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삶) 하느님 체험이란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800회 작성일 23-03-22 21:45본문
그리스도교는 하느님께서 우리가 체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세상에서 활동하신다고 믿습니다. 하여 그리스도교 전통의 영적지도에서는 동반하는 사람이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떻게 하느님을 경험하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도록 안내하고, 그 경험들 가운데 어떤 체험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지를 기도 가운데 분별하며, 동반자가 하느님과 보다 깊고 친밀한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이를 위해 지도자는 동반자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기도 가운데 성찰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다양한 질문들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요사이 당신 삶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하느님은 어떤 모습의 하느님입니까? 하느님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이미지가 요사이 당신의 행동이나 감정, 선택들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요사이 하느님이 가깝게 느껴지십니까? 아니면 멀게 느껴집니까? 왜 그렇다고 생각합니까? 요사이 당신은 어디서 어떻게 하느님을 체험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그 체험을 하느님 체험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까? 요사이 당신이 기도 가운데 경험하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입니까? 기도경험을 통해 하느님에 대해 당신이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습니까? 무엇입니까?... 지도자는 이같은 질문들을 통하여 동반자가 자신의 삶 속에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초대를 기도 가운데 분별하며 응답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체험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실재하는 어떤 것과 의식을 가진 존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사건이나 사물, 혹은 같은 상황을 경험하면서도 각 사람의 체험이 다른 이유는 그 사건과 상황을 경험하는 그 순간, 각 사람 마음의 상태, 그리고 그 사건이나 상황과 관련하여 각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이전 경험들이 그 체험을 인지하고 해석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하느님 체험 역시, 그 체험의 순간, 우리의 마음 상태와 이전에 받아 온 신앙교육, 하느님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 성장과정에서의 경험 등이 체험을 인지하고 해석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같은 과정은 우리가 인간이기에 자연스럽고 당연한 과정입니다. 때문에 각 사람이 자신의 체험을 인지하고 해석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이같은 주관적인 요소들 때문에, 자신이 체험한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분별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체험에 대한 이같은 주관적인 해석과 분별로 개인과 교회가 큰 어려움에 직면하였던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교 영적전통에서는 분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왔고, 그리스도교 전통의 분별 지혜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하느님 체험을 이야기할 때, 무엇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느님 체험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으며, 통제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의 불을 소멸시킬 수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 올 때 도망칠 수 있으며, 성령께 마음을 열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하거나 아니면 분리된 상태 사이 그 어딘가에서, 순간순간 하느님을 듣고 보라는 초대의 표징들에 응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향한 갈망과 기대, 그리고 만남을 알아차리기 위해 깨어있는 태도가 요구됩니다.
하느님 체험이란?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서 사람들과 함께 계셨습니다.(창세 3:8) 인간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사람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거역한 후에도 변하지 않았으며, 하느님은 자신을 거역한 인류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원하시고,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스바 3:17) 성경은 모세처럼 하느님을 직접 경험하거나 함께 한 경험, 또는 예언자들이나 신실한 신앙의 선조들이 하느님을 영이나 음성으로 경험한 사건들에 대해 증언합니다. 그런가하면 하느님은 때로 사람이나 천사를 메신저로 사용하여 보내시기도 합니다.(루가 1:11-13, 26-28) 이같은 이야기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무엇보다 나자렛 예수라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보다 온전히 인간과 함께 하시는 길을 선택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지상에 계시는 동안 예수님과 만났던 사람들의 경험을 성찰하면서, 인격적으로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 무엇과 같은 것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여러 방식으로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지도자로, 설교자로, 친구로, 질문자로, 치유자로 하느님을 경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느님께서 인격적인 성령님으로 늘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한 14:25-26) 성령님은 다른 사람들과 세상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을 감지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영적 눈을 열어주십니다.
