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얇은 곳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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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90회 작성일 23-06-07 16:47본문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 5:8)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 5:3)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행 17:27)
“시스루 룩”이라는 말이 있다. 패션용어로 속이 훤히 비쳐 보이게 만든 옷을 일컫는다. “시스루”는 영어의 see와 through를 합성한 말이다. “~를 통해, ~을 통과해 본다”는 뜻이다. 얇은 망사로 만든 옷들이 대표적인 시스루 룩see-through look이다. 이슬람 세계의 군주인 술탄들 앞에서 요염한 자태로 춤을 추는 무희들은 대개 시스루 룩을 입고 있다. 시스루 룩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우리 교회 근처에 무도장이 있는데 백바지에 검은 망사로 만든 시스루 룩을 입고 그곳에 드나드는 남자들을 여럿 봤다. 시스루 룩은 몸을 가리면서도 동시에 드러낸다. 시스루 룩은 유혹의 기술이기도 하다. 은폐와 현시顯示를 동시에 구현하면서 시선을 끌어당겨 고정시킨다.
얇은 곳
영성에도 시스루 룩과 비슷한 개념이 있다. “얇은 곳”thin places이 그것이다. 영어 단어 “thin”의 뜻이 “①얇은, 가느다란 ②마른, 여윈 ③숱이 적은”이라고 해서 “얇은 곳”을 깡마른 사람들이나 날씬한 사람들, 또는 머리숱이 적은 사람들이 사는 곳 쯤으로 오해해서는 않된다.
“얇은 곳”은 켈트 영성에서 사용하는 심오한 영적 메타포다. 켈트 영성은 5세기쯤에 시작되어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그리고 영국 북부지역에서 번창했던 기독교 형태다. 요즘은 『원복』Original Blessing의 저자 매튜 폭스가 켈트 기독교의 창조영성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영성가요 의사요 작가요 작곡가요 생물학자요, 이 외에도 다방면에서 천재성을 발휘한 빙엔의 힐데가르트 같은 여성도 대표적인 켈트 영성가다.
“얇은 곳”이란 무엇일까? “두꺼운”thick 곳의 반대다. 고대 세계관에 따르면 하늘과 땅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영역이다. 전혀 다른 실재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간격은 멀다. 하늘과 땅의 간격이 넓으면 그만큼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인” 공중이 두꺼워진다. 공중에는 바늘 들어갈 틈도 없을 만큼 악령으로 꽉 차 있다.(엡 2:1-6) “하늘”이 하나님이 거주하는 영역이라면, “공중”은 악마의 거주지다. 따라서 따라서 공중이 두꺼울수록 하나님과의 거리는 멀어진다.
그런데 하늘과 땅의 간격이 가까워지는 곳이 있다. 공중의 두꺼움이 해체되고 얇아지는 곳이 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하늘이 땅에 닿고 침투하고 스며드는 곳, 성聖과 속俗이 만나는 곳, 성과 속의 접경지역이다. 일종의 성소요 거룩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성스러움은 매개 없이 현현한다. 이런 “얇은 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현존을 그 어떤 곳에서보다 강하게 느낀다. 마치 시스루 룩이 감췄던 알몸을 투명하게 드러내듯이.
공중의 두꺼움이 해체되고 얇아지는 곳이 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하늘이 땅에 닿고 침투하고 스며드는 곳, 성聖과 속俗이 만나는 곳, 성과 속의 접경지역이다. 일종의 성소요 거룩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성스러움은 매개 없이 현현한다.
켈트 기독교에서는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선에서 좀 떨어진 이오나 섬을 전형적인 “얇은 곳”으로 친다. 전통적인 순례지인 예루살렘이나 로마도 얇은 곳이다. 성경에는 얇은 곳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아브라함이 본토・친척・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들은 곳도 얇은 곳이며,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지 않아 실의에 빠졌을 때 광활한 밤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믿게 된 곳도 “얇은 곳”이다. 야곱이 형을 피해 도망하던 중에 노숙하다가 꿈속에서 하늘의 사닥다리를 본 벧엘도 “얇은 곳”이다. 형을 만나기 전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고뇌하다가 참자아를 각성한─성경은 하나님의 얼굴을 한 “어떤 사람”과 씨름했다고 묘사한다─얍복강도 “얇은 곳”이다.
