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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세이) 관상적 상상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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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38회 작성일 23-03-14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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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원에 대한 상상력 -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
(요 8:58)
 

창작하는 사람들에게 예술적 상상력이 필요하고, 정치 지도자들에게 연민의 상상력이 필요하다면, 기독교인들에게는 관상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관상적 상상력이 없으면 기독교가 말하는 모든 구원의 언어들은 리얼리티를 잃고 추상적인 관념이나 교리에 머물기 때문이다.

관상적 상상력이란 무엇일까? 관상기도 수련을 통해 관상(적) 상태에 이를 때 발달하는 상상력이다. 그러면 관상 상태란 무엇일까? 첫째,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는 상태, 둘째,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현존 속에 머무르고 있는 상태, 셋째, 예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현존 속에 머무르면서 성령이 충만한 상태다. 한 마디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한 현존과 사랑의 친교 속에 참여하고 있는 상태다.

관상 상태에 있을 때의 상상력은 관상 상태에서 벗어났을 때의 상상력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관상 상태에서 상상력은 정화되고 변형되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정화되고 변형될 때 일어날 일을 예언자 요엘은 이렇게 묘사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욜 2:28)
성령충만한 관상 상태에서 “아들딸”은 예언을 한다. 왜일까? 머리에서 벗어나 직관이 열리고 영적 감각이 깨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본다. 표층 아래의 심층을 보고, 표면 너머의 이면을 본다. 이전에 듣지 못하던 것을 듣는다. 내면의 소리를 듣고 영혼의 소리를 듣고 침묵의 소리를 듣는다. 이전에 느끼지 못하던 것을 느낀다. 하나님의 보편적 현존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물의 신성함을 느낀다. 예언이 샘솟을 수밖에 없다. 예언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 다시 말해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들려주시고 느끼게 하시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다. “예언은 성령에 이끌려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말씀을 받아서 하는 것입니다.”(벧후 1:21)



 정념과 상상력
무엇보다 요엘은 관상 상태에 있을 때 “노인들이 꿈을 꾸고 젊은이들이 환상을 본다”고 말한다. 관상적 상상력은 새로운 것을 상상하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그것이 뭘까? “근원에 대한 상상”이다. 근원을 상상하는 상상력 곧 관상적 상상력을 설명하기 전에 먼저 관상 상태에서 벗어날 때 상상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살펴보자.

관상 상태를 벗어날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욕망 에너지다. 탁월한 영성심리학자인 사막 교부 에바그리우스에 따르면 욕망은 여덟 가지 정념(정욕)을 일으킨다. 그리고 정념들은 수많은 환상을 쏟아낸다.

첫 번째 정념은 “탐식”이다. 탐식이라는 정념에서는 포식과 포만의 환상이 싹트기 시작한다. 포식과 포만의 환상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대한 염려로 굴절하고, 나중에는 은퇴 후의 불안이나 노후에 대한 걱정으로 뒤틀린다. 둘째 정념은 “음욕”이다. 음욕이라는 정념에 사로잡힐 때 상상력이 어떻게 작용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음란한 상상, 포르노적 이미지들이 난무한다. 음욕을 구현하려는 상상이 쏟아진다. n번방 미성년자 성착취나 불법촬영 같은 것들은 이런 상상의 산물이다.

셋째 정념인 탐욕에 사로잡힐 때 상상력은 정당한 소유를 넘어 불의한 착취와 강탈의 환상을 펼칠 것이고, 넷째 정념인 우울에 사로잡힐 때 상상력은 죽음과 관련된 환상을 독버섯처럼 피워낼 것이다. 다섯째 정념인 “분노”는 가해와 복수 같은 폭력적인 상상에 불 지를 것이며, 여섯째 정념인 “나태”는 무기력하고 몽환적인 상태에서 뜬구름 잡는 상상으로 생의 시간을 허비할 것이다. 일곱째 정념인 “허영”에 사로잡히면 노력 없이 얻는 갈채와 영광에 대한 환영에 시달릴 것이며, 여덟째 정념인 “교만”에 사로잡히면 지배하고 군림하는 쾌감에 대한 상상에 중독될 것이다.

