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테오그노스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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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64회 작성일 23-03-14 14:17본문
“모태에서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시 139:6)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알았고…”
(렘 1:5)
“모태에서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시인은 하나님이 모태에서부터 자기를 보고 계셨다고 한다. 그것도 “형질이 갖추어지기 전부터.” 하나님이 모태에서 보고 계셨던 나는 누구, 또는 무엇일까? “형질”이 갖춰지기 전 무형의 상태에 있는 “나”에게서 하나님은 무얼 보고 계셨을까?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실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알았다.” 예레미야가 모태에서 잉태되기도 전에 하나님이 알고 있었던 예레미야는 어떤 존재였을까? 예레미야가 아는 예레미야 자신과 같은 존재였을까 다른 존재였을까?
내려가라
그러면 나는 누구일까?
사람들은 나의 겉모습을 보면서 나를 안다고 생각할 것이다. 외모, 학벌, 이력, 경력, 직업, 역할을 보면서…. 호감을 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겉모습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나에겐 숨겨진 부분이 더 많다. 어쩌다 나의 이기와 불순을 알면 호감은 금세 혐오로 바뀔 것이다. 하지만 숨겨진 부분도 나의 전부는 아니다.
내 깊은 곳엔 또 다른 내가 있다. 거짓보다는 진실을, 불순보다는 순수를, 미움보다는 사랑을 열망하는 참자아가 있다. 그것이 바로 나의 형질이 모태에서 갖춰지기도 전에 하나님이 보고 계셨던 나, 모태에서 잉태되기도 전에 하나님이 알고 계셨던 나, 그리고 지금까지도 줄곧 보고 아시는 나 아닐까?
사람들이 나의 겉모습을 볼 때 하나님은 나의 심층을 보신다. 사람들이 나의 숨겨진 부분에 흥미를 가질 때 하나님은 나의 참자아에 관심을 가지신다. 이런 생각을 하면 위로가 된다. 열등감에 시달리다가도 존재의 용기를 얻는다. 화를 내다가도 너그러워진다. 미워하다가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이 보시는 나를 보고, 하나님이 아시는 나를 알아차릴 때 나는 새로워진다. 삶은 행복한 운명을 시작한다. 하여, 나는 위축될 때마다, 불운이 예감될 때마다 스스로 속삭인다.
내려가라 더 아래로, 다만 내려가라
영원한 고독의 세계 속으로,
세상 아닌 세상, 그러나 세상 아닌 그것,
내면의 어둠, 박탈
또 일체 소유 없는 궁핍,
감각이 마른 세계,
공상을 비운 세계,
정신이 멈춘 세계로
(T.S. 엘리엇, 「사중주」)
그곳에서 나는 새로워진다.
테오그노스토스
지난 안식월 기간에 비르질 게오르규의 『25시』를 읽었다. 신학교 때 읽었지만 『25』시와 함께 게오르규의 인생 삼부작인 『25시에서 영원으로』와 『내 이름은 왜 비르질인가』의 여운이 가시질 않아 다시 읽었다.
『25시』를 쓰기 전 게오르규는 조국이 소련군에 점령당하자 아내와 함께 독일로 망명한다. 종전이 됐지만 미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은 루마니아가 적성 국가라는 이유만으로 게오르규를 2년간 수용소에 가둔다. 독일이나 소련, 미국은 이념이 달랐지만, 과학기술을 맹목적으로 신봉한다는 점에서 똑같았으며, 야만성과 비인간성도 똑같았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서구문명을 게오르규는 “25시”라는 상징으로 고발한다.
25시는 희망을 상실한 시간이다. “인류의 모든 구원의 시도가 무효가 된 시간”이며, “메시야가 와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시간”이다. 최후의 시간에서 한 시간이나 더 지난 시간인 25시의 늪에서 게오르규는 절규한다. “주님, 제가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지금은 25시, 그야말로 구원을 받기에도, 죽기에도, 살아가기에도 나무 늦은 시간입니다. 실로 모든 것이 너무 늦었습니다.”