모세가 양떼를 치다가 하나님을 만난 불에 타지 않는 떨기나무도 “얇은 곳”이며, 율법을 받은 시내산도 “얇은 곳”이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해서 이긴 갈멜산도 “얇은 곳”이며, 이세벨의 협박 때문에 도망다니다가 “완전한 침묵의 소리”sound of sheer silence(NRSV)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호렙산도 “얇은 곳”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인간 무의식의 심층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을 대면하고 극복하신 광야야말로 “얇은 곳”이다. 이러한 얇은 곳에 대한 경험이 초대교회를 세우고 확장했다.
벗들의 얇은 곳은 어디인가? 하늘과 땅 사이의 “두꺼움”이 무너진 장소, 또는 신성과 초월과 무한에 사로잡힌 장소, 시스루 룩이 알몸을 드러내듯 하나님의 현존을 날것으로 경험한 장소 말이다. 기도원이 그런 곳일 수도 있고, 피정의 집이 그런 곳일 수도 있겠다. 요즘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얇은 곳인 것 같다. 많은 사람이 그 길을 순례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
나에겐 산이 그런 곳이었다.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매일 새벽기도회 끝나고 올랐던 수락산이 나에겐 얇은 곳이었다. 산을 오르면 몸이 더워지고 몸에선 비 오듯 땀이 난다. 몸이 정화된다. 마음도 깨끗해진다. 산의 고요와 정적에 잠기면 염려, 걱정, 불안, 두려움, 분노, 화 같은 어두운 감정이 저절로 씻겨 나가기 때문이다. 침묵 속에서 산길을 한참 걷다 보면 마음은 점차 무심에 이른다. 무심에 이른 마음에선 새로운 영감과 통찰이 샘솟는다. 하나님이 그 어느 때보다, 그 어느 곳에서보다 가깝게 느껴진다.
성 패트릭의 얇은 곳
요즘 새롭게 깨달은 “얇은 곳”이 있다. 우리가 날마다 암송하는 성 패트릭의 기도를 통해 깨달은 얇은 곳이다. 이 기도문의 7연은 유명하다. 노래도 여럿이다. 션 데이비가 작곡하고 리타 코널리가 부른 노래가 유명하다. 드와이트 빌은 “성 패트릭 찬가”Hymn of St. Patrick라는 제목으로 재해석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부르기 좋아할 만한 창법으로 부른다. 에스토니아의 영성 깊은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가 “사슴의 외침”Deer’s Cry이라는 제목으로 작곡한 4부 합창곡은 아카펠라 합창의 백미다.
이 기도문에서 성 패트릭은 그리스도가 앞에도 뒤에도, 안에도 계시며, 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에도 계시며, 누울 때나 앉을 때나 일어날 때도 계신다고 고백한다. 모든 공간 모든 시간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놀라운 고백이다.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지는 고백은 더욱 놀랍다.
그리스도여, 당신은
나를 생각하는 이들의 가슴 속에도 계시며
나에 대해 말하는 이들의 입속에도 계시며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 속에도 계시며
내 말을 듣는 이들의 귓속에도 계십니다.
타인의 가슴과 입, 눈과 귀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차리는 성인의 영적 감수성이 놀랍지 않은가. 이러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에게 타인의 가슴과 입, 눈과 귀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는 얇은 곳이다. 타인의 작고 연약한 지체들에서조차 그리스도를 알아차리는 감수성이 살아있다면 하나님 경험은 얼마나 풍성해질까. (요즘 저에게 조금이나마 그런 감수성을 일깨우시는 하나님, 찬양받으소서!)
타인의 작고 연약한 지체들에서조차 그리스도를 알아차리는 감수성이 살아있다면 하나님 경험은 얼마나 풍성해질까.