정욕의 토양에 뿌리내린 상상력의 나무에서 징그럽게 피어나는 악의 꽃들은 마음을 더럽히고, 영혼을 부패하게 한다. 정념이 길러낸 상상력은 해충이 배춧잎 갉아 먹듯 생의 시간을 야금야금 먹어치운다. 상상력을 정념의 손아귀에 넘겨주는 것은 삶을 망치려는 악마의 가장 효과적인 계략이다. 상상력을 정념에 넘겨주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은 마약중독을 방치하면서 제정신이기를 바라는 것만큼이나 어리석다.


근원에 대한 상상력
그러면 관상의 토양에서 자란 상상력의 나무에선 어떤 환상의 꽃이 피어날까? 그것이 바로 “근원에 대한 상상”이다. 다윗은 뛰어난 시인답게 근원에 대한 상상을 이렇게 펼쳐 보인다.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나에게 정하여진 날들이 아직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주님의 책에 다 기록되었습니다.(시 139:16)
다윗의 상상력이 도달한 곳은 모태다. 다윗의 상상력은 모태에서 자기의 형질이 갖추어지기 전, 자기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을 상상한다. 형질이 갖추어지기 전에 하나님은 다윗의 어떤 모습을 보셨을까? 양을 치던 다윗이었을까, 골리앗을 이긴 다윗이었을까, 아니면 밧세바를 겁탈한 다윗이었을까? 이 모두 아니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주님의 책”에 사회적 자아나 거짓자아를 기록하실까? 그럴 리는 만무하다. 주님께서 다윗의 형질이 갖추어지기 전부터 보신 것은 다윗의 본질 자아 곧 하나님의 형상이었을 것이다. 다윗은 관상적 상상력을 통해 모태에 이르렀고, 거기서 자신의 근원을 직관한다.

예언자 이사야도 관상적 상상력이 발달한 사람이다. 그의 상상력도 모태를 향해 펼쳐진다. “주께서 이미 모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태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다.”(사 49:1)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그의 종으로 삼으셨다.”(사 49:5)

물리적 시간으로 따지면 이사야가 예언자의 소명을 받은 때는 “웃시야 왕이 죽던 해”(사 6:1)였다. 하지만 이사야는 관상적 상상력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이 이미 모태에서 시작되었다고 고백한다. 모태는 존재의 시작이며, 운명의 시작이다. 따라서 이사야는 모태에서 하나님이 부르셨다는 상상을 통해 예언자의 소명이 취소 불능의 운명임을 받아들인다.

예수님처럼 근원에 대한 상상력이 탁월하신 분도 없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이 논쟁할 때였다. 유대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라고 자랑하자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녀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는, 진리를 말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이런 일을 하지 않았다.”(요 8:39-40) 아브라함을 자기와 관련지어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유대인들이 물었다. “당신이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더 위대하다는 말이오? …당신은 아직 나이가 쉰도 안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다는 말이오?”(요 8:53, 57)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요 8:37-59)
유대인들은 깜짝 놀랐다.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어떻게 쉰도 안된 사람이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 산술적으로나 논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관상적 상상력으로는 가능하다. 관상적 상상력은 근원에 대한 상상, 즉 영원한 현재(eternal now)에 대한 감각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나이를 통해 자기를 사회적 자아 곧 페르소나로 인식하지 않으신다. 관상적 상상력을 통해 자신의 본질 자아 곧 참자아를 직관하신다. 그리고 영원한 현재에 머무르신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다”라고 하지 않고 내가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관상적 상상력이 활성화되면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본질 자아를 통찰한다. 나이와 상관없이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 속에 현존하는 존재의 원형(하나님의 형상)을 말이다. 하여, 관상적 상상력이 발달하면 우리도 예수님과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라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관상적 상상력이 활성화되면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있는” 본질 자아를 통찰한다. 나이와 상관없이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 속에 현존하는 존재의 원형(하나님의 형상)을 말이다. 하여, 관상적 상상력이 발달하면 우리도 예수님과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라고.



나의 근원에 대한 상상력
나에게 근원에 대한 상상력을 일깨워준 사람은 엄마였다. 성격이 극내향에 가까웠던 나는 수줍음과 부끄럼을 잘 탔다. 사람들 앞에서 말하거나 의견을 발표해야 할 때면 얼굴이 빨개지고 가슴이 뛰고 이마와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러한 증상을 자각하면 머리가 하얘지고 말을 더듬기 시작한다. 하려던 말은 속으로 기어들어 가고 나는 수치심에 휩싸인다.