하지만 게오르규는 그리스정교회 사제였던 아버지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다. 그 희망은 “영원으로부터” 오는 희망이었다. 영원은 물리적 시간뿐 아니라 절망의 시간인 “25시”마저 초월한 신의 시간이다. 그는 새로운 희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좌로부터 오는 희망이건 우로부터 오는 희망이건 모든 희망을 거부하며, 내 희망, 내 백성의 희망을 저 높은 곳, 저 위에 둔다.”(『25시에서 영원으로』)
게오르규가 발견한 영원으로부터 오는 희망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었다. 그 희망을 아버지가 구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거룩한 사제인 나의 아버지에 대한 찬양시”라는 부제가 붙은 『25시에서 영원으로』에서 비르질은 아버지를 성스러운 이콘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콘이란 “형상”image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이콘은 신적이며 동시에 인간적인 형상이다. 천상에도 속하고 지상에도 속하는 형상이다. 이콘이 표상하는 성인들은 육신을 입었지만 물질을 벗어난 천사들처럼 산 사람이다. 이콘의 얼굴은 흙에 속한 것, 먼지로 돌아갈 것, 땅에 속한 물질적인 것들이 벗겨지고, 가벼워지고, 정화된 얼굴이다. 이콘 안에서 사람의 얼굴은 순결해지고 비로소 인간의 원형을 되찾는다. 게오르규는 아버지에게서 그런 얼굴을 본다.
이콘은 신적이며 동시에 인간적인 형상이다. 이콘의 얼굴은 흙에 속한 것, 먼지로 돌아갈 것, 땅에 속한 물질적인 것들이 벗겨지고, 가벼워지고, 정화된 얼굴이다. 이콘 안에서 사람의 얼굴은 순결해지고 비로소 인간의 원형을 되찾는다.
그러면 게오르규가 아버지에게서 보았던 새로운 희망의 얼굴은 무엇이었을까? 루마니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때였다. 길거리마다 유랑민들이 넘쳤다. 탈영병, 낙오병, 탈옥수 등 온갖 종류의 쫓기는 사람들이 개처럼 길거리를 헤맸다.
어느 날, 게오르규의 고향 마을 한복판에서 한 젊은이가 죽은 채 발견됐다. 그의 몸은 추위에 잔뜩 웅크린 채 굳어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젊은이는 양복바지에 셔츠만 입고 있었다. 살은 희었고 수염은 적갈색에 잘 정돈돼 있었다. 도시풍의 젊은이였다. 사람들은 시신을 개나 고양이가 훼손하지 못하도록 성당으로 옮겼다.
사제였던 아버지는 이웃 마을에 있는 보안관들에게 낯선 젊은이의 죽음을 알렸고, 보안관들을 기다리는 동안 시신의 머리맡 양쪽에 초 두 개를 켰다. 젊은이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생전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달라고, 낙원에서 성인들과 함께 안식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오후에 도착한 보안관들은 죽은 젊은이의 매장을 허락했다.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은 최대의 경의를 표하며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러주었다. 하지만 그건 위험한 일이었다. 비기독교인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러주는 것은 교회법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사제관 앞마당에 있는 무덤들을 바라보며 자문했다. ‘무엇이 군인의 뼈고, 무엇이 장군의 뼈이며, 무엇이 의로운 사람의 뼈고 또 무엇이 죄인의 뼈란 말인가. 모두가 똑같은 뼈 아닌가.’
아버지는 최고의 예를 갖춰 장례식을 치른 다음, 젊은이의 무덤에는 아름다운 나무 십자가를 세우고 비문을 써넣었다. “우리 마을에서 사망한 테오그노스토스, 여기 잠들다.” 테오그노스토스Théognostos, “하나님이 알고 있는 사람”, “오직 하나님에게만 알려진 사람!” 아버지는 그를 이방인으로 보지 않았다. 낙오병이나 탈영병이나 탈옥수일지도 몰랐지만, “하나님이 알고 있는 사람”으로 보았다. 겉모양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으며, 껍데기가 아니라 본질자아(참자아)를 보았던 것이다.