사람이 얇은 곳이다
다음 주면 이번 학기도 종강이다. 그래선지 지난 금요일 아침에 기도하는데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동자가 보였고, 내 강의를 “듣는” 그들의 진지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 전날의 수업의 여운이 남아서였을까. 물음이 이어졌다. 저들은 왜 기대어린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일까? 저들은 왜 내 말을 들으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일까?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신학교에 들어온 것 자체가 하나님을 찾는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번 학기 내 수업에 참여했을 것이고, 어떤 기대를 품고 나를 바라보며 내 말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들의 배후에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들의 고뇌와 방황 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느껴졌다. 그들은 나에게 성사聖事 곧 “얇은 곳”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그 어떤 것보다, 그 어떤 장소보다 더 강렬하게 하나님을 느끼게 했다.
학생들을 통해 성사적 감수성이 열리자 얼마 전(5월 29일)에 〈레미제라블〉에서 한 강의가 생각났다. 그때 현장에서 내 말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 줌을 통해 강의를 들었을 이름 모를 길벗들을 떠올리자 그들의 삶 속에서 그들과 함께하셨고, 지금도 함께 하시고, 앞으로도 함께 하실 하나님의 현존이 느껴졌다. 그러자 뭉클했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는가. 뿌듯하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강의를 듣는 사람들뿐일까. 매주일 내 설교를 경청하는 길벗들은 또 어떤가.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섭리와 현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여정 중에 같은 교회에서 만났다. 하고 많은 교회들 중에서 하필이며 은명교회에서! 우리의 만남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나의 어눌한 설교를 듣고 작게나마 깨달음과 힘을 얻어 예수의 길을 걸으려는 그들의 몸짓에서 어찌 하나님을 느끼지 않겠는가. 송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벗들, 하나님 경험을 하고 싶은가.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사도 바울은 말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습니다.”(행 17:27) 야곱은 얍복강에서 자신의 참자아를 만났을 때 무서웠던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하므로 가까이에 있는 길벗이 얇은 곳이다. 사람이 얇은 곳이다.
벗들, 하나님 경험을 하고 싶은가.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자신의 참자아를 만났을 때 무서웠던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하므로 가까이에 있는 길벗이 얇은 곳이다. 사람이 얇은 곳이다.
무아의 다이어트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자기만의 “얇은 곳”을 간직한 사람이다. 장소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공간이나 장소보다 중요한 얇은 곳이 있다. “내면의 얇은 곳”이다! 내면의 얇은 곳이란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가로막는 에고가 사라진 내면 상태,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을 왜곡하는 거짓자아가 해체된 내면 상태를 일컫는다. 사실 에고의 두꺼움은 거대한 바윗덩어리처럼 하나님을 가린다. 거짓자아의 두꺼움은 장마철의 먹구름처럼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내면의 “하늘”을 차단한다. 내면의 공중을 차지하고 있는 에고나 거짓자아야말로 삶을 파괴하는 원흉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 5:8) 깨끗한 마음이 바로 에고가 깨지고 거짓자아가 해체된 무아無我 상태다. 마음이 깨끗해지면 시스루 룩이 알몸을 드러내듯 감춰졌던 하나님이 보인다. 시나브로 마음은 가난해져 “무심”無心에 이른다. 무아와 무심에 이른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장소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현존을 알아차린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성사이며, 모든 곳이 얇은 곳이다.
지금 다이어트 열풍이 문명 세계를 휩쓸고 있다. 비만이라는 질병이 만연한 선진국일수록 다이어트는 삶의 당위로 여겨진다. 다이어트 강박은 세대를 가리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물론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다이어트는 일종의 사명 같은 게 되었다. 내 머릿속에도 다이어트에 대한 생각이 의무감처럼 자리잡고 있다. 나이 들면서 나오는 배를 볼 때마다 나태한 삶을 산 것 같아 죄책감이 들어서다.
