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삶) 어둔 밤과 정화(淨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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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705회 작성일 23-03-22 21:51본문
영성생활이란 시간 속에서 성장하고 발전되기 때문에 많은 영성가들은 그 과정을 설명하려고 여러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같은 노력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는데 첫째는 이론적으로 영성생활을 이해하기 위함이고, 둘째는 다른 이들의 영적 여정을 돕고 있는 영적지도자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영성가들은 관점에 따라 다양한 표현으로 그 여정을 정의하였지만,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표현은 정화淨化, 조명照明, 일치一致라는 관상생활의 고전적이 세 국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화의 길은 영성생활에서 우리들의 무질서한 성향들과 죄로부터 영혼이 깨끗하게 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조명의 길은 긍정적인 영적 깨달음과 성장이 강조되는 과정이고, 마지막으로 일치의 길은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과의 친밀한 연합을 이루는 단계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영성생활에 대한 이같은 구분이 편리하긴 할지라도 누가 어떤 단계에 있는지 규정하려는 노력은 권장할 만한 일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국면에는 다른 국면의 요소들이 섞여 있을 수 있고, 누군가의 영적상태를 어떤 단계로 규정하는 일이 한 개인의 영성생활을 절망스러운 결론으로 이끌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정화의 길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의 번잡한 생활에 만족하기를 거부하면서 더 깊은 영적교제를 갈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생활이 더욱 친숙해지고, 과거 일상에서 매우 적절하다고 여겼던 의식이나 태도와 첨예하게 충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죄를 만나게 되면 기도하는 사람은 존재의 변화와 회심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변화를 향한 노력에서 나약하고 무력한 자신을 만나게 되면서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한 변화를 더욱 갈망하게 됩니다. 영성가들은 영혼의 이같은 여정을 정화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려는 사람에게는 모두 신중한 자기-단순화, 그리고 마음과 의지의 정화가 요구됩니다. 이 여정을 잘 통과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하여 우리를 정화하시는 하느님께 협력해야만 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용기와 단순한 마음 그리고 절제입니다. 정화의 과정은 종종 고통을 수반하는데 하느님께서 우리의 정화를 위하여 때로 고통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정화를 통해 우리 영혼은 일상에서 하느님의 섭리에 보다 민감해질 수 있습니다.
정화를 통한 이기심의 죽음, 사심 없는 상태, 자비한 마음의 눈이 바로 참 지식과 만나는 조건의 비밀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느님을 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이처럼 급작스럽게 또는 점진적으로 ‘참된 지혜’를 향하여 나가게 되고, 이같은 시각의 변화는 그의 인격 전체에, 지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측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이 바로 ‘정화淨化’가 뜻하는 것입니다.
이 정화의 여정을 가장 탁월하게 이론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십자가의 성 요한John of the Cross 입니다. 그는 사랑의 산 불꽃, 가르멜의 산길, 어둔 밤 등 그의 기념비적 저서를 통하여 정화를 통한 일치로의 여정을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의 책에 서술된 것처럼 자신에게 이같은 이론을 논리적으로 적용하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강제할 수 없지만. 그의 설명에 비추어 자신이 처한 영적상황과 상태를 이해하고, 지금 자신에게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으며, 그것을 쉽게 받아들여 따를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 여정을 감각의 정화와 영혼의 정화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감각의 정화를 통하여 감각이 은총과 이성에 복종하게 되고, 영의 정화를 통해서 영혼이 성령의 활동에 복종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글은 요한의 언어를 가능한 그가 사용한 표현 그대로 사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중세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16세기를 살았던 그의 시대적 상황과 아직 중세적 표현들이 남아있는 표현들은 우리 시대에서 어떻게 적용할지를 염두에 두면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십자가의 성 요한의 이론적 가르침이 유효하다는 것에 많은 영성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가르침이 우리의 영적체험으로 입증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는 것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외적 감각의 정화
외적 감각들을 능동적으로 정화하는 목적은 감각의 과도한 사용을 억제하여 믿음으로 조명된 이성의 법칙에 그 감각을 예속시키기 위함입니다. 잘 훈련된 인간의 육신(肉身)은 훌륭한 성화(聖化)의 도구이지만, 본성이 타락한 상태에서 육신은 감각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거스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경향이 제어되지 않는다면 걷잡을 수 없게 되어 마침내 욕구는 영적인 완덕의 길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고 맙니다. (로마서 7:15이하)
