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관상적 상상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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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56회 작성일 23-03-14 14:30본문
-성사적聖事的 상상력-
“무엇보다도 너는 네 상상력을 지켜라.
그래야 생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상상한 것으로 이루어지는 존재다.”
(Man imagines what he is.)
「잠언」의 지혜자는 말한다.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잠 4:23) 나는 이것을 이렇게 읽는다. “무엇보다도 너는 네 상상력을 지켜라. 그래야 생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물론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말한다. “인간은 자기가 먹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존재다.”(Man eats what he is.)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자기가 상상한 것으로 이루어지는 존재다.”(Man imagines what he is.)
인간은 상상한 것을 어떻게든 구현하려고 한다. 그런데 상상력은 길들이지 않은 말과 같아서 내버려 두면 제멋대로 날뛴다. 길들이지 않으면 상상력은 저급한 욕망을 실현하려는 환상에 쉽게 사로잡힌다. 따라서 상상력을 길들이지 않으면 저급한 욕망을 실현하려는 충동이 생의 시간을 갉아먹는다. 바울이 권고하는 것처럼 “세월을 아끼려면”(엡 5:16) 상상력을 지켜야 한다.
사실 세속 문화는 저급한 욕망의 포로가 된 상상력의 산물이다. 천박한 물질만능주의, 음란한 향락문화, 관능적인 외모지상주의, 퇴폐적인 성문화, 선정적인 언론문화, 관음적인 인터넷 문화, 야비한 댓글 문화, 잔인한 폭력문화 따위가 그렇다. 요즘 우리는 대한민국이 더 이상 마약 청정국가가 아니라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이러한 현실은 욕망의 늪에 빠진 상상력과 무관하지 않다. 타락한 문화일수록 욕망에 취한 상상력이 그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육체와 욕망을 매도할 생각은 없다. 육체와 욕망은 인간을 구성하는 실재(reality)다. 성경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 2:7)고 말한다. 인간은 흙과 생기의 통합체다. 육과 영, 욕망과 신성이 통합되어야 비로소 “생명체”(생령)가 된다.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 육과 영, 욕망과 신성이 균형을 잃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사람이라면 육체를 위하는 만큼 영을 존중해야 하며, 욕망을 충족하려는 만큼 신성을 실현해야 한다. 이건 선택 사항이 아니다. 삶이 인간에게 부여한 운명, 다시 말해 하나님이 정해놓은 인간의 운명이다. 영과 신성에 무지하거나 그것을 무시할 때 인간은 온전한 생명체가 되지 못한다. 인간의 요건을 갖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인간, 영의 은총과 신성의 운명을 거역한 반쪽 인간, “괴물”이다!
상상력의 정화
요즘 세상, 괴물들 천지다. 괴물이 괴물을 낳고, 대물림하여 괴물을 길러낸다. 괴물들끼리 모여 서로의 욕망에 불을 지른다. 신성한 상상력은 고사한 나무처럼 말라비틀어지고, 괴물의 상상력만 독버섯 피어나듯 기승부린다. 저급하고, 저속하고, 천박하고, 경박하고, 음란하고, 음침하고, 잔인하고, 야비하고, 음습하고, 음산한 괴물들의 욕망과 괴물의 상상력은 교회에까지 침투한다. 교회에서조차 인간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인간, 하나님이 정해주신 신성의 운명을 거역한 반쪽 인간 즉 “괴물”이 활보한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일까? 예수 믿고 죽은 다음 천당에 가는 거? 그런 믿음을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그 전에 이뤄야 할 것이 있다. 육과 욕망만 비대하게 발달한 반쪽 인간이 온전한 인간 되는 것, 신성의 운명을 거역한 괴물이 참사람 되는 것. 그러려면 욕망에 취한 상상력을 깨워야 하고, 제멋대로 날뛰는 육의 상상력을 영의 상상력으로 길들여야 한다. 저속한 욕망에 오염된 괴물의 상상력을 정결한 신성의 상상력으로 정화해야 한다.
상상력을 지키지 못하고, 상상력을 길들이지 못하고, 상상력을 정화하지 못하면 기독교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영혼구원”은 김빠진 구호에 머물고 만다. 구원받았다면서도 온갖 저속한 상상에 휩싸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상상력을 정화하지 못하는 영혼구원은 종교적 위선으로 인도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러면 상상력을 어떻게 정화할 수 있을까? 번영신앙과 율법신앙으로는 불가능하다. 한국교회의 상상력을 저속하게 만든 주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관상기도 수련이다.