하지만 지방이 쌓여 뚱뚱해진 몸의 다이어트보다 더 중요한 다이어트가 있다. 내면의 다이어트다! 우리의 내면에는 성장 과정과 인간관계를 통해 쌓인, 그리고 충격적인 사건 사고를 겪으며 쌓인 심리적 퇴적물이 있다. 상처, 억울함, 화, 분노, 그리고 이런 것들과 관련된 어두운 감정, 우울한 기분 따위…. 이런 것들은 발설하기도 어려워 심연에 쌓이기만 한다. 심리적 퇴적물의 두꺼움은 살아온 세월의 길이에 정비례한다. 그럴수록 우리의 심리현실은 덩어리지고 어두워지고 거대해진다. 에고는 바윗덩어리처럼 견고해지며, 거짓자아는 철옹성처럼 단단해해진다. 무아와 무심은 처참하게 유린된다.
마침내 내면의 심층에 있는 영성현실,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아름다운 영성현실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맘에 안 드는 사람 투명인간 취급하듯, 원래 있는 영성현실은 완전히 무시당한다. 영성현실의 리얼리티 자체가 망각되고 무화된다. 있는데 없다! 실재인데 비존재다! 하나님의 형상도 빛을 잃고 참자아도 맥을 못 쓴다. 이게 인간의 비극적 운명이요 삶의 비애다. “모두가 다 같은 운명을 타고났다. 사람들은 마음에 사악과 광증을 품고 살다가 결국에는 죽고 만다.”(전 9:3)
하므로 내면의 다이어트, 시급하다. 그래야 두꺼운 공중이 얇아지고, 공중이 얇아지는 만큼 내면의 하늘이 맑게 펼쳐진다. 심리현실이 줄어들고, 심리현실이 줄어드는 만큼 영성현실이 드러난다. 마음이 깨끗해지고 가난해져 무아와 무심에 이른다. 무아와 무심에 이르는 만큼 하나님의 얼굴이 빛나기 시작하고, 참자아가 깨어난다. 먹구름 사라진 하늘에 보름달 둥실 떠오르듯 말이다.
예수님이 괜히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을 복되다고 말씀하신 게 아니다. 이 말씀은 내면의 다이어트를 촉구하시는 말씀이다. 내면의 다이어트를 해야 쌓이고 쌓여 산처럼 거대해진 심리현실과 거짓자아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깨끗한 마음과 가난한 마음, 무아와 무심에 이른 마음이야말로 가장 얇은 곳이다. 얇다 못해 없는 듯하여 초월과 거룩을, 신성과 하나님을, 투명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곳이다. 무아와 무심이라는 얇은 곳에 다다른 사람에겐 모든 곳이 얇은 곳이다.
예수의 이름
예수님이 그런 분이시다. 예수님의 마음은 깨끗하고 가난하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면서 심리현실을 깨끗이 비우신 분, 에고도 거짓자아도 사라지고 없어 무아 상태에서 무심에 이르신 분, 두꺼운 공중이 얇아지고 얇아져 하늘 그 자체가 되신 분이다. 아,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신 분!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을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십니다.”(히 1:3)
예수님이야말로 최고의 성사요, 가장 성스러운 얇은 곳이었다. 하여, 나는 내 마음의 두꺼움에 스스로 숨이 막힐 때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 내 에고의 단단함과 거짓자아의 교활함이 더불어 사는 삶의 환희를 망가뜨릴 때마다 나는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 예수님처럼 마음이 깨끗해지고 가난해져 무아와 무심에 이르기를 갈망할 때마다 나는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모든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본다.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무심의 경지에 이르러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나는 그리스도를 통해through Christ 모든 사람, 모든 곳에서 “얇은 곳”을 본다.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나는 그리스도로서as Christ 모든 이들과 함께 모든 곳에서 천국을 산다.
- 이민재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다.
