘이다. 이제 이 글을 읽던 눈으로 그림을 몇 분간 주의 깊게 바라보기 바란다. 무엇이 보이는가. 느낌을 적어보라.
icon of jesus, kiko arguello, 1939~현재
(첨부파일)
이제 본 것을 서로 나눠보라. 그러면 사람마다 본 것이 다르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눈이 슬프다고도 하고, 무심하다도 한다. 왼쪽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는 사람도 있고, 튀어난 광대뼈를 보는 사람도 있다. 콧날이 날카롭다고 한 사람도 있고, 오른쪽 볼에 난 대여섯 가닥의 수염을 보는 사람도 있다. 꽉 다문 입에서 어떤 굳은 의지를 보는 사람도 있고, 눈에 초점이 없는 것 같다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본 것이 다르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건 모든 “내가” 그림을 보았다는 점이다. 그림을 보는 주체는 나이고, 그림의 예수는 나에 의해 “알려지는” 대상이다. 주체인 내가 대상인 그림의 예수를 볼 때 나는 대상에 대한 앎을 얻는다. 각 사람이 얻은 지식은 다르지만 그것을 모두 합하면 상당한 양의 지식이 된다.
이 그림을 보는 다른 방법이 있다. 이제 이콘의 눈을 바라보면서, 이콘의 눈 즉 예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본다. 자신이 보는 주체가 되어 이콘이라는 대상에 “대해” 무언가 알려고 하는 충동이 일어나면 흘려보낸다. 그렇게 눈을 고요하게 만든 다음, 다시 예수님의 눈을 통해 자신을 본다. 더 나아가 예수님의 눈을 통해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을 본다. 이때 보는 주체는 예수님이고, 자신은 예수님이 보시는 대상이 된다. 시선의 방향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이러한 시선의 변화야말로 이콘 묵상의 커다란 은총이다. 이건 혁명이다! 삶의 모든 것이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이콘의 시선으로 자신을 20분 정도 바라본다. 바라보는 동안 판단하는 마음, 거리끼는 마음, 경직된 느낌, 호기심, 불신감 같은 것들이 일어나면 부드럽게 흘려보낸다. 이콘의 눈을 통해 지극한 사랑으로 여러분을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계속 알아차린다. 하나님의 수용적 시선에서 벗어나 숨겨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한다. 모든 비밀이 깨끗해지고 치유되며 환히 빛을 받도록 모든 것을 활짝 열어젖힌다.
이런 식으로 이콘 묵상을 하게 되면 내가 예수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인식한다. 나는 “아는 자”가 아니라 “알려지는 자”가 된다. 예수님이 인식하는 주체이며 나는 인식되는 대상이다. 이때 “하나님께 알려지는 것”이 나의 인식작용을 채우기 시작한다. 마침내 나는 이분법적인 주관/객관의 인식틀을 벗어나 상호-인식mutual knowing의 상태에 들어간다.
이런 식으로 이콘 묵상을 하게 되면 내가 예수님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를 인식한다. 나는 “아는 자”가 아니라 “알려지는 자”가 된다.
이뿐 아니라 나는 예수님의(그리고 하나님의) 순수한 바라봄의 시선을 덧입으며, 예수님과(그리고 하나님과) 상호내재적 현존 상태에 들어간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관상 상태에 이르게 된다.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그냥 고요하고 개방되고 순수한 존재로 있으면서 단순한 마음의 눈eye of heart을 유지하면 된다.
이콘 묵상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이제 눈을 감고 이콘의 느낌을 마음에 간직한다. 그런 다음 이콘의 형체를 흘려보내 사라지게 한다. 이콘의 눈이 자신의 눈이 되는 것을 고요히 지켜본다. 하나님이 그 눈으로, 즉 예수님의 눈이 된 자신의 눈으로 사람을, 삶을, 세상을 보신다고 상상한다. 자신이 이콘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자신을, 타인을, 삶을, 세상을 신성의 충만함 속에서 바라보며, 하나님처럼 자신을, 타인을, 삶을, 세상을 사랑한다.