요한은 감각을 정화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말하는데, 첫째는 부정한 쾌락을 자아낼지도 모르는 것을 감각에서 멀리하는 것이고, 둘째는 육체적인 금욕을 수단으로 해서 적극적인 극기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육체적인 고행이든 지나친 것은 주의하라고 권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과 정신과 인내심을 가지고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작은 십자가들을 받아들임으로써 평범하고 일상적인 신체적 극기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상에서의 수면, 식사, 인간관계 등에서 절제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내적 감각의 정화
이 과정은 우리의 극기와 노력으로 사욕(邪慾)을 거부함으로, 사욕이 갈수록 약해지는 과정입니다. 내적 감각의 정화란 우리의 상상력, 기억력, 정욕, 지성, 의지가 우리의 노력을 통해 정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 상상력을 억제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중요한 두 가지 장애가 있는데, 그것은 분산과 유혹입니다. 상상력에 대한 능동적 정화를 위하여 우리는 외적 감각들, 특히 보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見物生心) 또한 독서를 지혜롭게 선택하고, 무익한 심상으로 상상력을 채우는 것을 멈출 수 있습니다. 둘째, 기억은 우리 내면에 좋고 나쁜 모든 종류의 지식을 축적하기 때문에 정화를 필요로 합니다. 기억력의 정화를 위해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용서받았다는 믿음으로 참회와 함께 과거의 상처들과 화해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기억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기억과 묵상은 우리의 상상을 정화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셋째는 정욕의 정화인데, 정욕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정욕이 선을 위해서 사용될 때는 영혼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도움을 주지만, 악을 위해 사용될 때는 무서운 파괴력을 갖습니다. 정욕의 정화를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환경에서 오는 정욕이라면 건전한 오락이나 기분전환 혹은 여행을 할 수 있고, 오감(五感) 자체에서 오는 것이라면, 적당한 노동이나, 우리가 보는 것들과 상상력을 통해 하느님을 연상할 수 있도록 훈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각자의 기질에서 오는 것이라면, 반성과 의지력이 가장 좋은 치료제입니다. 심리학적 견지에서 볼 때, 정욕을 제어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그것을 제어하려는 단호한 의향입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정욕의 정화를 위한 노력이 정서의 소멸이나, 억압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선을 향한 대단한 정열이 없다면 완덕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지성은 정화인데, 요한은 지성과 의지의 탈선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정화가 정신의 중심에 까지 미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지성의 고유한 기능은 판단이고, 우리가 진리나 오류에 관해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지성의 판단입니다. 지성의 능동적 정화는 우선 이 기능을 유익하게 이용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지성을 정화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영혼은 지성을 하느님과 일치시키는 직접적이고 적절한 수단이 되는 믿음의 빛에 의해 그것이 인도되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지성은 믿음의 빛 아래 있어야 합니다.
다섯째는 의지의 정화입니다. 의지는 지성이 제안한 선을 따릅니다. 그러나 그 의지는 이기적 사랑과 이타적 사랑, 자발적 의지와 명령에 의한 의지처럼 다른 양상으로 외화 될 수 있으며, 의지를 바로 잡는 데에는 이중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의지에 완전히 복종하고 일치함으로써 하느님께 자신의 의지를 종속시키려는 노력이고, 둘째는 하급 기능들을 완전히 자신에게 종속시킬 때까지 그 기능들에 관해서 의지력을 강화시키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하느님을 향하여 자유롭게 내딛는 데 가장 장애거리가 되는 ‘자아’에서 이탈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외적 사물에서 이탈한다 하더라도 큰 이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 맛보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맛없는 거기를 거쳐 가라 / 모르는 것에 네가 다다르려면 모르는 거기를 거쳐 가라 ….
가르멜의 산길 中에서
이기적 자애自愛는 모든 죄의 근원이며, 우리 영성에 영향을 미치는 그만큼 그것은 모든 것을 그 둘레를 맴돌게 만드는 우리 삶의 중심점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성스러운 것들에서까지 자신을 찾습니다. 그들은 기도에서도 자신을 찾는데, 기도에서 감미로움과 위안을 느낄 때는 오래 지속하다가, 무미건조함을 느낄 때는 즉시 그만 둡니다. 성사를 받을 때도 감성적인 위안만 찾고, 영적지도를 받을 때도 유명한 지도자를 찾거나, 또는 이기적인 가치나 목적을 갖고 제 나름대로 편히 살도록 가르치는 지도자를 찾습니다.
이제까지 말한 능동적 정화의 여정은 죄를 피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깊어지면서 의식이 좀 더 순수하고 섬세해져 우리 죄의 뿌리까지 볼 수 있게 합니다. 이 여정에서 가능한 위험은 긴장과 무분별한 열심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위험은 초심자가 자신의 개인적 노력을 은총의 작용이나 하느님의 자유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다른 한편 능동적 정화의 여정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 걱정들과 본성적인 정서들에서 깨끗하게 되어, 그것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으로 다시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능동적 정화를 위한 극기의 여정에 이어 수동적인 정화에 대하여 말하는데, 이 수동적 정화에 대한 설명은 그가 영성신학에 공헌한 독창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수동적 정화의 여정을 감각의 밤과 영의 밤으로 나누어 설명하였습니다.