마음은 글을 모른다
이 일 때문에 아버지는 큰 곤경에 빠졌다. 그 젊은이가 유복한 유대인의 아들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젊은이의 아버지와 정교회 당국 양쪽으로부터 고발을 당했다. 정교회 당국은 이교도를 기독교식으로 장례 치렀으니 교회법을 위반했다고 고발했고, 젊은이의 아버지는 유대인을 기독교식으로 치렀으니 시신을 모독했다고 고발했다.
게오르규는 정교회의 교회법과 유대교의 율법을 어긴 아버지가 그야말로 “아버지의 심정으로” 장례를 치러주었음을 알았다. 아버지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함으로써”(엡 4:15) 예수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법의 사람이기 전에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법과 교리를 넘어선 아버지의 사랑을 게오르규는 이렇게 요약한다.
“인간의 마음은 글을 통해 배우지 않는다. 마음은 언제나 글을 모른다.”
사랑은 글이, 율법이나 교리나 이념이 가르쳐주지 않는다. 즉 머리가 가르쳐주지 않는다. 글을 모르는 마음은 율법이나 교리를 모른다. 그저 사랑이 시키는 일을 할 뿐이다. 사랑은 머리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 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때로는 이단으로 정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이방인, 나그네, 성소수자, 타종교인들을 어떻게 “테오그노스토스”(하나님이 알고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겠는가? 율법과 교리가 혐오의 대상으로 규정한 사람들을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행색이 초라하고 위축된 사람들을 “하나님이 알고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눈이 열릴까? 어떻게 해야 혐오와 배제의 대상으로 분류된 사람들을 “테오그노스토스”로 존중하는 눈이 열릴까?
아마 관상수련을 꾸준히 해온 사람들은 알 것이다. 깊은 침묵의 고요함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어떤 눈이 열리고 있음을! 그 눈은 수행자 내면의 눈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눈이기도 하다. 이 눈은 똑같은 눈이다. 겉모습이 아니라 참자아를 보기 때문이며, 혐오의 대상으로 분류된 사람들조차 테오그노스토스로 보기 때문이다.
- 이민재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시 139:6)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알았고…”
(렘 1:5)
“모태에서 나의 형질이 갖추어지기도 전부터, 주님께서는 나를 보고 계셨으며…” 시인은 하나님이 모태에서부터 자기를 보고 계셨다고 한다. 그것도 “형질이 갖추어지기 전부터.” 하나님이 모태에서 보고 계셨던 나는 누구, 또는 무엇일까? “형질”이 갖춰지기 전 무형의 상태에 있는 “나”에게서 하나님은 무얼 보고 계셨을까?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부르실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내가 너를 모태에서 짓기도 전에 너를 알았다.” 예레미야가 모태에서 잉태되기도 전에 하나님이 알고 있었던 예레미야는 어떤 존재였을까? 예레미야가 아는 예레미야 자신과 같은 존재였을까 다른 존재였을까?
내려가라
그러면 나는 누구일까?
사람들은 나의 겉모습을 보면서 나를 안다고 생각할 것이다. 외모, 학벌, 이력, 경력, 직업, 역할을 보면서…. 호감을 가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겉모습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나에겐 숨겨진 부분이 더 많다. 어쩌다 나의 이기와 불순을 알면 호감은 금세 혐오로 바뀔 것이다. 하지만 숨겨진 부분도 나의 전부는 아니다.
내 깊은 곳엔 또 다른 내가 있다. 거짓보다는 진실을, 불순보다는 순수를, 미움보다는 사랑을 열망하는 참자아가 있다. 그것이 바로 나의 형질이 모태에서 갖춰지기도 전에 하나님이 보고 계셨던 나, 모태에서 잉태되기도 전에 하나님이 알고 계셨던 나, 그리고 지금까지도 줄곧 보고 아시는 나 아닐까?
사람들이 나의 겉모습을 볼 때 하나님은 나의 심층을 보신다. 사람들이 나의 숨겨진 부분에 흥미를 가질 때 하나님은 나의 참자아에 관심을 가지신다. 이런 생각을 하면 위로가 된다. 열등감에 시달리다가도 존재의 용기를 얻는다. 화를 내다가도 너그러워진다. 미워하다가도 사랑하게 된다.
