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하나님의 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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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713회 작성일 23-03-14 14:34본문
내가 너를 도와주고 내 승리의 오른팔로 너를 붙들어주겠다.
(이사야 41:10)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붙잡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돕겠다.
(이사야 41:13)
고통, 인간이 신보다 나은 점.
(시몬 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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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에세이 by 숨빛향기] 하나님의 연필, 당신은 하나님이 들고계신 연필이다. 하나님은 올해 어떤 작품을 만드실까?
[숨빛향기]는 일상의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며 이민재 목사가 쓰고 읽는 영성에세이입니다.숨은 하나님 사랑이며, 빛은 이웃 사랑입니다.숨빛향기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향기입니다.벗들이 모두 숨빛향기입니다.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수필집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연필에 대해 묵상하며 삶을 이야기한다.
첫째, 연필을 이끄는 손과 같은 존재가 있다. 사람들은 그 존재를 신이라고 부른다. 연필이 손을 따르듯 삶은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한다.
둘째, 우리는 가끔 쓰던 걸 멈추고 연필을 깎아야 한다. 당장은 아파도 심은 더 예리해진다. 우리는 삶의 고통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된다.
셋째, 연필에는 지우개가 달려있다. 지우개는 잘못을 바로잡는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옳은 길을 걷도록 도와준다.
넷째, 연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무가 아니라 그 안에 든 심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다섯째, 연필이 지나간 곳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삶도 흔적을 남긴다. 우리는 우리가 남기는 흔적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손
아무리 좋은 연필이라도 사람의 손에 들려 있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손 안에 있어야 연필은 진가를 발휘한다. 연필이 작가의 손에 들려 있으면 시와 소설이 나온다. 화가의 손에 들려 있으면 아름다운 그림이 나온다. 작곡가의 손에 들려 있으면 심금을 울리는 노래가 나온다. 설계사의 손에 들려 있으면 웅장한 건축물이 나온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연필이다.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하나님은 “오른팔로” 우리를 붙들어주시고(사 42:10), 우리의 “오른손을” 붙잡고 계신다.(사 41:13) 시편 시인은 우리를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시 95:7)이라고 묘사한다. 양이 목자를 따르듯,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 사는 게 세월을 아끼는 삶의 지혜다.
새해에는, 작가가 쥐고 있는 연필처럼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 살고 싶다. 하나님은 우리를 멋진 작품으로 만드실 것이다. 아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작품이다. 하나님은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작품으로 만드셨다.(엡 2:10) 남은 일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우리가 완성하는 것이다.
새해에는 춤을 추자. 내키는 대로 욕망의 막춤 추지 말고, 하나님의 손이 리드하시는 대로 신성한 춤을 추자. 하나님의 손길 따라 때로는 경건하고 신령하게, 때로는 우아하고 아름답게, 때로는 격정적이고 뜨겁게, 때로는 고요하고 평화롭게 하늘 춤사위를 날리자. 예언자 이사야가 아름답게 묘사한 대로 우리는 이미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하나님의 손의 왕관”(사62:3)을 쓴 사람들 아닌가.
삶의 고통
깎지 않은 연필은 쓸 수가 없다. 연필 같은 존재인 우리도 깎여야 쓸모있는 사람이 된다. 우리를 깎는 칼은 삶의 시련과 고통이다. 인생유전과 관련된 아픔, 사업의 곡절에서 오는 아픔, 관계의 실패에서 오는 아픔 등 고통은 다양하다. 고통을 겪으면서 우리는 깎인다. 자존심과 고집도 깎이고, 허영과 사치도 깎이고, 허풍과 허세도 깎인다. 삶은, 고통이라는 정으로 쪼고 시련이라는 끌로 깎으며 우리를 다듬는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 삶은 원래 불편하고 고통스럽다.(신영복) 고통이 없다면 삶이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고통이 없다면 무(無)의 심연이 입을 벌리고 우리를 기다릴 뿐이다. 시인의 노래처럼 “생선이 소금에 절임을 당하고, 얼음에 냉장을 당하는 고통이 없다면, 썩는 길밖에 없다.”(정채봉)
시몬 베유는 “인간이 신보다 나은 점”이 바로 고통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고통이 사라지기를, 고통이 줄어들기를 원하지 말고, 고통에 손상되지 않기를 바라라”고 충고한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점은 고통에 대해 초자연적인 해결책을 얻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을 초자연적으로 활용하는 데 있다”고도 한다. 고통을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없애려고 하지 말고, 고통을 통해 성숙해지라는 뜻이겠다.