(마 5:8)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마 5:3)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행 17:27)
“시스루 룩”이라는 말이 있다. 패션용어로 속이 훤히 비쳐 보이게 만든 옷을 일컫는다. “시스루”는 영어의 see와 through를 합성한 말이다. “~를 통해, ~을 통과해 본다”는 뜻이다. 얇은 망사로 만든 옷들이 대표적인 시스루 룩see-through look이다. 이슬람 세계의 군주인 술탄들 앞에서 요염한 자태로 춤을 추는 무희들은 대개 시스루 룩을 입고 있다. 시스루 룩은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우리 교회 근처에 무도장이 있는데 백바지에 검은 망사로 만든 시스루 룩을 입고 그곳에 드나드는 남자들을 여럿 봤다. 시스루 룩은 몸을 가리면서도 동시에 드러낸다. 시스루 룩은 유혹의 기술이기도 하다. 은폐와 현시顯示를 동시에 구현하면서 시선을 끌어당겨 고정시킨다.
얇은 곳
영성에도 시스루 룩과 비슷한 개념이 있다. “얇은 곳”thin places이 그것이다. 영어 단어 “thin”의 뜻이 “①얇은, 가느다란 ②마른, 여윈 ③숱이 적은”이라고 해서 “얇은 곳”을 깡마른 사람들이나 날씬한 사람들, 또는 머리숱이 적은 사람들이 사는 곳 쯤으로 오해해서는 않된다.
“얇은 곳”은 켈트 영성에서 사용하는 심오한 영적 메타포다. 켈트 영성은 5세기쯤에 시작되어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그리고 영국 북부지역에서 번창했던 기독교 형태다. 요즘은 『원복』Original Blessing의 저자 매튜 폭스가 켈트 기독교의 창조영성을 새롭게 조명하고 있다. 영성가요 의사요 작가요 작곡가요 생물학자요, 이 외에도 다방면에서 천재성을 발휘한 빙엔의 힐데가르트 같은 여성도 대표적인 켈트 영성가다.
“얇은 곳”이란 무엇일까? “두꺼운”thick 곳의 반대다. 고대 세계관에 따르면 하늘과 땅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영역이다. 전혀 다른 실재이다. 그래서 하늘과 땅의 간격은 멀다. 하늘과 땅의 간격이 넓으면 그만큼 “하늘과 땅 사이의 공간인” 공중이 두꺼워진다. 공중에는 바늘 들어갈 틈도 없을 만큼 악령으로 꽉 차 있다.(엡 2:1-6) “하늘”이 하나님이 거주하는 영역이라면, “공중”은 악마의 거주지다. 따라서 따라서 공중이 두꺼울수록 하나님과의 거리는 멀어진다.
그런데 하늘과 땅의 간격이 가까워지는 곳이 있다. 공중의 두꺼움이 해체되고 얇아지는 곳이 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하늘이 땅에 닿고 침투하고 스며드는 곳, 성聖과 속俗이 만나는 곳, 성과 속의 접경지역이다. 일종의 성소요 거룩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성스러움은 매개 없이 현현한다. 이런 “얇은 곳”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현존을 그 어떤 곳에서보다 강하게 느낀다. 마치 시스루 룩이 감췄던 알몸을 투명하게 드러내듯이.
공중의 두꺼움이 해체되고 얇아지는 곳이 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하늘이 땅에 닿고 침투하고 스며드는 곳, 성聖과 속俗이 만나는 곳, 성과 속의 접경지역이다. 일종의 성소요 거룩한 공간이다. 이곳에서 성스러움은 매개 없이 현현한다.
켈트 기독교에서는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선에서 좀 떨어진 이오나 섬을 전형적인 “얇은 곳”으로 친다. 전통적인 순례지인 예루살렘이나 로마도 얇은 곳이다. 성경에는 얇은 곳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아브라함이 본토・친척・아비 집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지시를 들은 곳도 얇은 곳이며,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지 않아 실의에 빠졌을 때 광활한 밤하늘을 쳐다보며 하나님의 약속을 다시 믿게 된 곳도 “얇은 곳”이다. 야곱이 형을 피해 도망하던 중에 노숙하다가 꿈속에서 하늘의 사닥다리를 본 벧엘도 “얇은 곳”이다. 형을 만나기 전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고뇌하다가 참자아를 각성한─성경은 하나님의 얼굴을 한 “어떤 사람”과 씨름했다고 묘사한다─얍복강도 “얇은 곳”이다.
