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삶) 기도와 공동 예배(禮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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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95회 작성일 23-03-22 21:48본문
영국 성공회 전례학자인 폴 F. 브래드쇼 Paul F. Bradshaw는 자신의 책 ‘Two ways of praying’에서 그리스도교의 기도 전통에는 두 가지 길- 대성당 Cathedral 전통과 수도승 Monastic 전통 -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전자의 공동적체인 특징과 후자의 개인적인 특징을 대비시키며, 오늘 날 그리스도교 영성에 대한 관심이 개인적으로 경도된 상황을 우려하며, 두 전통의 균형과 조화가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성공회 영적전통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 베네딕트 영적전통은 베네딕트 규칙서에 잘 드러나 있는데, 규칙서는 기도를 크게 개인기도(private prayer)와 성무일과(Daily Offices)와 그리고 성찬(Eucharist)이라는 삼중구조로 나누고 있습니다. 베네딕트 성인은 이 세 가지의 기도는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을 강조하였고, 개인기도와 성무일과는 성찬을 통하여 완성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개인기도 없는 성무일과는 건조하게 형식화될 수 있고, 성무일도 없는 개인기도는 주관적 신앙에 떨어질 위험이 있으며, 성찬예배는 성무일과와 개인기도라는 기초 위에서 드려질 때 완성된다고 믿었습니다. 성공회 영성신학자 마틴 쏜톤Martin Thornton은 성공회 기도서는 베네딕트 규칙서의 이같은 기도 전통과 맥을 함께 하고 있으며, 이 세 기도의 균형이 깨질 때 오류가 발생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성공회는 이 세 기도를 모두 소중하게 지켜온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도’라는 말을 떠올릴 때, 사람들이 자주 하는 오해 가운데 하나는 기도를 공동체와 분리시켜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하는 태도입니다. 물론 기도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것은 기도가 한 영혼이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의 교제이며, 각 사람의 영혼은 고유하고, 같은 영혼이 둘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개별적이고 고유하며,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또한 그같은 친교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홀로 드리는 기도는 고유하고 개별적인 친교를 통하여 한 영혼이 맺고 있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 깊은 사랑과 신뢰로 이끌어 줍니다. 반면에, 공동체와 함께 매일 드리는 성무일과는 한 개인의 고유함과 개성을 넘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영적전통이 짙게 베인 기도를 함께 반복적으로 드림으로, 각 개인의 영성을 공동체의 영적전통과 연결 짓고, 조화를 이루도록 돕습니다. 수도회들이 저마다의 기도서로 드리는 성무일과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구성원들이 개별성과 고유성을 넘어 공동체의 영적전통 안에서 한 몸을 이룰 수 있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성찬은 우리가 어느 그리스도교 영적전통 혹은 공동체에 속하였을지라도, 전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감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이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가 소중하게 지켜 온 말씀과 성찬과 고백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룹니다. 우리가 성찬 중에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나누며, 한 몸으로 이룹니다.’라고 고백하는 순간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믿는 구원의 신비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매주 형식을 갖춘 공동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교 전통에 있는 중심활동입니다. 형식을 갖춘 예배를 꾸준하게 드리는 기도가 교회 역사 속에서 중심이 되고 있는 이유를 감리교 전례학자 돈 E 셀리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심리는 매주 함께 모이지 않으면,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가 개인은 물론이고 공동체로서 누구인지를 쉽게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상충되는 가치와 문화가 지배하는 매일의 일상을 살면서, 더 깊은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해 줄 영적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고, 의미 있는 영성수련도 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최소한 매일의 기도수련을 통하여 하느님 안에 있는 더 깊은 생명을 향한 열망을 구체화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같은 기도가 없다면 사람들은 주일 예배에 대해 비현실적인 기대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교의 주일 전례는 기억memory과 재연결reconnecting의 시간입니다. 거룩함과 인간다움의 상호작용에 관해 전통이 들려주는 신성한 이야기,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에 우리 이야기를 연결하는 시간입니다. 그것은 또한 희망의 시간입니다. 이야기들과 설교와 기도와 실천의 요청은 하느님의 정의롭고 조화로운 사랑의 미래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열어주며, 나아가, 더 큰 정체성과 목적을 함께 공유하는 다른 사람들과 돌봄으로 연결되는 시간입니다. 예배 속에서 모든 사람은 진정한 자기 모습이 되고, 있는 그대로 자기 가치를 인정받은 동료 신자들과 연결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해주는 거룩한 사랑의 더 큰 실재에 소속된 것을 함께 축하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한 주간 동안 에고(Ego)와 거짓 자아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편협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유혹 가운데 살았지만, 예배는 우리를 그 유혹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과 연결된 더 큰 정체성으로 우리를 인식하게 합니다.
