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성령과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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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59회 작성일 23-03-14 14:26본문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요엘 2:28)
“하삐, 10 더하기 1이 뭔지 알아?” 손녀가 물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야 11이지.”
“아니, 2야.” 대답이 뜻밖이었다. 손녀는 또 물었다.
“그럼, 10 더하기 2는?”
“그건 12지.” 하지만 손녀의 말은 엉뚱했다.
“12가 아니고 3이야.” 그러더니 또 한 번 묻는다.
“10 더하기 3은?” 당연히 13이지라고 대답하려다가 되물었다.
“뭔데?
“그야 4지!”
10 더하기 3이 왜 4니? 13이지, 라고 고쳐주려다가 10 더하기 1이 왜 2이고, 10 더하기 2가 왜 3이며, 10 더하기 3이 왜 4인지 이유를 물었다. 손녀의 셈법은 이랬다.
“자 봐, 10은 1과 0인데 0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1이 남고, 1과 1을 더하면 2잖아.”
수리의 개념에 길들지 않은 손녀의 상상력이 재미있었다. 물론 답이 틀렸다고 고쳐주지는 않았다.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될 터였다.
얼마 후 아는 수학 선생님을 만나 대화하다가 손녀 이야기를 했더니 크게 웃으며 말했다.
“손녀가 0의 의미를 아네요.”
그러면서 자기 아이에게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전화해서 심각하게 말하더란다. 아이한테 신경 좀 써야 할 것 같다고.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이가 셈을 못 해요. 1 빼기 1은 1, 2 빼기 2는 2, 3 빼기 3은 3이라고 우기네요.”
명색이 수학 선생님인데 이건 아니다 싶어 전화를 끊고 나서 아이에게 물었다.
“1 빼기 1이 왜 1이고, 2 빼기 2는 왜 2이고, 3 빼기 3은 왜 3이라고 했니?”
아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어, 빼는 건 없애는 거잖아. 1을 없애려고 손으로 가렸더니 1이 남았어.”
상상력
이런 게 아이들의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개념을 학습하고 정답을 암기하기 전에 발달하는 자유로운 정신활동이다. 벗들의 자녀 가운데에도 엉뚱한 상상력으로 가슴 철렁하게 하는 아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때가 되면 스스로 이치를 터득하게 될 테니 말이다. 스스로 터득할 기회를 주지 않고 학원이나 과외를 통해 정답을 외우게 하는 순간 아이의 상상력은 시들어버릴 것이다.
지식을 쌓고 정답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상의 날개를 자유롭게 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상상력은 모든 창조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음악・미술・문학의 모든 걸작이 상상력의 산물 아닌가. 문명의 이기(利器)도 마찬가지다. 요즘 누구나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은 상상력이 IT기술과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예술적 상상력이 보태져 미학적으로도 아름답다.
상상력이 시들면 감수성도 무뎌진다. 감수성이 무뎌지면 자연의 아름다움도 음미하지 못하며, 삶은 신비하지도 경이롭지도 않다. 타인의 고통에도 무감각해진다. 그뿐 아니다. 상상력이 시들면 위기상황을 창의적으로 돌파하는 순발력도 둔해진다. 개념의 틀에 갇혀 보라는 것만 보고, 하라는 것만 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 때 가만있으라는 말을 따르다가 얼마나 많은 학생이 희생됐는지를 생각해보라. 아인슈타인도 말했듯이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상상력이 메마르면 인간은 생존의 굴레에 갇힌 동물에 불과하다. 이때 삶은 견딜 수 없이 고단하고 지루할 것이다.
아인슈타인도 말했듯이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상상력이 메마르면 인간은 생존의 굴레에 갇힌 동물에 불과하다. 이때 삶은 견딜 수 없이 고단하고 지루할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하다. 기억이 과거를 더듬는다면 상상은 과거・현재・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현세뿐 아니라 내세, 초월과 신성의 세계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기에 상상의 세계는 기억의 세계보다 훨씬 크다. 상상력은 경험하지 않은 것이나 현재에 없는 대상까지 직관하고 심상화한다. 칸트는 상상력을 “현시(顯示)의 능력”이라고 했다고 한다. 현시의 능력이란 보이지 않는 것이나 추상적인 것, 또는 개념이나 지식에 불과한 것을 드러내고 나타내 보이는 능력이다.(『철학과 인문적 상상력』)
상상력은 환상의 세계를 창조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라캉은 상상력이 환상을 창조한다는 것을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전부를 환상이 상연하고 있다.” 환상은 상상력에 의해 상상된 것, 즉 상상의 내용이다. 그런데 인간은 상상력이 창조한 환상을 어떻게든 현실로 만들고 싶어 한다. 이때 동원되는 것이 이성과 의지이다. 쉽게 말해 인간은 자기가 상상한 것(즉 환상)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짜내고 노력하는 것이다. 머리를 짜내는 것은 이성의 일이고, 노력하는 것은 의지의 일이다.