하나님이 보시는 나를 보고, 하나님이 아시는 나를 알아차릴 때 나는 새로워진다. 삶은 행복한 운명을 시작한다. 하여, 나는 위축될 때마다, 불운이 예감될 때마다 스스로 속삭인다.
내려가라 더 아래로, 다만 내려가라
영원한 고독의 세계 속으로,
세상 아닌 세상, 그러나 세상 아닌 그것,
내면의 어둠, 박탈
또 일체 소유 없는 궁핍,
감각이 마른 세계,
공상을 비운 세계,
정신이 멈춘 세계로
(T.S. 엘리엇, 「사중주」)
그곳에서 나는 새로워진다.
테오그노스토스
지난 안식월 기간에 비르질 게오르규의 『25시』를 읽었다. 신학교 때 읽었지만 『25』시와 함께 게오르규의 인생 삼부작인 『25시에서 영원으로』와 『내 이름은 왜 비르질인가』의 여운이 가시질 않아 다시 읽었다.
『25시』를 쓰기 전 게오르규는 조국이 소련군에 점령당하자 아내와 함께 독일로 망명한다. 종전이 됐지만 미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은 루마니아가 적성 국가라는 이유만으로 게오르규를 2년간 수용소에 가둔다. 독일이나 소련, 미국은 이념이 달랐지만, 과학기술을 맹목적으로 신봉한다는 점에서 똑같았으며, 야만성과 비인간성도 똑같았다. 더 이상 희망이 없는 서구문명을 게오르규는 “25시”라는 상징으로 고발한다.
25시는 희망을 상실한 시간이다. “인류의 모든 구원의 시도가 무효가 된 시간”이며, “메시야가 와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시간”이다. 최후의 시간에서 한 시간이나 더 지난 시간인 25시의 늪에서 게오르규는 절규한다. “주님, 제가 죽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지금은 25시, 그야말로 구원을 받기에도, 죽기에도, 살아가기에도 나무 늦은 시간입니다. 실로 모든 것이 너무 늦었습니다.”
하지만 게오르규는 그리스정교회 사제였던 아버지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한다. 그 희망은 “영원으로부터” 오는 희망이었다. 영원은 물리적 시간뿐 아니라 절망의 시간인 “25시”마저 초월한 신의 시간이다. 그는 새로운 희망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눈물을 닦으며, 좌로부터 오는 희망이건 우로부터 오는 희망이건 모든 희망을 거부하며, 내 희망, 내 백성의 희망을 저 높은 곳, 저 위에 둔다.”(『25시에서 영원으로』)
게오르규가 발견한 영원으로부터 오는 희망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었다. 그 희망을 아버지가 구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거룩한 사제인 나의 아버지에 대한 찬양시”라는 부제가 붙은 『25시에서 영원으로』에서 비르질은 아버지를 성스러운 이콘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콘이란 “형상”image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이콘은 신적이며 동시에 인간적인 형상이다. 천상에도 속하고 지상에도 속하는 형상이다. 이콘이 표상하는 성인들은 육신을 입었지만 물질을 벗어난 천사들처럼 산 사람이다. 이콘의 얼굴은 흙에 속한 것, 먼지로 돌아갈 것, 땅에 속한 물질적인 것들이 벗겨지고, 가벼워지고, 정화된 얼굴이다. 이콘 안에서 사람의 얼굴은 순결해지고 비로소 인간의 원형을 되찾는다. 게오르규는 아버지에게서 그런 얼굴을 본다.
이콘은 신적이며 동시에 인간적인 형상이다. 이콘의 얼굴은 흙에 속한 것, 먼지로 돌아갈 것, 땅에 속한 물질적인 것들이 벗겨지고, 가벼워지고, 정화된 얼굴이다. 이콘 안에서 사람의 얼굴은 순결해지고 비로소 인간의 원형을 되찾는다.
그러면 게오르규가 아버지에게서 보았던 새로운 희망의 얼굴은 무엇이었을까? 루마니아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때였다. 길거리마다 유랑민들이 넘쳤다. 탈영병, 낙오병, 탈옥수 등 온갖 종류의 쫓기는 사람들이 개처럼 길거리를 헤맸다.