감각의 밤
진지하게 영적여정을 시작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두 가지 유혹이 있는데 첫째는 이전 삶에 대한 즐거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둘째는 새로 선택한 삶을 혐오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복음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고, 그리스도께 투신하는 첫 걸음을 내딛고 나면, 우리는 이내 곧 무의식 속에 있는 낡은 가치관들과의 싸움과 마주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같은 상황을 ‘우리가 청소를 시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내면을 더욱 밝게 비추시어 우리가 이전에 보지 못하였던 내면의 버러지들을 발견하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요한에 따르면 감각의 밤에 나타나는 첫 표지는 기도와 일상생활이 무미건조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감각의 밤에 경험하는 건조함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만족감이 사라지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증가했거나, 관상기도를 시작하는 데서 오는 직접적인 효과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수련에서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갖게 되는 동시에 이전에 즐기던 세속적 즐거움들 - 쾌락이나 힘, 안전 등 -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성령님은 이때 행복에 대한 우리의 끊임없는 욕구를 하느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음을 마음속에 주입시킵니다. 이로 인해 슬퍼지는 기간이 생기는데,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우리에게 행복을 주리라고 기대하였던 모든 것들을 점차 상대적인 것들로 다룰 수 있게 됩니다.
감각의 밤에 나타나는 두 번째 표지는 우리가 거꾸로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자신이 저지른 개인적인 잘못이나 실수로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였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시기는 은총으로 인한 무엇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더 복잡해 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은 더욱 간절하게 지속됩니다. 이 경험은 하느님과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게도 하지만, 실재로는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는 전환점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젖을 떼는 어린아이의 경험’과 비교하며 설명하는데, 유아는 젖을 떼는 것을 거부하지만 이후 단단하지만 더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감각의 밤의 세 번째 표지는 논리적 묵상을 할 수 없게 되거나, 하려는 마음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논리적 묵상을 하려는 마음이 없어지면 마음은 끊임없이 방황하게 됩니다. 의지만으로 하느님께 응답하려는 우리의 사랑, 찬미, 청원, 어떤 응답행위에서 우리는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합니다. 하느님과 혼자 있고 싶지만 하느님은 아득히 떨어져서 마치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감각의 밤은 이 세 가지 표지들이 모두 있어야 하며, 우리는 세 가지 표지의 시험을 모두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그는 성 안토니가 사막에서 하였던 경험을 예로 들어 세 가지 표지의 유혹들을 설명하는데 첫 번째 시험은 음욕과 자부심입니다. 그는 안토니가 그랬던 것처럼 강렬한 유혹에 대항할 만한 불길을 상상함으로써 음욕의 불길을 끌 수 있으며, 비난이나 분노, 혹은 낙심과 같은 정서적 반응을 동반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겸손으로 자부심을 물리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 유혹은 불경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불경의 영은 통제하려는 욕구에 대한 것인데, 감각에 밤에 우리는 아무것도 스스로 조정할 수 없다는 현실을 직면하며, 자신을 개선하려는 계획도 세울 수가 없게 되는데 이러한 욕구의 좌절은 불경할 정도의 분노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세 번째 유혹은 그가 ‘영혼의 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것은 어둔 밤 14장 3에 묘사된 것처럼 ‘영적 불확실성’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때 유혹은 자신의 성소나 양심의 심각한 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감각에 밤에 우리의 모든 관능적 만족은 말라버리고,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본성은 어떤 감정이라도 느낌을 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얻으려고 갈망하게 됩니다.
이 세 가지 유혹은 토마스 키딩이 말한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의 근원이 이기심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유혹들을 물리치기 위한 일을 시작하면 하느님께서 마무리하여 주십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감각의 밤을 대처하는 길로 다섯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 하느님이 정하신 기간에 고통스러운 시련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참을성 있게 받아들이면서 하느님 뜻에 온전히 의탁하는 것. 둘째, 정화 상태를 해로운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영혼 자체를 튼튼하게 해주고 영성생활의 진보를 가져오는 수단으로 생각할 것, 셋째, 고난 중에도 더 열렬히 기도하신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든 난관을 무릎 쓰고 기도에 정진할 것. 넷째, 평화와 고요 속에 머물며, 별다른 생각 없이 또 기쁨이나 감정에 대한 어떤 욕심도 없이 단순히 사랑스런 눈길로 하느님을 응시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 다섯째, 지혜롭고 경험 있는 지도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영적 지도자를 만나는 일이 이 순간보다 필요한 때는 없습니다.
