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하나님을 만나는 한가지 또는 만가지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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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760회 작성일 23-03-14 14:21본문
“오직 하나님은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느니라.”
(골 3:11)
“하나님이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다”는 이 한 마디는 바울의 어떤 하나님 경험에서 나온 말일까? 이런 하나님은 얼마나 클까? 그리고 만유(萬有) 곧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한다면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비르질 게오르규의 말이 생각난다. “아름다움과 신성함은 단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성함은 아름답고, 아름다움은 신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필로칼로스’(philokalos) 곧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자’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최고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이 말대로라면 만유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삶은 아름답고 성스러워질 것이다.
그런데 “사람으로서는 본 일도 없고, 또 볼 수도 없는”(딤전 6:16) 하나님을 만유 안에서, 심지어 만유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절망의 늪
기말과제를 포기한 학생이 있었다. 지정한 책을 읽고 리포트를 내야 했는데 마감일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전화해서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죄송하다며 곧 제출하겠다고 해서 마감을 연장해주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감감소식이었다. 영점 처리하려다가 만나서 사정을 물었다.
이번 학기 완전히 포기한 거야? 그럼 재수강해야 하잖아?
아무 말이 없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한두 번 호흡을 가다듬고 나는 또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
여전히 대답이 없다. 집안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걸까, 말하기 어려운 나쁜 일을 겪은 걸까, 아니면 수업에 불만을 가진 걸까? 질문이 쏟아졌지만, 나는 침묵하면서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려고 애썼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아요.
한참 후에 학생은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말했다. 짐작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한 학기를 포기해? 라고 나는 다그칠 뻔했다. 하지만 문제는 문제였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데 신학생이 어떻게 신학을 계속하겠는가.
학생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요즘의 상태를 묘사해볼 수 있겠어?
대답은 간결했다.
늪.
그리고 뜸 들이지 않고 덧붙였다.
절망의 늪.
하나님의 부재는 그에게서 삶의 의미를 송두리째 빼앗았다. 성적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고민은 나의 고민이 되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나도 늪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신앙의 패러다임이 바뀔 때마다 영혼의 홍역을 앓던 때가 생각났다. 하나님 관념이 바뀔 때마다 문지방의 터가 흔들렸던 경험. 교리적인 신앙이 은사주의 신앙으로 바뀔 때도 그랬고, 근본주의 신앙이 자유주의 신앙으로 바뀔 때도 그랬다.
이런 경험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많다.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 예전 같지 않은 때. 신심은 시들고 경건은 무료하고 기쁨도 감사도 사라지는 그때, 사람들은 신앙이 병들었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경험하는) 하나님보다 크다. 하나님에겐 천의 얼굴이 있다. 우리는 그 중에서 하나의 얼굴을 볼 뿐이다. 따라서 하나의 얼굴만 보면 또 다른 얼굴을 볼 수 없다. 우리의 좁은 인식과 경험에 갇힐 때 하나님은 왜소하고 초라하다.
사실 하나님 부재의 경험은 기회요 은총이다. 하나님의 또 다른 얼굴을 보고,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부재의 경험은 새로운 하나님 경험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초대다. 이 초대에 응하려면 그동안 갖고 있던 하나님 이미지나 관념을 버려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하나님 경험은 의미의 원천이며 생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경험은 절대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라지셨다? 그건 목숨 바쳐 사랑한 연인이 떠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사라지신 것 같이 느껴지면 견딜 수가 없다. 그건 재앙 중의 재앙이다. 절망의 늪에 빠지는 것도 당연하다.
40년의 회한
지난여름, 안식월을 지내는 동안 설교의 부담에서 벗어나니 홀가분했다. 설교준비를 하지 않는 토요일이 처음엔 낯설었지만, 적응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손주들이랑도 놀고, 나들이도 하고, 영화도 보는 주말은 즐거웠다.
한 친구가 물었다. 안식월에 어디 갈 거냐고. 외국에라도 다녀올 줄 알았던 모양이다. 내 생각에도 산티아고나 제주도 올레길이라도 걸어야 있어 보일 것 같기는 했다. 아니면 수도원 순례라도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냥 일상을 편안하고 평범하게 누리고 싶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안식월의 편안한 기분 뒤편에서 불편한 감정이 어른거렸다. 불청객처럼 반기고 싶지 않았던 그 감정은 “40”이라는 숫자와 관련이 있었다. 올해는 내가 목회를 시작한 지 꼭 40년이 되는 해였다.