이콘의 눈이 자신의 눈이 되는 것을 고요히 지켜본다. 하나님이 그 눈으로, 즉 예수님의 눈이 된 자신의 눈으로 사람을, 삶을, 세상을 보신다고 상상한다. 자신이 이콘이 되고, 하나님의 형상이 되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관상적 시선의 기적
관상적 시선으로 사람을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기적이 일어난다. 고민투성이, 문제투성이, 걱정투성이, 불안투성이인 내가 “세상의 빛”으로 변형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무지렁이들을, 상처 입은 짐승 같은 나를 그렇게 보신 것처럼 말이다.
관상적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은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를 보는 것이다. 이때 나는 세속이나 악마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가 된다. “너는 나의 것이다.”(사 43:1) 조롱과 멸시를 받아 마땅한 무가치한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겨 사랑하는”(사 43:4) 고귀한 존재가 된다. “주님께서 네게 지어주신 새이름으로 부를 것이다. 너는 주님의 손에 들려 있는 아름다운 면류관이 될 것이며, 하나님의 손바닥에 놓여 있는 왕관이 될 것이다.”(사 62:2-3)
관상적 시선으로 남을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남은 더 이상 경쟁자가 아니다. 비교의 대상도 아니다. 욕망 충족의 도구도 아니다. 친구가 되며, 길벗이 된다. 혈연과 지연과 학연을 넘어선 새로운 인연이 생긴다. 영적 인연이요, 소울프렌드가 된다. 취미가 같은 동호인들이나 동업관계에 있는 사업파트너나 경험이 비슷한 동창이나 고통을 함께 나눈 군대 동기나 심지어 피를 나눈 가족에게서 볼 수 없는 깊고 신비한 만남이 이루어진다. 사랑과 신뢰, 공감과 배려, 존중과 환대의 관계가 형성된다.
관상적 시선으로 삶을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일상이 신비와 신성으로 풍요로워진다. 섭리의 눈으로 삶을 보기 때문에 삶에서 “신성한 삶의 배열”을 읽는다. 하여, 지금 여기에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관상적 시선으로 삶을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일상이 신비와 신성으로 풍요로워진다. 섭리의 눈으로 삶을 보기 때문에 삶에서 “신성한 삶의 배열”을 읽는다. 하여, 지금 여기에 이런 사람들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은총의 눈으로 삶을 보기 때문에 살면서 겪은 삶의 모든 고통이 보석처럼 빛나기 시작한다.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밑거름이 된다. 내가 맺고 있는 모든 관계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알기에 하나님 경험도 풍부해진다. 하나님 경험이 풍부해지는 만큼 삶이 더욱 신성해진다.
노동도 새로워진다. 나의 노동을 통해 누군가의 생명이 유지됨을 알기에 소명감을 갖게 된다. 모든 노동 속에는 누군가의 기도(노동자 자신의 기도, 노동자를 위한 부모의 기도, 아내의 기도, 남편의 기도, 아이들의 기도)가 들어있음을 깨닫기에 노동이 거룩해진다. 지겹고 고달팠던 노동은 마침내 거룩한 하나님의 일Officium Divinum[성무일도], Liturgia Honarum[시간전례])이 된다.
성찬의 신비
왜 관상기도를 할까?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정도가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다. “실제로” 그리스도의 따뜻한 시선으로 나를 보고, 타자를 보기 위해서다. “실제로” 하나님의 눈으로 삶을 보고, 섭리를 깨닫고, 은총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다. 그래서 하나님의 시선이라 해도 좋고, 그리스도의 시선이라고 해도 좋은 것을 굳이 “관상적” 시선이라고 한 것이다. 관상기도 수련을 꾸준히 하면 “실제로” 눈의 정화, 곧 시선의 혁명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최고의 관상은 무엇일까? 바로 성찬례다. 성찬례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살을 상징하는 떡을 먹고,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를 마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들어와 소화과정을 거쳐 분해되고 해체된다. 신경 조직에 퍼지고, 혈관에 흐르며, 몸에 두루 스며든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몸이 되고,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가 된다.
이것이 성찬의 신비다. 성찬례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될 때 우리의 모든 지체 중 하나요, 예수께서 “몸의 등불”이라고 하신(마 6:22)인 눈도 그리스도의 눈이 된다. 나와 너의 온 몸이, 너와 너의 온 맘이, 나와 너가 만나는 온 사람이, 나와 너가 빚어가는 온 삶이 찬란한 천상의 빛으로 밝아진다. 아, 경이롭고 아름다운 성찬의 신비여!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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