하지만 상상력은 위험하기도 하다. 인간은 선한 것만 상상하지 않고 악한 것도 상상하기 때문이다. 오래전 일이지만 나는 한동안 나에게 모욕을 준 사람들에게 잔인하게 복수하는 상상에 시달린 적이 있다. 나뿐일까. 상상력이 오용되거나 남용되는 경우는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요즘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각종 흉악범죄, 변태적이며 도착적(倒錯的)인 포르노그래피의 세계, 사람을 괴롭히고 학대하는 다양한 고문 방법, 아동이나 미성년자들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 범죄 등은 상상력이 얼마나 악하고 파렴치하게 사용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상상력의 변형
상상력을 선용할 수는 없을까? 아름답고 성스러운 것을 상상하며 살 수는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조건이 바뀌어야 한다. 그럼 인간조건이 바뀐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성경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 2:7)고 한다. 이것은 인간조건에 대한 성서의 핵심 진술이다.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흙”의 차원과 “생기”의 차원으로 이루어진 혼합체라는 뜻이다. 흙이 육과 욕망의 차원을 상징한다면, 생기는 영과 신성의 차원을 상징한다.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시계추처럼 육과 영, 욕망과 신성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것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 성서의 통찰이다. 따라서 육과 욕망에 사로잡힐 때의 삶과 영과 신성에 참여할 때의 삶은 판이하다.
상상력도 마찬가지다. 욕망에 사로잡힐 때의 상상력과 신성에 참여할 때의 상상력은 아주 다르다. 악한 상상력은 욕망에 사로잡힐 때 번성하고 선한 상상력은 신성에 참여할 때 피어난다. 이는 나무와 토양의 관계와 같다. 상상력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욕망과 신성은 나무가 자라는 토양에 비유할 수 있다. 상상력이라는 나무는 욕망이라는 토양에서 불순하고 불쾌하고 불의한 상상의 가지를 무성하게 뻗고, 신성이라는 토양에서는 순수하고 아름답고 성스러운 상상의 꽃을 활짝 피운다. 따라서 상상력이 변형되려면 상상력의 토양 즉 인간조건이 바뀌어야 한다.
상상력이라는 나무는 욕망이라는 토양에서 불순하고 불쾌하고 불의한 상상의 가지를 무성하게 뻗고, 신성이라는 토양에서는 순수하고 아름답고 성스러운 상상의 꽃을 활짝 피운다. 따라서 상상력이 변형되려면 상상력의 토양 즉 인간조건이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상상력의 토양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번뜩이는 이성과 불굴의 의지로도 바뀌지 않는다. 이성을 통해 선한 상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의지를 동원하여 선한 상상을 하겠다고 결심해도 상상력의 토양은 바뀌지 않는다. 토양이 나무를 바꾸지 나무가 토양을 바꾸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성과 의지는 상상한 것(환상)을 실현할 때 동원되는 도구에 불과하다. 상상력을 정화하거나 변형시키는 힘은 아니다.
상상력의 토양이 바뀌려면 다른 힘이 개입해야 한다. 욕망이라는 토양에 깊이 박힌 상상력의 뿌리를 뽑아 신성이라는 토양에 이식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근원적인 힘 말이다. 그러면 그 힘이 뭘까? 그게 바로 성령이다! 성령은 이성과 의지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영으로 육과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따라서 성령이 임할 때 삶의 토양(즉 인간조건)은 육에서 영으로, 욕망에서 신성으로 바뀐다. 이때 상상력도 정화되고 변형된다. 이전에 하지 못했던 새로운 상상이 시작된다. 선하고 아름답고 신성한 상상이….