40년은 시간의 만만한 단위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40년은 광야생활의 연단을 마친 기간이었다. 노예살이에서의 탈출과 하나님 백성이 되는 훈련을 거쳐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약속 성취의 세월이었다. 그런데 나의 40년에선 탈출과 연단과 성취의 흔적이 미미한 것 같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나의 40년은 무엇을 남겼을까. 40년은 지나온 세월에 대한 회한의 숫자였다.
40년은 은퇴 후의 삶을 떠올리는 염려의 숫자이기도 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생존을 염려하게 하는 불안한 숫자. 40년은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온 나의 운명이 땅에 매여 있으며 몸을 위해 밥을 먹어야 함을 알려주는 민망한 숫자였다.
무엇보다 40년은 내가 설교를 한 기간이었다. 그 긴 세월 동안 대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하나님에 대해 할 말이 그렇게 많았을까?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나 하고 말한 걸까? 아는 것도 없이 떠든 것 같았고, 경험도 없이 열을 올린 것 같았다. 때론 핏대를 내며 다른 사람의 하나님을 단죄하기도 했다. 회한은 회의로, 회의는 불안으로 이어졌다.
그날, 빗소리
하나님을 모른다는 느낌, 하나님 경험의 초라함, 그러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설교했다는 자책감, 이어지는 당혹감. 나는 내 영혼이 “절망의 늪”에 빠졌다고 진단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다고 인정하는 순간 끝장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로 어떻게 설교한다는 말인가.
이렇게 안식월을 끝낼 수는 없었다. 일주일을 남겨놓고 개인피정을 시작했다. 겉으로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독서도 했고, 글도 썼다. 기도도 많이 했다.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피정의 집 꼭대기에 있는 기도실은 내 영혼의 놀이터였다. 점심을 먹고 나선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했다. 셋째 날인가 넷째 날, 비가 쏟아질 때 걸었던 십자가의 길은 특별한 영적 감흥을 주었다.
하지만 피정이 끝나갈수록 겉과 달리 마음에선 초조함이 스멀거렸다.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지 못했다는 징후였다. 하나님을 상징하는 바다는 겉은 요란해도 속은 고요한데 나는 그 반대였다. 겉은 평온한데 속은 요동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피정 끝나기 전날. 물음이 꼬리를 물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평생 하나님을 믿어왔고, 사십 년 동안 하나님을 설교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흔들려본 적이 없다고 장담한 적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하나님은 누구 또는 무엇인가? 알 것 같으면서도 실체가 없고, 믿는 것 같으면서도 모호하고…. 어쩌나. 사람들이 이런 속사정을 눈치채면…. 하루만 지나면 피정도 안식월도 끝나는데….
피정 닷새째. 아침부터 비가 왔다. 습관처럼 기도실을 찾았다. 고요했다. 문득 빗소리. 내가 빗소리를 들은 게 아니라, 빗소리가 내 귀에 들어왔다. 소리, 소리가 이어지는데 묘했다. 소리의 향연 속에서 침묵은 더욱 깊어졌고, 고요는 더욱 넓어졌다. 빗소리에는 다른 소리도 섞여 있었다. 멀리서 들리는 닭울음 소리, 십자가의 길을 오를 때도 들었던 새소리, 땀방울 식혀주었던 바람소리, 빗방울 세차게 지붕 때리는 소리.
소리들 천지인데 침묵은 더욱 확연하다. 무슨 조화일까. 덩달아 마음은 경건하고 평온하다. 빗소리, 침묵, 기도실의 고요한 경건, 이것들은 하나님과 무슨 관계일까?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실까?
점심 때쯤 되자 아침에 기도실에서 느꼈던 고요와 경건은 사라지고 말았다. 저녁 무렵엔 피정 기간 내내 유지했던 중심을 향한 지향도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 다시 초조해졌다. 이렇게 산만한 상태로 안식월이 끝나는 건가?
