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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삶) 기도의 여정에서 경험하는 어려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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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81회 작성일 23-03-22 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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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가는 갈망의 불꽃
우리가 하느님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그분을 찾기 위해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온 마음으로 그 분을 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기도 중에 종종 하느님을 찾으려는 갈망이 식어버린 자신을, 혹은 갈망을 느낄 수 없는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향한 성인들의 갈망과 관련한 글을 읽거나 영적 갈망이 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의 상태를 비교하고, 자신의 초라함과 무력함에 실망하기도 합니다. 이같은 영적 고독의 상태는 영적인 게으름으로 인하여 찾아오기도 하지만, 때로는 영적 성장과정에서 누구나 직면하고 통과하게 되는 과정으로 찾아오기도 합니다. 만일 당신에게도 그런 시기가 있었거나, 그런 시기를 지나고 있다면 그것은 기도의 여정에서 경험하게 되는 자연스러운 일이니 놀라거나 당황스러워 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그런 경험을 하고 있을 때, 한 가지 꼭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을 향한 갈망은 모든 사람들 마음 깊은 곳에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스스로 느끼지 못하고 있는 순간일지라도... 하지만 하느님을 향한 갈망은 다른 것들을 향한 우리들의 갈망들로 인하여 매우 약해질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많은 경우 다른 갈망들은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갈망을 자기 자신을 향한 추구나 자기실현으로 그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순간, 순간 하느님을 추구하거나 또는 자신을 추구하는 선택을 하며 매일의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을 추구하는 생활이란 자기추구를 향한 갈망과의 투쟁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 싸움을 수행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먼저 우리 안에 숨겨진 자신의 죄스러운 성향들과 직면하여야 합니다. 그것들은 하느님의 현존에서 우리를 분리시키는 것들입니다. 어쩌면 인간의 타고난 약함과 한계일수도 있고. 때로는 각 사람이 양육되고 성장하는 과정 속에서 형성된 정서적이고 심리적인 상처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하느님과의 일치를 방해하는 장애물들이며,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어떤 약함과 한계를 지닌 채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자신의 그 죄스러운 성향들을 보여 달라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매일의 기도와 성찰 가운데서, 혹은 어떤 사건이나 만남 가운데서 직면하게 되는 자신의 어두움으로부터 눈길을 돌려 피하려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직면한 자신의 어두움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러면 하느님께서 그 어두움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그렇게 꾸준히 실천하면 우리는 내면에서 자기추구의 충동이 올라올 때 그것을 곧 알아차리고, 그것을 다룰 수 있게 되어 우리 마음을 다시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같은 실천의 반복은 점차 우리 갈망을 자신에게서 하느님께로 옮겨줄 것입니다.   

기도 중에 우리 안에 죄스러운 성향들을 우리가 알아차리고, 의식하게 될지라도 그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우리 안에 자리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의식을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께로 향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 죄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을 지라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 원하시는 자유를 위하여, 우리는 하느님께 협력할 수 있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 중에 발견한 자신의 죄스러운 성향이 제거되지 않는다고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그것을 알아차리게 된 순간, 우리가 하느님께 협력하려는 의지를 갖고 그 길을 선택할 수 있다면,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를 도우십니다. 

기도 중에 경험하는 지루함
우리가 어떤 기술을 배우려고 마음먹었을 때, 처음에는 그 과정이 어렵고 길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실천으로 옮겨 훈련을 시작하고, 꾸준히 지속하면 우리는 어느덧 온전함에 이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악기 연주하는 법을 배우는 과정을 연상하여 보십시오. 처음 악기를 배우려는 사람이 시간과 에너지를 훈련에 사용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이내 곧 악기 배우는 것을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악기를 배우려는 갈망이 크고, 악기를 사랑하는 진지한 사람이라면 꾸준한 실습과 훈련의 과정을 거쳐, 어느 날 문득 악기를 자연스럽게 연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내적 기도를 시작하려는 사람들도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경험합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기도를 배우려는 갈망과 진지함이 큰 사람들은 때로 쉽게 기도의 진보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같은 경험은 세속적인 다른 일이나 관심에 앞서 기도에 헌신할 수 있게 하는 힘과 자극이 됩니다. 하지만 이같은 진보의 체험이 때로는 자기만족이나 교만으로 흐를 위험도 있습니다. 때문에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만족이나 체험에 집착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하여 자신의 생각과 마음을 하느님께 모으고, 하느님께 자신을 열어 드리는 사려 깊은 준비를 하여 합니다.