성령이 임할 때 일어나는 상상력의 정화와 변형을 예언자 요엘은 이렇게 묘사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나의 영” 곧 주님의 성령이 임할 때 아들딸은 왜 예언을 할까? 욕망 때문에 죽었던 직관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직관이 살아나면 영적 감각이 깨어나고, 영적 의식이 형성되며, 신령한 눈이 열리기 때문이다. 왜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까? 성령이 임하면 삶의 토양이 육에서 영으로, 욕망에서 신성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토양이 바뀌면 상상력이 정화되고 변형되기 때문에 이전에 꾸지 않았던 꿈을 꾸고, 이전에 상상해보지 못한 환상을 본다. 선하고 아름답고, 경건하고 성스러운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상상력의 확장
요즘 나는 이따금 그런 상상을 경험한다. 내가 기도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곧 일종의 기도체(祈禱體)라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기도를 많이 한다거나, 삶이 기도며 기도가 삶이라는 자랑을 눈치 없이 늘어놓으려는 건 아니니까. 누군가의 기도가 없다면 내가 사람 구실을 할 수 없으며, 하루 한 시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뿐이다. 이런 상상을 하게 된 과정을 더듬어보자.
나는 보통 노트북 컴퓨터를 켜고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쓴다. 이 글은 설교가 되기도 하고, 잡지 원고가 되기도 하며, 수업 자료가 되기도 한다.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은혜받았다고 하고, 잡지의 글을 읽은 독자는 감동했다고 하며,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은 새로운 걸 배웠다고 한다. 「숨빛향기」의 글이 “맑고 밝고 그윽하다”는 소감을 보내온 지인도 있었고, 포스팅한 글에 이런 댓글을 단 독자도 있었다. “영적이고 신학적이며 동시에 시적이고 철학적인 글을 읽는 맛이 깊고 달콤합니다.” 물론 과찬이지만, 나는 의미있는 일을 한 것 같아 잠시나마 보람을 느낀다. 이러한 보람은 노트북 컴퓨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안경도 마찬가지다. 안경을 쓰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뿐일까. 컴퓨터가 놓여있는 책상이나 내가 앉아 있는 의자가 없으면 작업이 아예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그 물건들을 만든 사람들이 없으면 내 삶의 보람과 의미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내 삶의 보람과 의미는 나 혼자만의 능력으로 이룰 수 없고, 내가 사용하는 물건과 그 물건을 만든 사람들과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 내가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내가 신고 다니는 구두도 그렇다. 영감과 통찰을 적는 묵상노트(『내 마음의 꽃밭』)도 그렇고, 그 노트에 글을 적는 0.38mm 수성펜도 그렇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므로 사람 구실도 할 수 없다. 삶의 의미나 보람은 꿈도 못 꾼다. 그런데 이런 것 중에 내가 만든 것은 하나도 없다! 밥은 또 어떤가. 하루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한 숟가락의 밥도 내가 지은 게 아니며, 그 밥을 지은 쌀도 내가 수확한 게 아니다.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나의 재능이나 지식이 아니다. 누군가의 수고와 땀이 없었다면, 그 수고와 땀으로 만든 것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못한다. 삶의 의미와 보람도 느끼지 못한다. 상상이 여기에 미쳤을 때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이따금 삶의 보람과 의미를 느끼는 나는 누군가의 수고와 땀뿐 아니라 기도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과민한 상상일까. 그렇지 않다. 내가 사용하는 물건들을 만든 노동자들의 마음을 헤아려본다면 그렇게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신성한 상상의 즐거움
그렇다고 노동자들을 이상화할 생각은 없다. 그들도 인간이기에 때론 일이 힘들어 불평을 늘어놓기도 할 것이다. 때론 기구한 운명을 원망하기도 할 것이다. 부당한 취급을 받을 때면 분통을 터뜨리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가슴엔 쉽게 꺼내 보이지 못하는 기도가 들어있다. 족쇄 같은 운명을 대물림하지 않았으면 하는 자식들을 위한 서러운 기도가 있을 것이다. 못난 남편 만나 평생 고생하면서도 내색 한 번 하지 않는 아내를 위한 미안한 기도도 있을 것이다. 건강을 회복하여 천수를 누렸으면 하는 병든 노모를 위한 애틋한 기도도 있을 것이다.
아내도 남편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직장에서 무슨 일을 겪어도 자존감 잃지 않기를 기도할 것이다. 노모도 아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몸 상하지 않고 하루하루 무사하기를 기도할 것이다. 자녀들도 아버지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가난해도 기둥 같은 아버지가 늘 곁에 있어서 감사하다고 기도할 것이다. 이 가정이 신실한 믿음의 가정이라면 가끔은 이런 기도도 할 것이다. 먹고 살기에 바빠 하나님의 일 번듯하게 하진 못해도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이 모르게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살피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중보기도도 빼놓지 않을 것이다. 실패한 사람들이나 실의에 빠진 사람들, 병들어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이렇게 수도사처럼 일하며 기도하고, 기도하며 일할 것이다.(ora et labora)
내가 사용하는 것 중에서 기도 없이 만들어진 것이 있을까. 내 삶을 의미있고 보람있게 하는 것 중에서 기도가 들어가지 않은 것이 있을까. 나의 노트북과 나의 안경, 나의 옷과 나의 구두에는 그것을 만든 누군가의 기도가 들어있다. 내가 먹는 밥, 그 밥을 지은 한 줌의 쌀에는 그것을 재배한 누군가의 기도가 들어있다. 그뿐일까. 그것들을 유통한 상인들의 기도가 들어있고, 그것들을 판매한 점원들의 기도가 들어있고, 그것들을 배달한 라이더들의 기도가 들어있다.