시몬 베유는 “인간이 신보다 나은 점”이 바로 고통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고통이 사라지기를, 고통이 줄어들기를 원하지 말고, 고통에 손상되지 않기를 바라라”고 충고한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점은 고통에 대해 초자연적인 해결책을 얻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을 초자연적으로 활용하는 데 있다”고도 한다.
고통은 인간을 성숙하고 쓸모있는 존재로 만든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낳는다.”(벧전 1:6)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인격을 단련하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다.”(롬 5:4) 시편 시인은 아예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 유익”(시 119:71)이라고 말한다. 그래선지 바울은 “환난을 자랑한다”(롬 5:3) 하고, 베드로는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해도 기뻐하라”(벧전 1:6)고 한다.
새해에도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기억해야 할 성경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고전 10:13)
실수 지우개
연필에는 지우개가 달려있어서 잘못 쓴 것을 지울 수 있다.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연필 같은 존재인 우리에게도 지우개가 있다. 그 지우개로 삶의 실수와 잘못을 지우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회개” 말이다. 회개하면 우리는 우리의 잘못과 실수, 그리고 그로 인한 죄책감을 지울 수 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개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상담가나 영성지도자 앞에서 상한 심정을 열어보이는 것으로 끝나서도 안 된다. 나로 인해 상처 받은 누군가의 상처를 지워주는 게 진정한 회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용서를 빌어야 한다. 회개는 그렇게 완성된다.
나로 인해 상처 받은 누군가의 상처를 지워주는 게 진정한 회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용서를 빌어야 한다. 회개는 그렇게 완성된다.
새해 첫날,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식탁에 초대받는다. 지난 한 해의 모든 실수와 잘못을 내려놓자. 사람들에게 품고 있는 서운함 억울함 배신감 같은 악감정도 지워버리자. 쉽게 끊지 못하고 있는 악습과 구습도 주님께 맡기자. 내가 상처를 준 사람에게 용서를 빌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새해엔 얼룩진 생을 되풀이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우리에게 회개라는 지우개가 있음을 잊지 말자.
이렇게 맞이하는 새해는 홀가분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에서 시작한다. 회개는 새롭고 신선하고 생기 있는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삶의 시련은 회개를 촉구하는 영원의 종소리다. 회개로 이끄는 삶의 시련은 가장 빛나는 삶의 은총이다.
존재의 심
연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심이다. 내 초등학교 시절, 향나무 연필이 귀했다. 그 연필은 부드럽게 깎였고, 향기도 좋았다. 어느 날 교회에서 향나무 연필 한 자루를 선물로 받았다. 무척 기뻤다. 하지만 조금만 힘을 줘도 심이 부러지는 통에 당최 쓸 수가 없었다. 좋아하다가 그만 바닥에 떨어뜨려 심이 골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나무가 좋아도 심이 부실하면 연필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 심이 아예 없다면 연필은 있으나 마나다.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연필 같은 존재인 우리에게도 심이 있다. 존재의 심! 존재의 심을 우리는 영혼, 속사람, 참자아, 영혼의 핵, 영혼의 불꽃, 하나님의 씨앗, 중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존재의 심이 부실하거나 골았다면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없다.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도 없다.
에크하르트에 따르면 존재의 심인 영혼의 핵은 하나님의 활동 장소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아들을 낳으신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귀인이 된다. 그래서 바울은 기도한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엡 3;16) 속사람이 존재의 심이다.