관상(觀想, contemplation)으로의 여정에서 만나는 실패의 경험들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데, 참다운 하느님과의 연합은 우리 노력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력과 비교할 수 없이 크신 하느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라는 진실입니다. 관상으로의 여정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한 측면은 기도 중에 우리의 노력은 점차 적어지고 우리 안에서 기도하시고 계신 성령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더욱 커지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실재로 많은 경우, 우리는 기도 중에 기울이는 자신의 노력에 더욱 집착하게 되는데, 이는 그것이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유일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내어드리려는 갈망은 기도 중에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성취하려는 노력이나 기대를 내려놓게 하고, 이기적인 집착을 비우게 하여 마침내 우리 안에 성령께서 활동하실 공간을 만듭니다.

그런데 기도 중에 하느님께서 하시는 역할이 커지기 시작하면, 때로 우리는 그동안 자신의 노력으로 해 왔던 익숙한 기도를 할 수 없게 되는 시간을 경험합니다. 그 경험은 기도의 실패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하느님께서 자신과 함께 하시지 않는 부재(不在)의 경험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런 상태의 기도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보다 기도 경험이 깊고 풍부하거나, 영적 지식이 깊은 사람들의 안내와 격려를 필요로 합니다. 그같은 경험은 하느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노력보다 성령님께서 더 많이 활동하시는 새로운 기도의 길을 열어주시는 초대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시기에는 성령님의 활동이 아직 희미하기 때문에 이전에 익숙하게 해왔던 기도의 체험과는 달리 공허함이나 떠오르는 분심들에 시달리면서 그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자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같은 단계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기대하고 있는 이기적인 영적 경향에 저항하며 자신이 싸우고 있는지, 혹은 자신에게 익숙한 경험보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기꺼이 복종하려고 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돌아보아야 합니다. 기도에서 실패의 경험은 종종 하느님 요청에 기꺼이 응답하려는 의지의 부족으로 인하여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패의 경험 가운데서도 하느님께서 도와주실 것임을 믿고, 그 과정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자신을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인도하실 것을 신뢰하며 기도하면,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기도의 진보를 허락하십니다.

이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 주의하여야 할 것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익숙하게 하던 기도를 계속 할 수도 없고, 새로 시작한 기도에서도 만족할 수 없다는 이유로 기도를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이겨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기도가 잘 안 된다는 이유로 기도를 영적독서로 대체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는데 이를 이겨내야 합니다. 영적독서가 기도를 도울 수 있지만 기도를 대체할 수는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단계에 있는 사람들이 하여야 할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어둔 밤 같은 영적상태에 있는 자신을 받아들이고, 하느님께 자신을 의탁하며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전에 경험하였던 어떤 명료한 생각이나 대화도 부재하고, 자신이 하느님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우리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분심에 머물기보다 기도 중에 마음에서 떠오르는 단순한 기도(“주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소서”, 혹은 “제가 당신을 떠나지 않게 하소서” 등)를 고요히 반복하거나, 영의 눈으로 단순히 하느님을 바라보며 하느님을 향하려는 평화로운 노력을 인내심을 갖고 유지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생각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곳, 영혼으로 우리를 기뻐하시는 하느님을 바라고 갈망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밤새 일하였지만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밤새 포기하지 않고 그물을 던지며 호수를 떠나지 않았던 제자들을 주님은 찾아오셨고, 마침내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 편으로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순종하였을 때, 고기들이 그물을 가득 채우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영혼의 어두운 시간 속에서도 계속 그물을 던져야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두 팔로 굳게 안고 계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마침내 우리 모두를 은총으로 지켜주시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도록 우리를 들어 올려 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의 여러 이름들
기도생활에서 우리와 하느님 사이에 맺는 관계의 건강한 특징은 첫째로, 숨김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둘째는 우리가 시험에 빠지기 쉬운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셋째는, 하느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많은 하느님의 이름들 가운데 하나의 이름만으로는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겠지만, 각각의 이미지들은 다양한 상황에서 우리의 기도를 인도해 줄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용서를 구할 때 우리는 ‘자비하신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고, 영감이 필요할 때는 우리는 ‘오소서 성령이여!’라고 기도할 수 있으며, 암으로 동생을 잃은 사람은 용기와 힘을 구하며 ‘나의 형제이신 예수님’이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외로울 때 우리는 ‘친구이신 하느님’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고, 길을 잃었을 때, 우리는 ‘길이신 주님’께 기도할 수 있으며, 하느님이 멀게 느껴질 때, 우리는 ‘연인이신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죄 – 기도에서 도덕적 분심
우리가 기도하기 어려울 때, 단지 게으름이 아니라 기도에 대한 어떤 두려움이나 혐오감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합니다. 이같은 현상은 단지 정신적 분심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우리 기도의 방해물로 자리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내 안에서 무엇이 사라져야 하는지, 내 안에 무엇이 하느님의 현존을 두려워하고 있는지, 내 몸의 어떤 암 세포들이 선한 외과 의사를 미워하고 있는지...내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하느님의 적은 오직 하나, 죄입니다.

