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사랑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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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234회 작성일 24-10-09 13:07본문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마 19:14, 21)
지난주 〈수요 성경공부〉 때 마태복음 19장을 공부했다. 19장에는 이혼에 관한 이야기, 어린이를 축복하신 이야기, 부자 청년 이야기가 나온다. 오늘 성서일과 복음서(마가복음 10장)와 변행본문이다. “하늘나라는 어린이들의 것이다”를 설명하면서 성경공부를 인도한 강 목사님은 어린이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소개했다.(강 목사님은 현재 미국 UMC에서 목회하고 계시며, 줌으로 은명교회 수요성경공부를 인도하신다.) 어린이는,
1. 큰사람이 되려는 욕심이 없다.
2. 몸집이 작아도 열등감이 없다.
3. 자기를 맘껏 사랑하며, 의존할 줄 안다.
4. 지금 여기에 머무는 천부적 능력이 있다.
5. 거짓자아에 부자연스럽고, 참자아에 자연스럽다.
성경공부를 끝내면서 나눔의 시간을 가졌는데 강 목사님은 어린이의 특징에 또 뭐가 있겠냐고 물었다. 길벗들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어린이는 관념의 세계에 살지 않고,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고 대답했다.
지난주 주일예배 끝나고 교육실에 갔는데 루오가 놀고 있었다. 나를 보고 달려오다가 멈칫 서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삐, 머리 짤랐어?” 그날 내 머리 모양의 변화를 알아채고 표현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루오는 그날 그 순간의 내 모습, 나의 현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았다.
나는 매일 달라지고, 변하고, 새로워진다. 하지만 그 새로움과 변화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드물다. 사람들은 매일 새롭게 창조되는 나를 보기보다 목사라는 신분(페르소나)을 먼저 본다. 평생 함께 사는 부부도 상대방의 현실 존재를 보지 않는다. 과거에 형성된 이미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관계가 대부분 그렇게 이루어진다. 매일 새롭게 형성되는 현실 존재를 보기보다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으로 평가하고 판단한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김 집사는 이렇고, 이 권사는 저렇고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현실 존재를 보지 않는다. 과거에 형성된 고정된 이미지로 평가한다. 현실 존재를 보지 않으면 인간관계가 쉽게 망가진다. 사람의 소중함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현실성이 부족할 때 삶은 공허해진다.
부자 청년
신앙도 관념적일 때가 많다. 천국, 영생, 부활 같은 구원의 언어들이 그렇다. 천국은 예수쟁이들이 죽어서 가는 저세상이고, 영생은 죽은 다음에 무한히 이어지는 시간의 연장이며, 부활은 종말 때 이뤄질 시체의 깜짝 소생 정도로 생각한다. 현재성도 현실성도 없다. 그래서 구원의 언어들은 공허하다. 교리들도 그렇다. 교리가 아무리 정교해도, 그것이 형성될 때의 현실성이 사라지면 생명력을 상실한다. 그래서 교리는 너무 자주 신자들을 추상성과 가상현실에 유폐(幽閉)시킨다.
관념적인 신앙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갈망했던 부자 청년이다. 부자 청년 이야기가 하늘 나라는 어린이들의 것이라는 말씀 다음에 나오는 게 의미심장하다. 마태는 어린이와 부자 청년 이야기를 나란히 배치하면서 어린이의 현실성과 부자 청년의 관념성을 명료하게 대조시킨다. 청년이 예수께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청년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청년은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는 것을 이웃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무엇 “하지 않는” 것은 소극적 윤리이며, 관념적 윤리다. 그래서 현실성과 구체성이 부족하다. 이런 윤리는 쉽다. 적극적이며 현실적인 행위가 없어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소극적이며 관념적인 윤리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림의 떡이 허기를 채우지 못하듯이, 관념에 머무는 사랑은 사랑의 욕구를 채워주지 않는다.
사랑이 구체적이며 현실적이며 실질적이어야 함을 예수님은 분명하게 알고 계셨다. 그래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서 청년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마 19:21)
소유를 파는 것은 구체적인 현실이다. 소유를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은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이웃 사랑이다. 모든 사랑은 이처럼 현실적이며 구체적이며 실질적이다.
그런데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사랑은 아프다. 자기 소유를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기가 소중하게 지켜왔던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질뿐만 아니다. 사랑을 하려면 에고를 깨고, 거짓자아를 해체하고, 의식의 틀을 바꿔야 한다. 그래서 사랑은 아프다. 하나님의 사랑은 특히 그렇다. 인간의 사랑이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해 아프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중심성을 깨뜨리기 때문에 아프다.