보다 쉬운 것보다 보다 어려운 것을 / 보다 맛있는 것 보다, 보다 맛없는 것을 / 보다 즐거운 것보다 차라리 덜 즐거운 것을 / 쉬운 일보다 고된 일을 / 위로가 되는 일보다 위로 없는 일을 / 보다 큰 것보다 보다 작은 것을 …
가르멜의 산길 1권 11,2
감각의 밤에 우리가 얻게 되는 기본적인 열매는 겸손인데, 감각의 밤을 지나며 우리의 정서프로그램과 거짓 자아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이 정화의 과정에서 열리는 열매는 우리가 거짓 자아의 강박적이고 고식적인 방해로부터 해방되어, 거짓 자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감각의 밤에 거짓 자아는 작아지고, 하느님을 향한 신뢰가 더욱 자라면서 우리는 그 에너지를 더 좋은 다른 것에 쓸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감각의 밤을 통해 교만함이 정화되기 전에 영적인 위안과 어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면 환희의 감정이 넘쳐흐를 것이고, 만일 성격의 어두운 면들이 올라오면 깊은 낙담의 늪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 때 좋은 영적 가르침들은 이런 순진성에 대한 해독제가 됩니다. 모든 위대한 영적 전통은 영적여정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두 가지 수련을 요구하는데 첫째는 하느님을 향한 예배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헌신과 예배는 거룩한 독서와 기도 수련으로 계발되며, 이웃을 향한 봉사는 각자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감각의 밤에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에너지에서 얻는 한 가지 긍정적인 이익은 직관적 의식수준의 발전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감각의 밤은 우리가 지금까지 완전하다고 느꼈던 근본을 뒤집고, 현실을 보는 새로운 눈을 열어줍니다.
영의 밤
십자가의 요한이 신성한 일치의 시작이라고 부른 영의 밤은, 좀 더 깊은 정화를 위한 더 높은 단계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이전에 받았던 영적인 위안에 비례하여 이제는 고통스러운 결핍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는 하느님 현존체험이 적은 사람들이 많았던 사람들에 비해 덜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를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영의 밤은 이같은 유혹을 사라지게 만드는데 그 이유는 정화를 거치면서 자신이 모든 악을 저지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하느님을 의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여정은 성공담이 아니라 자아를 축소시키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겸손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어떤 죄도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영의 밤에 맺어지는 첫 열매는 우리가 영적인 은사와 선물을 가지고 명예스러운 역할을 맡으려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자신만을 특별하게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같은 방법으로 다루시되 각자에게 맞는 특별한 방식으로 대하신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열매는 어떤 정서적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하지 않는 정서를 단순히 의지의 힘으로 억압하거나 누르는 것이 아니고, 그 정서를 받아들여 우리 본성에 있는 이성과 직관에 융화시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정서 프로그램의 마지막 흔적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열매는 어린 시절 가졌던 혹은 우리가 속한 집단에서 숭배하는 하느님께 대한 생각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알고 있던 하느님에 대해서 더 이상 관심이 없어지고. 강력하고도 표현할 수 없는 에너지가 내부에서 솟아오름을 느낄 뿐입니다. 그 강력한 에너지는 분명히 인격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다루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비인격적인 것으로 경험되기도 합니다.
네 번째 열매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신학적 덕이라고 부르는 믿음, 사랑, 희망이 정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졌던 영적인 여행과 그것들을 위해 택했던 방법들, 우리의 성소, 활동, 그리스도 심지어는 하느님에 대한 개념조차 흔들릴 수 있습니다. 영의 밤에 얻어지는 가장 큰 열매는 하느님을 하느님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우리는 비록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자아승복과 포기가 영의 밤에 강력하게 자라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완전한 승복과 복종을 통하여 변형하는 일치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다섯 번째 열매는 우리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이기심을 떠나보내고, 하느님과 연합하며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열망입니다. 자아 중심의 나는 아주 작아지고 출에굽기에서 ‘나’(출에 3:14)라고 말씀하신 거룩한 분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영적 여정에서 확실한 것은 기대하는 것들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지의 세계로 자신을 내맡기는 신뢰의 도약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정화의 길은 영성생활에서 우리들의 무질서한 성향들과 죄로부터 영혼이 깨끗하게 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조명의 길은 긍정적인 영적 깨달음과 성장이 강조되는 과정이고, 마지막으로 일치의 길은 우리의 영혼이 하느님과의 친밀한 연합을 이루는 단계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은 영성생활에 대한 이같은 구분이 편리하긴 할지라도 누가 어떤 단계에 있는지 규정하려는 노력은 권장할 만한 일이 못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한 국면에는 다른 국면의 요소들이 섞여 있을 수 있고, 누군가의 영적상태를 어떤 단계로 규정하는 일이 한 개인의 영성생활을 절망스러운 결론으로 이끌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정화의 길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세상의 번잡한 생활에 만족하기를 거부하면서 더 깊은 영적교제를 갈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도생활이 더욱 친숙해지고, 과거 일상에서 매우 적절하다고 여겼던 의식이나 태도와 첨예하게 충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처럼 자신의 죄를 만나게 되면 기도하는 사람은 존재의 변화와 회심에 대한 갈망을 갖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 변화를 향한 노력에서 나약하고 무력한 자신을 만나게 되면서 하느님의 도우심에 의한 변화를 더욱 갈망하게 됩니다. 영성가들은 영혼의 이같은 여정을 정화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려는 사람에게는 모두 신중한 자기-단순화, 그리고 마음과 의지의 정화가 요구됩니다. 이 여정을 잘 통과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다하여 우리를 정화하시는 하느님께 협력해야만 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용기와 단순한 마음 그리고 절제입니다. 정화의 과정은 종종 고통을 수반하는데 하느님께서 우리의 정화를 위하여 때로 고통을 사용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정화를 통해 우리 영혼은 일상에서 하느님의 섭리에 보다 민감해질 수 있습니다.