디오니시우스는 제자 디모테오에게 영혼의 중심에 머무르라고 하면서 이렇게 권면한다. “사랑하는 내 아들 디모테오야. 너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네 자아를 넘어 솟아올라라. 그리고 들어가라. 네 능력과 네 성격을 넘어 고요한 비밀의 어둠 속으로! 그러면 모든 신 위에 계신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을 알 수 있으리라.” 중심에 머무르려면 자아를 넘어서야 한다. 성격도 넘어서야 한다. “고요한 비밀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그곳이 존재의 심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신다.
너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네 자아를 넘어 솟아올라라. 네 능력과 네 성격을 넘어 고요한 비밀의 어둠 속으로!
영혼의 흔적
연필이 지나간 곳에는 흔적이 남는다. 모든 사람은 연필처럼 흔적을 남긴다. 예술가처럼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는 사람도 있고, 전문가처럼 완성도 있는 흔적을 남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흔적이 어지러운 사람이 있다. 서툴기만 하고 미숙한 티를 벗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그렇다. 사십 년을 설교했어도 여전히 초보 같다.
기독교인은 무슨 흔적을 남겨야 할까? 기독교인을 성도라고 부른다. 성도(聖徒), “거룩한 무리”라는 뜻이다. 성도가 바로 세인트(saint) 곧 성인이다. 기독교인은 성인의 흔적 곧 영혼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다섯 가지 영혼의 흔적을 남겼다.
첫째, “머무름”의 흔적이다. 초대교회는 기도와 말씀, 예배와 성례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에 머무르려 했다. 영성의 흔적이요 관상의 흔적이다. 이걸 초대교회에서는 “레이투르기아”(leiturgia)라고 불렀다.
둘째, “사귐”의 흔적이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사귐은 아름다웠다. 그들은 하나였다. 남자도 여자도, 그리스인도 이방인도, 자유인도 종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였다.(갈 3:28) 그리고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행 2:44)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행 2:47) “코이노니아”(koinonia)의 흔적이었다.
셋째, “배움”의 흔적이다. 초대교회는 끊임없이 가르치고 배우는 교회였다.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었다.(갈 6:6) 바울은 이렇게 권고하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살아 있게 하십시오. 온갖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골 3:16) 초대교회는 “디다케”(didache)의 흔적을 남겼다.
넷째, “나눔”의 흔적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받은 것 배운 것 가진 것을 줄기차게 나눴다. 복음을 나눴고, 먹을 것을 나눴다. 어딜 가나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했고, 쉬지 않고 행복한 삶에 대한 진실(복음)을 전했다. 그들이 가는 곳과 머무는 곳에는 “케리그마”(kerygma)의 흔적이 남았다.
다섯째, “섬김”의 흔적이다. 초대교회는 조직이기 이전에 공동체였다. 공동체는 명령과 복종을 근간으로 하는 수직적인 체계가 아니라, 섬김과 순종을 통한 수평적인 공동체였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특별히 연약한 지체들과 모자라 보이는 지체들을 섬겼다.(고전 22, 24) 이러한 섬김은 사회 정의로 발전하였다. 초대교회는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겼다. 디아코니아”(diakonia)의 흔적이다.
새해에 우리의 삶에는 어떤 흔적이 남을까? 그동안 우리의 삶을 더럽혔던 욕망의 얼룩은 줄어들거나 깨끗이 지워지면 좋겠다. 모든 흔적에서는 향기가 난다. 새해에는 머무름과 사귐과 배움의 향기, 나눔과 섬김의 신성한 향기가 더욱 강렬해지면 좋겠다. Happy New Year!
- 이민재
(이사야 41:10)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다. 내가 너의 오른손을 붙잡고 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돕겠다.
(이사야 41:13)
고통, 인간이 신보다 나은 점.
(시몬 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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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에세이 by 숨빛향기] 하나님의 연필, 당신은 하나님이 들고계신 연필이다. 하나님은 올해 어떤 작품을 만드실까?
[숨빛향기]는 일상의 새 하늘과 새 땅을 꿈꾸며 이민재 목사가 쓰고 읽는 영성에세이입니다.숨은 하나님 사랑이며, 빛은 이웃 사랑입니다.숨빛향기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향기입니다.벗들이 모두 숨빛향기입니다.