그런가하면 우리의 기대나 소망을 넘어 자유로운 선물로 다가 오는 하느님의 은총을 우리는 일상과 삶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과 우정의 경험들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선물을 받은 것 같은 순간들에서(여성들의 경우 출산의 경험과 같은), 어느 시인의 ‘어느 날 시가 나를 찾아왔다.’는 고백처럼 무언가를 빚어내는 창작의 경험 속에서, 무조건적인 용서와 자비의 체험들 속에서, 피조세계와 자연이 주는 깊은 평화와 초월에 영혼이 조율되는 것 같은 신비한 은총의 순간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성경말씀 속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이 우리를 향해 건네는 말을 듣는 속에서, 문득 가슴으로 다가 온 구절이나 단어 속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도 하느님을 만납니다. 어느 순간 하느님 품에 안긴 것 같은 깊은 평화 가운데서, 생각지 못했던 선물같은 깨달음과 통찰 속에서, 뉘우침과 회개의 눈물 속에서, 솟구치는 감사와 찬양 속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또한 역사 속에서도 하느님을 만납니다. 불의와 부조리에 저항하는 알 수 없는 용기와 양심 앞에서, 고난 받는 사람들과 가슴으로 연대하는 연민 속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하느님을 만납니다. 일상 중에 경험하는 뜻 깊은 모든 만남의 울림들 속에서도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부재하신 것 같은 어둠속에서도 하느님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삶의 모든 버팀목들이 사라진 것 같은 절망의 순간에 찾아오는 예상치 못한 은총을 경험하면서, 죽음 앞에서 궁극적 실재에 자신을 의탁하는 환우들의 순종을 바라보면서, 실패와 바닥의 자리에서 그곳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발견과 함께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으로 이끌리는 경험을 하면서, 아무도 채워줄 수 없는 깊은 상실과 외로움의 자리에 소리 없이 찾아오는 위로와 충만함을 경험
하면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종교학자 존 스미스 John Smith는 ‘종교체험’이라는 말보다 ‘체험의 종교적 차원’을 강조하였는데, 그는 ‘종교체험이란 어떤 특정한 유형의 체험이라기보다 모든 체험에 내재하는 종교적 차원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 체험은 모든 곳에서 가능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루를 하느님 안에서 돌아보는 의식성찰 훈련은 우리 삶 가운데 살아계신 하느님 임재의 순간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좋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모든 영적 경험들이 하느님 체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영적인 경험 그 자체가 경험의 진정성과 거룩성을 보장해 주는 충분한 증거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하느님 체험은 성경에 계시된 하느님의 본성과 조화를 이룹니다. 영적체험 그자체가 어떤 사람에게 사랑과 평안을 느끼게 한다 할지라도, 경험한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경험의 기원과 목적을 기도 가운데 주의 깊게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임재를 체험하고자 간절히 원하며 찾고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하느님인지 아니면 영적경험인지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 체험의 장애물 - 생각과 완고한 마음
나자렛 예수가 아버지라고 부른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는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사도 17:28)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 삶의 터전이며, 생명의 근원으로 우리를 움직이고, 이끄시며 살아가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왜일까요? 이에 대해 성서학자 마커스 보그 Marcus J. Borg는 ‘우리가 에덴 동쪽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에덴의 동쪽은 공간적으로 하느님과 가깝다고 하더라도 인식론적으로 먼 거리에 있다고 말합니다. 마틴 레어드Martin Laird는 자신의 저서 ‘침묵수업’에서 우리가 하느님이 안 계시다고 느끼거나 하느님과 멀어졌다고 느끼는 분리감은 마음(mind/생각)이 만들어 내는 착각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어느 우화(寓話)에서 아기 물고기가 엄마 물고기와 함께 바다 속을 헤엄치며 바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볼 수 없는 원인이 되는 인간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몇 지 은유 그 가운데 하나는 ‘완고한 마음’입니다. 성서전통에서 마음Heart은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의지하고 보는 것 보다 한층 ‘깊이’에 있는 자아의 한 차원으로 모든 것들에 영향을 니다. 마음Heart은 점진적으로 혹은 급진적으로 열릴 수 있는데, 그 때 우리는 열린 마음, 드러운 마음, 새로운 마음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돌 같이 굳은 마음이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됩니다.(에스겔 36:25-26) 성공회에서는 성무일과 중에 매일 ‘주여, 깨끗한 마음Heart을 새로 지어주시고...’(시편 51:10)라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미국의 프란치스칸 수도자 리처드 로어 Rohr Richard는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 메타노이아(μετανόια, Metanoia)가 위(above)를 뜻하는 Meta와 마음mind를 뜻하는 Nous의 합성어로 ‘너의 마음mind을 바꾸어라’ 또는 ‘너의 마음mind 너머로 가라’는 뜻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회개에 대한 이같은 이해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God blesses those people whose hearts are pure. They will see him!.’(마태 5:8)이라는 복음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체험