아, 온통 기도 천지다. 기도가 들어있지 않은 것이 없다. 기도가 내 눈을 밝히고 있고, 기도가 내 주린 배를 채워주고 있으며, 기도가 내 몸을 기르고 있다. 아침에는 책을 만든 기도가 나를 사색하게 하고, 낮에는 오디오를 만든 기도가 나를 즐겁게 하고, 저녁에는 운동화를 만든 기도가 나를 산책하게 하고, 밤중에는 침대를 만든 기도가 나를 잠들게 한다. 내가 기도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상상은 결코 망상이 아닌 것이다.
아, 온통 기도 천지다. 기도가 들어있지 않은 것이 없다. 기도가 내 눈을 밝히고 있고, 기도가 내 주린 배를 채워주고 있으며, 기도가 내 몸을 기르고 있다.
그뿐일까. 내가 기도로 이루어진 존재라면, 나는 하나님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도 하다.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이다. 기도의 시작도 하나님이며 기도의 목표도 하나님이다. 하나님 때문에 기도할 수 있으며,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친밀해진다. 그러고 보니 온통 하나님 천지다! 하나님이 옷으로 내 몸을 감싸고, 하나님이 안경으로 내 눈을 밝히고, 하나님이 밥으로 내 생명을 살린다. 심지어 하나님은 내 똥에도 들어있다. 하나님은 내가 섭취하는 모든 음식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가 섭취하는 모든 음식에 사용된 재료를 생산한 모든 노동자의 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가 섭취하는 모든 음식에 사용된 재료를 생산한 모든 노동자가 바친 모든 기도의 궁극 목표이기 때문이다.
감사하다.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감사하고, 그 노동자들이 기도로 만든 물건들에 감사하다. 하나님이 주신 햇빛과 비로 재배한 쌀에, 그 쌀로 지은 밥에 감사하다. 그 덕으로 일하면서 사람들을 섬길 수 있음이 감사하다. 그 덕으로 글을 쓰고 설교하면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음이 감사하다. 그 덕으로 사람 구실 하면서 보람과 의미를 느낄 수 있음이 감사하다.
이따금이지만 이런 상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나의 상상이 노동자들의 땀과 수고에 미치지 못했다면 나는 얼마나 기고만장했겠는가. 나의 상상이 노동자들이 땀 흘려 만든 물건에 미치지 못했다면 나는 얼마나 교만했겠는가. 나의 상상이 노동자들의 기도에 미치지 못했다면 나는 얼마나 천박했겠는가. 나의 상상이 기도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께 미치지 못했다면 나는 얼마나 속물스러웠겠는가. 나의 상상이 감사의 마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면 내 삶은 얼마나 빈곤했겠는가.
신성한 상상을 할 때 나는 행복하다. 어쩌다 이런 상상을 하게 됐을까? 관상기도 수련을 통해 나도 모르게 삶의 토양이 바뀌고, 삶의 토양이 바뀌면서 상상력이 정화되고 변형됐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의 토양에서 새로운 상상력의 나무가 자라고, 새로운 상상력의 나무에서 새로운 꿈의 가지가 뻗고 새로운 환상의 꽃이 피어났기 때문이다. 아, 신성한 상상의 즐거움이여!
- 이민재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요엘 2:28)
“하삐, 10 더하기 1이 뭔지 알아?” 손녀가 물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야 11이지.”
“아니, 2야.” 대답이 뜻밖이었다. 손녀는 또 물었다.
“그럼, 10 더하기 2는?”
“그건 12지.” 하지만 손녀의 말은 엉뚱했다.
“12가 아니고 3이야.” 그러더니 또 한 번 묻는다.
“10 더하기 3은?” 당연히 13이지라고 대답하려다가 되물었다.
“뭔데?
“그야 4지!”