『연금술사』의 작가 파울로 코엘료는 수필집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연필에 대해 묵상하며 삶을 이야기한다.
첫째, 연필을 이끄는 손과 같은 존재가 있다. 사람들은 그 존재를 신이라고 부른다. 연필이 손을 따르듯 삶은 그분의 뜻을 따라야 한다.
둘째, 우리는 가끔 쓰던 걸 멈추고 연필을 깎아야 한다. 당장은 아파도 심은 더 예리해진다. 우리는 삶의 고통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된다.
셋째, 연필에는 지우개가 달려있다. 지우개는 잘못을 바로잡는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옳은 길을 걷도록 도와준다.
넷째, 연필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나무가 아니라 그 안에 든 심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다섯째, 연필이 지나간 곳에는 반드시 흔적이 남는다. 삶도 흔적을 남긴다. 우리는 우리가 남기는 흔적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손
아무리 좋은 연필이라도 사람의 손에 들려 있지 않으면 쓸모가 없다. 손 안에 있어야 연필은 진가를 발휘한다. 연필이 작가의 손에 들려 있으면 시와 소설이 나온다. 화가의 손에 들려 있으면 아름다운 그림이 나온다. 작곡가의 손에 들려 있으면 심금을 울리는 노래가 나온다. 설계사의 손에 들려 있으면 웅장한 건축물이 나온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있는 연필이다. 예언자 이사야의 말대로 하나님은 “오른팔로” 우리를 붙들어주시고(사 42:10), 우리의 “오른손을” 붙잡고 계신다.(사 41:13) 시편 시인은 우리를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 그의 손이 돌보시는 양”(시 95:7)이라고 묘사한다. 양이 목자를 따르듯,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 사는 게 세월을 아끼는 삶의 지혜다.
새해에는, 작가가 쥐고 있는 연필처럼 하나님의 손길을 따라 살고 싶다. 하나님은 우리를 멋진 작품으로 만드실 것이다. 아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작품이다. 하나님은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작품으로 만드셨다.(엡 2:10) 남은 일은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을 우리가 완성하는 것이다.
새해에는 춤을 추자. 내키는 대로 욕망의 막춤 추지 말고, 하나님의 손이 리드하시는 대로 신성한 춤을 추자. 하나님의 손길 따라 때로는 경건하고 신령하게, 때로는 우아하고 아름답게, 때로는 격정적이고 뜨겁게, 때로는 고요하고 평화롭게 하늘 춤사위를 날리자. 예언자 이사야가 아름답게 묘사한 대로 우리는 이미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하나님의 손의 왕관”(사62:3)을 쓴 사람들 아닌가.
삶의 고통
깎지 않은 연필은 쓸 수가 없다. 연필 같은 존재인 우리도 깎여야 쓸모있는 사람이 된다. 우리를 깎는 칼은 삶의 시련과 고통이다. 인생유전과 관련된 아픔, 사업의 곡절에서 오는 아픔, 관계의 실패에서 오는 아픔 등 고통은 다양하다. 고통을 겪으면서 우리는 깎인다. 자존심과 고집도 깎이고, 허영과 사치도 깎이고, 허풍과 허세도 깎인다. 삶은, 고통이라는 정으로 쪼고 시련이라는 끌로 깎으며 우리를 다듬는다.
고통은 피할 수 없다. 삶은 원래 불편하고 고통스럽다.(신영복) 고통이 없다면 삶이 성립되지 않는다. 따라서 고통이 없다면 무(無)의 심연이 입을 벌리고 우리를 기다릴 뿐이다. 시인의 노래처럼 “생선이 소금에 절임을 당하고, 얼음에 냉장을 당하는 고통이 없다면, 썩는 길밖에 없다.”(정채봉)
시몬 베유는 “인간이 신보다 나은 점”이 바로 고통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고통이 사라지기를, 고통이 줄어들기를 원하지 말고, 고통에 손상되지 않기를 바라라”고 충고한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점은 고통에 대해 초자연적인 해결책을 얻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을 초자연적으로 활용하는 데 있다”고도 한다. 고통을 초자연적인 기적으로 없애려고 하지 말고, 고통을 통해 성숙해지라는 뜻이겠다.