모세가 양떼를 치다가 하나님을 만난 불에 타지 않는 떨기나무도 “얇은 곳”이며, 율법을 받은 시내산도 “얇은 곳”이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해서 이긴 갈멜산도 “얇은 곳”이며, 이세벨의 협박 때문에 도망다니다가 “완전한 침묵의 소리”sound of sheer silence(NRSV) 가운데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호렙산도 “얇은 곳”이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인간 무의식의 심층에 도사리고 있는 욕망을 대면하고 극복하신 광야야말로 “얇은 곳”이다. 이러한 얇은 곳에 대한 경험이 초대교회를 세우고 확장했다.
벗들의 얇은 곳은 어디인가? 하늘과 땅 사이의 “두꺼움”이 무너진 장소, 또는 신성과 초월과 무한에 사로잡힌 장소, 시스루 룩이 알몸을 드러내듯 하나님의 현존을 날것으로 경험한 장소 말이다. 기도원이 그런 곳일 수도 있고, 피정의 집이 그런 곳일 수도 있겠다. 요즘은 산티아고 순례길이 얇은 곳인 것 같다. 많은 사람이 그 길을 순례하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다.
나에겐 산이 그런 곳이었다.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매일 새벽기도회 끝나고 올랐던 수락산이 나에겐 얇은 곳이었다. 산을 오르면 몸이 더워지고 몸에선 비 오듯 땀이 난다. 몸이 정화된다. 마음도 깨끗해진다. 산의 고요와 정적에 잠기면 염려, 걱정, 불안, 두려움, 분노, 화 같은 어두운 감정이 저절로 씻겨 나가기 때문이다. 침묵 속에서 산길을 한참 걷다 보면 마음은 점차 무심에 이른다. 무심에 이른 마음에선 새로운 영감과 통찰이 샘솟는다. 하나님이 그 어느 때보다, 그 어느 곳에서보다 가깝게 느껴진다.
성 패트릭의 얇은 곳
요즘 새롭게 깨달은 “얇은 곳”이 있다. 우리가 날마다 암송하는 성 패트릭의 기도를 통해 깨달은 얇은 곳이다. 이 기도문의 7연은 유명하다. 노래도 여럿이다. 션 데이비가 작곡하고 리타 코널리가 부른 노래가 유명하다. 드와이트 빌은 “성 패트릭 찬가”Hymn of St. Patrick라는 제목으로 재해석했다. 그는 젊은이들이 부르기 좋아할 만한 창법으로 부른다. 에스토니아의 영성 깊은 작곡가 아르보 패르트가 “사슴의 외침”Deer’s Cry이라는 제목으로 작곡한 4부 합창곡은 아카펠라 합창의 백미다.
이 기도문에서 성 패트릭은 그리스도가 앞에도 뒤에도, 안에도 계시며, 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에도 계시며, 누울 때나 앉을 때나 일어날 때도 계신다고 고백한다. 모든 공간 모든 시간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놀라운 고백이다. 하지만 그다음에 이어지는 고백은 더욱 놀랍다.
그리스도여, 당신은
나를 생각하는 이들의 가슴 속에도 계시며
나에 대해 말하는 이들의 입속에도 계시며
나를 바라보는 이들의 눈 속에도 계시며
내 말을 듣는 이들의 귓속에도 계십니다.
타인의 가슴과 입, 눈과 귀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차리는 성인의 영적 감수성이 놀랍지 않은가. 이러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에게 타인의 가슴과 입, 눈과 귀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는 얇은 곳이다. 타인의 작고 연약한 지체들에서조차 그리스도를 알아차리는 감수성이 살아있다면 하나님 경험은 얼마나 풍성해질까. (요즘 저에게 조금이나마 그런 감수성을 일깨우시는 하나님, 찬양받으소서!)
타인의 작고 연약한 지체들에서조차 그리스도를 알아차리는 감수성이 살아있다면 하나님 경험은 얼마나 풍성해질까.