정화를 통한 이기심의 죽음, 사심 없는 상태, 자비한 마음의 눈이 바로 참 지식과 만나는 조건의 비밀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마음이 가난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하느님을 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이처럼 급작스럽게 또는 점진적으로 ‘참된 지혜’를 향하여 나가게 되고, 이같은 시각의 변화는 그의 인격 전체에, 지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측면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이 바로 ‘정화淨化’가 뜻하는 것입니다.
이 정화의 여정을 가장 탁월하게 이론적으로 정리한 사람은 십자가의 성 요한John of the Cross 입니다. 그는 사랑의 산 불꽃, 가르멜의 산길, 어둔 밤 등 그의 기념비적 저서를 통하여 정화를 통한 일치로의 여정을 설명하였습니다. 우리는 그의 책에 서술된 것처럼 자신에게 이같은 이론을 논리적으로 적용하고, 그것을 실천하도록 강제할 수 없지만. 그의 설명에 비추어 자신이 처한 영적상황과 상태를 이해하고, 지금 자신에게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를 깨달을 수 있으며, 그것을 쉽게 받아들여 따를 수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 여정을 감각의 정화와 영혼의 정화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는데, 감각의 정화를 통하여 감각이 은총과 이성에 복종하게 되고, 영의 정화를 통해서 영혼이 성령의 활동에 복종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 글은 요한의 언어를 가능한 그가 사용한 표현 그대로 사용하고자 하였습니다. 중세에서 근대로 이어지는 16세기를 살았던 그의 시대적 상황과 아직 중세적 표현들이 남아있는 표현들은 우리 시대에서 어떻게 적용할지를 염두에 두면서 읽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십자가의 성 요한의 이론적 가르침이 유효하다는 것에 많은 영성학자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가르침이 우리의 영적체험으로 입증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는 것을 공유하고 싶습니다.
외적 감각의 정화
외적 감각들을 능동적으로 정화하는 목적은 감각의 과도한 사용을 억제하여 믿음으로 조명된 이성의 법칙에 그 감각을 예속시키기 위함입니다. 잘 훈련된 인간의 육신(肉身)은 훌륭한 성화(聖化)의 도구이지만, 본성이 타락한 상태에서 육신은 감각을 즐겁게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거스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일 이러한 경향이 제어되지 않는다면 걷잡을 수 없게 되어 마침내 욕구는 영적인 완덕의 길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고 맙니다. (로마서 7:15이하)
요한은 감각을 정화하는 방법으로 두 가지를 말하는데, 첫째는 부정한 쾌락을 자아낼지도 모르는 것을 감각에서 멀리하는 것이고, 둘째는 육체적인 금욕을 수단으로 해서 적극적인 극기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육체적인 고행이든 지나친 것은 주의하라고 권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음과 정신과 인내심을 가지고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작은 십자가들을 받아들임으로써 평범하고 일상적인 신체적 극기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일상에서의 수면, 식사, 인간관계 등에서 절제를 실천할 수 있습니다.
내적 감각의 정화
이 과정은 우리의 극기와 노력으로 사욕(邪慾)을 거부함으로, 사욕이 갈수록 약해지는 과정입니다. 내적 감각의 정화란 우리의 상상력, 기억력, 정욕, 지성, 의지가 우리의 노력을 통해 정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첫째, 상상력을 억제할 수 없을 때 일어나는 중요한 두 가지 장애가 있는데, 그것은 분산과 유혹입니다. 상상력에 대한 능동적 정화를 위하여 우리는 외적 감각들, 특히 보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見物生心) 또한 독서를 지혜롭게 선택하고, 무익한 심상으로 상상력을 채우는 것을 멈출 수 있습니다. 둘째, 기억은 우리 내면에 좋고 나쁜 모든 종류의 지식을 축적하기 때문에 정화를 필요로 합니다. 기억력의 정화를 위해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용서받았다는 믿음으로 참회와 함께 과거의 상처들과 화해하여야 합니다. 우리의 기억을 하느님께로 향하게 하는 기억과 묵상은 우리의 상상을 정화하는데 큰 도움을 줍니다.
