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시간, 우리 것이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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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65회 작성일 23-03-14 14:20본문
시간,
그러나 우리의 것이 아닌 시간.
(T.S. 엘리엇)
이 표현을 접했을 때 나는 눈이 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맞장구를 쳤다. 맞아, 시간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어! 공기가 우리 것이 아니듯, 바람이 우리 것이 아니듯, 시간은 우리 것이 아니었어! 해와 달과 별, 저녁노을과 밤의 고요와 새벽빛이 우리 것이 아니듯 시간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어!
그런데 우리는 “시간이 돈”이라며 얼마나 시간을 소유하려고 하는지. 누가 “내” 돈을 빼앗으려고 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것처럼 “내” 시간을 방해받으면 얼마나 화를 내는지. 시간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는 것이 악마의 장난임을 C. 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익살스럽게 묘사한다. 삼촌 악마는 조카 악마를 교육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한가한 저녁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연락도 없이 사람이 불쑥 찾아오면 사람들은 쉽게 화를 내. 왜? 자기 시간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 너는, 사람들이 하루 24시간의 합법적인 소유자가 자기들이라고 생각하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해.”
하나님의 시간
시간이 돈이라는 생각, 시간이 “내” 소유라는 생각, 시간을 “내” 멋대로 쓰는 사람이 자유인이라는 생각은 시간의 본성에 무지한 자본주의의 천박한 시간관일 뿐이다. 시간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사물 같은 게 아니다. 삼촌 악마는 조카 악마에게 계속 말한다.
“시간은 순전히 선물로 주어진 것인데, 인간들은 그걸 몰라. 만약 시간이 인간들 것이라면 해나 달도 그들의 소지품이게? 인간이 시간을 창조주의 뜻에 따라 써야 한다는 걸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게 우리 악마들이 할 일이지.”
시간은 해・달・별의 운행으로 생긴 “때에 대한 감각”이다. 그런데 해・달・별은 하나님이 만드셨다. 따라서 시간은 하나님의 것이다! 시간은 결국 선물이며 은총인 것이다.
시간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우리는 시간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은총은 언제나 무상(無償)으로 주어진다. 하나님은 대가를 바라며 은총을 베푸시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하나님의 입장이고, 시간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무상의 은총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은혜를 아는 사람의 도리요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바쳐야 한다면,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하지 않겠는가.
하여, 우리는 일상 속에 하나님을 위한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는 시간, 시간의 주인께 감사하는 시간 말이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무르는 관상적 시간, 이러한 시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사람다워진다. 사람의 도리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관상적 시간에 우리 안에 있는 참자아가 깨어나기 때문이다. 이때 불행에 찌든 사람의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형상)로 빛날 것이고, 열등감에 젖은 페르소나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고후 3:18)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불행은 시간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삶이 불행한 까닭은 시간을 자기 소유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지 못해 은총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시간을 상실한다면 시간은 병들고 만다. 시간이 자기 소유라면 시간을 자기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남는 건 영원과 절연한 분절된 시간, 신성과 접촉하지 않는 경박한 시간뿐! 생기있던 시간은 무료한 시간으로, 충만했던 시간은 공허한 시간으로, 유쾌한 창조의 시간은 지겨운 노동의 시간으로 변질한다. 생존을 위한 일은 놀이와 향유의 가능성을 잃고 노예의 노동으로 전락한다.
시간이 “나의” 소유라면, 시간이 없어도 문제지만 시간이 남아돌아도 문제다. 남아도는 시간은 무료하다. 무료한 시간은 견딜 수 없다. 무료한 시간에 감염되면 영혼은 생기와 빛을 잃고, 삶은 장마철에 눅눅해진 김처럼 맛과 향을 잃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아도는 시간을 어찌해보려고 기를 쓴다. 수많은 계획을 세우고, 일정표를 빼곡히 채운다. 그러다 보면 이젠 시간이 없다.