10 더하기 3이 왜 4니? 13이지, 라고 고쳐주려다가 10 더하기 1이 왜 2이고, 10 더하기 2가 왜 3이며, 10 더하기 3이 왜 4인지 이유를 물었다. 손녀의 셈법은 이랬다.
“자 봐, 10은 1과 0인데 0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1이 남고, 1과 1을 더하면 2잖아.”
수리의 개념에 길들지 않은 손녀의 상상력이 재미있었다. 물론 답이 틀렸다고 고쳐주지는 않았다. 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될 터였다.
얼마 후 아는 수학 선생님을 만나 대화하다가 손녀 이야기를 했더니 크게 웃으며 말했다.
“손녀가 0의 의미를 아네요.”
그러면서 자기 아이에게 있었던 일을 들려주었다. 어느 날 선생님이 전화해서 심각하게 말하더란다. 아이한테 신경 좀 써야 할 것 같다고.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선생님은 걱정스럽게 말했다.
“아이가 셈을 못 해요. 1 빼기 1은 1, 2 빼기 2는 2, 3 빼기 3은 3이라고 우기네요.”
명색이 수학 선생님인데 이건 아니다 싶어 전화를 끊고 나서 아이에게 물었다.
“1 빼기 1이 왜 1이고, 2 빼기 2는 왜 2이고, 3 빼기 3은 왜 3이라고 했니?”
아이는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어, 빼는 건 없애는 거잖아. 1을 없애려고 손으로 가렸더니 1이 남았어.”
상상력
이런 게 아이들의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개념을 학습하고 정답을 암기하기 전에 발달하는 자유로운 정신활동이다. 벗들의 자녀 가운데에도 엉뚱한 상상력으로 가슴 철렁하게 하는 아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않았으면 한다. 때가 되면 스스로 이치를 터득하게 될 테니 말이다. 스스로 터득할 기회를 주지 않고 학원이나 과외를 통해 정답을 외우게 하는 순간 아이의 상상력은 시들어버릴 것이다.
지식을 쌓고 정답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상의 날개를 자유롭게 펴도록 내버려 두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상상력은 모든 창조의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음악・미술・문학의 모든 걸작이 상상력의 산물 아닌가. 문명의 이기(利器)도 마찬가지다. 요즘 누구나 들고 다니는 스마트폰은 상상력이 IT기술과 결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예술적 상상력이 보태져 미학적으로도 아름답다.
상상력이 시들면 감수성도 무뎌진다. 감수성이 무뎌지면 자연의 아름다움도 음미하지 못하며, 삶은 신비하지도 경이롭지도 않다. 타인의 고통에도 무감각해진다. 그뿐 아니다. 상상력이 시들면 위기상황을 창의적으로 돌파하는 순발력도 둔해진다. 개념의 틀에 갇혀 보라는 것만 보고, 하라는 것만 하기 때문이다. 세월호 사건 때 가만있으라는 말을 따르다가 얼마나 많은 학생이 희생됐는지를 생각해보라. 아인슈타인도 말했듯이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상상력이 메마르면 인간은 생존의 굴레에 갇힌 동물에 불과하다. 이때 삶은 견딜 수 없이 고단하고 지루할 것이다.
아인슈타인도 말했듯이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상상력이 메마르면 인간은 생존의 굴레에 갇힌 동물에 불과하다. 이때 삶은 견딜 수 없이 고단하고 지루할 것이다.
인간의 상상력은 무궁무진하다. 기억이 과거를 더듬는다면 상상은 과거・현재・미래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현세뿐 아니라 내세, 초월과 신성의 세계도 예외가 아니다. 그렇기에 상상의 세계는 기억의 세계보다 훨씬 크다. 상상력은 경험하지 않은 것이나 현재에 없는 대상까지 직관하고 심상화한다. 칸트는 상상력을 “현시(顯示)의 능력”이라고 했다고 한다. 현시의 능력이란 보이지 않는 것이나 추상적인 것, 또는 개념이나 지식에 불과한 것을 드러내고 나타내 보이는 능력이다.(『철학과 인문적 상상력』)
상상력은 환상의 세계를 창조하기도 한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이자 철학자인 자크 라캉은 상상력이 환상을 창조한다는 것을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전부를 환상이 상연하고 있다.” 환상은 상상력에 의해 상상된 것, 즉 상상의 내용이다. 그런데 인간은 상상력이 창조한 환상을 어떻게든 현실로 만들고 싶어 한다. 이때 동원되는 것이 이성과 의지이다. 쉽게 말해 인간은 자기가 상상한 것(즉 환상)을 실현하기 위해 끊임없이 머리를 짜내고 노력하는 것이다. 머리를 짜내는 것은 이성의 일이고, 노력하는 것은 의지의 일이다.