알다시피 관상기도란 성 삼위 하나님의 신성한 현존과 사랑의 친교 속에 머무는 기도다. 그렇기에 관상기도는 영을 살리고 신성을 깨운다. 관상기도는 영을 살려 육만 비대한 반쪽 인간을 온전한 인간으로 만든다. 신성을 깨워 삶이 부여한 성스러운 운명을 살아간다. 영과 신성이 활성화됨에 따라 상상력도 달라진다. 괴물의 상상력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더 나아가 천사의 상상력으로 변형된다. 이름하여 “관상적” 상상력이 발달하는 것이다.
관상적 상상력은 앞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모태에 대한 상상으로 이끌어간다. 다윗은 자기의 몸(형질)이 지어지기 전에 자기의 본질 자아를 보고 계신 하나님의 따뜻한 시선을 상상한다. 얼마나 성스럽고 아름다운 상상인가. 이것이 바로 “근원에 대한 상상력”(imagination of origin)이다. 근원에 대한 상상력은 어머니 태에서 이미 예언자로 부름받았다고 고백하는 예언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고,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에게서도 볼 수 있다.
성서의 성사적 상상력
일단 깨어나면 관상적 상상력은 근원에 대한 상상력에 이어 “성사적 상상력”(sacramental imagination)으로 진화한다. 근원에 대한 상상력이 존재의 본질을 통찰한다면, 성사적 상상력은 만물(萬物)과 만인(萬人)과 만사(萬事)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감지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통찰하며,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꿈꾼다. 예를 들어보자.
예수님은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 하늘의 새와 들에 핀 꽃을 보며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알아차린다. 새와 들꽃은 하찮은 사물이기를 멈추고 성사가 된다. 바울은 만물의 성사성(聖事性)을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롬 1:19-20) 만물은 그리스도를 드러낸다. “그리스도는 만물이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골 3:11)
만물뿐인가, “사람”도 하나님을 드러낸다. 야곱은 자기를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형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창 33:10) 예수님은 무지렁이 같은 사람들에게서 신성의 빛을 보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 5:14) 예수님이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보잘것없는 사람들 곧 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방황하는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을 때(마 25:40) 성사적 상상력은 절정에 이른다.
요셉에겐 “사건”이 성사였다. 알다시피 요셉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꾼 죄로 형들에게 죽을 뻔했고, 큰형의 만류로 다행히 죽음은 면했지만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야 했다. 이집트에서는 음탕한 유부녀가 동침하자는 유혹을 뿌리친 죄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기도 했다. 억울한 일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요셉은 자기의 생을 이렇게 해석한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창 45:5) 요셉은 자기가 겪은 억울한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 곧 하나님의 삶의 배열을 본다.
시편 시인은 누구보다 성사적 상상력이 발달한 사람이다. 그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위엄을 본다. “주 우리의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시 8:1) 시인은 하늘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준다.”(시 19:1) 하늘뿐 아니라 산과 바다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시 36:5-6) 공간적 차원에서 펼쳐지던 시인의 성사적 상상력은 시간으로 확장한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준다.”(시 19:2)
문학과 성사적 상상력
성사적 상상력은 문학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유명한 시 「순수의 전조」는 성사적 상상력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는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지상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상 세계를 본다. 그뿐 아니라 손바닥 안에 무한을 담고, 한순간 속에서 영원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 한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이러한 성사적 상상력이 있기에 블레이크는 새장에 갇힌 새를 보면서 천국의 분노를 느끼고, 굶주린 개를 보면서 한 나라의 파멸을 감지한다.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
천국을 온통 분노케 하며,
주인집 문 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
주인집 문 앞에서 굶어 죽은 개가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면, 이태원의 어느 거리를 걷다가 쓰러진 백쉰여덟 명의 젊은이들은 무엇을 예고할까? 그들의 죽음을 추상화하려고 기를 쓰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에 대한 구체적 상상을 불허하는 관 주도의 추모는 얼마나 괴물스러운가?
시인 정호승은 「쌀 한 톨」을 통해 성사적 상상력을 펼쳐 보인다. 아주 작고 하찮아 보이는 쌀 한 톨을 통해 그는 생을 경건하게 대하는 법을 배운다.