시간이 “나의” 소유라면 노년은 재앙이다. 남는 시간을 때우는 데는 사람을 만나는 것 만한 것도 없는데 사람을 만나려면 돈이 들고 체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돈과 체력은 점점 시들해진다. 사람을 피하게 되고 관계는 뜸해진다. 남는 시간에 할 일이란 혼자 있는 일뿐, 외로움은 뼛속까지 스며든다. 외로움은 노년을 병들게 하는 가장 무서운 질병이다.
엘리엇의 시간
“시간, 그러나 우리의 것이 아닌 시간.” 이 문장을 나는 『침묵의 대화』를 읽다가 만났다. 이 책에 나오는 “성스러운 등정”이라는 글에서 글쓴이(데이비드 슈타인들-라스트)는 수도원 생활을 묘사하면서 T.S. 엘리엇이 「사중주」에서 묘사한 이 표현을 인용한다. 그 표현의 본래 문맥이 궁금했다. 필독 목록에 있지만 평생 미뤄온 「사중주」를 사서 정독했다.
“시간, 그러나 우리의 것이 아닌 시간”이라는 표현은 「사중주」 제3편, “드라이 샐베이지스”(Dry Salvages)에 나온다. 엘리엇은 신에 대한 이야기로 시를 시작한다.
나는 신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지만, 저 강은
힘센 황톳빛 신이라 생각한다─야생 그대로라 다루기 힘든.
시인은 홍수 때면 범람하는 누런 강물(미시시피강)에서 황톳빛 하나님을 본다.(번역가가 신으로 번역했지만 나는 하나님으로 읽으려고 한다.) 쉬지 않고 흐르고 힘이 세고 다루기 힘든 야생의 강에서 영원하고 전능하고 자유로운 하나님을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사람들은 평소에 하나님을 잊고 살아간다. “황톳빛 신은 잊힌 존재”다. 하지만 “지켜보며 기다”리는 일상의 신비가에게 하나님은 도처에 현존하신다.
신의 리듬은 아기 자장가에 담겨 있었다,
사월 현관 앞마당 무성한 가죽나무에도,
가을 식탁 위 포도알 향기에도,
또 겨울 가스등 밑 저녁모임에도.
강에서 신을 보고, 도처에 현존하는 신을 노래하던 엘리엇은 2연에서 강과 함께 바다를 등장시킨다. “강은 우리 안에, 바다는 우리 사방에 있어…” 강은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이 내면에 현존하신다는 은유다. 바다는 사방에 있다. 광활하고 우주적인 신성(Godhead)의 현존에 대한 은유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행 17:28)
그런 바다에서 엘리엇은 수많은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평소에 듣던 소리와는 “다른” 소리다. 귀에 익은 소리도 타성에 젖은 소리도 아니다. 바다의 목소리는 신의 소리 곧 하나님의 소리였다.
바다는 목소리 많아,
신들이 많아 또 목소리 많아.
바다의 울부짖음과
바다 으르렁댐은, 서로 다른 목소리들
영적 여정이란 무엇일까. 세속의 수많은 목소리에 귀 막고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여정이다. 평소의 신념이나 집단의 확신을 하나님을 통해 증명하려는 종교적 거짓자아의 기획이 아니다. 영적 여정은 자기중심적인 거짓자아를 깨뜨리는 목소리, 세속적인 행복프로그램을 해체하는 목소리, 하나님을 닮은 참자아를 일깨워주는 목소리를 듣는 여정이다. 낡은 것들을 부수기 위해 바다처럼 울부짖고 으르렁대는 아주 낯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여정이다.
엘리엇은 울부짖고 으르렁대는 소리 가운데에서 또 한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배가 암초에 부딪치지 않게 하기 위해 부표(浮標)에서 나는 경고음이다. 이 소리를 들어야 암초를 피할 수 있으므로 이 소리는 구원의 소리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안개 짙게 깔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울리는 경고음에서 엘리엇은 구원의 “종소리”를 듣는다.