의지의 실패인 죄는 정신적인 분심이 기도를 방해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커다란 기도의  장애물입니다. 따라서 해결방법 역시 정신적 분심을 다루는 것보다 근본적인 처방을 필요로 합니다. 사실 그 해결방법이란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분명 그것은 반갑지 않은 소리입니다. 하지만 반가운 소식은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해결방법을 주셨고, 지금도 주시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피로 이루신 모든 이들을 향한 용서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기본진리이며, 기쁜 소식인 복음입니다.

죄의 용서에는 두 영역이 있습니다. 첫 번째 영역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심이고, 두 번째 영역은 그것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용서는 여느 선물과 같이 자유롭게 주어지고, 자유롭게 받아들여야 하는 선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용서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언제나 받아들이지는 못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용서하심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과정에 참회와 고백 그리고 하느님을 향한 믿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할까요? 왜냐하면 내가 누군가를 용서하고자 하는데, 만일 그가  나의 용서를 원치 않거나, 그가 용서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나의 용서를 받아들일 만큼 나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는 나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일도 이와 비슷합니다. 만일 우리가 죄로부터 돌아서 하느님께로 향하는(참회) 대신 죄에 머물길 원한다면, 우리가 용서받을 필요가 있다는 것(죄의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신뢰하지(믿음)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용서의 손길을 결코 멈추지 않고 계시지만 문제는 우리가 손을 내밀어, 용서의 손길을 잡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다른 누군가를 향한 우리의 용서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주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듯이 하느님께 우리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기 위하여 우리의 죄로부터 돌아서야만 합니다. 죄는 부정한 관계처럼 기도를 방해하고 진정한 사랑도 방해합니다. 그러나 죄는 하느님의 현존과 빛을 견디지 못합니다. 때문에 기도의 습관은 죄로부터 우리를 지키는 가장 강력한 방패입니다. 죄와 기도는 빛과 어둠처럼 정반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가 가르치는 죄란 도덕적이거나 법적인 차원보다 근원적인 차원을 뜻하는 데 첫째는 하느님 안에 참된 행복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無知)입니다. 둘째는,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지만 의지를 갖고 그 길을 거절하는 불복종입니다. 셋째는 참된 행복의 길을 걷고자 갈망하지만 우리의 한계로 인하여 자주 넘어지는 나약함입니다. 나약함의 죄는 아무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조건이기도 합니다. 심리학과 현대 과학은 우리가 죄라고 생각하는 어떤 행동들은 어릴 적 부모와의 양육관계. 중독, 배반, 상처, 가족관계, 인정을 위한 무의식적 추구 등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자신의 죄를 성찰할 때, 그것이 “나의 죄인가? 도덕적인 위반인가? 나쁜 태도와 결점들 그리고 내면의 상처로 인한 결과인가?”라고 물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죄와 잘못을 바라보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에 책임을 지게 만들고, 이 과정을 통하여 하느님께 우리 온 존재를 드릴 수 있게 하며,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형상을 회복해 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참회와 고백과 믿음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용서에 무언가를 더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용서는 우리의 참회와 고백과 믿음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우리의 모든 죄보다 크고 넓고 깊으신 하느님 사랑에 의존합니다. 한량없으신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모든 죄를 덮고도 남습니다. 용서받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몫은 단지 하느님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용서를 믿는 일입니다.