셋째는 정욕의 정화인데, 정욕은 그 자체로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정욕이 선을 위해서 사용될 때는 영혼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도움을 주지만, 악을 위해 사용될 때는 무서운 파괴력을 갖습니다. 정욕의 정화를 위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이 환경에서 오는 정욕이라면 건전한 오락이나 기분전환 혹은 여행을 할 수 있고, 오감(五感) 자체에서 오는 것이라면, 적당한 노동이나, 우리가 보는 것들과 상상력을 통해 하느님을 연상할 수 있도록 훈련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것이 각자의 기질에서 오는 것이라면, 반성과 의지력이 가장 좋은 치료제입니다. 심리학적 견지에서 볼 때, 정욕을 제어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은 그것을 제어하려는 단호한 의향입니다. 하지만 기억해야 할 것은 정욕의 정화를 위한 노력이 정서의 소멸이나, 억압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선을 향한 대단한 정열이 없다면 완덕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넷째는 지성은 정화인데, 요한은 지성과 의지의 탈선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정화가 정신의 중심에 까지 미칠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지성의 고유한 기능은 판단이고, 우리가 진리나 오류에 관해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지성의 판단입니다. 지성의 능동적 정화는 우선 이 기능을 유익하게 이용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지성을 정화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영혼은 지성을 하느님과 일치시키는 직접적이고 적절한 수단이 되는 믿음의 빛에 의해 그것이 인도되도록 해야 합니다. 따라서 지성은 믿음의 빛 아래 있어야 합니다.
다섯째는 의지의 정화입니다. 의지는 지성이 제안한 선을 따릅니다. 그러나 그 의지는 이기적 사랑과 이타적 사랑, 자발적 의지와 명령에 의한 의지처럼 다른 양상으로 외화 될 수 있으며, 의지를 바로 잡는 데에는 이중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의지에 완전히 복종하고 일치함으로써 하느님께 자신의 의지를 종속시키려는 노력이고, 둘째는 하급 기능들을 완전히 자신에게 종속시킬 때까지 그 기능들에 관해서 의지력을 강화시키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하느님을 향하여 자유롭게 내딛는 데 가장 장애거리가 되는 ‘자아’에서 이탈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외적 사물에서 이탈한다 하더라도 큰 이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것을 맛보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맛보려 하지 말라 / 모든 것을 얻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얻으려 하지 말라 / 모든 것이 되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되려고 하지 말라 / 모든 것을 알기에 다다르려면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말라 / 맛보지 못한 것에 다다르려면 맛없는 거기를 거쳐 가라 / 모르는 것에 네가 다다르려면 모르는 거기를 거쳐 가라 ….
가르멜의 산길 中에서
이기적 자애自愛는 모든 죄의 근원이며, 우리 영성에 영향을 미치는 그만큼 그것은 모든 것을 그 둘레를 맴돌게 만드는 우리 삶의 중심점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심지어 성스러운 것들에서까지 자신을 찾습니다. 그들은 기도에서도 자신을 찾는데, 기도에서 감미로움과 위안을 느낄 때는 오래 지속하다가, 무미건조함을 느낄 때는 즉시 그만 둡니다. 성사를 받을 때도 감성적인 위안만 찾고, 영적지도를 받을 때도 유명한 지도자를 찾거나, 또는 이기적인 가치나 목적을 갖고 제 나름대로 편히 살도록 가르치는 지도자를 찾습니다.
이제까지 말한 능동적 정화의 여정은 죄를 피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깊어지면서 의식이 좀 더 순수하고 섬세해져 우리 죄의 뿌리까지 볼 수 있게 합니다. 이 여정에서 가능한 위험은 긴장과 무분별한 열심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위험은 초심자가 자신의 개인적 노력을 은총의 작용이나 하느님의 자유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다른 한편 능동적 정화의 여정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 걱정들과 본성적인 정서들에서 깨끗하게 되어, 그것들을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으로 다시 볼 수 있게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능동적 정화를 위한 극기의 여정에 이어 수동적인 정화에 대하여 말하는데, 이 수동적 정화에 대한 설명은 그가 영성신학에 공헌한 독창적인 분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 수동적 정화의 여정을 감각의 밤과 영의 밤으로 나누어 설명하였습니다.