사람이 얇은 곳이다
다음 주면 이번 학기도 종강이다. 그래선지 지난 금요일 아침에 기도하는데 나를 “바라보는” 학생들의 눈동자가 보였고, 내 강의를 “듣는” 그들의 진지한 모습이 떠올랐다. 그 전날의 수업의 여운이 남아서였을까. 물음이 이어졌다. 저들은 왜 기대어린 눈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일까? 저들은 왜 내 말을 들으며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는 것일까?
그들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었다. 신학교에 들어온 것 자체가 하나님을 찾는 여정이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이번 학기 내 수업에 참여했을 것이고, 어떤 기대를 품고 나를 바라보며 내 말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들의 배후에서 그들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그들의 고뇌와 방황 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이 느껴졌다. 그들은 나에게 성사聖事 곧 “얇은 곳”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그 어떤 것보다, 그 어떤 장소보다 더 강렬하게 하나님을 느끼게 했다.
학생들을 통해 성사적 감수성이 열리자 얼마 전(5월 29일)에 〈레미제라블〉에서 한 강의가 생각났다. 그때 현장에서 내 말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 줌을 통해 강의를 들었을 이름 모를 길벗들을 떠올리자 그들의 삶 속에서 그들과 함께하셨고, 지금도 함께 하시고, 앞으로도 함께 하실 하나님의 현존이 느껴졌다. 그러자 뭉클했다. 이런 생각도 들었다. 내가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로 하여금 내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시는가. 뿌듯하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강의를 듣는 사람들뿐일까. 매주일 내 설교를 경청하는 길벗들은 또 어떤가. 그들을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섭리와 현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여정 중에 같은 교회에서 만났다. 하고 많은 교회들 중에서 하필이며 은명교회에서! 우리의 만남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나의 어눌한 설교를 듣고 작게나마 깨달음과 힘을 얻어 예수의 길을 걸으려는 그들의 몸짓에서 어찌 하나님을 느끼지 않겠는가. 송구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벗들, 하나님 경험을 하고 싶은가.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사도 바울은 말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기만 하면 만날 수 있습니다.”(행 17:27) 야곱은 얍복강에서 자신의 참자아를 만났을 때 무서웠던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하므로 가까이에 있는 길벗이 얇은 곳이다. 사람이 얇은 곳이다.
벗들, 하나님 경험을 하고 싶은가.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야곱은 얍복강에서 자신의 참자아를 만났을 때 무서웠던 형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 하므로 가까이에 있는 길벗이 얇은 곳이다. 사람이 얇은 곳이다.
무아의 다이어트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자기만의 “얇은 곳”을 간직한 사람이다. 장소일 수도 있고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공간이나 장소보다 중요한 얇은 곳이 있다. “내면의 얇은 곳”이다! 내면의 얇은 곳이란 하나님의 임재와 현존을 가로막는 에고가 사라진 내면 상태,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와 말씀을 왜곡하는 거짓자아가 해체된 내면 상태를 일컫는다. 사실 에고의 두꺼움은 거대한 바윗덩어리처럼 하나님을 가린다. 거짓자아의 두꺼움은 장마철의 먹구름처럼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내면의 “하늘”을 차단한다. 내면의 공중을 차지하고 있는 에고나 거짓자아야말로 삶을 파괴하는 원흉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마 5:8) 깨끗한 마음이 바로 에고가 깨지고 거짓자아가 해체된 무아無我 상태다. 마음이 깨끗해지면 시스루 룩이 알몸을 드러내듯 감춰졌던 하나님이 보인다. 시나브로 마음은 가난해져 “무심”無心에 이른다. 무아와 무심에 이른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장소는 문제가 아니다. 그는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현존을 알아차린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성사이며, 모든 곳이 얇은 곳이다.
지금 다이어트 열풍이 문명 세계를 휩쓸고 있다. 비만이라는 질병이 만연한 선진국일수록 다이어트는 삶의 당위로 여겨진다. 다이어트 강박은 세대를 가리지 않는다. 젊은이들은 물론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다이어트는 일종의 사명 같은 게 되었다. 내 머릿속에도 다이어트에 대한 생각이 의무감처럼 자리잡고 있다. 나이 들면서 나오는 배를 볼 때마다 나태한 삶을 산 것 같아 죄책감이 들어서다.