하나님스러움
잠이 안 왔다. 뒤척이다가 설핏 잠이 들었고, 새벽녘에 잠을 깼다. 또 빗소리. 이번 여름엔 비가 참 많이도 오네.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체념적인 기분으로 기도실에 올라갔다. 비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기도실에 앉아 침묵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기도실은 고요로 가득했다. 빗소리도 가득했다. 소리는 가득한데 침묵은 깊어졌고, 고요는 두터워졌다. 이상했다. 소리가 침묵을 더욱 깊게 하다니. 소리와 침묵은 반대 아닌가. 어쨌거나 침묵과 고요 속에서 듣는 빗소리가 좋았다.
그러다가 묘한 현상을 알아차렸다. 점점 깊어지는 침묵 속에서 나는 경건해지고 있었다. 좀 더 순수해지고 있었고, 진실해지고 있었다. 연민과 사랑도 샘솟고 있었다. 무엇보다 평화로웠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경건, 순수, 진실, 연민, 사랑, 평화는 하나님의 성품임을. 그래, 나는 하나님스러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왜였을까, 라고 묻는데 번개가 쳤다.
아,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스럽게” 하는 모든 것으로 다가오신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스럽게” 하는 모든 것으로 다가오신다!
하염없이 내리는 빗소리, 빗방울 지붕 때리는 소리, 새벽부터 나를 깨우는 새소리로. 산책할 때마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과 숲향기로. 나무들 위로 쏴아 쏟아지는 비, 비, 소리, 소리로. 이 모든 것들이 나를 하나님스러워지게 한다면, 그래서 내가 본질자아로 현존한다면, 하나님은
그것들 안에 계시고,
그것들과 함께 현존하시고,
그것들을 통해 오신다.
나를 둘러싼 경건한 분위기로 현존하신다.
그렇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하나님스러움으로, 나의 본질로, 나의 “나다움”으로 현존하신다. 빗소리 안에서 빗소리를 통하여, 새소리 안에서 새소리를 통하여, 바람 안에서 바람을 통하여, 십자가의 길에서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기도실에 있는 감실(龕室)과 기도방석 안에서 그것들을 통하여, 머튼의 일기와 게오르규의 소설을 통하여. 심지어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생을 마감한 수원의 세 모녀에 대한 슬픔과 옥상에서 생을 정리한 보육원 출신 대학생에 대한 비통함을 통하여….
하여 하나님은 내가 있는 곳, 내가 가는 곳, 어디에나 계신다. 나를 경건하게 하고 순수하게 하고 진실하게 하고 정의를 갈망하게 하고 연민을 갖게 하는 모든 것으로,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 경험에서 중요한 건 나였다. 내 내면의 상태, 내 존재의 분위기였다. 나를 나답게 하고 나의 참자아를 일깨우고 나를 하나님스럽게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얼굴이었다. 하나님은 천의 얼굴을 갖고 계셨다. 아니다, 나를 하나님스럽게 하는 경우의 수는 너무 많았고, 없는 곳이 없었다. 아, 하나님은 만유였고, 만유 안에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한의 신비였다.
또 다른 현상. 침묵과 고요 속에서 만물을 통해 경건해진 나에게 만물은 죽어 있는 사물도, 객관적인 분석의 대상도 아니었다. 살아있는 생명이었다. 만물을 통해 나를 새롭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다. 아,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딤전 6:13)
이어진 현상. 만물을 존중하고 싶은 마음! 사물들을, 나무를, 꽃을, 새를, 바람을. 그리고 자연을, 사건을, 역사를. 존중의 마음과 함께 사람들이 존엄해 보였고, 내 정신은 숭고해졌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통하여 나는 아름다워졌고 성스러워졌다. 비로소 성도(聖徒) 곧 “필로칼로스”가 된 것이다.
성도가 된 나는 즐겁게 하산했다. 안식월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 이민재
(골 3:11)
“하나님이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신다”는 이 한 마디는 바울의 어떤 하나님 경험에서 나온 말일까? 이런 하나님은 얼마나 클까? 그리고 만유(萬有) 곧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을 경험한다면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비르질 게오르규의 말이 생각난다. “아름다움과 신성함은 단 하나의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성함은 아름답고, 아름다움은 신성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필로칼로스’(philokalos) 곧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자’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최고의 아름다움이기 때문이다.” 이 말대로라면 만유 안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삶은 아름답고 성스러워질 것이다.
