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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삶) 고통 가운데 기도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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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83회 작성일 23-03-22 2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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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당신이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어떤 한 사람을 깊이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으로 인하여 그 불행의 일부를 함께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겪는 고통이 길어지고, 그에 따라 당신이 나누게 되는 고통도 길어진다면, 주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은 당신에게 왜 그 사람을 떠나지 않았느냐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당신은 어떻게 대답하게 될 것 같습니까? 당신이 나누고 있는 고통이 너무 무겁고 힘겨워서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는 선택을 하게 될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사람 없이 행복한 것보다 그 사람의 불행을 함께 나누는 선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랑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을 나누는 것보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는 선택이 당신에게 더 힘든 일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자신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자신의 행복이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 사람 자체이며, 그 사람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통은 사랑의 여정에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는 과정의 한 부분이며,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십자가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14세기 영국의 신비가 노르위치의 줄리안은 죽음의 고비를 오가는 큰 질병을 통하여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회심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녀가 심각한 질병 가운데 있던 시절, 영국과 유럽은 심각한 전염병과 전쟁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 가운데 있던 절망적인 상황에 있었습니다. 줄리안은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가?’하는 의문을 품고 있던 시대를 살았던 신비가입니다. 그녀는 기도를 통하여 자신과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하느님께 더 깊고 가까이 나아가는 길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녀는 기도란 고통 중에도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이며, 고통에 대한 실질적이고, 강력한 처방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하느님은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파괴하지 않으시며, 우리가 겪는 고통마저도 선함과 성화(聖化)와 궁극적 기쁨을 위하여 사용하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고난과 치욕의 십자가를 인류를 위한 구원의 징표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을 당하셨고, 고통을 품으셨고, 고통의 의미를 변화시키셨습니다. 하여 우리도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고통을 품고, 그 의미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과 함께 있는 곳은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우리의 열쇠입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이같은 고통과 절망을 우리에게 허락하시고, 우리의 기도에 침묵하고 계신가?” 라는 질문에 줄리안은 하느님의 궁극적인 선하심과 구원에 대한 궁극적 믿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만일 당신이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진지하게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그 ‘고통의 달콤함’을 어떤 방식으로든 이미 경험하였거나,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당신을 따르고자하는 제자들에게 ‘달콤함과 고통’을 하나의 묶음으로 주실 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근심에 잠길지라도 그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20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33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혹은 예수님을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고통의 달콤함’이라는 말은 좀 이상하고, 혼란스럽게 들릴지 모릅니다. 주님께서 사랑하셨던 제자들조차도 그 말을 이해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함께 하며, 임재 가운데 있을 지라도 고통을 달콤하게 경험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가 달콤함에 중독되길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의 감각보다 믿음에 의지할 수 있도록 우리를 훈련시키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믿음은 고통의 한 복판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습니다.

사람들은 고통이 믿음의 시험대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고통이 왜 믿음의 시험대가 되는지를 모든 사람이 아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은 자주 두려움과 자기연민에 빠져 있는 우리를 하느님께로 가까이 이끌기보다 자기 자신에 온통 몰두하게 하고,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서도록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이 유혹은 우리 영혼의 유익을 갉아먹는 나쁜 질병입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이 믿음의 시험대가 되는 이유입니다. 믿음은 없지만 강한 의지를 가진 사람 역시 고통을 인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신비로운 손길에 자신을 맡긴 사람들은 자신이 지닌 강한 의지와 힘이 아니라 하느님을 향한 신뢰의 힘으로 그 고통을 견디어 냅니다. 고통은 하느님을 느끼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고통 중에도 우리는 믿음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 말이 어리석고 한심하게 들릴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믿음은 십자가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게 합니다.

믿음의 눈으로 볼 때 당연한 것들이 불신의 눈으로 볼 때는 어리석어 보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이 전적으로 선하시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해할 수 없는 불행과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로마 8:28)는 사도 바오로의 고백을 신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해치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하여 선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하느님의 의지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믿음과 소망과 사랑 안에서 하느님 안에서 머물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서로 작용하여 우리에게 선(善)을 이룰 것입니다. 물론 일어나는 모든 것이 그 자체로 선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모든 순간에 우리와 함께 하시며, 모든 것은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선을 위하여 작용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최악의 사건이 우리와 모든 인류의 구원을 위한 가장 선한 사건이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고통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선하심과 지혜 그리고 능력, 이 세 가지 가운데 한 가지를 부인하도록 우리를 부추깁니다. 고통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의심하고,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랑하는 외아들을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지옥의 고통을 겪는 값비싼 희생을 치르시도록 허락하셨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느님은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습니다.(요한 3:16) 우리의 믿음은 그 진실 위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 진실 때문에 우리는 비록 하느님께서 우리를 저버리신 것 같은 고통 중에 있으면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불구덩이 용광로 속에서 우리 영혼을 그리스도를 닮은 칼로 아름답게 빚어 주십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믿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통하여 우리가 강해지도록 하십니다. 하느님의 권능이 약함 가운데서 드러나듯 그리스도 안에서 약함은 강함이며, 강함은 약함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의 첫 자락에서 우리가 달콤함을 맛보게 하시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고통의 첫 자락에서 달콤함을 맛보게 된다면 진정한 믿음을 지닐 수 없을 뿐 아니라 믿음의 성숙 또한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고통을 통하여 하늘의 영원한 기쁨을 맛볼 수 있는 능력을 키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기쁨을 한 번 맛보면, 그 믿음은 습관이 됩니다. 믿음이 습관이 되면 비록 바다 표면이 폭풍으로 흔들릴 때에도 우리 영혼은 바다의 깊은 평화의 바닥에 닺을 내릴 수 있게 됩니다. 비록 우리 몸이 아프고, 우리 마음이 찢어질 때에도 우리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 때, 하느님께서 우리 믿음이 미혹되지 않고, 고통 가운데서도 달콤함을 맛 볼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이것은 마치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를 내어주는 고통 중에도 사랑 때문에 맛보는 기쁨과 같습니다.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당신이 정말로 마음 깊은 곳에서 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면, 그 일을 하면서 직면하게 될 어려움이나 자기희생을 감내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만일 우리가 고통 대신 달콤함만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욕망하는 달콤한 것들 안에서 오히려 고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 달콤함을 포기하고 고통을 껴안으면,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인 고통들 속에서 신비한 달콤함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즐거움에 대한 욕심은 중독처럼 오히려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 줄 뿐입니다. 붓다도 그것을 알았습니다. 하여 붓다는 즐거움에 대한 갈망과 집착이 고통의 원인이라고 하였습니다. 삶에는 오직 두 갈래 길이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길과 자신의 뜻을 이루는 길, 두 길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것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리고 우리가 진심으로 먼저 하느님 나라를 구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다른 모든 것도 우리에게 더하여 주실 것입니다.(루가 12:31) 믿음은 수술하는 의사의 손에 들린 피 뭍은 수술 칼 뒤에 숨겨진 무한한 아름다움을 봅니다. 십자가 위에 참으로 현존하시는 주님의 현존만이 우리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악하고 해로운 것처럼 보이는 일이 많이 일어나서 우리를 절망시킵니다. 우리가 이러한 것들 때문에 애통해 하는 동안에는 하느님의 놀라우신 지혜안에서 편하게 쉴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이성은 눈멀고 약하고 무지해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선함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결국 우리가 그 일들을 믿음과 신뢰를 지니고 받아들인다면, 마지막에 가서는 분명히 충만한 기쁨 속에서 그 일들의 진상을 보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 노르위치의 줄리안 -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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