시몬 베유는 “인간이 신보다 나은 점”이 바로 고통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는 “고통이 사라지기를, 고통이 줄어들기를 원하지 말고, 고통에 손상되지 않기를 바라라”고 충고한다. “그리스도교의 가장 위대한 점은 고통에 대해 초자연적인 해결책을 얻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고통을 초자연적으로 활용하는 데 있다”고도 한다.
고통은 인간을 성숙하고 쓸모있는 존재로 만든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낳는다.”(벧전 1:6)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인격을 단련하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다.”(롬 5:4) 시편 시인은 아예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 유익”(시 119:71)이라고 말한다. 그래선지 바울은 “환난을 자랑한다”(롬 5:3) 하고, 베드로는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해도 기뻐하라”(벧전 1:6)고 한다.
새해에도 삶이 고단하고 힘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기억해야 할 성경 말씀이 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여러분이 감당할 수 있는 능력 이상으로 시련을 겪는 것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련과 함께 그것을 벗어날 길도 마련해 주셔서, 여러분이 그 시련을 견디어 낼 수 있게 해주십니다.”(고전 10:13)
실수 지우개
연필에는 지우개가 달려있어서 잘못 쓴 것을 지울 수 있다.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연필 같은 존재인 우리에게도 지우개가 있다. 그 지우개로 삶의 실수와 잘못을 지우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회개” 말이다. 회개하면 우리는 우리의 잘못과 실수, 그리고 그로 인한 죄책감을 지울 수 있다. 하나님은 회개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개가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고백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상담가나 영성지도자 앞에서 상한 심정을 열어보이는 것으로 끝나서도 안 된다. 나로 인해 상처 받은 누군가의 상처를 지워주는 게 진정한 회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용서를 빌어야 한다. 회개는 그렇게 완성된다.
나로 인해 상처 받은 누군가의 상처를 지워주는 게 진정한 회개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용서를 빌어야 한다. 회개는 그렇게 완성된다.
새해 첫날, 오늘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식탁에 초대받는다. 지난 한 해의 모든 실수와 잘못을 내려놓자. 사람들에게 품고 있는 서운함 억울함 배신감 같은 악감정도 지워버리자. 쉽게 끊지 못하고 있는 악습과 구습도 주님께 맡기자. 내가 상처를 준 사람에게 용서를 빌 수 있는 용기를 달라고, 새해엔 얼룩진 생을 되풀이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우리에게 회개라는 지우개가 있음을 잊지 말자.
이렇게 맞이하는 새해는 홀가분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회개에서 시작한다. 회개는 새롭고 신선하고 생기 있는 삶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삶의 시련은 회개를 촉구하는 영원의 종소리다. 회개로 이끄는 삶의 시련은 가장 빛나는 삶의 은총이다.
존재의 심
연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심이다. 내 초등학교 시절, 향나무 연필이 귀했다. 그 연필은 부드럽게 깎였고, 향기도 좋았다. 어느 날 교회에서 향나무 연필 한 자루를 선물로 받았다. 무척 기뻤다. 하지만 조금만 힘을 줘도 심이 부러지는 통에 당최 쓸 수가 없었다. 좋아하다가 그만 바닥에 떨어뜨려 심이 골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실망했는지 모른다.
나무가 좋아도 심이 부실하면 연필을 제대로 쓸 수가 없다. 심이 아예 없다면 연필은 있으나 마나다. 하나님의 손에 쥐어진 연필 같은 존재인 우리에게도 심이 있다. 존재의 심! 존재의 심을 우리는 영혼, 속사람, 참자아, 영혼의 핵, 영혼의 불꽃, 하나님의 씨앗, 중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존재의 심이 부실하거나 골았다면 사람 구실을 할 수가 없다.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도 없다.
