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삶) 관상적 중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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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718회 작성일 23-03-22 21:47본문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지체들 상호간에 중보기도 덕분에 유지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공동체는 무너져 버립니다. 내가 중보기도해 주는 형제. 자매가 내게 온갖 어려움을 가져다줄지라도 나는 그를 심판하거나 미워할 수 없습니다.... 중보기도에는 극복될 수 없는 혐오감이나 개인적인 긴장, 또는 불화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중보기도는 개인과 공동체가 날마다 들어가야 하는 정화의 욕실입니다.
- 디트리히 본 회퍼 Dietrich Bonhoeffer -
우리의 기도는 대개는 청원(請願)으로 시작합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이든,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위한 기도이든, 기도는 우리의 바람과 욕구. 그리고 우리의 근심을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소경 바르티메오에게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 질문에 그가 ‘보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답을 하듯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 해결되기를 바라는 이슈, 치료와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청원기도는 때로 우리가 잠들어 있는 하느님을 깨우는 행위나, 하느님께 우리가 중보하는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정보를 브리핑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 그것들을 드러내어 말하기 전에 더 깊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당신은 ‘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말씀드려야 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가 무엇을 청할지를 이미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청을 듣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마음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그 관계에서 기쁨을 누리듯, 우리의 청을 듣고, 그 청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창조되는 우리가 맺게 되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하느님은 기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누구도 청원기도를 초보적이 기도로 이해하거나 미숙한 사람들의 기도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관상적 중보기도
시리아의 교부 이삭Isaac the Syrian은 “전적으로 자비로운 마음의 표징은 만물을 위해 타오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청원기도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기도에 응답하는 것이라면, 중보기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느님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헨리 나웬은 ‘중보기도란 상대방의 필요에 대한 연민어린 마음을 갖고 하느님과 마주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난과 비극들에 대해 슬픔과 연민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 일어날 때, 우리가 경험하는 그 걱정과 연민은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은 이미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기도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할 마음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우리는 우리가 중보하는 사람과 상황에 대한 우리의 바람을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청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중보하는 상황과 사람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고, 무엇이 가장 좋은지를 하느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다는 믿음으로 중보 할 수도 있습니다. 청원기도에서는 우리의 바람을 하느님께 가지고 가지만, 관상적인 중보기도에서는 하느님의 뜻과 기도에 우리 자신을 열어드립니다.
관상적 중보기도에서 우리는 우리의 아젠다를 내려놓고 우리가 중보하는 상황과 사람을 향하여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관상적 중보에서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아뢰는 대신 모든 사람과 상황 전체의 맥락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해 귀를 기울입니다. 이같은 기도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는데, 하느님의 더 크신 비젼 앞에서 우리의 필요, 생각, 바람을 내려놓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신, 우리가 중보하는 사람이 처한 상황에 대한 하느님의 기도를 듣습니다.
하느님의 기도
우리는 하느님의 기도에 대해 말합니다. 하느님은 기도하실까요? 사도 바오로는 모든 피조물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진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으며,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우시어 우리를 대신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6-28)
중보 중에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 마음의 중심에 흐르고, 그것은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관심으로 모든 것이 하나가 될 때까지, 우리의 관심을 옮기도록 할 것입니다. 하여 관상적 중보는 지속적인 하느님의 성육신적 창조사역이 모든 곳 -장소, 사건, 상황, 사람들-에서 꽃피고, 드러날 수 있도록 함께 하는 것이며, 그 구원사역에 공동의 참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의 위험과 댓가
관상적 중보는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더 크신 하느님의 기도에 맡기고, 그것이 우리를 어딘가로 인도해가도록 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관상적 중보는 위험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무엇을 요구하실지.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요청하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느님은 우리가 어려운 이웃을 방문하거나, 물질적 소유를 나누도록 요청하거나, 혹은 용서와 화해의 실천을 요구할 수도 있고, 혹은 감당하기 어려운 더 깊은 포기를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 중에 우리는 하느님께 숨기고 있는 것이나,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까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대다수는 갈등하는 세상에서 어느 한 편에 서기를 요청받습니다. 그리고 부분적인 증거나 소문에 근거하여 옳고 그름을 구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행동에 나서려는 사람들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하고, 필요한 것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 편들지 않는 능력으로 현실 전체를 포용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관상적 중보는 사랑의 소명과 그 사랑이 각각의 특정한 상황에서 우리를 부르는 초대에 승복하는 기도입니다. 하여 그것은 결국 마리아의 고백처럼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관상적 중보에서 식별의 기준은 내가 주도하는가? 아니면 하느님이 이끄시는가?에 있습니다.
중보기도는 응답되는가?