인간의 사랑이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해 아프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중심성을 깨뜨리기 때문에 아프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지난 주 한 길벗이 성경 구절을 보내왔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 다 진실하고
그 모든 업적에는 사랑이 담겨 있다.
주님이 하시는 그 모든 일은 의롭다.
주님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신다.(시 145:13b, 17)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묵상하는데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좋은 시절도 있었고 고통스러운 시절도 있었다. 유년 시절은 행복했다. 하지만 사춘기를 지나면서 삶은 고통스러웠다. 진학에 여러 번 실패했고, 원하던 관계를 의지와 상관없이 끝내야만 했던 경우도 많았다. 고통은 이십 대 삼십 대를 비껴가지 않았다.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고통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요즘은 문득문득 깨닫는다. 주님이 이루신 업적에는 사랑이 담겨 있음을, 하나님은 내 삶에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셨음을.
심지어 실패와 고통 속에서도 그랬다. 아니 그때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강력하게 사랑으로 일하셨다.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나를 새로운 존재로 만들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아프다. “변형의 아픔”이라고나 할까. 이 아픔은 새가 알을 깨고 나올 때 겪어야 하는 아픔이며, 번데기가 고치를 벗고 나비가 될 때 겪어야 하는 아픔이다.
완전한 실패란 없다. 실패의 경험은 쓰리고 아프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들을 가르쳐준다.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생의 이면을 보게 하고, 인간의 심층을 보게 하고, 존재의 깊이를 보게 하기 때문이다. 성공의 관점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포함한 전체의 관점으로 삶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패의 경험은 사람과 삶을 일면적으로 보지 않고 통합적으로 보게 한다. 부분적으로 부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게 한다.
완전한 실패란 없다. 실패의 경험은 쓰리고 아프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들을 가르쳐준다.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생의 이면을 보게 하고, 존재의 심연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성공의 관점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포함한 전체의 관점으로 삶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요즘 내 삶과 신앙과 목회를 가능하게 하는 지혜는 실패의 고통을 통해 배운 것들이다. 마음과 영, 거짓자아와 참자아를 분별하는 것을 비롯하여, 무심 예수 참자아의 원형 그리스도 등이 그렇다. 관상적 영성을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배웠다. 하나님은 실패의 고통을 통해 그 어떤 스승보다 지혜롭게 나를 가르치셨고,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다. 아, 하나님은 사랑으로 일하신다!
그러나 때로 그 사랑은 아프다. 하나님은 나를 좀 더 나은 존재로 만들고 싶어하시기 때문에 아프다.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에 맞추려면 현재의 내가 변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변하려고 하지 않는다. 삶의 구습은 새로움의 낯섦을 싫어한다. 하여, 나는 고집스럽고 완강하게 에고의 관성에 안주하려고 한다. 내가 완강하게 버틸수록 하나님의 사랑의 압력은 거세진다. 스스로 알아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지 않으면 하나님이 직접 일하시기 시작한다. 거짓자아를 벗기는 작업을 시작하신다. 에고를 깨뜨리는 작업을 시작하신다. 이 과정에서 실패 경험이 뒤따른다. 병들기도 한다. 그 과정이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이 사실은 하나님이 사랑으로 일하시는 징표다.
사실 가장 아프신 분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완전히 깨뜨리신 하나님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본다. 십자가의 처참한 실패와 처절한 고통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져야 하는 실패와 고난의 십자가 속에서 사랑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사랑으로 함께 깨지고 함께 상처 입은 하나님을 만난다. 그러면서 차츰 무심 예수 참자아의 원형 그리스도를 닮아간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일하신다. 지금 벗들을 아프게 하고 괴롭히는 것들, 화나게 하고 속상하게 하는 상황을 곰곰이 들여다보라. 그 속에서 하나님은 사랑으로 일하신다. 누구도 알 수 없고 벗들 자신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으로 일하신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잘 받들어라. 그리고 감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의 도움을 구하라.
하나님의 사랑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상현실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구체적이며 현실적이다. 거짓자아를 찍어버려야 하고, 의식의 틀을 깨뜨려야 하고,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하고,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실패를 경험하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을 통해 우리는 성장한다. 부분에서 전체로 시야가 넓어진다. 성정은 온유하고 겸손해진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 마침내 어린아이 같이 되어 지금 여기에서 영생을 맛보며 천국을 산다.
- 이민재
하늘나라는 이런 어린이들의 것이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마 19:14, 21)
지난주 〈수요 성경공부〉 때 마태복음 19장을 공부했다. 19장에는 이혼에 관한 이야기, 어린이를 축복하신 이야기, 부자 청년 이야기가 나온다. 오늘 성서일과 복음서(마가복음 10장)와 변행본문이다. “하늘나라는 어린이들의 것이다”를 설명하면서 성경공부를 인도한 강 목사님은 어린이의 특징을 다섯 가지로 소개했다.(강 목사님은 현재 미국 UMC에서 목회하고 계시며, 줌으로 은명교회 수요성경공부를 인도하신다.) 어린이는,
1. 큰사람이 되려는 욕심이 없다.