그런데 “사람으로서는 본 일도 없고, 또 볼 수도 없는”(딤전 6:16) 하나님을 만유 안에서, 심지어 만유로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절망의 늪
기말과제를 포기한 학생이 있었다. 지정한 책을 읽고 리포트를 내야 했는데 마감일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다. 전화해서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죄송하다며 곧 제출하겠다고 해서 마감을 연장해주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도 감감소식이었다. 영점 처리하려다가 만나서 사정을 물었다.
이번 학기 완전히 포기한 거야? 그럼 재수강해야 하잖아?
아무 말이 없었다.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한두 번 호흡을 가다듬고 나는 또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
여전히 대답이 없다. 집안에 무슨 안 좋은 일이 생긴 걸까, 말하기 어려운 나쁜 일을 겪은 걸까, 아니면 수업에 불만을 가진 걸까? 질문이 쏟아졌지만, 나는 침묵하면서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려고 애썼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아요.
한참 후에 학생은 들릴락 말락 한 소리로 말했다. 짐작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아니 그렇다고 한 학기를 포기해? 라고 나는 다그칠 뻔했다. 하지만 문제는 문제였다. 하나님이 안 계신 것 같은데 신학생이 어떻게 신학을 계속하겠는가.
학생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요즘의 상태를 묘사해볼 수 있겠어?
대답은 간결했다.
늪.
그리고 뜸 들이지 않고 덧붙였다.
절망의 늪.
하나님의 부재는 그에게서 삶의 의미를 송두리째 빼앗았다. 성적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고민은 나의 고민이 되었다. 하나님이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나도 늪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신앙의 패러다임이 바뀔 때마다 영혼의 홍역을 앓던 때가 생각났다. 하나님 관념이 바뀔 때마다 문지방의 터가 흔들렸던 경험. 교리적인 신앙이 은사주의 신앙으로 바뀔 때도 그랬고, 근본주의 신앙이 자유주의 신앙으로 바뀔 때도 그랬다.
이런 경험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많다.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 예전 같지 않은 때. 신심은 시들고 경건은 무료하고 기쁨도 감사도 사라지는 그때, 사람들은 신앙이 병들었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하는(경험하는) 하나님보다 크다. 하나님에겐 천의 얼굴이 있다. 우리는 그 중에서 하나의 얼굴을 볼 뿐이다. 따라서 하나의 얼굴만 보면 또 다른 얼굴을 볼 수 없다. 우리의 좁은 인식과 경험에 갇힐 때 하나님은 왜소하고 초라하다.
사실 하나님 부재의 경험은 기회요 은총이다. 하나님의 또 다른 얼굴을 보고,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부재의 경험은 새로운 하나님 경험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초대다. 이 초대에 응하려면 그동안 갖고 있던 하나님 이미지나 관념을 버려야 한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하나님 경험은 의미의 원천이며 생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경험은 절대적이기까지 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라지셨다? 그건 목숨 바쳐 사랑한 연인이 떠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사라지신 것 같이 느껴지면 견딜 수가 없다. 그건 재앙 중의 재앙이다. 절망의 늪에 빠지는 것도 당연하다.
40년의 회한
지난여름, 안식월을 지내는 동안 설교의 부담에서 벗어나니 홀가분했다. 설교준비를 하지 않는 토요일이 처음엔 낯설었지만, 적응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손주들이랑도 놀고, 나들이도 하고, 영화도 보는 주말은 즐거웠다.
한 친구가 물었다. 안식월에 어디 갈 거냐고. 외국에라도 다녀올 줄 알았던 모양이다. 내 생각에도 산티아고나 제주도 올레길이라도 걸어야 있어 보일 것 같기는 했다. 아니면 수도원 순례라도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러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냥 일상을 편안하고 평범하게 누리고 싶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안식월의 편안한 기분 뒤편에서 불편한 감정이 어른거렸다. 불청객처럼 반기고 싶지 않았던 그 감정은 “40”이라는 숫자와 관련이 있었다. 올해는 내가 목회를 시작한 지 꼭 40년이 되는 해였다.