하지만 어떤 신학적이고 당위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주일 예배가 형식적으로 느껴지고, 의무적이고 당위적인 예배 참여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20세기 퀘이커 지도자 더글러스 스티어Douglas V Steere는 이같은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그는 공동체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예배자의 감정적 동기나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위한, 그리고 성장을 위한 학교에 비유합니다. 그는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대로 되어갑니다.”라고 말하며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안아 줄 때,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안아 주지만, 동시에 부모가 자녀를 더 사랑하기 위하여 안아 주는 것처럼 사랑은 감정에서 비롯되는 반응이나 행동 이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대상을 향한 헌신된 관계에 기초하고 있음을 역설하며, 이는 단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도 해당된다고 말합니다.
개인기도와 공동체 예배 사이에 간극을 치열한 영적여정을 통하여 통합한 대표적인 모범은 아마도 20세기 성공회 영성가 이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일 것입니다. 영성생활의 목표에 대한 언더힐의 초기 이해는 자기실현과 하느님과의 일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그녀의 생각은 이후 영성생활의 진정한 목표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내어줌으로 하느님의 뜻에 겸손히 협력하신 것을 본받는데 있다는 보다 성숙한 관점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녀는 후기로 갈수록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어간다는 것은 자기 내어줌과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이해하였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와 도구가 되어, 자신을 하느님의 자기표현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자기를 내어주는 산제물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관상생활에 대한 이같은 이해는 그녀가 후기로 갈수록 점차 관상생활을 자기실현의 관점에서 자기희생이라는 관점으로 전환하게 하였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저서가 ‘예배Worship’ 라는 것은 그녀의 영적여정의 종착지가 어디인가를 보여주는 단적이 표현이며, 예배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다시 돌아보도록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예배가 점점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인간의 욕구충족과 요구를 중심으로, 초자연적인 것에서 윤리적인 것으로 그 성격이 변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언더힐은 자신의 저서 ‘예배Worship’에서 ‘가장 깊은 감각으로 드리는 개인의 예배는 하느님의 자비를 일으키기 위해 자비를 향해 돌아가는 인간의 움직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자비란 사랑의 하느님이며, 예배란 바로 자기 증여의 사랑이신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언더힐은 그리스도인의 헌신은 영적의식의 성취라기보다 얼마나 사랑으로 하느님께 자기를 내어드리는가와 지금 여기서 주요한 은총의 매개로서 성사를 고요히 받아들이는가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배하는 삶의 전체 가치는 이기주의로 찌든 얼룩들이 정화되고 이타심과 단순함이 일상적인 마음에 자리 잡아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개인이 자기가 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신적인 사랑이 개인적 표현에 대한 갈망, 무언가를 경험하고 싶은 갈망, 개인적인 안전과 기쁨에 대한 갈망을 집어 삼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예배와 성화(聖化)의 공통된 목적은 교회가 자신의 머리인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더욱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에 있는 위대하고 자명한 진리에 열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옹졸함과 개인주의, 감정적 편견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모두 이를 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느님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기도가 저 위대한 법, 그리스도교 공통의 신앙으로부터 멀어지면 겸손함과 온전한 판단을 잃기 십상입니다. 처음 기도할 때, 우리는 무언가를 믿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이 단계에서 그 무엇은 희미하며 막연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깊이를 더해 갈수록 믿음은 풍요로워지고 넓혀집니다.
