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삶) 성화(聖化)와 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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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77회 작성일 23-03-22 21:50본문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같이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라”(마태 5:48)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온전해지기를 바라십니다. 초기 교회 신자들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른 이유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하고 따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 신앙의 중심에는 어떤 교의를 믿는 것보다 우선하여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방식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형성되도록 자신을 내어 맡기는 믿음과 용기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세례와 회심의 과정이 필요했고, 사도 바오로는 그 세례와 회심의 여정을 ‘낡은 사람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를 입는’ 것에 비유하였습니다.
요한 웨슬리 John Wesley의 가장 큰 영적 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함에 이르는 성화(聖化sanctification)에 있었습니다, 성공회 사제로 생을 마감한 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였던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개혁된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깊이 회의와 질문을 품었고, 그리스도인들의 성화라는 화두를 품고 평생을 씨름하였습니다. 이같은 웨슬리의 영향으로 감리교는 성서, 이성, 전통이라는 성공회 전통에 더하여 체험과 성화를 감리교 영성의 중요한 기초로 삼게 되었습니다. 은혜 가운데 성장하는 여정을 의미하는 성화는 우리가 칭의(稱義,justification)를 통해 드러난 결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며, 웨슬리는 중생과 성화는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삶 모든 영역에서 - 만남과 대화 가운데서, 먹고 마시는 가운데서, 우리의 모든 행함 가운데서 -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기를 배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신앙의 목표는 우리의 모든 생각, 말, 감정과 행동이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기인토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성화의 영성은 성공회 감사성찬예배를 시작하며 드리는 정심(淨心) 기도문 -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우리 마음의 온갖 생각을 정결하게 하시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공경하여 찬송하게 하소서.’ - 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보다 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하였던 로욜라의 이냐시오 St. Ignatius de Loyola는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은 하느님을 향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여러 층위들의 갈망이 존재하지만 그 모든 갈망들의 가장 깊은 층에 자리하고 있는 갈망은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냐시오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온전함을 갈망합니다.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마음은 이미 하느님 안에서 온전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도 당신이 온전하기를 갈망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 깊은 곳에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다’(로마 7:18)고 고백한 바오로처럼 그 갈망을 온전히 사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로마 7:24)라고 스스로 물은 후, 바오로는 그 질문에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로마 7:25)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죄로부터 해방되는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은혜라고 믿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삶과 일상에서 은혜의 필요를 덜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은혜가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일지도 모릅니다. 만일 지금 우리가 하느님을 멀리 떠나서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은혜보다 자신에게 더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심화시켜가고 성장시켜 주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갈망과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의 힘입니다. 그 외 모든 것들은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만일 우리에게 진정으로 주님을 닮고 싶은 갈망이 있다면, 가장 먼저 자신보다 하느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전혀 하느님 은혜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거룩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신성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Teresa of Avila는 ‘모든 것이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경건한 과장도 아니고 거짓 겸손도 아닙니다. 이 말은 그녀에게 전적으로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공회 성서 신학자 마커스 보그 Marcus J. Borg는 믿음이란 ‘세계를 보는 눈’이라고 하였는데 ‘모든 것이 은혜’라는 그녀의 말에는 그녀가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눈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다르게 보았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하느님의 풍요로 넘치는 은총의 세계였지만, 제자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고 걱정해야만 하는 결핍의 광야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풍요로운 은총에 기대며 살아가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고, 결핍의 세상을 불안해하며 경쟁과 소유에 기대어 사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풍요로운 무상의 은총에 기대어 살아가라고 초대하십니다.