2. 몸집이 작아도 열등감이 없다.
3. 자기를 맘껏 사랑하며, 의존할 줄 안다.
4. 지금 여기에 머무는 천부적 능력이 있다.
5. 거짓자아에 부자연스럽고, 참자아에 자연스럽다.
성경공부를 끝내면서 나눔의 시간을 가졌는데 강 목사님은 어린이의 특징에 또 뭐가 있겠냐고 물었다. 길벗들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나는 “어린이는 관념의 세계에 살지 않고,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고 대답했다.
지난주 주일예배 끝나고 교육실에 갔는데 루오가 놀고 있었다. 나를 보고 달려오다가 멈칫 서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하는 것이었다. “하삐, 머리 짤랐어?” 그날 내 머리 모양의 변화를 알아채고 표현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루오는 그날 그 순간의 내 모습, 나의 현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보았다.
나는 매일 달라지고, 변하고, 새로워진다. 하지만 그 새로움과 변화를 알아차리는 사람은 드물다. 사람들은 매일 새롭게 창조되는 나를 보기보다 목사라는 신분(페르소나)을 먼저 본다. 평생 함께 사는 부부도 상대방의 현실 존재를 보지 않는다. 과거에 형성된 이미지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관계가 대부분 그렇게 이루어진다. 매일 새롭게 형성되는 현실 존재를 보기보다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으로 평가하고 판단한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김 집사는 이렇고, 이 권사는 저렇고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현실 존재를 보지 않는다. 과거에 형성된 고정된 이미지로 평가한다. 현실 존재를 보지 않으면 인간관계가 쉽게 망가진다. 사람의 소중함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현실성이 부족할 때 삶은 공허해진다.
부자 청년
신앙도 관념적일 때가 많다. 천국, 영생, 부활 같은 구원의 언어들이 그렇다. 천국은 예수쟁이들이 죽어서 가는 저세상이고, 영생은 죽은 다음에 무한히 이어지는 시간의 연장이며, 부활은 종말 때 이뤄질 시체의 깜짝 소생 정도로 생각한다. 현재성도 현실성도 없다. 그래서 구원의 언어들은 공허하다. 교리들도 그렇다. 교리가 아무리 정교해도, 그것이 형성될 때의 현실성이 사라지면 생명력을 상실한다. 그래서 교리는 너무 자주 신자들을 추상성과 가상현실에 유폐(幽閉)시킨다.
관념적인 신앙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갈망했던 부자 청년이다. 부자 청년 이야기가 하늘 나라는 어린이들의 것이라는 말씀 다음에 나오는 게 의미심장하다. 마태는 어린이와 부자 청년 이야기를 나란히 배치하면서 어린이의 현실성과 부자 청년의 관념성을 명료하게 대조시킨다. 청년이 예수께 물었다.
“선하신 선생님, 내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는 계명을 알고 있을 것이다. ‘살인하지 말아라, 간음하지 말아라, 도둑질하지 말아라, 거짓 증언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여라.’”
청년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다 지켰습니다.”
청년은 살인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는 것을 이웃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무엇 “하지 않는” 것은 소극적 윤리이며, 관념적 윤리다. 그래서 현실성과 구체성이 부족하다. 이런 윤리는 쉽다. 적극적이며 현실적인 행위가 없어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소극적이며 관념적인 윤리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림의 떡이 허기를 채우지 못하듯이, 관념에 머무는 사랑은 사랑의 욕구를 채워주지 않는다.
사랑이 구체적이며 현실적이며 실질적이어야 함을 예수님은 분명하게 알고 계셨다. 그래서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면서 청년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마 19:21)
소유를 파는 것은 구체적인 현실이다. 소유를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은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이웃 사랑이다. 모든 사랑은 이처럼 현실적이며 구체적이며 실질적이다.
그런데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사랑은 아프다. 자기 소유를 팔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기가 소중하게 지켜왔던 것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질뿐만 아니다. 사랑을 하려면 에고를 깨고, 거짓자아를 해체하고, 의식의 틀을 바꿔야 한다. 그래서 사랑은 아프다. 하나님의 사랑은 특히 그렇다. 인간의 사랑이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해 아프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중심성을 깨뜨리기 때문에 아프다.
인간의 사랑이 이기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욕심을 버리지 못해 아프다면, 하나님의 사랑은 자기중심성을 깨뜨리기 때문에 아프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지난 주 한 길벗이 성경 구절을 보내왔다.