또 들썩 뜨는 경고음 부표…
말없는 안개 짓누르는 그 밑에서
딩딩 종소리
그런데 엘리엇은 구원의 종소리를 들으며 돌연 깨닫는다. 시간이 우리의 것이 아님을!
시간, 그러나 우리의 것이 아닌 시간,
그 시간은
크로노미터 시간보다 더 늙은,
근심 걱정하는 여인들이 세는 시간보다 더 늙은 시간
엘리엇이 깨달은 시간은 “크로노미터 시간” 즉 기계로 측정할 수 있고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다. 수많은 걱정과 염려로 오염된 세속의 시간도 아니다. 아, 시간은 하나님의 것이었던 것이다!
자정과 여명 사이, 과거는 온통 환영인 그때에
미래는 미래 없고, 파수꾼 아침을 기다리듯
시간 멈추고 또 시간 전혀 끝나지 않는 그때,
또 치솟는 큰 파도, 이는 태초부터 있고 또 있었던 것,
땡땡
종소리.
인간이 시간을 소유할 때 과거는 온통 환영으로 가득 차고, 미래는 염려로 가득 찬다. 하지만,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듯” 시간의 주인을 바라보는 일상의 신비가는 시간이 인간의 통제와 소유를 벗어난 태초의 현존이었음을 깨닫는다. 시간의 신성한 기원을 깨달으며 엘리엇은 또 한 번 종소리를 듣는다. “땡땡” 구원의 종소리를.
수도원의 시간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잘 아는 사람들이 수도사들이었다. 수도원에서는 대략 세 시간마다 종을 쳤다. 한밤중에(밤기도, vigil), 새벽에(찬과, lauds), 아침에(1시과, prime), 일과를 시작하며(3시과, terce), 정오에(6시과, sext), 오후에(9시과, none), 저녁에(만과, vespers), 잠자리에 들 때(종과, compline)…. 성 베네딕트의 『규칙서』는 일하다가 종소리가 나면 손에서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기도하러 가라고 한다. “심지어 편지를 쓰면서 막 마침표를 찍으려는데 종소리가 울리면 점찍는 것을 중단하고 일어나야 한다.” 수도원의 종소리는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리는 신호였다.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고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하나님의 현존에 머무르면서 수도사들은 정념을 비웠고 상상을 정화했다. 생각과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조율했고, 감정을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시켰다. 매순간이 신성한 현존으로 충만해지는 영적 인풋의 시간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잠들었고, 하나님과 함께 일어났다. 밥도 하나님과 함께 먹었고, 일도 하나님과 함께했다.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신성으로 충만해진 수도사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형됐다. 그들의 얼굴에선 신성의 빛이 빛났고, 그들의 시간에선 경건의 향기가 났다. 일이 지겨울 리 없었다. 기도하며 일할 때(ora et labora) 일은 생존을 위한 버거운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신성한 놀이이기 때문이다.
시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종소리를 “듣는” 시간과 종소리에 “귀 먼” 시간.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면 무료할 틈이 없다.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시간도 없으며, 무료한 시간을 채우느라 시간 없이 바쁜 시간도 없다. 시간은 질서 잡히고, 의미를 잉태한다. 반대로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리는 종소리에 귀 먼 시간은 자유로운 주체의 시간 같지만 방만하게 낭비되며 빠르게 소진된다. 혼란하고 무질서하다. 무료한데 시간이 없고, 일정이 빼곡한데 시간은 공허하다.
종소리를 듣는 시간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 부담스러운 시간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함께 영적 인풋이 이뤄지는 충만한 시간이다. 종소리를 듣는 시간은 세속의 시간을 거룩한 시간으로, 물리적 시간을 “관상적” 시간으로 바꾼다. 인간의 기획과 통제 안에 있는 분절된, 불안한, 부담스러운 시간을 하나님의 현존 안에 있는 영원한, 편안한, 즐거운 시간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리는 종소리는 수도원 담을 넘어간다. 수도원 바깥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도 종소리를 듣고 기도에 동참한다. “기도하며 일하는” 수도사들의 삶은 마을 사람들의 일상으로 스며든다. 사람들은 성화의 여정을 수도사들과 함께 걷는다. 수도사들이 성화되는 만큼 일상도 성화된다. 교회는 이런 곳이어야 한다. 성화의 길을 걷는 성도들이 세속을 성화시키는….