두 갈래의 답이 있습니다. 때때로 기도는 우리가 처음 청한 대로 응답됩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 우리의 기도는 시작할 때와 달리 기도 중에 하느님에 의해 변형되고, 변형된 방식으로 응답을 받습니다. 아들이 직업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었는데 몇 일 동안 간절히 기도한 끝에, 자신이 아들의 무직 상태에 대한 두려움과 좌절감에서 기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이 아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아들이 일할 수 있게 해 주시길 청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계속하면서 그녀는 하느님의 눈을 통해 지쳐있고 낙담해 있는 청년으로 아들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녀의 기도는 해결을 요구하는 것에서 하느님께서 아들을 인도해 주시고, 아들에게 용기를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기도가 바뀌면서, 자신의 마음이 누그러지자 자신과 아들의 관계도 달라지는 것을 경함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취업을 간절히 바라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늘 마음 한구석에 미안함과 죄책감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지치고 불안한 마음을 헤아려주고, 격려하자 어머니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관상적 중보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뜻에 따라 변화를 창조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변형의 길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나 중보는 무엇보다 정직한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 제 아들이 폐암에 걸렸어요. 당장 치료해 주세요...’ 만일 당신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거기서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선하고 의로운 삶을 성실히 살았던 가까운 친구가 불치의 병으로 죽어간다면, 당신은 그 상황에서 분노로 기도를 시작할 수 있고, 오랫동안 하느님께 화를 내며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면 마침내 하느님께서 당신의 기도와 마음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 행동이나 태도에 미묘한 변화를 가져오려는 하느님의 사랑에 ‘예’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오랜 기간 기도하다 보면 우리 대부분은 처음 기도에서 내세웠던 것들이 탐색되거나 종종 밀려나고, 그 사람 또는 상황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갈망의 층들이 그 자리에 나타난다는 것을 기도의 경험으로부터 배웁니다.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유연해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긴 시간 머무는 것이 필요합니다. 처음 언급했던 걱정거리들이 변형될 때까지...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하느님의 기도에 온전히 승복하기 전에, 잠든 제자들을 세 번씩이나 깨우러 가실 만큼 오래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자기추구나 조작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렇게 기도할 때, 기도는 우리를 정화시키고 변형시키는 성령을 향해 우리는 내어드릴 수 있게 하고, 영혼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창조적인 행위에 승복할 수 있게 합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 디트리히 본 회퍼 Dietrich Bonhoeffer -
우리의 기도는 대개는 청원(請願)으로 시작합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이든, 어떤 사람이나 상황을 위한 기도이든, 기도는 우리의 바람과 욕구. 그리고 우리의 근심을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소경 바르티메오에게 ‘나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신 질문에 그가 ‘보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답을 하듯 드리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바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시는 질문에 대답할 필요가 있습니다. 풀리지 않는 문제, 해결되기를 바라는 이슈, 치료와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청원기도는 때로 우리가 잠들어 있는 하느님을 깨우는 행위나, 하느님께 우리가 중보하는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정보를 브리핑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느님께 그것들을 드러내어 말하기 전에 더 깊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당신은 ‘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느님께 말씀드려야 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이미 우리가 무엇을 청할지를 이미 잘 알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청을 듣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마음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그 관계에서 기쁨을 누리듯, 우리의 청을 듣고, 그 청에 응답하는 과정에서 창조되는 우리가 맺게 되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하느님은 기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누구도 청원기도를 초보적이 기도로 이해하거나 미숙한 사람들의 기도로 치부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관상적 중보기도
시리아의 교부 이삭Isaac the Syrian은 “전적으로 자비로운 마음의 표징은 만물을 위해 타오르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청원기도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기도에 응답하는 것이라면, 중보기도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하느님의 기도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헨리 나웬은 ‘중보기도란 상대방의 필요에 대한 연민어린 마음을 갖고 하느님과 마주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재난과 비극들에 대해 슬픔과 연민의 마음이 우리 안에서 일어날 때, 우리가 경험하는 그 걱정과 연민은 우리 안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은 이미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시는 하느님의 기도이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기도할 마음을 일깨워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우리는 우리가 중보하는 사람과 상황에 대한 우리의 바람을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청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중보하는 상황과 사람에게 무엇이 가장 필요하고, 무엇이 가장 좋은지를 하느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다는 믿음으로 중보 할 수도 있습니다. 청원기도에서는 우리의 바람을 하느님께 가지고 가지만, 관상적인 중보기도에서는 하느님의 뜻과 기도에 우리 자신을 열어드립니다.
관상적 중보기도에서 우리는 우리의 아젠다를 내려놓고 우리가 중보하는 상황과 사람을 향하여 하느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입니다. 관상적 중보에서 우리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아뢰는 대신 모든 사람과 상황 전체의 맥락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대해 귀를 기울입니다. 이같은 기도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는데, 하느님의 더 크신 비젼 앞에서 우리의 필요, 생각, 바람을 내려놓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대신, 우리가 중보하는 사람이 처한 상황에 대한 하느님의 기도를 듣습니다.