신앙인들은 여정의 어느 지점에서 한 분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교제로 초대되며,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감사의 마음을 지니도록 인도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과 참회를 통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전환하는 경험을 합니다. 그들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는 예수 안에서 성육신하신 하느님, 인류를 위해 인간의 삶을 기꺼이 선택하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경험은 사도 바오로의 증언처럼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도 영원히 살아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경험입니다. 그들은 이후 기도와 성경공부와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성부 하느님과 성령 하느님께도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인도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창조주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느님께 이끌립니다. 그들은 자연세계를 즐기며 나무와 호수, 산들과 피조물, 하늘과 변하는 계절을 바라보며 기뻐합니다. 그들은 우주의 신비와 피조세계에 대한 경이감으로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창조의 기원이 되는 창조주의 마음과 정신에게로 이끌립니다. 창조의 선물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그들을 하느님께로 이끌고, 그들은 하느님을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종교유무와 관계없이 하느님께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따라 가는 중, 어느 순간에 그들은 기도나 공부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하고, 그들의 말을 기꺼이 경청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함께 성경공부와 기도와 신앙 강연과 예배에 참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어라 이름을 붙여 표현할 수 없만,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 가운데서 하느님을 경험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한 채, 세밀한 음성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거룩한 임재로부터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면, 그들은 하느님이 계획하신 여러 초대들을 통하여 예수님과 창조주 하느님께 이끌리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을 성령을 보다 뜨거운 감정과 극적인 방식으로 경험합니다. 그 체험이 강렬하고 오래 기억되어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을 굳게 만들어 줍니다. 이처럼 출발은 다를 수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체험은 어디서 출발하든 그 체험은 점차 삼위일체 하느님 체험으로 성장해 갑니다.
하느님 체험의 변화와 고유함
하느님께서는 시기와 상황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만나시고, 양육하시기 때문에 하느님 체험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느님께서 삼위일체 중 어느 한 위격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도록 요청하고 계심을 인지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어떤 한 분 하느님께 더욱 이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또한 하느님을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영적여정을 홀로 추구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공동체 안에서 추구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숲을 보는데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나무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분석적이며 신학적인 사고에 매료되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감정과 반응들에 초점을 맞추기도 합니다. 일 우리들이 하느님을 경험하는 다양한 길들을 모두 사용할 수 있다면 더욱 풍요롭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기와 상황에 따라 우리의 영적 필요에 맞추어 다르게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익숙한 방식으로 말씀하실 때도 있지만 낯선 방식으로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요사이 당신 삶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하느님은 어떤 모습의 하느님입니까? 