예수님의 시간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을 이렇게 묘사한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 1:14) 그분은 “때” 곧 하나님의 시간을 아시는 분이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도 수시로 한적한 곳을 찾아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럴 때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렀다.”(골 2:9)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은 영적 인풋이 폭포처럼 이루어지는 시간이었다.
생애 최후의 시간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을 마지막으로 관상하신다. 하지만 공생애 기간에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을 관상할 때와는 달랐다. 목소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정도 고요도 없었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기도라기보다 차라리 절규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막 1:14)
보아라, 때가 이르렀다.
인자는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막 14:41)
그 시간에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하나님의 시간이 임박해오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제자들의 시간은 하나님의 시간과 단절되어 있었다. 같은 말씀으로 세 번째 기도하시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자고 쉬어라. 보아라. 때가 이르렀다.”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 속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시간을 아셨고, 그 시간에 자신을 맡기셨다. 이제 죄인들이 그를 잡으러 올 터였다.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라며 자신을 봉헌할 때 이미 예감한 바였다. 예수님은 “넘겨줄 자가 가까이 오는 것”과 함께 도래한 하나님의 시간을 받아들이셨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시간이 되셨다. 예수님은 육화한 하나님의 시간이셨다.
- 이민재
그러나 우리의 것이 아닌 시간.
(T.S. 엘리엇)
이 표현을 접했을 때 나는 눈이 열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나는 맞장구를 쳤다. 맞아, 시간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어! 공기가 우리 것이 아니듯, 바람이 우리 것이 아니듯, 시간은 우리 것이 아니었어! 해와 달과 별, 저녁노을과 밤의 고요와 새벽빛이 우리 것이 아니듯 시간은 우리의 것이 아니었어!
그런데 우리는 “시간이 돈”이라며 얼마나 시간을 소유하려고 하는지. 누가 “내” 돈을 빼앗으려고 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것처럼 “내” 시간을 방해받으면 얼마나 화를 내는지. 시간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려고 하는 것이 악마의 장난임을 C. 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익살스럽게 묘사한다. 삼촌 악마는 조카 악마를 교육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한가한 저녁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연락도 없이 사람이 불쑥 찾아오면 사람들은 쉽게 화를 내. 왜? 자기 시간을 도둑맞았다고 생각하니까. 그러니 너는, 사람들이 하루 24시간의 합법적인 소유자가 자기들이라고 생각하도록 열심히 노력해야 해.”
하나님의 시간
시간이 돈이라는 생각, 시간이 “내” 소유라는 생각, 시간을 “내” 멋대로 쓰는 사람이 자유인이라는 생각은 시간의 본성에 무지한 자본주의의 천박한 시간관일 뿐이다. 시간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사물 같은 게 아니다. 삼촌 악마는 조카 악마에게 계속 말한다.
“시간은 순전히 선물로 주어진 것인데, 인간들은 그걸 몰라. 만약 시간이 인간들 것이라면 해나 달도 그들의 소지품이게? 인간이 시간을 창조주의 뜻에 따라 써야 한다는 걸 깨닫지 못하게 하는 게 우리 악마들이 할 일이지.”
시간은 해・달・별의 운행으로 생긴 “때에 대한 감각”이다. 그런데 해・달・별은 하나님이 만드셨다. 따라서 시간은 하나님의 것이다! 시간은 결국 선물이며 은총인 것이다.
시간이 하나님의 것이라면 우리는 시간을 하나님께 돌려드려야 한다. 물론 하나님의 은총은 언제나 무상(無償)으로 주어진다. 하나님은 대가를 바라며 은총을 베푸시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하나님의 입장이고, 시간을 선물로 받은 우리는 무상의 은총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게 은혜를 아는 사람의 도리요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카이사르의 것을 카이사르에게 바쳐야 한다면,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쳐야 하지 않겠는가.