- 예배 Worship 중에서 -
언더힐은 예배의 응답으로서 영적 일치를 향한 인간의 본질적 활동에 대하여 ‘우리는 오직 예배에 의해 거룩함과 실재에 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녀에게 예배는 영원한 하느님을 향한 피조물의 응답이며, 그것은 항상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인격적인 예배는 궁극적으로 이 두 차원과 관계된 것이며, 그것은 첫째로 사랑과 예배의 대상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거룩함을 향한 여정이고, 둘째는 하느님의 창조적 활동에 사랑으로 참여하고 협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의지로 응답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협력하며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그녀는 하느님과 연합하는 삶은 성찬 안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몸의 지체가 되는 의무를 포함하는 성사적 생활이며, 영성생활은 세상으로부터 영적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 안에서 자기희생적 참여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 The Golden Sequence에서 관상이란 자기를 내어주며 하느님의 은혜에 응답하기 위한 역량이 자라나는 수단이기에 가치가 있으며, 하느님을 향한 열린 수용과 타자를 향한 자기 개방의 매개적 행동으로 완성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기도의 목적, 점점 그 자체로 기도가 되어가는 삶의 숨 겨진 목적은 하느님과의 일치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문구를 자주 이용하지만, 너무 자주 이용하는 까닭에 그 전체에 담긴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란 무엇입니까? 종 교적 열정이 타오르는 순간에 즐기는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닙니다. 그 기분 좋은 느낌은 하느 님과의 일치에서 오는 부산물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하느님과의 일 치의 핵심이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란 우리가 지닌 인간적 본성의 모든 부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만들어지고, 마음과 영혼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창조주이신 그분의 삶과 행위에 엮여 들어가며, 그분이 목적으로 두고 계신 구원사건 속으로 녹아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느님의 피조물은 그 자신의 운명을 성취합니다. 하느님과의 일치가 인간의 본성에 무엇 을 의미하는지, 그 대가는 무엇이고, 그 모습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관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관상함으로써 우 리는 지혜로워지고 성숙해집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혹은 그저 영적으로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분의 가르침과 치유와 생명을 주시는 능력이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를 통해서 일하게 하시는 것, 그 분이 보이신 모범과 십자가를 따라 우리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그분의 생명을 얻는 것, 그것이 성숙이고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 The Golden Sequence 중에서 -
- 김홍일 (기도하는 삶)
‘기도’라는 말을 떠올릴 때, 사람들이 자주 하는 오해 가운데 하나는 기도를 공동체와 분리시켜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으로 치부하는 태도입니다. 물론 기도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것은 기도가 한 영혼이 하느님과 나누는 사랑의 교제이며, 각 사람의 영혼은 고유하고, 같은 영혼이 둘이 있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각 사람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개별적이고 고유하며,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 또한 그같은 친교의 성격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홀로 드리는 기도는 고유하고 개별적인 친교를 통하여 한 영혼이 맺고 있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더 깊은 사랑과 신뢰로 이끌어 줍니다. 반면에, 공동체와 함께 매일 드리는 성무일과는 한 개인의 고유함과 개성을 넘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영적전통이 짙게 베인 기도를 함께 반복적으로 드림으로, 각 개인의 영성을 공동체의 영적전통과 연결 짓고, 조화를 이루도록 돕습니다. 수도회들이 저마다의 기도서로 드리는 성무일과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구성원들이 개별성과 고유성을 넘어 공동체의 영적전통 안에서 한 몸을 이룰 수 있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성찬은 우리가 어느 그리스도교 영적전통 혹은 공동체에 속하였을지라도, 전체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인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며, 감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이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가 소중하게 지켜 온 말씀과 성찬과 고백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룹니다. 