하느님에 대해 당신이 갖고 있는 이미지가 요사이 당신의 행동이나 감정, 선택들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까? 요사이 하느님이 가깝게 느껴지십니까? 아니면 멀게 느껴집니까? 왜 그렇다고 생각합니까? 요사이 당신은 어디서 어떻게 하느님을 체험하고 있습니까? 무엇이 그 체험을 하느님 체험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습니까? 요사이 당신이 기도 가운데 경험하는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입니까? 기도경험을 통해 하느님에 대해 당신이 새롭게 발견한 것이 있습니까? 무엇입니까?... 지도자는 이같은 질문들을 통하여 동반자가 자신의 삶 속에 살아계시고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자신을 향한 하느님의 초대를 기도 가운데 분별하며 응답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체험이라는 말을 사용할 때, 그것은 ‘실재하는 어떤 것과 의식을 가진 존재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만남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같은 사건이나 사물, 혹은 같은 상황을 경험하면서도 각 사람의 체험이 다른 이유는 그 사건과 상황을 경험하는 그 순간, 각 사람 마음의 상태, 그리고 그 사건이나 상황과 관련하여 각 사람이 지니고 있는 이전 경험들이 그 체험을 인지하고 해석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하느님 체험 역시, 그 체험의 순간, 우리의 마음 상태와 이전에 받아 온 신앙교육, 하느님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 성장과정에서의 경험 등이 체험을 인지하고 해석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같은 과정은 우리가 인간이기에 자연스럽고 당연한 과정입니다. 때문에 각 사람이 자신의 체험을 인지하고 해석하는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이같은 주관적인 요소들 때문에, 자신이 체험한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 분별하는 일이 그리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체험에 대한 이같은 주관적인 해석과 분별로 개인과 교회가 큰 어려움에 직면하였던 사례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교 영적전통에서는 분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해 왔고, 그리스도교 전통의 분별 지혜를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하느님 체험을 이야기할 때, 무엇보다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느님 체험은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없으며, 통제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전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의 불을 소멸시킬 수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찾아 올 때 도망칠 수 있으며, 성령께 마음을 열고 싶어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함께 하거나 아니면 분리된 상태 사이 그 어딘가에서, 순간순간 하느님을 듣고 보라는 초대의 표징들에 응답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하느님과의 만남을 향한 갈망과 기대, 그리고 만남을 알아차리기 위해 깨어있는 태도가 요구됩니다.
하느님 체험이란?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서 사람들과 함께 계셨습니다.(창세 3:8) 인간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사람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거역한 후에도 변하지 않았으며, 하느님은 자신을 거역한 인류와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관계 맺기를 원하시고, 그것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스바 3:17) 성경은 모세처럼 하느님을 직접 경험하거나 함께 한 경험, 또는 예언자들이나 신실한 신앙의 선조들이 하느님을 영이나 음성으로 경험한 사건들에 대해 증언합니다. 그런가하면 하느님은 때로 사람이나 천사를 메신저로 사용하여 보내시기도 합니다.(루가 1:11-13, 26-28) 이같은 이야기들은 하느님께서 우리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하느님은 무엇보다 나자렛 예수라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보다 온전히 인간과 함께 하시는 길을 선택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지상에 계시는 동안 예수님과 만났던 사람들의 경험을 성찰하면서, 인격적으로 하느님을 체험하는 것이 무엇과 같은 것인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여러 방식으로 경험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선생님으로, 지도자로, 설교자로, 친구로, 질문자로, 치유자로 하느님을 경험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또한 하느님께서 인격적인 성령님으로 늘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요한 14:25-26) 성령님은 다른 사람들과 세상 안에 거하시는 하느님을 감지할 수 있도록 우리의 영적 눈을 열어주십니다.