하여, 우리는 일상 속에 하나님을 위한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총을 기억하는 시간, 시간의 주인께 감사하는 시간 말이다. 하나님의 현존 안에 머무르는 관상적 시간, 이러한 시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사람다워진다. 사람의 도리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관상적 시간에 우리 안에 있는 참자아가 깨어나기 때문이다. 이때 불행에 찌든 사람의 얼굴은 하나님의 얼굴(형상)로 빛날 것이고, 열등감에 젖은 페르소나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고후 3:18)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불행은 시간 때문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삶이 불행한 까닭은 시간을 자기 소유로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갖지 못해 은총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시간을 상실한다면 시간은 병들고 만다. 시간이 자기 소유라면 시간을 자기가 책임져야 하기 때문이다. 남는 건 영원과 절연한 분절된 시간, 신성과 접촉하지 않는 경박한 시간뿐! 생기있던 시간은 무료한 시간으로, 충만했던 시간은 공허한 시간으로, 유쾌한 창조의 시간은 지겨운 노동의 시간으로 변질한다. 생존을 위한 일은 놀이와 향유의 가능성을 잃고 노예의 노동으로 전락한다.
시간이 “나의” 소유라면, 시간이 없어도 문제지만 시간이 남아돌아도 문제다. 남아도는 시간은 무료하다. 무료한 시간은 견딜 수 없다. 무료한 시간에 감염되면 영혼은 생기와 빛을 잃고, 삶은 장마철에 눅눅해진 김처럼 맛과 향을 잃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남아도는 시간을 어찌해보려고 기를 쓴다. 수많은 계획을 세우고, 일정표를 빼곡히 채운다. 그러다 보면 이젠 시간이 없다.
시간이 “나의” 소유라면 노년은 재앙이다. 남는 시간을 때우는 데는 사람을 만나는 것 만한 것도 없는데 사람을 만나려면 돈이 들고 체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돈과 체력은 점점 시들해진다. 사람을 피하게 되고 관계는 뜸해진다. 남는 시간에 할 일이란 혼자 있는 일뿐, 외로움은 뼛속까지 스며든다. 외로움은 노년을 병들게 하는 가장 무서운 질병이다.
엘리엇의 시간
“시간, 그러나 우리의 것이 아닌 시간.” 이 문장을 나는 『침묵의 대화』를 읽다가 만났다. 이 책에 나오는 “성스러운 등정”이라는 글에서 글쓴이(데이비드 슈타인들-라스트)는 수도원 생활을 묘사하면서 T.S. 엘리엇이 「사중주」에서 묘사한 이 표현을 인용한다. 그 표현의 본래 문맥이 궁금했다. 필독 목록에 있지만 평생 미뤄온 「사중주」를 사서 정독했다.
“시간, 그러나 우리의 것이 아닌 시간”이라는 표현은 「사중주」 제3편, “드라이 샐베이지스”(Dry Salvages)에 나온다. 엘리엇은 신에 대한 이야기로 시를 시작한다.
나는 신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많지 않지만, 저 강은
힘센 황톳빛 신이라 생각한다─야생 그대로라 다루기 힘든.
시인은 홍수 때면 범람하는 누런 강물(미시시피강)에서 황톳빛 하나님을 본다.(번역가가 신으로 번역했지만 나는 하나님으로 읽으려고 한다.) 쉬지 않고 흐르고 힘이 세고 다루기 힘든 야생의 강에서 영원하고 전능하고 자유로운 하나님을 연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사람들은 평소에 하나님을 잊고 살아간다. “황톳빛 신은 잊힌 존재”다. 하지만 “지켜보며 기다”리는 일상의 신비가에게 하나님은 도처에 현존하신다.
신의 리듬은 아기 자장가에 담겨 있었다,
사월 현관 앞마당 무성한 가죽나무에도,
가을 식탁 위 포도알 향기에도,
또 겨울 가스등 밑 저녁모임에도.