하지만 지방이 쌓여 뚱뚱해진 몸의 다이어트보다 더 중요한 다이어트가 있다. 내면의 다이어트다! 우리의 내면에는 성장 과정과 인간관계를 통해 쌓인, 그리고 충격적인 사건 사고를 겪으며 쌓인 심리적 퇴적물이 있다. 상처, 억울함, 화, 분노, 그리고 이런 것들과 관련된 어두운 감정, 우울한 기분 따위…. 이런 것들은 발설하기도 어려워 심연에 쌓이기만 한다. 심리적 퇴적물의 두꺼움은 살아온 세월의 길이에 정비례한다. 그럴수록 우리의 심리현실은 덩어리지고 어두워지고 거대해진다. 에고는 바윗덩어리처럼 견고해지며, 거짓자아는 철옹성처럼 단단해해진다. 무아와 무심은 처참하게 유린된다.
마침내 내면의 심층에 있는 영성현실, 하나님이 현존하시는 아름다운 영성현실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다. 맘에 안 드는 사람 투명인간 취급하듯, 원래 있는 영성현실은 완전히 무시당한다. 영성현실의 리얼리티 자체가 망각되고 무화된다. 있는데 없다! 실재인데 비존재다! 하나님의 형상도 빛을 잃고 참자아도 맥을 못 쓴다. 이게 인간의 비극적 운명이요 삶의 비애다. “모두가 다 같은 운명을 타고났다. 사람들은 마음에 사악과 광증을 품고 살다가 결국에는 죽고 만다.”(전 9:3)
하므로 내면의 다이어트, 시급하다. 그래야 두꺼운 공중이 얇아지고, 공중이 얇아지는 만큼 내면의 하늘이 맑게 펼쳐진다. 심리현실이 줄어들고, 심리현실이 줄어드는 만큼 영성현실이 드러난다. 마음이 깨끗해지고 가난해져 무아와 무심에 이른다. 무아와 무심에 이르는 만큼 하나님의 얼굴이 빛나기 시작하고, 참자아가 깨어난다. 먹구름 사라진 하늘에 보름달 둥실 떠오르듯 말이다.
예수님이 괜히 마음이 가난한 사람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을 복되다고 말씀하신 게 아니다. 이 말씀은 내면의 다이어트를 촉구하시는 말씀이다. 내면의 다이어트를 해야 쌓이고 쌓여 산처럼 거대해진 심리현실과 거짓자아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깨끗한 마음과 가난한 마음, 무아와 무심에 이른 마음이야말로 가장 얇은 곳이다. 얇다 못해 없는 듯하여 초월과 거룩을, 신성과 하나님을, 투명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곳이다. 무아와 무심이라는 얇은 곳에 다다른 사람에겐 모든 곳이 얇은 곳이다.
예수의 이름
예수님이 그런 분이시다. 예수님의 마음은 깨끗하고 가난하다.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면서 심리현실을 깨끗이 비우신 분, 에고도 거짓자아도 사라지고 없어 무아 상태에서 무심에 이르신 분, 두꺼운 공중이 얇아지고 얇아져 하늘 그 자체가 되신 분이다. 아,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신 분!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하나님을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이십니다.”(히 1:3)
예수님이야말로 최고의 성사요, 가장 성스러운 얇은 곳이었다. 하여, 나는 내 마음의 두꺼움에 스스로 숨이 막힐 때마다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 내 에고의 단단함과 거짓자아의 교활함이 더불어 사는 삶의 환희를 망가뜨릴 때마다 나는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 예수님처럼 마음이 깨끗해지고 가난해져 무아와 무심에 이르기를 갈망할 때마다 나는 예수의 이름을 부른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무아의 경지에 이르러 모든 사람에게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본다.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무심의 경지에 이르러 모든 곳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나는 그리스도를 통해through Christ 모든 사람, 모든 곳에서 “얇은 곳”을 본다. 예수의 이름을 부를 때 나는 그리스도로서as Christ 모든 이들과 함께 모든 곳에서 천국을 산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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