그런가하면 우리의 기대나 소망을 넘어 자유로운 선물로 다가 오는 하느님의 은총을 우리는 일상과 삶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과 우정의 경험들 속에서, 형언할 수 없는 선물을 받은 것 같은 순간들에서(여성들의 경우 출산의 경험과 같은), 어느 시인의 ‘어느 날 시가 나를 찾아왔다.’는 고백처럼 무언가를 빚어내는 창작의 경험 속에서, 무조건적인 용서와 자비의 체험들 속에서, 피조세계와 자연이 주는 깊은 평화와 초월에 영혼이 조율되는 것 같은 신비한 은총의 순간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성경말씀 속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이 우리를 향해 건네는 말을 듣는 속에서, 문득 가슴으로 다가 온 구절이나 단어 속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기도 속에서도 하느님을 만납니다. 어느 순간 하느님 품에 안긴 것 같은 깊은 평화 가운데서, 생각지 못했던 선물같은 깨달음과 통찰 속에서, 뉘우침과 회개의 눈물 속에서, 솟구치는 감사와 찬양 속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또한 역사 속에서도 하느님을 만납니다. 불의와 부조리에 저항하는 알 수 없는 용기와 양심 앞에서, 고난 받는 사람들과 가슴으로 연대하는 연민 속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도 하느님을 만납니다. 일상 중에 경험하는 뜻 깊은 모든 만남의 울림들 속에서도 하느님을 만납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부재하신 것 같은 어둠속에서도 하느님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삶의 모든 버팀목들이 사라진 것 같은 절망의 순간에 찾아오는 예상치 못한 은총을 경험하면서, 죽음 앞에서 궁극적 실재에 자신을 의탁하는 환우들의 순종을 바라보면서, 실패와 바닥의 자리에서 그곳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발견과 함께 새로운 희망과 가능성으로 이끌리는 경험을 하면서, 아무도 채워줄 수 없는 깊은 상실과 외로움의 자리에 소리 없이 찾아오는 위로와 충만함을 경험
하면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종교학자 존 스미스 John Smith는 ‘종교체험’이라는 말보다 ‘체험의 종교적 차원’을 강조하였는데, 그는 ‘종교체험이란 어떤 특정한 유형의 체험이라기보다 모든 체험에 내재하는 종교적 차원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 체험은 모든 곳에서 가능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아니 계신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루를 하느님 안에서 돌아보는 의식성찰 훈련은 우리 삶 가운데 살아계신 하느님 임재의 순간들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돕는 좋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그 모든 영적 경험들이 하느님 체험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영적인 경험 그 자체가 경험의 진정성과 거룩성을 보장해 주는 충분한 증거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참된 하느님 체험은 성경에 계시된 하느님의 본성과 조화를 이룹니다. 영적체험 그자체가 어떤 사람에게 사랑과 평안을 느끼게 한다 할지라도, 경험한 그것이 성경의 가르침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경험의 기원과 목적을 기도 가운데 주의 깊게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임재를 체험하고자 간절히 원하며 찾고 있을 때, 우리는 참으로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하느님인지 아니면 영적경험인지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하느님 체험의 장애물 - 생각과 완고한 마음
나자렛 예수가 아버지라고 부른 하느님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이해는 ‘우리는 하느님 안에서 숨 쉬고, 움직이며 살아간다.’(사도 17:28)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에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우리 삶의 터전이며, 생명의 근원으로 우리를 움직이고, 이끄시며 살아가게 해 주시는 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은 왜일까요? 이에 대해 성서학자 마커스 보그 Marcus J. Borg는 ‘우리가 에덴 동쪽에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에덴의 동쪽은 공간적으로 하느님과 가깝다고 하더라도 인식론적으로 먼 거리에 있다고 말합니다. 마틴 레어드Martin Laird는 자신의 저서 ‘침묵수업’에서 우리가 하느님이 안 계시다고 느끼거나 하느님과 멀어졌다고 느끼는 분리감은 마음(mind/생각)이 만들어 내는 착각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마치 어느 우화(寓話)에서 아기 물고기가 엄마 물고기와 함께 바다 속을 헤엄치며 바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성서에서 우리가 하느님을 볼 수 없는 원인이 되는 인간의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몇 지 은유 그 가운데 하나는 ‘완고한 마음’입니다. 성서전통에서 마음Heart은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고 의지하고 보는 것 보다 한층 ‘깊이’에 있는 자아의 한 차원으로 모든 것들에 영향을 니다. 마음Heart은 점진적으로 혹은 급진적으로 열릴 수 있는데, 그 때 우리는 열린 마음, 드러운 마음, 새로운 마음으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돌 같이 굳은 마음이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됩니다.