만일 아직도 당신이 하느님 앞에서 기도할 수 없을 만큼 큰 죄를 지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용서하심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용서받습니다. 돌아 온 탕자(蕩子)를 받아들인 아버지처럼, 하느님은 우리에게 ‘너는 깨끗하게 되었고 하느님의 가족으로 받아들여졌다. 네가 그만한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내가 사랑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학의 눈길을 보내기보다 하느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약함과 죄 그리고 하느님의 권능
어떤 사람은 하느님께서 우리의 약함까지 사랑하시고,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기 때문에 약함과 죄로 인한 자기 한계를 넘어서려고 노력하는 일은 부질없는 일이고, 그럴 필요도 없다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에 대한 지나친 오해입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는 결코 우리를 죄에 머물러 있게 하거나 죄의 반복을 방치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가시로 찌르는 것 같은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하였던 사도 바오로에게 주님은 “내 권능은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난다.”(고후 12:9)고 응답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세속적인 잣대로 자신을 자랑하며 우쭐거리는 사람들에게 자신은 ‘오직 그리스도의 능력이 임할 자신의 약함을 자랑하겠다.’(고후11:30)고 하였습니다. 바오로에게 자신의 약함과 죄를 인정하는 것이 중요했던 것은 그 상태에 머물거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는 것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약함과 죄에 대한 인정과 고백이 우리를 하느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도록 인도하고, 우리의 죄와 약함을 아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도움에 더욱 의지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중요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약함이 우리를 죄로 이끈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죄가 우리에게 은총이고, 하느님 영광의 놀라운 표현인 경우는 죄를 통하여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가 함께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은 죄를 통하여 오히려 우리의 구원을 향한 하느님의 위대한 계획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그 속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계획을 찬양하게 되고, 커다란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14세기 영국의 신비가 노르위치의 줄리안 St. Julian of Norwich은 우리가 죄를 볼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책감이란 우리가 하느님 사랑에 다가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느끼게 되는 감정입니다. 그런 점에서 진정함 죄책감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진정한 죄책감은 우리가 스스로를 자책하며 어두움 가운데 머물러 자신을 파괴하도록 방치하지 않으며, 죄를 외면하고 모른 채 죄를 반복하도록 하지도 않습니다. 진정한 죄책감은 우리를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인도해 줍니다.

우리가 강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자주 하느님 없이 스스로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하느님께 의지하여 얻게 되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문제를 하느님의 자비 앞에 가지고 나아가도록 돕고, 크신 하느님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드러날 수 있는 여백을 만들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과 행복도 선물하지 않는 죄가 있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죄에 대해서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슬퍼하는 마음으로 깊이 뉘우쳐야 합니다. 뉘우치는 마음 없이 단순히 우리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변명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가까운 사람에게 화를 내어 마음에 미안함이 있다면, 그 미안함은 우리의 양심을 찔러서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을 일으키고, 그 때 뉘우치는 마음이란 그 사람을 다시 사랑하도록 만드는 슬픔과 같은 것입니다. 뉘우침은 과거의 죄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를 하느님과 이웃에게 다시 사랑으로 다가서도록 만드는 슬픔에 관한 것입니다. 이같은 슬픔은 모든 성인(聖人)들의 삶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뚜렷한 표징들입니다. 이 슬픔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기쁨으로부터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의 나약함과 죄에 대한 슬픔을 통하여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을 체험하게 합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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