우리가 성찬 중에 ‘우리는 서로 다르나 한 빵을 나누며, 한 몸으로 이룹니다.’라고 고백하는 순간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믿는 구원의 신비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매주 형식을 갖춘 공동예배에 참석하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교 전통에 있는 중심활동입니다. 형식을 갖춘 예배를 꾸준하게 드리는 기도가 교회 역사 속에서 중심이 되고 있는 이유를 감리교 전례학자 돈 E 셀리어스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의 심리는 매주 함께 모이지 않으면,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가 개인은 물론이고 공동체로서 누구인지를 쉽게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과 상충되는 가치와 문화가 지배하는 매일의 일상을 살면서, 더 깊은 자신의 정체성을 강화해 줄 영적 공동체에도 속하지 않고, 의미 있는 영성수련도 하지 않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최소한 매일의 기도수련을 통하여 하느님 안에 있는 더 깊은 생명을 향한 열망을 구체화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같은 기도가 없다면 사람들은 주일 예배에 대해 비현실적인 기대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교의 주일 전례는 기억memory과 재연결reconnecting의 시간입니다. 거룩함과 인간다움의 상호작용에 관해 전통이 들려주는 신성한 이야기,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에 우리 이야기를 연결하는 시간입니다. 그것은 또한 희망의 시간입니다. 이야기들과 설교와 기도와 실천의 요청은 하느님의 정의롭고 조화로운 사랑의 미래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열어주며, 나아가, 더 큰 정체성과 목적을 함께 공유하는 다른 사람들과 돌봄으로 연결되는 시간입니다. 예배 속에서 모든 사람은 진정한 자기 모습이 되고, 있는 그대로 자기 가치를 인정받은 동료 신자들과 연결됩니다. 우리는 자신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해주는 거룩한 사랑의 더 큰 실재에 소속된 것을 함께 축하합니다. 이처럼 우리는 한 주간 동안 에고(Ego)와 거짓 자아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편협하게 인식하게 만드는 유혹 가운데 살았지만, 예배는 우리를 그 유혹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이웃과 연결된 더 큰 정체성으로 우리를 인식하게 합니다.
하지만 어떤 신학적이고 당위적인 설명에도 불구하고 주일 예배가 형식적으로 느껴지고, 의무적이고 당위적인 예배 참여에 대해 한 번도 의문을 품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20세기 퀘이커 지도자 더글러스 스티어Douglas V Steere는 이같은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그는 공동체 예배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예배자의 감정적 동기나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위한, 그리고 성장을 위한 학교에 비유합니다. 그는 “우리는 우리가 행하는 대로 되어갑니다.”라고 말하며 부모가 자신의 자녀를 안아 줄 때,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안아 주지만, 동시에 부모가 자녀를 더 사랑하기 위하여 안아 주는 것처럼 사랑은 감정에서 비롯되는 반응이나 행동 이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니라 대상을 향한 헌신된 관계에 기초하고 있음을 역설하며, 이는 단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도 해당된다고 말합니다.
개인기도와 공동체 예배 사이에 간극을 치열한 영적여정을 통하여 통합한 대표적인 모범은 아마도 20세기 성공회 영성가 이블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일 것입니다. 영성생활의 목표에 대한 언더힐의 초기 이해는 자기실현과 하느님과의 일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같은 그녀의 생각은 이후 영성생활의 진정한 목표가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내어줌으로 하느님의 뜻에 겸손히 협력하신 것을 본받는데 있다는 보다 성숙한 관점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녀는 후기로 갈수록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어간다는 것은 자기 내어줌과 고통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이해하였고,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와 도구가 되어, 자신을 하느님의 자기표현이 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 자기를 내어주는 산제물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관상생활에 대한 이같은 이해는 그녀가 후기로 갈수록 점차 관상생활을 자기실현의 관점에서 자기희생이라는 관점으로 전환하게 하였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저서가 ‘예배Worship’ 라는 것은 그녀의 영적여정의 종착지가 어디인가를 보여주는 단적이 표현이며, 예배에 대한 우리들의 생각을 다시 돌아보도록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예배가 점점 하느님을 경외하는 것에서 인간의 욕구충족과 요구를 중심으로, 초자연적인 것에서 윤리적인 것으로 그 성격이 변하고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언더힐은 자신의 저서 ‘예배Worship’에서 ‘가장 깊은 감각으로 드리는 개인의 예배는 하느님의 자비를 일으키기 위해 자비를 향해 돌아가는 인간의 움직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자비란 사랑의 하느님이며, 예배란 바로 자기 증여의 사랑이신 하느님을 향한 인간의 응답이라는 것입니다. 