하느님의 기도
우리는 하느님의 기도에 대해 말합니다. 하느님은 기도하실까요? 사도 바오로는 모든 피조물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진통 가운데 신음하고 있으며,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우시어 우리를 대신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성령께서도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대신해서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깊이 탄식하시며 하느님께 간구해 주십니다. 이렇게 성령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따라 성도들을 대신해서 간구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속까지도 꿰뚫어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성령의 생각을 잘 아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로마 8:26-28)
중보 중에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 마음의 중심에 흐르고, 그것은 피조물을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관심으로 모든 것이 하나가 될 때까지, 우리의 관심을 옮기도록 할 것입니다. 하여 관상적 중보는 지속적인 하느님의 성육신적 창조사역이 모든 곳 -장소, 사건, 상황, 사람들-에서 꽃피고, 드러날 수 있도록 함께 하는 것이며, 그 구원사역에 공동의 참여자가 되는 것입니다.
중보기도의 위험과 댓가
관상적 중보는 기도하는 우리 자신을 더 크신 하느님의 기도에 맡기고, 그것이 우리를 어딘가로 인도해가도록 열어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관상적 중보는 위험한 기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무엇을 요구하실지. 우리에게 어떤 사랑을 요청하실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느님은 우리가 어려운 이웃을 방문하거나, 물질적 소유를 나누도록 요청하거나, 혹은 용서와 화해의 실천을 요구할 수도 있고, 혹은 감당하기 어려운 더 깊은 포기를 요구할 수도 있습니다. 기도 중에 우리는 하느님께 숨기고 있는 것이나, 우리가 모르고 있는 것에 대해서까지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대다수는 갈등하는 세상에서 어느 한 편에 서기를 요청받습니다. 그리고 부분적인 증거나 소문에 근거하여 옳고 그름을 구별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옳고 그름을 기준으로 행동에 나서려는 사람들은 부족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부족하고, 필요한 것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 편들지 않는 능력으로 현실 전체를 포용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관상적 중보는 사랑의 소명과 그 사랑이 각각의 특정한 상황에서 우리를 부르는 초대에 승복하는 기도입니다. 하여 그것은 결국 마리아의 고백처럼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는 기도가 될 것입니다. 관상적 중보에서 식별의 기준은 내가 주도하는가? 아니면 하느님이 이끄시는가?에 있습니다.
중보기도는 응답되는가?
두 갈래의 답이 있습니다. 때때로 기도는 우리가 처음 청한 대로 응답됩니다. 그러나 더 많은 경우 우리의 기도는 시작할 때와 달리 기도 중에 하느님에 의해 변형되고, 변형된 방식으로 응답을 받습니다. 아들이 직업을 찾을 수 있도록 기도하는 어머니가 있었는데 몇 일 동안 간절히 기도한 끝에, 자신이 아들의 무직 상태에 대한 두려움과 좌절감에서 기도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이 아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아들이 일할 수 있게 해 주시길 청했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계속하면서 그녀는 하느님의 눈을 통해 지쳐있고 낙담해 있는 청년으로 아들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녀의 기도는 해결을 요구하는 것에서 하느님께서 아들을 인도해 주시고, 아들에게 용기를 주시기를 간구하는 기도로 바뀌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기도가 바뀌면서, 자신의 마음이 누그러지자 자신과 아들의 관계도 달라지는 것을 경함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취업을 간절히 바라는 어머니를 볼 때마다, 늘 마음 한구석에 미안함과 죄책감이 있었는데, 어머니가 지치고 불안한 마음을 헤아려주고, 격려하자 어머니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였습니다. 관상적 중보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개입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의 뜻에 따라 변화를 창조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변형의 길을 제공해 줍니다.
그러나 중보는 무엇보다 정직한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느님 제 아들이 폐암에 걸렸어요. 당장 치료해 주세요...’ 만일 당신이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거기서 시작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선하고 의로운 삶을 성실히 살았던 가까운 친구가 불치의 병으로 죽어간다면, 당신은 그 상황에서 분노로 기도를 시작할 수 있고, 오랫동안 하느님께 화를 내며 기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기도를 멈추지 않는다면 마침내 하느님께서 당신의 기도와 마음을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기도, 행동이나 태도에 미묘한 변화를 가져오려는 하느님의 사랑에 ‘예’라고 응답하는 것입니다.
오랜 기간 기도하다 보면 우리 대부분은 처음 기도에서 내세웠던 것들이 탐색되거나 종종 밀려나고, 그 사람 또는 상황에 대한 전혀 새로운 갈망의 층들이 그 자리에 나타난다는 것을 기도의 경험으로부터 배웁니다.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유연해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긴 시간 머무는 것이 필요합니다. 처음 언급했던 걱정거리들이 변형될 때까지... 예수님은 겟세마네에서 하느님의 기도에 온전히 승복하기 전에, 잠든 제자들을 세 번씩이나 깨우러 가실 만큼 오래 기도하셨습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자기추구나 조작하려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렇게 기도할 때, 기도는 우리를 정화시키고 변형시키는 성령을 향해 우리는 내어드릴 수 있게 하고, 영혼 안에서 일하시는 하느님의 창조적인 행위에 승복할 수 있게 합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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