은혜는 제일 원인입니다. 아무것도 은혜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도 하느님의 은혜로운 역사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은혜를 받아들이기 위해 무언가 할 수 있고, 하여야 합니다. 본회퍼Bonhoeffer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은혜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느님의 ‘값진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킨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은혜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은혜는 햇빛과 같습니다. 우리는 햇빛을 만들 수도, 햇빛을 비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햇빛이 비추는 마당으로 나갈 것인지, 햇빛이 없는 방 안에 머물 것인지를 결심할 수 있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햇빛이 빛나는 마당으로 나갈 수 있는 길과 방법이 있습니다. 아마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문이 가장 좋은 길과 방법이 될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도 이것은 진실입니다. 빛이 비추는 밖으로 나가기 위한 가장 가까운 문이 있는 것처럼 기도에 있어서도 아주 단순한 방법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문이다.’(요한 10:9)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은혜의 통로이며 중개자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한번 그것을 받아들이면, 주님은 우리의 길이 되고, 방법이 됩니다. 기도는 어떤 내적 기술도, 자기 조작도, 영적인 자동판매기도 아닙니다. 기도는 단순히 빛 아래 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영혼 안에서 우리 스스로 사랑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단순히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한 바구니가 되면 됩니다. 빛이 비추는 뜰을 두고 어둡고, 차가운 자아의 방 안에 머물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빛이 비추는 마당을 향해 나가길 원한다면, 먼저 가장 가까운 방문을 찾아, 그 문을 열고 나가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햇살을 받아들이십시오. 뜰에 햇빛이 비추고 있는데 방 안에서 인공적인 빛을 만들려고 애를 쓸 필요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은혜를 신뢰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요한 1서 4:10)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에는 바알의 제사장들과 같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왕상 18:26-29)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향해 깨어있는 열망이 자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리석게도 자주 신뢰를 잃은 채 분주하기만 하였던 마르타의 노력처럼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해 지곤 합니다. 우리 눈에는 마르타의 많은 노력에 비하여 마리아가 보여주었던 신뢰는 너무 빈약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제자들을 향해 노력하라고 말하기보다 믿으라고, 신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환자가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도 의사는 수술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은 때로 우리가 깨어 있을 때보다 잠들어 있는 중에 보다 효과적으로 우리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잠들은 바다에서도 성령의 바람은 불고 있습니다. 잠은 우리에게 마치 죽음 같은 고요함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듯 잠드는 시간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영혼의 잠든 바다 속으로 들어오시길 갈망하십니다. 죽음과 같이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 ‘모든 것이 은총이다.’라는 말은 보다 분명한 진실이 됩니다. 우리가 깨어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손길 안에 있기를 소망하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치료해 주시기를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심장 수술을 위해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죽음과 같은 고요함에 머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믿음이란 우리를 구원할 힘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있다는 진실을 신뢰하며 하느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로렌스 형제는 우리에게 ‘부자 집 문 앞에서 구걸하는 중풍병자나 걸인처럼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로렌스는 우리가 누구이며,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같은 태도를 겸손이라고 가르칩니다. 성 어거스틴은 신앙의 네 가지 기본적인 덕목을 말하며 ‘겸손, 겸손, 겸손, 겸손’이라고 반복하여 강조하였습니다. 성 베네딕트는 수도자가 완덕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그가 하느님의 일(Opus Dei)이라고 칭한 ‘성무일과’와 함께 겸손을 말했습니다. 성인이 되고자 하는 높고 거룩한 열망은 겸손, 즉 하느님의 은혜에 온전히 의지하려는 거룩한 겸손과 반대되지 않습니다. 겸손 없는 열망은 교만입니다.(잠언 16:18) 하지만 열망 없는 겸손은 거짓 겸손입니다. 그것은 대단한 교만입니다. 왜냐하면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길 원하시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필립 3:14)