언더힐은 그리스도인의 헌신은 영적의식의 성취라기보다 얼마나 사랑으로 하느님께 자기를 내어드리는가와 지금 여기서 주요한 은총의 매개로서 성사를 고요히 받아들이는가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배하는 삶의 전체 가치는 이기주의로 찌든 얼룩들이 정화되고 이타심과 단순함이 일상적인 마음에 자리 잡아 온전해 지는 것입니다. 예배에서 개인이 자기가 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을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신적인 사랑이 개인적 표현에 대한 갈망, 무언가를 경험하고 싶은 갈망, 개인적인 안전과 기쁨에 대한 갈망을 집어 삼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예배와 성화(聖化)의 공통된 목적은 교회가 자신의 머리인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영광을 더욱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교에 있는 위대하고 자명한 진리에 열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옹졸함과 개인주의, 감정적 편견에서 벗어난다면 우리는 모두 이를 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기도는 하느님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기도가 저 위대한 법, 그리스도교 공통의 신앙으로부터 멀어지면 겸손함과 온전한 판단을 잃기 십상입니다. 처음 기도할 때, 우리는 무언가를 믿기 때문에 기도합니다. 이 단계에서 그 무엇은 희미하며 막연합니다. 그러나 기도가 깊이를 더해 갈수록 믿음은 풍요로워지고 넓혀집니다.
- 예배 Worship 중에서 -
언더힐은 예배의 응답으로서 영적 일치를 향한 인간의 본질적 활동에 대하여 ‘우리는 오직 예배에 의해 거룩함과 실재에 이르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녀에게 예배는 영원한 하느님을 향한 피조물의 응답이며, 그것은 항상 주체와 객체의 관계를 의미합니다. 인격적인 예배는 궁극적으로 이 두 차원과 관계된 것이며, 그것은 첫째로 사랑과 예배의 대상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거룩함을 향한 여정이고, 둘째는 하느님의 창조적 활동에 사랑으로 참여하고 협력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순종하는 의지로 응답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협력하며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됩니다. 그녀는 하느님과 연합하는 삶은 성찬 안에서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몸의 지체가 되는 의무를 포함하는 성사적 생활이며, 영성생활은 세상으로부터 영적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죽음 안에서 자기희생적 참여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 The Golden Sequence에서 관상이란 자기를 내어주며 하느님의 은혜에 응답하기 위한 역량이 자라나는 수단이기에 가치가 있으며, 하느님을 향한 열린 수용과 타자를 향한 자기 개방의 매개적 행동으로 완성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신비주의자들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기도의 목적, 점점 그 자체로 기도가 되어가는 삶의 숨 겨진 목적은 하느님과의 일치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이 문구를 자주 이용하지만, 너무 자주 이용하는 까닭에 그 전체에 담긴 의미를 잃어버렸습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란 무엇입니까? 종 교적 열정이 타오르는 순간에 즐기는 기분 좋은 느낌은 아닙니다. 그 기분 좋은 느낌은 하느 님과의 일치에서 오는 부산물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하느님과의 일 치의 핵심이 아닙니다. 하느님과의 일치란 우리가 지닌 인간적 본성의 모든 부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만들어지고, 마음과 영혼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창조주이신 그분의 삶과 행위에 엮여 들어가며, 그분이 목적으로 두고 계신 구원사건 속으로 녹아드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하느님의 피조물은 그 자신의 운명을 성취합니다. 하느님과의 일치가 인간의 본성에 무엇 을 의미하는지, 그 대가는 무엇이고, 그 모습은 어떠해야 할지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길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관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을 관상함으로써 우 리는 지혜로워지고 성숙해집니다. 우리 자신을 위해서, 혹은 그저 영적으로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분의 가르침과 치유와 생명을 주시는 능력이 우리를 사로잡고, 우리를 통해서 일하게 하시는 것, 그 분이 보이신 모범과 십자가를 따라 우리 자신의 삶을 내려놓고 그분의 생명을 얻는 것, 그것이 성숙이고 하느님과의 일치입니다.’
- The Golden Sequence 중에서 -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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