어느 날, 게오르규의 고향 마을 한복판에서 한 젊은이가 죽은 채 발견됐다. 그의 몸은 추위에 잔뜩 웅크린 채 굳어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젊은이는 양복바지에 셔츠만 입고 있었다. 살은 희었고 수염은 적갈색에 잘 정돈돼 있었다. 도시풍의 젊은이였다. 사람들은 시신을 개나 고양이가 훼손하지 못하도록 성당으로 옮겼다.
사제였던 아버지는 이웃 마을에 있는 보안관들에게 낯선 젊은이의 죽음을 알렸고, 보안관들을 기다리는 동안 시신의 머리맡 양쪽에 초 두 개를 켰다. 젊은이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생전에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달라고, 낙원에서 성인들과 함께 안식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오후에 도착한 보안관들은 죽은 젊은이의 매장을 허락했다. 아버지와 마을 사람들은 최대의 경의를 표하며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러주었다. 하지만 그건 위험한 일이었다. 비기독교인일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러주는 것은 교회법에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사제관 앞마당에 있는 무덤들을 바라보며 자문했다. ‘무엇이 군인의 뼈고, 무엇이 장군의 뼈이며, 무엇이 의로운 사람의 뼈고 또 무엇이 죄인의 뼈란 말인가. 모두가 똑같은 뼈 아닌가.’
아버지는 최고의 예를 갖춰 장례식을 치른 다음, 젊은이의 무덤에는 아름다운 나무 십자가를 세우고 비문을 써넣었다. “우리 마을에서 사망한 테오그노스토스, 여기 잠들다.” 테오그노스토스Théognostos, “하나님이 알고 있는 사람”, “오직 하나님에게만 알려진 사람!” 아버지는 그를 이방인으로 보지 않았다. 낙오병이나 탈영병이나 탈옥수일지도 몰랐지만, “하나님이 알고 있는 사람”으로 보았다. 겉모양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형상을 보았으며, 껍데기가 아니라 본질자아(참자아)를 보았던 것이다.
마음은 글을 모른다
이 일 때문에 아버지는 큰 곤경에 빠졌다. 그 젊은이가 유복한 유대인의 아들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졌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젊은이의 아버지와 정교회 당국 양쪽으로부터 고발을 당했다. 정교회 당국은 이교도를 기독교식으로 장례 치렀으니 교회법을 위반했다고 고발했고, 젊은이의 아버지는 유대인을 기독교식으로 치렀으니 시신을 모독했다고 고발했다.
게오르규는 정교회의 교회법과 유대교의 율법을 어긴 아버지가 그야말로 “아버지의 심정으로” 장례를 치러주었음을 알았다. 아버지는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함으로써”(엡 4:15) 예수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법의 사람이기 전에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법과 교리를 넘어선 아버지의 사랑을 게오르규는 이렇게 요약한다.
“인간의 마음은 글을 통해 배우지 않는다. 마음은 언제나 글을 모른다.”
사랑은 글이, 율법이나 교리나 이념이 가르쳐주지 않는다. 즉 머리가 가르쳐주지 않는다. 글을 모르는 마음은 율법이나 교리를 모른다. 그저 사랑이 시키는 일을 할 뿐이다. 사랑은 머리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 하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기란 쉽지 않다. 때로는 이단으로 정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이방인, 나그네, 성소수자, 타종교인들을 어떻게 “테오그노스토스”(하나님이 알고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겠는가? 율법과 교리가 혐오의 대상으로 규정한 사람들을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행색이 초라하고 위축된 사람들을 “하나님이 알고 있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눈이 열릴까? 어떻게 해야 혐오와 배제의 대상으로 분류된 사람들을 “테오그노스토스”로 존중하는 눈이 열릴까?
아마 관상수련을 꾸준히 해온 사람들은 알 것이다. 깊은 침묵의 고요함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때 어떤 눈이 열리고 있음을! 그 눈은 수행자 내면의 눈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눈이기도 하다. 이 눈은 똑같은 눈이다. 겉모습이 아니라 참자아를 보기 때문이며, 혐오의 대상으로 분류된 사람들조차 테오그노스토스로 보기 때문이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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