감각의 밤
진지하게 영적여정을 시작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두 가지 유혹이 있는데 첫째는 이전 삶에 대한 즐거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이고, 둘째는 새로 선택한 삶을 혐오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복음을 따라 살겠다고 결심하고, 그리스도께 투신하는 첫 걸음을 내딛고 나면, 우리는 이내 곧 무의식 속에 있는 낡은 가치관들과의 싸움과 마주하게 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이같은 상황을 ‘우리가 청소를 시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내면을 더욱 밝게 비추시어 우리가 이전에 보지 못하였던 내면의 버러지들을 발견하게 한다.’고 설명합니다.
요한에 따르면 감각의 밤에 나타나는 첫 표지는 기도와 일상생활이 무미건조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감각의 밤에 경험하는 건조함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만족감이 사라지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증가했거나, 관상기도를 시작하는 데서 오는 직접적인 효과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 수련에서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하고 있다는 강한 느낌을 갖게 되는 동시에 이전에 즐기던 세속적 즐거움들 - 쾌락이나 힘, 안전 등 -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합니다. 성령님은 이때 행복에 대한 우리의 끊임없는 욕구를 하느님만이 채워주실 수 있음을 마음속에 주입시킵니다. 이로 인해 슬퍼지는 기간이 생기는데,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우리에게 행복을 주리라고 기대하였던 모든 것들을 점차 상대적인 것들로 다룰 수 있게 됩니다.
감각의 밤에 나타나는 두 번째 표지는 우리가 거꾸로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자신이 저지른 개인적인 잘못이나 실수로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였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이 시기는 은총으로 인한 무엇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더 복잡해 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은 더욱 간절하게 지속됩니다. 이 경험은 하느님과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게도 하지만, 실재로는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는 전환점입니다. 요한은 그것을 ‘젖을 떼는 어린아이의 경험’과 비교하며 설명하는데, 유아는 젖을 떼는 것을 거부하지만 이후 단단하지만 더 영양가 있는 음식을 섭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감각의 밤의 세 번째 표지는 논리적 묵상을 할 수 없게 되거나, 하려는 마음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논리적 묵상을 하려는 마음이 없어지면 마음은 끊임없이 방황하게 됩니다. 의지만으로 하느님께 응답하려는 우리의 사랑, 찬미, 청원, 어떤 응답행위에서 우리는 아무런 이익도 얻지 못합니다. 하느님과 혼자 있고 싶지만 하느님은 아득히 떨어져서 마치 우리에게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에 따르면 감각의 밤은 이 세 가지 표지들이 모두 있어야 하며, 우리는 세 가지 표지의 시험을 모두 경험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그는 성 안토니가 사막에서 하였던 경험을 예로 들어 세 가지 표지의 유혹들을 설명하는데 첫 번째 시험은 음욕과 자부심입니다. 그는 안토니가 그랬던 것처럼 강렬한 유혹에 대항할 만한 불길을 상상함으로써 음욕의 불길을 끌 수 있으며, 비난이나 분노, 혹은 낙심과 같은 정서적 반응을 동반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겸손으로 자부심을 물리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두 번째 유혹은 불경심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불경의 영은 통제하려는 욕구에 대한 것인데, 감각에 밤에 우리는 아무것도 스스로 조정할 수 없다는 현실을 직면하며, 자신을 개선하려는 계획도 세울 수가 없게 되는데 이러한 욕구의 좌절은 불경할 정도의 분노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세 번째 유혹은 그가 ‘영혼의 밤’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그것은 어둔 밤 14장 3에 묘사된 것처럼 ‘영적 불확실성’을 불러일으킵니다. 이 때 유혹은 자신의 성소나 양심의 심각한 문제와 관련하여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감각에 밤에 우리의 모든 관능적 만족은 말라버리고, 이런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본성은 어떤 감정이라도 느낌을 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얻으려고 갈망하게 됩니다.
이 세 가지 유혹은 토마스 키딩이 말한 ‘행복을 위한 정서 프로그램’의 근원이 이기심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유혹들을 물리치기 위한 일을 시작하면 하느님께서 마무리하여 주십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감각의 밤을 대처하는 길로 다섯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첫째, 하느님이 정하신 기간에 고통스러운 시련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참을성 있게 받아들이면서 하느님 뜻에 온전히 의탁하는 것. 둘째, 정화 상태를 해로운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영혼 자체를 튼튼하게 해주고 영성생활의 진보를 가져오는 수단으로 생각할 것, 셋째, 고난 중에도 더 열렬히 기도하신 겟세마네 동산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모든 난관을 무릎 쓰고 기도에 정진할 것. 넷째, 평화와 고요 속에 머물며, 별다른 생각 없이 또 기쁨이나 감정에 대한 어떤 욕심도 없이 단순히 사랑스런 눈길로 하느님을 응시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 다섯째, 지혜롭고 경험 있는 지도자를 만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영적 지도자를 만나는 일이 이 순간보다 필요한 때는 없습니다.