에크하르트에 따르면 존재의 심인 영혼의 핵은 하나님의 활동 장소다. 그 안에서 하나님은 아들을 낳으신다. 이때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귀인이 된다. 그래서 바울은 기도한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엡 3;16) 속사람이 존재의 심이다.
디오니시우스는 제자 디모테오에게 영혼의 중심에 머무르라고 하면서 이렇게 권면한다. “사랑하는 내 아들 디모테오야. 너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네 자아를 넘어 솟아올라라. 그리고 들어가라. 네 능력과 네 성격을 넘어 고요한 비밀의 어둠 속으로! 그러면 모든 신 위에 계신 알려지지 않은 하나님을 알 수 있으리라.” 중심에 머무르려면 자아를 넘어서야 한다. 성격도 넘어서야 한다. “고요한 비밀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이, 그곳이 존재의 심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신다.
너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네 자아를 넘어 솟아올라라. 네 능력과 네 성격을 넘어 고요한 비밀의 어둠 속으로!
영혼의 흔적
연필이 지나간 곳에는 흔적이 남는다. 모든 사람은 연필처럼 흔적을 남긴다. 예술가처럼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는 사람도 있고, 전문가처럼 완성도 있는 흔적을 남기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흔적이 어지러운 사람이 있다. 서툴기만 하고 미숙한 티를 벗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내가 그렇다. 사십 년을 설교했어도 여전히 초보 같다.
기독교인은 무슨 흔적을 남겨야 할까? 기독교인을 성도라고 부른다. 성도(聖徒), “거룩한 무리”라는 뜻이다. 성도가 바로 세인트(saint) 곧 성인이다. 기독교인은 성인의 흔적 곧 영혼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다섯 가지 영혼의 흔적을 남겼다.
첫째, “머무름”의 흔적이다. 초대교회는 기도와 말씀, 예배와 성례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에 머무르려 했다. 영성의 흔적이요 관상의 흔적이다. 이걸 초대교회에서는 “레이투르기아”(leiturgia)라고 불렀다.
둘째, “사귐”의 흔적이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의 사귐은 아름다웠다. 그들은 하나였다. 남자도 여자도, 그리스인도 이방인도, 자유인도 종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였다.(갈 3:28) 그리고 “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했다.”(행 2:44) “그래서 그들은 모든 사람에게서 호감을 샀다.”(행 2:47) “코이노니아”(koinonia)의 흔적이었다.
셋째, “배움”의 흔적이다. 초대교회는 끊임없이 가르치고 배우는 교회였다.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었다.(갈 6:6) 바울은 이렇게 권고하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살아 있게 하십시오. 온갖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골 3:16) 초대교회는 “디다케”(didache)의 흔적을 남겼다.
넷째, “나눔”의 흔적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받은 것 배운 것 가진 것을 줄기차게 나눴다. 복음을 나눴고, 먹을 것을 나눴다. 어딜 가나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했고, 쉬지 않고 행복한 삶에 대한 진실(복음)을 전했다. 그들이 가는 곳과 머무는 곳에는 “케리그마”(kerygma)의 흔적이 남았다.
다섯째, “섬김”의 흔적이다. 초대교회는 조직이기 이전에 공동체였다. 공동체는 명령과 복종을 근간으로 하는 수직적인 체계가 아니라, 섬김과 순종을 통한 수평적인 공동체였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특별히 연약한 지체들과 모자라 보이는 지체들을 섬겼다.(고전 22, 24) 이러한 섬김은 사회 정의로 발전하였다. 초대교회는 가난하고 힘없고 소외된 사람들을 섬겼다. 디아코니아”(diakonia)의 흔적이다.
새해에 우리의 삶에는 어떤 흔적이 남을까? 그동안 우리의 삶을 더럽혔던 욕망의 얼룩은 줄어들거나 깨끗이 지워지면 좋겠다. 모든 흔적에서는 향기가 난다. 새해에는 머무름과 사귐과 배움의 향기, 나눔과 섬김의 신성한 향기가 더욱 강렬해지면 좋겠다. Happy New Year!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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