우리는 기도하기 위하여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은혜로 온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여정입니다. 기도는 파도타기와 같습니다. 은혜의 바다 위에서 영혼의 파도타기를 하는 것입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요한 웨슬리 John Wesley의 가장 큰 영적 관심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함에 이르는 성화(聖化sanctification)에 있었습니다, 성공회 사제로 생을 마감한 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하였던 종교개혁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개혁된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깊이 회의와 질문을 품었고, 그리스도인들의 성화라는 화두를 품고 평생을 씨름하였습니다. 이같은 웨슬리의 영향으로 감리교는 성서, 이성, 전통이라는 성공회 전통에 더하여 체험과 성화를 감리교 영성의 중요한 기초로 삼게 되었습니다. 은혜 가운데 성장하는 여정을 의미하는 성화는 우리가 칭의(稱義,justification)를 통해 드러난 결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며, 웨슬리는 중생과 성화는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삶 모든 영역에서 - 만남과 대화 가운데서, 먹고 마시는 가운데서, 우리의 모든 행함 가운데서 -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기를 배워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에게 신앙의 목표는 우리의 모든 생각, 말, 감정과 행동이 오직 하느님께로부터 기인토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성화의 영성은 성공회 감사성찬예배를 시작하며 드리는 정심(淨心) 기도문 - ‘성령의 감화하심으로 우리 마음의 온갖 생각을 정결하게 하시어,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주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공경하여 찬송하게 하소서.’ - 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보다 큰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하였던 로욜라의 이냐시오 St. Ignatius de Loyola는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은 하느님을 향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여러 층위들의 갈망이 존재하지만 그 모든 갈망들의 가장 깊은 층에 자리하고 있는 갈망은 하느님을 향한 갈망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냐시오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온전함을 갈망합니다. 지금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는 것이 그것을 반증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마음은 이미 하느님 안에서 온전하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도 당신이 온전하기를 갈망하십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 깊은 곳에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다’(로마 7:18)고 고백한 바오로처럼 그 갈망을 온전히 사는 것을 가로막고 있는 죄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로마 7:24)라고 스스로 물은 후, 바오로는 그 질문에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로마 7:25)라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교는 죄로부터 해방되는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은혜라고 믿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삶과 일상에서 은혜의 필요를 덜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은혜가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일지도 모릅니다. 만일 지금 우리가 하느님을 멀리 떠나서 절망적인 상태에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은혜보다 자신에게 더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심화시켜가고 성장시켜 주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의 갈망과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의 힘입니다. 그 외 모든 것들은 부수적인 것들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만일 우리에게 진정으로 주님을 닮고 싶은 갈망이 있다면, 가장 먼저 자신보다 하느님의 은혜에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왜냐하면 악마는 전혀 하느님 은혜에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은혜는 거룩한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신성한 방법을 사용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Teresa of Avila는 ‘모든 것이 은혜’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경건한 과장도 아니고 거짓 겸손도 아닙니다. 이 말은 그녀에게 전적으로 사실이었기 때문입니다. 성공회 성서 신학자 마커스 보그 Marcus J. Borg는 믿음이란 ‘세계를 보는 눈’이라고 하였는데 ‘모든 것이 은혜’라는 그녀의 말에는 그녀가 세상과 삶을 바라보는 눈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다르게 보았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눈에 비친 세상은 하느님의 풍요로 넘치는 은총의 세계였지만, 제자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요한 6:7)고 걱정해야만 하는 결핍의 광야였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풍요로운 은총에 기대며 살아가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고, 결핍의 세상을 불안해하며 경쟁과 소유에 기대어 사는 길을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풍요로운 무상의 은총에 기대어 살아가라고 초대하십니다.