하지만 상상력은 위험하기도 하다. 인간은 선한 것만 상상하지 않고 악한 것도 상상하기 때문이다. 오래전 일이지만 나는 한동안 나에게 모욕을 준 사람들에게 잔인하게 복수하는 상상에 시달린 적이 있다. 나뿐일까. 상상력이 오용되거나 남용되는 경우는 그야말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요즘 우리 주위에서 벌어지는 각종 흉악범죄, 변태적이며 도착적(倒錯的)인 포르노그래피의 세계, 사람을 괴롭히고 학대하는 다양한 고문 방법, 아동이나 미성년자들을 대상으로 한 성착취 범죄 등은 상상력이 얼마나 악하고 파렴치하게 사용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상상력의 변형
상상력을 선용할 수는 없을까? 아름답고 성스러운 것을 상상하며 살 수는 없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인간조건이 바뀌어야 한다. 그럼 인간조건이 바뀐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성경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 2:7)고 한다. 이것은 인간조건에 대한 성서의 핵심 진술이다.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흙”의 차원과 “생기”의 차원으로 이루어진 혼합체라는 뜻이다. 흙이 육과 욕망의 차원을 상징한다면, 생기는 영과 신성의 차원을 상징한다. 인간이라는 생명체는 시계추처럼 육과 영, 욕망과 신성 사이를 끊임없이 오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것이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 성서의 통찰이다. 따라서 육과 욕망에 사로잡힐 때의 삶과 영과 신성에 참여할 때의 삶은 판이하다.
상상력도 마찬가지다. 욕망에 사로잡힐 때의 상상력과 신성에 참여할 때의 상상력은 아주 다르다. 악한 상상력은 욕망에 사로잡힐 때 번성하고 선한 상상력은 신성에 참여할 때 피어난다. 이는 나무와 토양의 관계와 같다. 상상력을 나무에 비유한다면 욕망과 신성은 나무가 자라는 토양에 비유할 수 있다. 상상력이라는 나무는 욕망이라는 토양에서 불순하고 불쾌하고 불의한 상상의 가지를 무성하게 뻗고, 신성이라는 토양에서는 순수하고 아름답고 성스러운 상상의 꽃을 활짝 피운다. 따라서 상상력이 변형되려면 상상력의 토양 즉 인간조건이 바뀌어야 한다.
상상력이라는 나무는 욕망이라는 토양에서 불순하고 불쾌하고 불의한 상상의 가지를 무성하게 뻗고, 신성이라는 토양에서는 순수하고 아름답고 성스러운 상상의 꽃을 활짝 피운다. 따라서 상상력이 변형되려면 상상력의 토양 즉 인간조건이 바뀌어야 한다.
하지만 상상력의 토양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번뜩이는 이성과 불굴의 의지로도 바뀌지 않는다. 이성을 통해 선한 상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의지를 동원하여 선한 상상을 하겠다고 결심해도 상상력의 토양은 바뀌지 않는다. 토양이 나무를 바꾸지 나무가 토양을 바꾸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성과 의지는 상상한 것(환상)을 실현할 때 동원되는 도구에 불과하다. 상상력을 정화하거나 변형시키는 힘은 아니다.
상상력의 토양이 바뀌려면 다른 힘이 개입해야 한다. 욕망이라는 토양에 깊이 박힌 상상력의 뿌리를 뽑아 신성이라는 토양에 이식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근원적인 힘 말이다. 그러면 그 힘이 뭘까? 그게 바로 성령이다! 성령은 이성과 의지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영으로 육과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따라서 성령이 임할 때 삶의 토양(즉 인간조건)은 육에서 영으로, 욕망에서 신성으로 바뀐다. 이때 상상력도 정화되고 변형된다. 이전에 하지 못했던 새로운 상상이 시작된다. 선하고 아름답고 신성한 상상이….