강에서 신을 보고, 도처에 현존하는 신을 노래하던 엘리엇은 2연에서 강과 함께 바다를 등장시킨다. “강은 우리 안에, 바다는 우리 사방에 있어…” 강은 우리 안에 있다. 하나님이 내면에 현존하신다는 은유다. 바다는 사방에 있다. 광활하고 우주적인 신성(Godhead)의 현존에 대한 은유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는…”(행 17:28)
그런 바다에서 엘리엇은 수많은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평소에 듣던 소리와는 “다른” 소리다. 귀에 익은 소리도 타성에 젖은 소리도 아니다. 바다의 목소리는 신의 소리 곧 하나님의 소리였다.
바다는 목소리 많아,
신들이 많아 또 목소리 많아.
바다의 울부짖음과
바다 으르렁댐은, 서로 다른 목소리들
영적 여정이란 무엇일까. 세속의 수많은 목소리에 귀 막고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여정이다. 평소의 신념이나 집단의 확신을 하나님을 통해 증명하려는 종교적 거짓자아의 기획이 아니다. 영적 여정은 자기중심적인 거짓자아를 깨뜨리는 목소리, 세속적인 행복프로그램을 해체하는 목소리, 하나님을 닮은 참자아를 일깨워주는 목소리를 듣는 여정이다. 낡은 것들을 부수기 위해 바다처럼 울부짖고 으르렁대는 아주 낯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여정이다.
엘리엇은 울부짖고 으르렁대는 소리 가운데에서 또 한 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배가 암초에 부딪치지 않게 하기 위해 부표(浮標)에서 나는 경고음이다. 이 소리를 들어야 암초를 피할 수 있으므로 이 소리는 구원의 소리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안개 짙게 깔려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울리는 경고음에서 엘리엇은 구원의 “종소리”를 듣는다.
또 들썩 뜨는 경고음 부표…
말없는 안개 짓누르는 그 밑에서
딩딩 종소리
그런데 엘리엇은 구원의 종소리를 들으며 돌연 깨닫는다. 시간이 우리의 것이 아님을!
시간, 그러나 우리의 것이 아닌 시간,
그 시간은
크로노미터 시간보다 더 늙은,
근심 걱정하는 여인들이 세는 시간보다 더 늙은 시간
엘리엇이 깨달은 시간은 “크로노미터 시간” 즉 기계로 측정할 수 있고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물리적인 시간이 아니다. 수많은 걱정과 염려로 오염된 세속의 시간도 아니다. 아, 시간은 하나님의 것이었던 것이다!
자정과 여명 사이, 과거는 온통 환영인 그때에
미래는 미래 없고, 파수꾼 아침을 기다리듯
시간 멈추고 또 시간 전혀 끝나지 않는 그때,
또 치솟는 큰 파도, 이는 태초부터 있고 또 있었던 것,
땡땡
종소리.
인간이 시간을 소유할 때 과거는 온통 환영으로 가득 차고, 미래는 염려로 가득 찬다. 하지만,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리듯” 시간의 주인을 바라보는 일상의 신비가는 시간이 인간의 통제와 소유를 벗어난 태초의 현존이었음을 깨닫는다. 시간의 신성한 기원을 깨달으며 엘리엇은 또 한 번 종소리를 듣는다. “땡땡” 구원의 종소리를.