은혜는 제일 원인입니다. 아무것도 은혜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외에는 아무것도 하느님의 은혜로운 역사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은혜를 받아들이기 위해 무언가 할 수 있고, 하여야 합니다. 본회퍼Bonhoeffer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주어지는 은혜를 주장하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느님의 ‘값진 은혜’를 ‘값싼 은혜’로 전락시킨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은혜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따름’에서 주어지는 것임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은혜는 햇빛과 같습니다. 우리는 햇빛을 만들 수도, 햇빛을 비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받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햇빛이 비추는 마당으로 나갈 것인지, 햇빛이 없는 방 안에 머물 것인지를 결심할 수 있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햇빛이 빛나는 마당으로 나갈 수 있는 길과 방법이 있습니다. 아마 당신에게 가장 가까운 문이 가장 좋은 길과 방법이 될 것입니다. 기도에 있어서도 이것은 진실입니다. 빛이 비추는 밖으로 나가기 위한 가장 가까운 문이 있는 것처럼 기도에 있어서도 아주 단순한 방법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문이다.’(요한 10:9)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은혜의 통로이며 중개자입니다. 예수님은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요한 15:5)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한번 그것을 받아들이면, 주님은 우리의 길이 되고, 방법이 됩니다. 기도는 어떤 내적 기술도, 자기 조작도, 영적인 자동판매기도 아닙니다. 기도는 단순히 빛 아래 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 영혼 안에서 우리 스스로 사랑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단순히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한 바구니가 되면 됩니다. 빛이 비추는 뜰을 두고 어둡고, 차가운 자아의 방 안에 머물려고 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하느님의 영광스러운 빛이 비추는 마당을 향해 나가길 원한다면, 먼저 가장 가까운 방문을 찾아, 그 문을 열고 나가십시오. 그리고 하느님의 햇살을 받아들이십시오. 뜰에 햇빛이 비추고 있는데 방 안에서 인공적인 빛을 만들려고 애를 쓸 필요가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은혜를 신뢰한다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들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요한 1서 4:10)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에는 바알의 제사장들과 같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왕상 18:26-29)이 아니라, 우리를 향하신 하느님의 사랑을 향해 깨어있는 열망이 자리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어리석게도 자주 신뢰를 잃은 채 분주하기만 하였던 마르타의 노력처럼 혼란스러움으로 가득해 지곤 합니다. 우리 눈에는 마르타의 많은 노력에 비하여 마리아가 보여주었던 신뢰는 너무 빈약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제자들을 향해 노력하라고 말하기보다 믿으라고, 신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환자가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도 의사는 수술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성령은 때로 우리가 깨어 있을 때보다 잠들어 있는 중에 보다 효과적으로 우리를 움직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잠들은 바다에서도 성령의 바람은 불고 있습니다. 잠은 우리에게 마치 죽음 같은 고요함으로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듯 잠드는 시간을 준비하여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영혼의 잠든 바다 속으로 들어오시길 갈망하십니다. 죽음과 같이 우리가 잠들어 있을 때, ‘모든 것이 은총이다.’라는 말은 보다 분명한 진실이 됩니다. 우리가 깨어있을 때, 우리는 하느님의 손길 안에 있기를 소망하며, 하느님께서 우리를 치료해 주시기를 간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심장 수술을 위해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은 죽음과 같은 고요함에 머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믿음이란 우리를 구원할 힘이 우리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있다는 진실을 신뢰하며 하느님을 구하는 것입니다. 부활의 로렌스 형제는 우리에게 ‘부자 집 문 앞에서 구걸하는 중풍병자나 걸인처럼 하느님 앞에서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로렌스는 우리가 누구이며,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았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이같은 태도를 겸손이라고 가르칩니다. 성 어거스틴은 신앙의 네 가지 기본적인 덕목을 말하며 ‘겸손, 겸손, 겸손, 겸손’이라고 반복하여 강조하였습니다. 성 베네딕트는 수도자가 완덕에 이르는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그가 하느님의 일(Opus Dei)이라고 칭한 ‘성무일과’와 함께 겸손을 말했습니다. 성인이 되고자 하는 높고 거룩한 열망은 겸손, 즉 하느님의 은혜에 온전히 의지하려는 거룩한 겸손과 반대되지 않습니다. 겸손 없는 열망은 교만입니다.(잠언 16:18) 하지만 열망 없는 겸손은 거짓 겸손입니다. 그것은 대단한 교만입니다. 왜냐하면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길 원하시는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명령을 거역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필립 3:14)
우리는 기도하기 위하여 은혜를 필요로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느님의 은혜로 온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여정입니다. 기도는 파도타기와 같습니다. 은혜의 바다 위에서 영혼의 파도타기를 하는 것입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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