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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삶) 성찬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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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724회 작성일 23-03-22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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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의식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에게 오직 하나, 성찬이라는 의식을 남겨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그 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남겨 주신 것이 말씀과 성찬이라는 것에 대해 신.구교를 불문하고 신학자들 사이에 이견은 없습니다. 단지 우선순위를 두고는 입장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성전 중심에 있는 설교대와 제대(祭臺)로 그 차이를 알 수 있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성찬에 관한 논쟁이 복음서들이 기록될 때부터 이미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때부터 서로 다른 공동체들은 성찬이 얼마나 자주 시행되어야 하는지, 정확하게 성찬의 어떤 역할이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 주는지에 관하여 중대한 의견 차이를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신자들은 성찬이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이고 중심적인 요소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에는 기본적인 동의를 보였습니다.

모든 시대를 망라하여 가장 영향력있는 그리스도교 신학자로 인정되는 어거스틴 Augustine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교회를 남겨놓으셨고, 우리는 교회로부터 성찬을 이끌어 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찬을 남겨 놓으셨고 우리는 성찬으로부터 교회를 이끌어 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적당할 것입니다.’ 교회가 성찬을 이끌어 낸 것이 아니라 성찬이 교회를 이끌어 낸 것입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인과 모든 인류의 연합을 드러내는 표시이기도 하면서 그 연합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여정의 끝이기도 하면서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곳에 다다르게 하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중적 의미 때문에 서로 다른 교파들은 성찬을 놓고 수많은 논쟁을 벌여 왔습니다.     

성공회 베네딕트회 수도자 돔 그레고리 딕스Dom Gregory Dix는 ‘성찬의 형식 the shape of liturgy’이라는 논문에서 주님의 식탁에서 보인 공통된 네 가지 행동의 동사에 대한 신학적 설명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행동은 ‘취하시고/받아들이고 take’ ‘축복하시고/감사하고 blessing’ ‘쪼개시고/부수고 breaking’ ‘주는/나누는 giving’ 것입니다. 오천 명의 군중을 먹이셨을 때(마태 14:13-21), 사천 명의 배고픈 군중들을 먹이신 사건(마태 15:32-39),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 저녁 최후의 만찬(마태 26:26-29), 엠마오에서의 식사(루가 24:30), 주님의 만찬을 묘사하는 바울로의 편지(고전 11:23-24)는 모두 같은 동작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레고리 딕스는 이 단순한 동사들은 기독론과 그리스도교 영성 모두를 충만하게 담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에게 성찬은 단지 우리가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의식적 기도만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을 만지는 것이었습니다. 성찬이 우리에게 주는 도전은 우리의 총체적 삶이 기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찬은 우리가 삶과 만나고, 삶을 받아들이고, 삶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방법이 될 필요가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는 성찬의 네 동작을 차례로 묵상하면서 성찬의 영성에 대하여 함께 생각할 것입니다.

취하기, 받아들이기 Take
성찬의 첫 번째 언어는 ‘받기, 취하기’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드리는 것을 받으십니다. 어린 아이의 떡과 물고기처럼, 우리의 일, 우리의 감정, 우리의 죄, 우리의 목마름... 우리가 주님 앞으로 가지고 나아가는 모든 것을 받으십니다. 성찬의 전례에서 우리는 세 번의 받아들임을 경험합니다. 첫째는 신자대표가 빵과 포도주, 봉헌함(우리 자신)을 제대로 가지고 오고, 사제가 그것을 받는 순간입니다. 두 번째는 성찬기도 중에 ‘받아먹으라, 받아마셔라.’ 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순간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성찬에 참여하는 우리들이 사제를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지는 빵과 포도주를 받아들이는 순간입니다. 그 모든 순간은 주어지고,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로널드 롤하우저Ronald Rolheiser는 그의 책 ‘성찬의 영성’에서 원죄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은총의 삶을 받아들이고, 누리며 살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획득하려 하였던 행위라고 말합니다. 에덴동산의 하느님께서 아담과 이브에게 하신 말씀은 ‘나는 너희에게 생명을 주려고 한다. 너희는 내가 주는 생명을 거저 받아들이면 된다. 그것을 스스로 취하는 것은 그것이 선물이 되는 것을 망치고 파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원죄는 감사의 실패이자 수용태도의 실패였습니다. 아담과 이브는 선물을 받아들이는 자세에서 벗어나 강탈하려는 자세는 취했다는 것이 창세기 타락 이야기의 핵심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성찬예식에서 우리 손에 건네지는 빵과 포도주는 자신을 비우고 십자가 위에 달리신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를 위한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때문에 그 사랑은 주어지는 것이고,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찬에서 우리가 빵과 포도주를 받아들이는 이 상징적 행위에는 우리의 삶이 우리의 노력이나 성취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혜에 기초하고 있고, 우리는 그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살아가고 있음에 대한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얼마나 많이 성취했느냐, 얼마나 많이 소유했느냐를 기준으로 성공을 평가하는 세상에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을 진리처럼 강조하는 세상에서 삶이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며, 움켜쥐는 것 보다 은총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길이 낫다는 제안은 참으로 반(反)문화적인 제안입니다.