40년은 시간의 만만한 단위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40년은 광야생활의 연단을 마친 기간이었다. 노예살이에서의 탈출과 하나님 백성이 되는 훈련을 거쳐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시대를 연 약속 성취의 세월이었다. 그런데 나의 40년에선 탈출과 연단과 성취의 흔적이 미미한 것 같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나의 40년은 무엇을 남겼을까. 40년은 지나온 세월에 대한 회한의 숫자였다.
40년은 은퇴 후의 삶을 떠올리는 염려의 숫자이기도 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생존을 염려하게 하는 불안한 숫자. 40년은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온 나의 운명이 땅에 매여 있으며 몸을 위해 밥을 먹어야 함을 알려주는 민망한 숫자였다.
무엇보다 40년은 내가 설교를 한 기간이었다. 그 긴 세월 동안 대체 나는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하나님에 대해 할 말이 그렇게 많았을까? 하나님을 제대로 알기나 하고 말한 걸까? 아는 것도 없이 떠든 것 같았고, 경험도 없이 열을 올린 것 같았다. 때론 핏대를 내며 다른 사람의 하나님을 단죄하기도 했다. 회한은 회의로, 회의는 불안으로 이어졌다.
그날, 빗소리
하나님을 모른다는 느낌, 하나님 경험의 초라함, 그러면서도 하나님에 대해 설교했다는 자책감, 이어지는 당혹감. 나는 내 영혼이 “절망의 늪”에 빠졌다고 진단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렇다고 인정하는 순간 끝장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로 어떻게 설교한다는 말인가.
이렇게 안식월을 끝낼 수는 없었다. 일주일을 남겨놓고 개인피정을 시작했다. 겉으로는 모든 게 순조로웠다. 독서도 했고, 글도 썼다. 기도도 많이 했다.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피정의 집 꼭대기에 있는 기도실은 내 영혼의 놀이터였다. 점심을 먹고 나선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묵상했다. 셋째 날인가 넷째 날, 비가 쏟아질 때 걸었던 십자가의 길은 특별한 영적 감흥을 주었다.
하지만 피정이 끝나갈수록 겉과 달리 마음에선 초조함이 스멀거렸다. 하나님과 새로운 관계가 설정되지 못했다는 징후였다. 하나님을 상징하는 바다는 겉은 요란해도 속은 고요한데 나는 그 반대였다. 겉은 평온한데 속은 요동치고 있었으니 말이다.
피정 끝나기 전날. 물음이 꼬리를 물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평생 하나님을 믿어왔고, 사십 년 동안 하나님을 설교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이 흔들려본 적이 없다고 장담한 적도 많았다. 그런데 지금 나에게 하나님은 누구 또는 무엇인가? 알 것 같으면서도 실체가 없고, 믿는 것 같으면서도 모호하고…. 어쩌나. 사람들이 이런 속사정을 눈치채면…. 하루만 지나면 피정도 안식월도 끝나는데….
피정 닷새째. 아침부터 비가 왔다. 습관처럼 기도실을 찾았다. 고요했다. 문득 빗소리. 내가 빗소리를 들은 게 아니라, 빗소리가 내 귀에 들어왔다. 소리, 소리가 이어지는데 묘했다. 소리의 향연 속에서 침묵은 더욱 깊어졌고, 고요는 더욱 넓어졌다. 빗소리에는 다른 소리도 섞여 있었다. 멀리서 들리는 닭울음 소리, 십자가의 길을 오를 때도 들었던 새소리, 땀방울 식혀주었던 바람소리, 빗방울 세차게 지붕 때리는 소리.
소리들 천지인데 침묵은 더욱 확연하다. 무슨 조화일까. 덩달아 마음은 경건하고 평온하다. 빗소리, 침묵, 기도실의 고요한 경건, 이것들은 하나님과 무슨 관계일까?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실까?
점심 때쯤 되자 아침에 기도실에서 느꼈던 고요와 경건은 사라지고 말았다. 저녁 무렵엔 피정 기간 내내 유지했던 중심을 향한 지향도 흐트러지는 것 같았다. 다시 초조해졌다. 이렇게 산만한 상태로 안식월이 끝나는 건가?