성령이 임할 때 일어나는 상상력의 정화와 변형을 예언자 요엘은 이렇게 묘사한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나의 영을 부어주겠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
“나의 영” 곧 주님의 성령이 임할 때 아들딸은 왜 예언을 할까? 욕망 때문에 죽었던 직관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직관이 살아나면 영적 감각이 깨어나고, 영적 의식이 형성되며, 신령한 눈이 열리기 때문이다. 왜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까? 성령이 임하면 삶의 토양이 육에서 영으로, 욕망에서 신성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토양이 바뀌면 상상력이 정화되고 변형되기 때문에 이전에 꾸지 않았던 꿈을 꾸고, 이전에 상상해보지 못한 환상을 본다. 선하고 아름답고, 경건하고 성스러운 상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상상력의 확장
요즘 나는 이따금 그런 상상을 경험한다. 내가 기도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곧 일종의 기도체(祈禱體)라는 상상을 하는 것이다. 오해하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기도를 많이 한다거나, 삶이 기도며 기도가 삶이라는 자랑을 눈치 없이 늘어놓으려는 건 아니니까. 누군가의 기도가 없다면 내가 사람 구실을 할 수 없으며, 하루 한 시도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하려는 것뿐이다. 이런 상상을 하게 된 과정을 더듬어보자.
나는 보통 노트북 컴퓨터를 켜고 자판을 두드리며 글을 쓴다. 이 글은 설교가 되기도 하고, 잡지 원고가 되기도 하며, 수업 자료가 되기도 한다.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은혜받았다고 하고, 잡지의 글을 읽은 독자는 감동했다고 하며,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은 새로운 걸 배웠다고 한다. 「숨빛향기」의 글이 “맑고 밝고 그윽하다”는 소감을 보내온 지인도 있었고, 포스팅한 글에 이런 댓글을 단 독자도 있었다. “영적이고 신학적이며 동시에 시적이고 철학적인 글을 읽는 맛이 깊고 달콤합니다.” 물론 과찬이지만, 나는 의미있는 일을 한 것 같아 잠시나마 보람을 느낀다. 이러한 보람은 노트북 컴퓨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안경도 마찬가지다. 안경을 쓰지 않으면 글을 쓸 수가 없다. 그뿐일까. 컴퓨터가 놓여있는 책상이나 내가 앉아 있는 의자가 없으면 작업이 아예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그 물건들을 만든 사람들이 없으면 내 삶의 보람과 의미는 물거품이 되고 만다. 내 삶의 보람과 의미는 나 혼자만의 능력으로 이룰 수 없고, 내가 사용하는 물건과 그 물건을 만든 사람들과 그물처럼 연결되어 있다. 내가 입고 있는 옷도 그렇고, 내가 신고 다니는 구두도 그렇다. 영감과 통찰을 적는 묵상노트(『내 마음의 꽃밭』)도 그렇고, 그 노트에 글을 적는 0.38mm 수성펜도 그렇다. 이런 것들이 없으면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므로 사람 구실도 할 수 없다. 삶의 의미나 보람은 꿈도 못 꾼다. 그런데 이런 것 중에 내가 만든 것은 하나도 없다! 밥은 또 어떤가. 하루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한 숟가락의 밥도 내가 지은 게 아니며, 그 밥을 지은 쌀도 내가 수확한 게 아니다.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나의 재능이나 지식이 아니다. 누군가의 수고와 땀이 없었다면, 그 수고와 땀으로 만든 것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하지 못한다. 삶의 의미와 보람도 느끼지 못한다. 상상이 여기에 미쳤을 때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이따금 삶의 보람과 의미를 느끼는 나는 누군가의 수고와 땀뿐 아니라 기도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과민한 상상일까. 그렇지 않다. 내가 사용하는 물건들을 만든 노동자들의 마음을 헤아려본다면 그렇게 결론지을 수밖에 없다.
신성한 상상의 즐거움
그렇다고 노동자들을 이상화할 생각은 없다. 그들도 인간이기에 때론 일이 힘들어 불평을 늘어놓기도 할 것이다. 때론 기구한 운명을 원망하기도 할 것이다. 부당한 취급을 받을 때면 분통을 터뜨리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가슴엔 쉽게 꺼내 보이지 못하는 기도가 들어있다. 족쇄 같은 운명을 대물림하지 않았으면 하는 자식들을 위한 서러운 기도가 있을 것이다. 못난 남편 만나 평생 고생하면서도 내색 한 번 하지 않는 아내를 위한 미안한 기도도 있을 것이다. 건강을 회복하여 천수를 누렸으면 하는 병든 노모를 위한 애틋한 기도도 있을 것이다.