성찬에서 받아들임은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사랑의 초대에 자신을 열고 내어드리는 응답이기도 합니다. 성찬의 영성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모든 것은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합니다. 성찬기도 중에 ‘받아먹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우리 삶의 방식을 총체적으로 지도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받은 것은 우리 손에 있을지라도 우리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잠시 우리 손에 맡겨진 것일 뿐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빵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우리는 언제나 모든 것은 선물이며, 그 무엇도 우리의 소유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요구받고 있습니다. 

감사하고 축복하기 Thank giving, Blessing
예수님은 ‘빵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후에...’ ‘식후에 잔을 들어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후에’ 기도를 이어가십니다. 이것이 성찬의 두 번째 행동입니다. 성찬기도 중에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와 육화, 그리고 지금도 지속되고 있는 구원사역과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에 참여하여 살고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은 우리가 감사하며 가지고 나아간 모든 것들을 아버지께 들어 올리십니다. 식탁 위에, 혹은 식탁 둘레에 무엇이 있든지 그것들은 모두 축복과 감사를 통해 하느님께 들려집니다. 그분은 우리를 하느님 안에로,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관계 안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드리는 것이 무엇이든 비판하거나 정죄하거나 거부하지 않으십니다. 이제 사제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신을 상징하는 봉헌과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상징하는 포도주와 빵을 하느님께 들어 올립니다. 그리고 감사하며 하느님께 바쳐진 것들은 모두 변화됩니다.

우리는 모두 얼굴의 너울을 벗어버리고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비추어줍니다. 동시에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영광스러운 상태에서 더욱 영광스러운 상태로 옮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령이신 주님께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 고후 3:18 -

항상 감사하라고 권면하는 바울로의 이야기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분명한 한 표징은 감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과 이브에게 생명과 낙원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저 그들에게 그것들을 고맙게 받아들이고 감사하라고만 요청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이브는 그것을 거절하였습니다. 그들은 선과 악을 판단하는 주체가 되려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을 당연한 권리로 여겼습니다. 그것이 죄를 낳았습니다.

감사하는 것과 고마움을 표시하는 것은 모든 종교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자세입니다. 우리는 선물로 주어진 것들에 대해 적절한 감사를 표할 줄 알아야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 선물을 충만히 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과 금욕주의자들을 구분하는 기준입니다. 선물을 준 사람에게 보내는 최고의 찬사는 그 선물을 충분히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주이신 하느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찬사는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이라는 선물을 진심으로 누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금욕주의자, 햄릿과 같은 인물,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는 여흥, 즐거움, 기쁨을 멀리하고 무관심한 사람들을 성숙하고 이상적이며 본받을 만한 영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찬의 사람은 체념을 즐기는 고결한 영웅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아이입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의 눈물을 충분히 나누면서도 동시에 자기의 웃음을 통해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은혜와 자비의 사람입니다.

‘감사하라!’는 말은 단지 우리가 성찬에서만 들으면 되는 도덕적 명령이 아닙니다. 그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들어야 하는 도덕적 명령입니다.

쪼개고 나누기, Breaking
사제는 ‘우리는 이 빵을 떼어 주님의 성체를 나눕니다.’라고 말하며 빵을 쪼개어 나눕니다. 이것이 성찬의 세 번째 동작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가지고 간 것을 부수어 떼십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성찬을 잘못 행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기도나 찬양을 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부수지 않기 때문입니다. 빵이 쪼개어지는 순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부수어 우리를 위해 내어주는 순간인 동시에, 들어 올려진 우리의 이기적 야망, 교만함, 비열함, 상처들이 쪼개지는 순간입니다. 서로를 분열시키는 이같은 장벽들이 부서지는 순간에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나누며 한 몸을 이룹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습니다.
 