수도원의 시간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잘 아는 사람들이 수도사들이었다. 수도원에서는 대략 세 시간마다 종을 쳤다. 한밤중에(밤기도, vigil), 새벽에(찬과, lauds), 아침에(1시과, prime), 일과를 시작하며(3시과, terce), 정오에(6시과, sext), 오후에(9시과, none), 저녁에(만과, vespers), 잠자리에 들 때(종과, compline)…. 성 베네딕트의 『규칙서』는 일하다가 종소리가 나면 손에서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기도하러 가라고 한다. “심지어 편지를 쓰면서 막 마침표를 찍으려는데 종소리가 울리면 점찍는 것을 중단하고 일어나야 한다.” 수도원의 종소리는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리는 신호였다.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기억하고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하나님의 현존에 머무르면서 수도사들은 정념을 비웠고 상상을 정화했다. 생각과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조율했고, 감정을 하나님의 마음에 일치시켰다. 매순간이 신성한 현존으로 충만해지는 영적 인풋의 시간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잠들었고, 하나님과 함께 일어났다. 밥도 하나님과 함께 먹었고, 일도 하나님과 함께했다. 하나님의 시간에 하나님의 신성으로 충만해진 수도사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형됐다. 그들의 얼굴에선 신성의 빛이 빛났고, 그들의 시간에선 경건의 향기가 났다. 일이 지겨울 리 없었다. 기도하며 일할 때(ora et labora) 일은 생존을 위한 버거운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에 동참하는 신성한 놀이이기 때문이다.
시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종소리를 “듣는” 시간과 종소리에 “귀 먼” 시간.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리는 종소리를 들으면 무료할 틈이 없다. 무의미하게 소모되는 시간도 없으며, 무료한 시간을 채우느라 시간 없이 바쁜 시간도 없다. 시간은 질서 잡히고, 의미를 잉태한다. 반대로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리는 종소리에 귀 먼 시간은 자유로운 주체의 시간 같지만 방만하게 낭비되며 빠르게 소진된다. 혼란하고 무질서하다. 무료한데 시간이 없고, 일정이 빼곡한데 시간은 공허하다.
종소리를 듣는 시간은 “내가” 책임져야 하는 부담스러운 시간이 아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감사와 함께 영적 인풋이 이뤄지는 충만한 시간이다. 종소리를 듣는 시간은 세속의 시간을 거룩한 시간으로, 물리적 시간을 “관상적” 시간으로 바꾼다. 인간의 기획과 통제 안에 있는 분절된, 불안한, 부담스러운 시간을 하나님의 현존 안에 있는 영원한, 편안한, 즐거운 시간으로 변형시키는 것이다.
시간이 하나님의 것임을 알리는 종소리는 수도원 담을 넘어간다. 수도원 바깥에서 일하고 있던 사람들도 종소리를 듣고 기도에 동참한다. “기도하며 일하는” 수도사들의 삶은 마을 사람들의 일상으로 스며든다. 사람들은 성화의 여정을 수도사들과 함께 걷는다. 수도사들이 성화되는 만큼 일상도 성화된다. 교회는 이런 곳이어야 한다. 성화의 길을 걷는 성도들이 세속을 성화시키는….
예수님의 시간
마가복음은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을 이렇게 묘사한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막 1:14) 그분은 “때” 곧 하나님의 시간을 아시는 분이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에도 수시로 한적한 곳을 찾아 하나님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럴 때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렀다.”(골 2:9)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은 영적 인풋이 폭포처럼 이루어지는 시간이었다.
생애 최후의 시간에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나님을 마지막으로 관상하신다. 하지만 공생애 기간에 한적한 곳에서 하나님을 관상할 때와는 달랐다. 목소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평정도 고요도 없었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기도라기보다 차라리 절규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침묵하셨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막 1:14)
보아라, 때가 이르렀다.
인자는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막 14:41)
그 시간에 제자들은 자고 있었다. 하나님의 시간이 임박해오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제자들의 시간은 하나님의 시간과 단절되어 있었다. 같은 말씀으로 세 번째 기도하시고 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자고 쉬어라. 보아라. 때가 이르렀다.”
하나님의 침묵과 부재 속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시간을 아셨고, 그 시간에 자신을 맡기셨다. 이제 죄인들이 그를 잡으러 올 터였다.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라며 자신을 봉헌할 때 이미 예감한 바였다. 예수님은 “넘겨줄 자가 가까이 오는 것”과 함께 도래한 하나님의 시간을 받아들이셨다. 그럼으로써 마침내 하나님의 시간이 되셨다. 예수님은 육화한 하나님의 시간이셨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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