주님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 다 진실하고
그 모든 업적에는 사랑이 담겨 있다.
주님이 하시는 그 모든 일은 의롭다.
주님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신다.(시 145:13b, 17)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묵상하는데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좋은 시절도 있었고 고통스러운 시절도 있었다. 유년 시절은 행복했다. 하지만 사춘기를 지나면서 삶은 고통스러웠다. 진학에 여러 번 실패했고, 원하던 관계를 의지와 상관없이 끝내야만 했던 경우도 많았다. 고통은 이십 대 삼십 대를 비껴가지 않았다.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고통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요즘은 문득문득 깨닫는다. 주님이 이루신 업적에는 사랑이 담겨 있음을, 하나님은 내 삶에서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셨음을.
심지어 실패와 고통 속에서도 그랬다. 아니 그때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강력하게 사랑으로 일하셨다. 이유는 분명하다. 하나님은 나를 새로운 존재로 만들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아프다. “변형의 아픔”이라고나 할까. 이 아픔은 새가 알을 깨고 나올 때 겪어야 하는 아픔이며, 번데기가 고치를 벗고 나비가 될 때 겪어야 하는 아픔이다.
완전한 실패란 없다. 실패의 경험은 쓰리고 아프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들을 가르쳐준다.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생의 이면을 보게 하고, 인간의 심층을 보게 하고, 존재의 깊이를 보게 하기 때문이다. 성공의 관점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포함한 전체의 관점으로 삶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실패의 경험은 사람과 삶을 일면적으로 보지 않고 통합적으로 보게 한다. 부분적으로 부지 않고 전체적으로 보게 한다.
완전한 실패란 없다. 실패의 경험은 쓰리고 아프지만, 그 어떤 곳에서도 배울 수 없는 것들을 가르쳐준다. 이제까지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생의 이면을 보게 하고, 존재의 심연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성공의 관점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를 포함한 전체의 관점으로 삶을 보게 하기 때문이다.
요즘 내 삶과 신앙과 목회를 가능하게 하는 지혜는 실패의 고통을 통해 배운 것들이다. 마음과 영, 거짓자아와 참자아를 분별하는 것을 비롯하여, 무심 예수 참자아의 원형 그리스도 등이 그렇다. 관상적 영성을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고통 속에서 그리스도를 새롭게 만나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배웠다. 하나님은 실패의 고통을 통해 그 어떤 스승보다 지혜롭게 나를 가르치셨고, 나에게 필요한 것을 주셨다. 아, 하나님은 사랑으로 일하신다!
그러나 때로 그 사랑은 아프다. 하나님은 나를 좀 더 나은 존재로 만들고 싶어하시기 때문에 아프다. 그러한 하나님의 의도에 맞추려면 현재의 내가 변해야 한다. 하지만 나는 변하려고 하지 않는다. 삶의 구습은 새로움의 낯섦을 싫어한다. 하여, 나는 고집스럽고 완강하게 에고의 관성에 안주하려고 한다. 내가 완강하게 버틸수록 하나님의 사랑의 압력은 거세진다. 스스로 알아서 하나님의 뜻을 받들지 않으면 하나님이 직접 일하시기 시작한다. 거짓자아를 벗기는 작업을 시작하신다. 에고를 깨뜨리는 작업을 시작하신다. 이 과정에서 실패 경험이 뒤따른다. 병들기도 한다. 그 과정이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이 사실은 하나님이 사랑으로 일하시는 징표다.
사실 가장 아프신 분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완전히 깨뜨리신 하나님이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본다. 십자가의 처참한 실패와 처절한 고통을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져야 하는 실패와 고난의 십자가 속에서 사랑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 사랑으로 함께 깨지고 함께 상처 입은 하나님을 만난다. 그러면서 차츰 무심 예수 참자아의 원형 그리스도를 닮아간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일하신다. 지금 벗들을 아프게 하고 괴롭히는 것들, 화나게 하고 속상하게 하는 상황을 곰곰이 들여다보라. 그 속에서 하나님은 사랑으로 일하신다. 누구도 알 수 없고 벗들 자신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방법으로 일하신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잘 받들어라. 그리고 감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의 도움을 구하라.
하나님의 사랑은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이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은 가상현실에서 이뤄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주 구체적이며 현실적이다. 거짓자아를 찍어버려야 하고, 의식의 틀을 깨뜨려야 하고, 고정관념을 깨뜨려야 하고,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실패를 경험하며 고통스러워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아프다. 하지만 그 아픔을 통해 우리는 성장한다. 부분에서 전체로 시야가 넓어진다. 성정은 온유하고 겸손해진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 마침내 어린아이 같이 되어 지금 여기에서 영생을 맛보며 천국을 산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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