성찬의 식탁에서는 나만의 세계에 머물거나 자기 충족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 허락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안으로 이끌려 가고, 함께 식사를 나누며 이 십자가를 몸으로 표현합니다. 우리의 교만과 자족감이 깨어지면서 새로운 삶, 새로운 행동이 우리 앞에 제시됩니다. 식탁 위에 놓인 것은 모두 생명의 교환, 곧 거짓과 위선으로 단단해진 속과 딱딱하게 굳은 껍질로 나아가지만 예수님을 우리를 산산이 부숨으로써 새로운 삶을 가져다주십니다.

하느님, 내 제물은 찢어진 마음뿐, 찢어지고 터진 마음을 당신께서 얕보지 아니하시니.....
                              시편 51:17

우리의 결점과 편협함을 인식하지 않고서 우리는 부부 공동체, 가정 공동체, 교회 공동체, 친구 공동체 그 밖의 여러 공동체를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는 변화하고 성숙해 지려고 하던지, 떠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슬프게도 사람들은 떠나는 쪽을 더 많이 선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변화되기 위해 깨어지고 부수어져야 합니다.

처음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런 깨어짐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이 깨어짐을 발견합니다. 성찬에서 우리는 부수어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더 활기찬 예식, 더 멋진 설교만으로는 공동체의 예배가 충만한 의미를 창출하지 못합니다. 예배가 충만한 의미를 창출하지 못하는 이유의 상당부분은 성찬식에서 변화되는 것이 빵과 포도주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변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계속 의심하고 질투하고 두려워하고 완고한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로는 절대 의미있는 예배를 만들어 내지 못합니다.

나누기, 주기 Giving
예수님께서는 우리는 우리가 가져간 것, 제대 위에 떡과 포도주와 함께 바쳐진 우리 자신을 다시 나눠주십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나누어지는 것은 더 이상 우리가 가지고 간 그대로가 아닙니다. 우리 자신, 곧 우리가 가지고 간 자아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변화됩니다. 르완 윌리암스Rowan Williams 대주교는 성공회 신학자의 기초를 놓은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와 시인이며 영성가인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두 사람은 모두 성변화(聖變化)가 근본적으로 빵과 포도주의 상태가 어떻게 변했는지에 관한 논쟁이기 보다 인간 삶의 변화에 관한 것이라고 믿었다고 지적합니다. 식탁에서 거룩해진 몸과 거룩한 피를 먹고 마시면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변화의 식사이며 동시에 부활의 식사입니다. 우리는 성찬의 식탁 앞에서 부활의 실천을 시작하지만 거기가 끝은 아닙니다. 부활과 친교의 식탁은 성전을 떠나 우리 삶의 모든 영역으로 확장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도 서로 생명을 나누시고, 그 나누어진 생명을 통해 감사와 기쁨의 영과 에너지를 충만히 발산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는 가족이자 공동체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또한 그러한 모습이 되라고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그러한 요구를 받아들일 때, 우리는 그 나눔을 통해 감사와 기쁨의 영과 에너지를 충분히 발산하며 살게 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성찬의 삶을 산다는 것은 매일의 삶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모든 식사에서 동일한 부활의 실천을 계속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식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인으로 임하시는 성만찬에 그 근거를 두며 우리는 이 성만찬을 매일 먹고 마심으로 그 부활의 의미를 전체 삶속으로 확장해 갑니다. 우리가 음식을 먹기 위해 식탁에 앉아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마다, 부활에 의한 변화의 모든 요소들이 그대로 식탁에서 드러납니다. 우리 삶 중에서 가장 평범한 행동이 가장 심오한 변화의 장이 된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습니다. 우리가 성찬의 형식을 통하여 증거하고 참여하는 자연과 초자연의 결합은 바로 우리의 식탁에서도 계속될 것입니다.

성찬은 교회에 함께 모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 주신 의식을 기념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성찬은 또한 가족과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삶의 모든 것을 나누는 것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예배란 매우 평범한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자신들의 삶을 하느님께 진정으로 봉헌하면, 하느님께서 그들을 그리스도를 닮은 공동체로 거룩하게 변화 시키시고, 세상에서 변화된 공동체가 자신을 내어주는 선교적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을 신뢰하는 기도입니다. 하느님은 예배 가운데서 우리의 삶을 취하시고, 축복하시고, 쪼개시고, 변화시키시어 다시 세상 한복판에서 몸으로 드리는 삶의 예배를 위해 파견하십니다. 하여 우리 모두는 보냄 받은 사람들입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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