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삶) 기도에서 생각과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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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730회 작성일 23-03-22 21:41본문
인간 영혼의 두 가지 힘과 능력
우리는 대개 생각과 행동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성격유형을 검사하며 행동형과 사고형의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하지만 실상 그것은 관념입니다. 한 사람에게 있어 생각과 행동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지닌 생각이라는 씨앗은 그 사람의 행동으로 열매를 맺고, 행동은 습관을, 습관은 개성을, 한 사람의 개성은 그 사람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지닌 생각과 보이는 행동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기도에서 생각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한편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당구장의 당구공처럼 그저 영혼 없이 움직이는 단순한 유기체가 아닙니다. 사람은 몸과 함께 영혼을 지닌 영적인 존재이며, 내면에서 울려오는 영혼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응답하며 반응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영혼을 가진 존재로 질문하고, 예술작품을 창조하며, 도덕적 선택을 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을 긍정하고, 아름다움에 감사하며, 기도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출발은 생각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생각에서 시작되는데 사도 바오로는 이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린토 교회 신자들을 향하여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고후 10:5) 한다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목표와 중심은 우리가 거룩해지고, 예수를 닮는 것입니다. 프랑스 소설가 레온 블로이 Leon Bloy는 “삶에서 오직 하나의 비극은 거룩한 존재가 되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거룩한 삶이란 ‘자신의 고유함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닮아가는 여정’입니다. 그 거룩함을 살아가는 성인(聖人)이 되는 두 영역의 과정이 있는데 그것은 생각과 의지이며, 생각과 의지는 하느님을 닮은 인간 영혼의 두 가지 힘과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함의 심장은 우리의 생각(mind)이 아니라 가슴(Heart) 안에 또는 의지 안에 있습니다. 성인(聖人)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전심(全心, whole heart)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슴(heart)은 생각(mind) 없이 일 할 수 없습니다. 가슴(의지)과 생각(정신)은 마치 닭과 달걀, 감각과 지성, 또는 여성과 남성처럼 서로 의존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에서 생각과 의지
이제 우리가 기도 중에 생각(정신)과 의지(가슴)가 어떻게 상호의존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생각의 작용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할 수 있도록 합니다. 하느님을 생각하고 상상하며 기도할 때, 생각이나 상상으로 그려낸 하느님이 실재 하느님은 아니지만, 생각과 상상은 언제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신비이신 하느님의 임재를 우리가 더 가깝고 생생하게 의식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한다는 것은 의지의 작용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고, 바라고, 사랑하는 것을 구합니다.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은 생각의 작용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단지 논리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아이디어도 아닙니다. 그것은 의지적인 친교와 교제를 통해 주어지는 인격적 앎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차리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하느님을 갈망하고, 찾고 그리고 하느님을 위하여 기꺼이 헌신하여야 합니다. 생각은 오직 의지를 가지고 멈추고, 보고, 들으려고 할 때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경청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것을 바라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지적인 선택으로 의도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을 바라보는 일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절반의 다른 측면 역시 진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생각할 때, 그 생각은 우리 의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으로 하느님을 더 많이 아는 것은,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하느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섬기며, 헌신할 수 있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더 많이 알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 더 많이 희생하고, 하느님을 위해 더 고통을 감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알게 된다면,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이유 하나로 하느님을 위해 무엇이든 기꺼이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것과 아는 것은 서로를 돕고, 온전하게 합니다. 사랑과 앎의 반대는 무관심과 무지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무관심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되면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강화시켜 주며,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무지는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키워줄 뿐입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우리는 대개 생각과 행동을 구분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성격유형을 검사하며 행동형과 사고형의 사람으로 구분합니다. 하지만 실상 그것은 관념입니다. 한 사람에게 있어 생각과 행동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지닌 생각이라는 씨앗은 그 사람의 행동으로 열매를 맺고, 행동은 습관을, 습관은 개성을, 한 사람의 개성은 그 사람의 인생에 중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지닌 생각과 보이는 행동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기도에서 생각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한편 매우 단순해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매우 의미심장한 이유가 있습니다. 인간은 당구장의 당구공처럼 그저 영혼 없이 움직이는 단순한 유기체가 아닙니다. 사람은 몸과 함께 영혼을 지닌 영적인 존재이며, 내면에서 울려오는 영혼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에 응답하며 반응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영혼을 가진 존재로 질문하고, 예술작품을 창조하며, 도덕적 선택을 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을 긍정하고, 아름다움에 감사하며, 기도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의 출발은 생각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행동이 우리의 생각에서 시작되는데 사도 바오로는 이를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린토 교회 신자들을 향하여 그리스도를 닮기 위해 “하느님을 아는 지식을 가로막는 모든 교만을 쳐부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서, 그리스도께 복종시켜야”(고후 10:5) 한다고 권면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삶의 목표와 중심은 우리가 거룩해지고, 예수를 닮는 것입니다. 프랑스 소설가 레온 블로이 Leon Bloy는 “삶에서 오직 하나의 비극은 거룩한 존재가 되어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거룩한 삶이란 ‘자신의 고유함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닮아가는 여정’입니다. 그 거룩함을 살아가는 성인(聖人)이 되는 두 영역의 과정이 있는데 그것은 생각과 의지이며, 생각과 의지는 하느님을 닮은 인간 영혼의 두 가지 힘과 능력입니다. 그런데 그 거룩함의 심장은 우리의 생각(mind)이 아니라 가슴(Heart) 안에 또는 의지 안에 있습니다. 성인(聖人)은 본질적으로 자신의 전심(全心, whole heart)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슴(heart)은 생각(mind) 없이 일 할 수 없습니다. 가슴(의지)과 생각(정신)은 마치 닭과 달걀, 감각과 지성, 또는 여성과 남성처럼 서로 의존하는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에서 생각과 의지
이제 우리가 기도 중에 생각(정신)과 의지(가슴)가 어떻게 상호의존하고 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생각의 작용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할 수 있도록 합니다. 하느님을 생각하고 상상하며 기도할 때, 생각이나 상상으로 그려낸 하느님이 실재 하느님은 아니지만, 생각과 상상은 언제 어디에나 현존하시는 신비이신 하느님의 임재를 우리가 더 가깝고 생생하게 의식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한다는 것은 의지의 작용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고, 바라고, 사랑하는 것을 구합니다.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은 생각의 작용입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단지 논리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추상적인 아이디어도 아닙니다. 그것은 의지적인 친교와 교제를 통해 주어지는 인격적 앎입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알아차리기 위하여 우리는 먼저 하느님을 갈망하고, 찾고 그리고 하느님을 위하여 기꺼이 헌신하여야 합니다. 생각은 오직 의지를 가지고 멈추고, 보고, 들으려고 할 때 그렇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을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느님을 경청할 수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다른 것을 바라보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의지적인 선택으로 의도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을 바라보는 일을 멈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절반의 다른 측면 역시 진실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생각할 때, 그 생각은 우리 의지에 커다란 영향을 미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각으로 하느님을 더 많이 아는 것은, 우리가 의지를 가지고 하느님을 더 많이 사랑하고 섬기며, 헌신할 수 있는 이유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더 많이 알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을 위해 더 많이 희생하고, 하느님을 위해 더 고통을 감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알게 된다면,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이유 하나로 하느님을 위해 무엇이든 기꺼이 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게 됩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것과 아는 것은 서로를 돕고, 온전하게 합니다. 사랑과 앎의 반대는 무관심과 무지입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미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무관심할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되면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은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무지를 강화시켜 주며,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무지는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을 키워줄 뿐입니다.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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