(에스겔 36:25-26) 성공회에서는 성무일과 중에 매일 ‘주여, 깨끗한 마음Heart을 새로 지어주시고...’(시편 51:10)라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미국의 프란치스칸 수도자 리처드 로어 Rohr Richard는 회개를 뜻하는 헬라어 메타노이아(μετανόια, Metanoia)가 위(above)를 뜻하는 Meta와 마음mind를 뜻하는 Nous의 합성어로 ‘너의 마음mind을 바꾸어라’ 또는 ‘너의 마음mind 너머로 가라’는 뜻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회개에 대한 이같은 이해는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God blesses those people whose hearts are pure. They will see him!.’(마태 5:8)이라는 복음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체험
신앙인들은 여정의 어느 지점에서 한 분이신 삼위일체 하느님과의 교제로 초대되며, 삼위일체
하느님에 대한 온전한 이해와 감사의 마음을 지니도록 인도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과 참회를 통해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하느님 중심의 삶으로 전환하는 경험을 합니다. 그들이 하느님과 맺는 관계는 예수 안에서 성육신하신 하느님, 인류를 위해 인간의 삶을 기꺼이 선택하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예수 경험은 사도 바오로의 증언처럼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도 영원히 살아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경험입니다. 그들은 이후 기도와 성경공부와 예수님과의 교제를 통해 성부 하느님과 성령 하느님께도 더 많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인도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창조주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느님께 이끌립니다. 그들은 자연세계를 즐기며 나무와 호수, 산들과 피조물, 하늘과 변하는 계절을 바라보며 기뻐합니다. 그들은 우주의 신비와 피조세계에 대한 경이감으로 하느님을 만납니다. 그들은 창조의 기원이 되는 창조주의 마음과 정신에게로 이끌립니다. 창조의 선물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은 그들을 하느님께로 이끌고, 그들은 하느님을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종교유무와 관계없이 하느님께로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따라 가는 중, 어느 순간에 그들은 기도나 공부모임에 참여하기 시작하고, 그들의 말을 기꺼이 경청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과 함께 성경공부와 기도와 신앙 강연과 예배에 참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어라 이름을 붙여 표현할 수 없만, 고요하고 세미한 음성 가운데서 하느님을 경험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도 못한 채, 세밀한 음성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 거룩한 임재로부터 배우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다면, 그들은 하느님이 계획하신 여러 초대들을 통하여 예수님과 창조주 하느님께 이끌리게 됩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을 성령을 보다 뜨거운 감정과 극적인 방식으로 경험합니다. 그 체험이 강렬하고 오래 기억되어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믿음을 굳게 만들어 줍니다. 이처럼 출발은 다를 수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체험은 어디서 출발하든 그 체험은 점차 삼위일체 하느님 체험으로 성장해 갑니다.
하느님 체험의 변화와 고유함
하느님께서는 시기와 상황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만나시고, 양육하시기 때문에 하느님 체험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움직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느님께서 삼위일체 중 어느 한 위격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도록 요청하고 계심을 인지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어떤 한 분 하느님께 더욱 이끌리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또한 하느님을 동일한 방식으로 경험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영적여정을 홀로 추구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공동체 안에서 추구하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숲을 보는데 흥미를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나무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분석적이며 신학적인 사고에 매료되는 경향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감정과 반응들에 초점을 맞추기도 합니다. 일 우리들이 하느님을 경험하는 다양한 길들을 모두 사용할 수 있다면 더욱 풍요롭게 하느님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기와 상황에 따라 우리의 영적 필요에 맞추어 다르게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익숙한 방식으로 말씀하실 때도 있지만 낯선 방식으로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