하나님스러움
잠이 안 왔다. 뒤척이다가 설핏 잠이 들었고, 새벽녘에 잠을 깼다. 또 빗소리. 이번 여름엔 비가 참 많이도 오네.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체념적인 기분으로 기도실에 올라갔다. 비는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다. 기도실에 앉아 침묵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기도실은 고요로 가득했다. 빗소리도 가득했다. 소리는 가득한데 침묵은 깊어졌고, 고요는 두터워졌다. 이상했다. 소리가 침묵을 더욱 깊게 하다니. 소리와 침묵은 반대 아닌가. 어쨌거나 침묵과 고요 속에서 듣는 빗소리가 좋았다.
그러다가 묘한 현상을 알아차렸다. 점점 깊어지는 침묵 속에서 나는 경건해지고 있었다. 좀 더 순수해지고 있었고, 진실해지고 있었다. 연민과 사랑도 샘솟고 있었다. 무엇보다 평화로웠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경건, 순수, 진실, 연민, 사랑, 평화는 하나님의 성품임을. 그래, 나는 하나님스러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왜였을까, 라고 묻는데 번개가 쳤다.
아,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스럽게” 하는 모든 것으로 다가오신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스럽게” 하는 모든 것으로 다가오신다!
하염없이 내리는 빗소리, 빗방울 지붕 때리는 소리, 새벽부터 나를 깨우는 새소리로. 산책할 때마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 빽빽하게 들어선 나무들과 숲향기로. 나무들 위로 쏴아 쏟아지는 비, 비, 소리, 소리로. 이 모든 것들이 나를 하나님스러워지게 한다면, 그래서 내가 본질자아로 현존한다면, 하나님은
그것들 안에 계시고,
그것들과 함께 현존하시고,
그것들을 통해 오신다.
나를 둘러싼 경건한 분위기로 현존하신다.
그렇다. 하나님은 언제나 나의 하나님스러움으로, 나의 본질로, 나의 “나다움”으로 현존하신다. 빗소리 안에서 빗소리를 통하여, 새소리 안에서 새소리를 통하여, 바람 안에서 바람을 통하여, 십자가의 길에서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기도실에 있는 감실(龕室)과 기도방석 안에서 그것들을 통하여, 머튼의 일기와 게오르규의 소설을 통하여. 심지어 삶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생을 마감한 수원의 세 모녀에 대한 슬픔과 옥상에서 생을 정리한 보육원 출신 대학생에 대한 비통함을 통하여….
하여 하나님은 내가 있는 곳, 내가 가는 곳, 어디에나 계신다. 나를 경건하게 하고 순수하게 하고 진실하게 하고 정의를 갈망하게 하고 연민을 갖게 하는 모든 것으로, 모든 것 안에서.
하나님 경험에서 중요한 건 나였다. 내 내면의 상태, 내 존재의 분위기였다. 나를 나답게 하고 나의 참자아를 일깨우고 나를 하나님스럽게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얼굴이었다. 하나님은 천의 얼굴을 갖고 계셨다. 아니다, 나를 하나님스럽게 하는 경우의 수는 너무 많았고, 없는 곳이 없었다. 아, 하나님은 만유였고, 만유 안에 계셨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무한의 신비였다.
또 다른 현상. 침묵과 고요 속에서 만물을 통해 경건해진 나에게 만물은 죽어 있는 사물도, 객관적인 분석의 대상도 아니었다. 살아있는 생명이었다. 만물을 통해 나를 새롭게 함으로써 하나님은 그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었다. 아, “만물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딤전 6:13)
이어진 현상. 만물을 존중하고 싶은 마음! 사물들을, 나무를, 꽃을, 새를, 바람을. 그리고 자연을, 사건을, 역사를. 존중의 마음과 함께 사람들이 존엄해 보였고, 내 정신은 숭고해졌다.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을 통하여 나는 아름다워졌고 성스러워졌다. 비로소 성도(聖徒) 곧 “필로칼로스”가 된 것이다.
성도가 된 나는 즐겁게 하산했다. 안식월은 그렇게 끝나가고 있었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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