하지만 나의 수치심은 내향적인 성격 탓만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었다. 그렇다고 심한 상처나 모욕을 받은 일은 없었다. 죄에 대한 죄책감이나 실패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지만, 수치심과는 달랐다. 아무리 분석해봐도 수치심의 뿌리를 알 수 없었다.

수치심의 원인을 깨닫게 한 것은 향심기도였다. 향심기도 수행에 심취하여 정진하던 시절, 어느 날이었다. 향심기도를 하고 있는데 해본 적이 없는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물론 그 생각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향심기도의 지침대로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 생각을 흘려버렸다. 그런데 기도가 끝난 뒤에도 그 생각은 떠나질 않았고, 기도할 때마다 되풀이하여 나타났다.

그 생각의 씨앗은 엄마가 뿌린 말이었다. 엄마는 하늘나라 가실 때까지 여러 달 암투병하셨다. 형제들이 돌아가며 간병하곤 했는데 내 차례였던 어느 날 엄마는 내 손을 잡고 뜬금없이 말했다. 큰일 날 뻔했지….

큰일 날 뻔하다니 무슨 말이냐고 물었다.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의 사정을 들려주었다. 나의 출산을 고민한 얘기를. 이미 칠 남매를 낳았고 육 남매를 기르고 있었다. 먹고살기 어려운 시절 먹는 입(食口)이 하나 더 느는 것은 부담스러웠다. 엄마는 유산을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엄마는 불파마를 하면 그럴 수 있다는 이야기를 누군가로부터 들었다.

적극적인 시도 여부는 잘 모른다. 하지만 엄마는 잠깐이라도 그런 생각을 했던 게 죄스러웠던 같다. 그래서 임종을 앞두고 당사자인 나에게 평생 가슴에 묻고 있었던 비밀을 꺼낸 모양이다. 큰일 날 뻔했지…. 이 한마디에는 유산했다면 목사가 된 막내아들을 보지 못했을 것 아니겠느냐는 가슴 쓸어내릴 정도의 철렁함과 그렇지 않아 다행이라는 안도의 한숨이 동시에 들어있었다.

엄마의 고해 같은 고백은 기도할 때마다 나의 상상력을 모태로 끌고 갔다. 그리고 나는 상상 속에서 보았다. 모태에서 떨고 있는 작은 태아를. 엄마에게 걱정거리가 되고 환대받지 못하는 씨앗 같은 생명을. 한때나마 전존재가 거부된 한 가련한 존재를.
엄마의 고해 같은 고백은 기도할 때마다 나의 상상력을 모태로 끌고 갔다. 그리고 나는 상상 속에서 보았다. 모태에서 떨고 있는 작은 태아를. 엄마에게 걱정거리가 되고 환대받지 못하는 씨앗 같은 생명을. 한때나마 전존재가 거부된 한 가련한 존재를.
물론 엄마에 대한 원망은 전혀 없었다. 나는 엄마의 염려와 고민을 충분히 이해했다. 같은 상황이었다면 누구라도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엄마를 이해하는 것과 본능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직관한 태아가 모태에서 떨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모태에 대한 상상을 계속하면서 나는 수치심의 원인을 짐작할 수 있었다. 환대받지 못한 존재의 원형적인 트라우마 때문이라고나 할까? 물론 이것은 나의 추측과 해석일 뿐 증명할 수 있는 사실은 아니다. 어쨌거나 나는 떨고 있는 태아를 만날 때마다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떨고 있는 태아를 보고 있는 나를, 그 아이를 사랑으로 안아주는 나를. 그는 바로 나에게 있는 또 다른 나, 곧  하나님의 형상이었다. 그는 나의 형질이 갖춰지기도 전에 하나님이 보고 계셨던 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지어지기도 전에 하나님 알고 계셨던 나였으며,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영원한 현재 속에 있던 나였다.

이처럼, 고해 같았던 엄마의 고백은 내 상상력을 모태에 이르게 했고, 상상력을 통해 모태에서 환대받지 못한 태아를 만나게 했으며, 그 아이를 바라보고 측은한 마음으로 안아주는 신성한 나를 알아차리게 했다. 나는 나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렇게 경험했다. 내 생애 최고의 축복이었으며 혁명의 시작이었다! 그 누구 그 무엇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무심의 평화, 그 어떤 상황 그 어떤 처지에서도 자기로 존재할 수 있는 의연한 평범의 시작이었다.

그 뒤로 신기하게도 수치심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관상적 상상력에는 치유의 힘이 있었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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