아내도 남편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직장에서 무슨 일을 겪어도 자존감 잃지 않기를 기도할 것이다. 노모도 아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몸 상하지 않고 하루하루 무사하기를 기도할 것이다. 자녀들도 아버지를 위해 기도할 것이다. 가난해도 기둥 같은 아버지가 늘 곁에 있어서 감사하다고 기도할 것이다. 이 가정이 신실한 믿음의 가정이라면 가끔은 이런 기도도 할 것이다. 먹고 살기에 바빠 하나님의 일 번듯하게 하진 못해도 오른손이 하는 일 왼손이 모르게 고통받는 사람들을 보살피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중보기도도 빼놓지 않을 것이다. 실패한 사람들이나 실의에 빠진 사람들, 병들어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것이다. 이렇게 수도사처럼 일하며 기도하고, 기도하며 일할 것이다.(ora et labora)
내가 사용하는 것 중에서 기도 없이 만들어진 것이 있을까. 내 삶을 의미있고 보람있게 하는 것 중에서 기도가 들어가지 않은 것이 있을까. 나의 노트북과 나의 안경, 나의 옷과 나의 구두에는 그것을 만든 누군가의 기도가 들어있다. 내가 먹는 밥, 그 밥을 지은 한 줌의 쌀에는 그것을 재배한 누군가의 기도가 들어있다. 그뿐일까. 그것들을 유통한 상인들의 기도가 들어있고, 그것들을 판매한 점원들의 기도가 들어있고, 그것들을 배달한 라이더들의 기도가 들어있다.
아, 온통 기도 천지다. 기도가 들어있지 않은 것이 없다. 기도가 내 눈을 밝히고 있고, 기도가 내 주린 배를 채워주고 있으며, 기도가 내 몸을 기르고 있다. 아침에는 책을 만든 기도가 나를 사색하게 하고, 낮에는 오디오를 만든 기도가 나를 즐겁게 하고, 저녁에는 운동화를 만든 기도가 나를 산책하게 하고, 밤중에는 침대를 만든 기도가 나를 잠들게 한다. 내가 기도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상상은 결코 망상이 아닌 것이다.
아, 온통 기도 천지다. 기도가 들어있지 않은 것이 없다. 기도가 내 눈을 밝히고 있고, 기도가 내 주린 배를 채워주고 있으며, 기도가 내 몸을 기르고 있다.
그뿐일까. 내가 기도로 이루어진 존재라면, 나는 하나님으로 이루어진 존재이기도 하다. 기도는 언제나 하나님을 향하기 때문이다. 기도의 시작도 하나님이며 기도의 목표도 하나님이다. 하나님 때문에 기도할 수 있으며,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친밀해진다. 그러고 보니 온통 하나님 천지다! 하나님이 옷으로 내 몸을 감싸고, 하나님이 안경으로 내 눈을 밝히고, 하나님이 밥으로 내 생명을 살린다. 심지어 하나님은 내 똥에도 들어있다. 하나님은 내가 섭취하는 모든 음식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가 섭취하는 모든 음식에 사용된 재료를 생산한 모든 노동자의 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내가 섭취하는 모든 음식에 사용된 재료를 생산한 모든 노동자가 바친 모든 기도의 궁극 목표이기 때문이다.
감사하다.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어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감사하고, 그 노동자들이 기도로 만든 물건들에 감사하다. 하나님이 주신 햇빛과 비로 재배한 쌀에, 그 쌀로 지은 밥에 감사하다. 그 덕으로 일하면서 사람들을 섬길 수 있음이 감사하다. 그 덕으로 글을 쓰고 설교하면서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음이 감사하다. 그 덕으로 사람 구실 하면서 보람과 의미를 느낄 수 있음이 감사하다.
이따금이지만 이런 상상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나의 상상이 노동자들의 땀과 수고에 미치지 못했다면 나는 얼마나 기고만장했겠는가. 나의 상상이 노동자들이 땀 흘려 만든 물건에 미치지 못했다면 나는 얼마나 교만했겠는가. 나의 상상이 노동자들의 기도에 미치지 못했다면 나는 얼마나 천박했겠는가. 나의 상상이 기도의 배후에 있는 하나님께 미치지 못했다면 나는 얼마나 속물스러웠겠는가. 나의 상상이 감사의 마음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면 내 삶은 얼마나 빈곤했겠는가.
신성한 상상을 할 때 나는 행복하다. 어쩌다 이런 상상을 하게 됐을까? 관상기도 수련을 통해 나도 모르게 삶의 토양이 바뀌고, 삶의 토양이 바뀌면서 상상력이 정화되고 변형됐기 때문이다. 새로운 삶의 토양에서 새로운 상상력의 나무가 자라고, 새로운 상상력의 나무에서 새로운 꿈의 가지가 뻗고 새로운 환상의 꽃이 피어났기 때문이다. 아, 신성한 상상의 즐거움이여!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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