보다 쉬운 것보다 보다 어려운 것을 / 보다 맛있는 것 보다, 보다 맛없는 것을 / 보다 즐거운 것보다 차라리 덜 즐거운 것을 / 쉬운 일보다 고된 일을 / 위로가 되는 일보다 위로 없는 일을 / 보다 큰 것보다 보다 작은 것을 …
가르멜의 산길 1권 11,2
감각의 밤에 우리가 얻게 되는 기본적인 열매는 겸손인데, 감각의 밤을 지나며 우리의 정서프로그램과 거짓 자아가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이 정화의 과정에서 열리는 열매는 우리가 거짓 자아의 강박적이고 고식적인 방해로부터 해방되어, 거짓 자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감각의 밤에 거짓 자아는 작아지고, 하느님을 향한 신뢰가 더욱 자라면서 우리는 그 에너지를 더 좋은 다른 것에 쓸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감각의 밤을 통해 교만함이 정화되기 전에 영적인 위안과 어떤 성령의 은사를 체험하면 환희의 감정이 넘쳐흐를 것이고, 만일 성격의 어두운 면들이 올라오면 깊은 낙담의 늪에 빠질 수 있습니다. 이 때 좋은 영적 가르침들은 이런 순진성에 대한 해독제가 됩니다. 모든 위대한 영적 전통은 영적여정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두 가지 수련을 요구하는데 첫째는 하느님을 향한 예배이고, 둘째는 다른 사람을 위한 봉사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헌신과 예배는 거룩한 독서와 기도 수련으로 계발되며, 이웃을 향한 봉사는 각자의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사랑의 실천입니다. 감각의 밤에 무의식에서 올라오는 에너지에서 얻는 한 가지 긍정적인 이익은 직관적 의식수준의 발전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감각의 밤은 우리가 지금까지 완전하다고 느꼈던 근본을 뒤집고, 현실을 보는 새로운 눈을 열어줍니다.
영의 밤
십자가의 요한이 신성한 일치의 시작이라고 부른 영의 밤은, 좀 더 깊은 정화를 위한 더 높은 단계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이전에 받았던 영적인 위안에 비례하여 이제는 고통스러운 결핍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는 하느님 현존체험이 적은 사람들이 많았던 사람들에 비해 덜 고통스러울 수 있습니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종종 하느님께서 주신 성령의 은사를 자신과 동일시하려는 유혹에 빠지곤 합니다. 영의 밤은 이같은 유혹을 사라지게 만드는데 그 이유는 정화를 거치면서 자신이 모든 악을 저지를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하느님을 의지하는 것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느끼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영적여정은 성공담이 아니라 자아를 축소시키는 과정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겸손이란 기본적으로 우리가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다면 어떤 죄도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영의 밤에 맺어지는 첫 열매는 우리가 영적인 은사와 선물을 가지고 명예스러운 역할을 맡으려는 유혹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 자신만을 특별하게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같은 방법으로 다루시되 각자에게 맞는 특별한 방식으로 대하신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커지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열매는 어떤 정서적 지배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원하지 않는 정서를 단순히 의지의 힘으로 억압하거나 누르는 것이 아니고, 그 정서를 받아들여 우리 본성에 있는 이성과 직관에 융화시키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정서 프로그램의 마지막 흔적을 제거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열매는 어린 시절 가졌던 혹은 우리가 속한 집단에서 숭배하는 하느님께 대한 생각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전에 알고 있던 하느님에 대해서 더 이상 관심이 없어지고. 강력하고도 표현할 수 없는 에너지가 내부에서 솟아오름을 느낄 뿐입니다. 그 강력한 에너지는 분명히 인격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다루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것이 비인격적인 것으로 경험되기도 합니다.
네 번째 열매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신학적 덕이라고 부르는 믿음, 사랑, 희망이 정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졌던 영적인 여행과 그것들을 위해 택했던 방법들, 우리의 성소, 활동, 그리스도 심지어는 하느님에 대한 개념조차 흔들릴 수 있습니다. 영의 밤에 얻어지는 가장 큰 열매는 하느님을 하느님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우리는 비록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자아승복과 포기가 영의 밤에 강력하게 자라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완전한 승복과 복종을 통하여 변형하는 일치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다섯 번째 열매는 우리 안에 아직도 남아 있는 이기심을 떠나보내고, 하느님과 연합하며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열망입니다. 자아 중심의 나는 아주 작아지고 출에굽기에서 ‘나’(출에 3:14)라고 말씀하신 거룩한 분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영적 여정에서 확실한 것은 기대하는 것들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지의 세계로 자신을 내맡기는 신뢰의 도약을 해야만 할 것입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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