쌀 한 톨 앞에 무릎을 꿇다
고마움을 통해 인생이 부유해진다는
아버님의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쌀 한 톨 안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해 질 녘
어깨에 삽을 걸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
쌀 한 톨, 얼마나 하찮고 가벼운 질량인가? 하지만 시인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하찮고 가벼운 질량을 통해 태산보다 무거운 삶의 무게를 느낀다. 성사적 상상력을 통해 쌀 한 톨 “안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해 질 녘 어깨에 삽을 걸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아, 쌀 한 톨은 저절로 생겨난 게 아니라 누군가의 땀으로 빚어진 경건한 물질이었던 것이다. 하여 시인은 그들을 향해,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 있는 신성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함민복의 「사과를 먹으며」는 성사적 상상력의 백미다. 시인은 사과를 먹으면서 사과꽃에 내려앉던 햇살을 먹고, 사과를 푸르게 하던 장맛비를 먹고,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고, 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도 먹고, 사과나무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도 먹고, 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도 먹는다. 그뿐 아니다. 사과나무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고, (그 딸이 하늘을 바라보면서 꾸었을 꿈도 먹는다.)
시인의 성사적 상상력은 시공으로 한없이 뻗어간다. 하여, 사과나무의 세월을 먹고, 사과나무의 나이테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자양분인 흙을 먹고, 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있는 지구의 중력을 먹고,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 사과를 먹으며 지구의 중력과 우주를 먹는 시인은 틀림없이 하나님도 먹었을 것이다. 사과를 먹으며 우주를 먹는, 심지어 하나님을 먹는 시인은 불행할까 행복할까? 빈곤할까 부유할까?
성사 중의 성사
성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성사 중의 성사가 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경험했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꿈꿨다. 하나님의 사랑의 현존은 나사렛 예수 안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났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탁월한 성사”(sacramentum par excellence)였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을 상상했다. 신성의 운명을 거역한 반쪽 인간, 욕망의 수렁에 빠진 괴물 같은 인간이 참사람 되는 것을 상상했다.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 곧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상상했다.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신성하게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는 것을 상상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관계가 새로워지는 것을 상상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상상했다. 죄인들을 조건 없이 사랑한 예수를 통해 그들도 조금씩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원수된 것이 십자가로 소멸되어 한 몸이 되는 것을 상상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혐오가 용납으로 변하고 배제가 포용으로 변하는 새로운 관계를 상상했다.
그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위선자들이 아니라 어린아이 같이 순진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천국을 상상했고, 오후에 일을 시작한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임금이 지불되는 평등한 세상을 상상했다. 그들은 세리도 인간 취급받고 창녀도 사람대접받는 연민의 나라를 상상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회복되는 치유의 공간을 상상했다. 혈연을 넘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한 가족 되는 신성한 가족공동체를 상상했다.
그들은 “탁월한 성사”였던 나사렛 예수를 통해 교리와 율법에 갇힌 창백하고 완고한 하나님에서 해방되었다. 하나님은 심판과 징벌이기 전에 연민과 사랑이었다. 하나님은 아빠가 되기도 하고, 연인이 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하고, 엄마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 종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탁월한 성사”였던 나사렛 예수를 통해 교리와 율법에 갇힌 창백하고 완고한 하나님에서 해방되었다. 하나님은 심판과 징벌이기 전에 연민과 사랑이었다. 탁월한 성사인 예수를 바라보며 그들의 성사적 상상력이 자유롭게 날아올랐을 때, 하나님은 아빠가 되기도 하고, 연인이 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하고, 엄마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 종이 되기도 했다. 예수님이 보여준 모든 동작과 행위와 언어들은 하나님의 신비를 구체적인 모습으로 보여주는 성사였다.(mysteria et sacramenta carnis Christi)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었다.(골 1:15)
대림절에 한국교회는 무엇을 상상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새로운 존재에 대한 상상력은 메마르고, 탐욕스럽고 고집스러운 인간들이 큰소리 지르는 것 같다. 새로운 관계에 대한 상상력은 간데없고, 이분법적 편 가르기와 혐오가 판을 치는 것 같다. 엄마의 품 같은 치유공동체에 대한 상상력은 고갈되고, 비교와 경쟁으로 운영하는 권위적인 조직이 활개를 치는 것 같다. 사람을 신화(神化)하기 위해 즐거이 사람이 되신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상상력은 퇴화하고, 정죄와 처벌에 능한 무서운 하나님이 군림하는 것 같다.
새로운 존재에 대한 상상력, 새로운 관계에 대한 상상력,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상상력이 메마른 한국교회, 무엇보다 사랑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연민에 대한 성사적 상상력이 고갈된 한국교회를 보는 것이 고통스럽다.
- 이민재
“무엇보다도 너는 네 상상력을 지켜라.
그래야 생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기가 상상한 것으로 이루어지는 존재다.”
(Man imagines what he is.)
「잠언」의 지혜자는 말한다.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잠 4:23) 나는 이것을 이렇게 읽는다. “무엇보다도 너는 네 상상력을 지켜라. 그래야 생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물론 철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는 말한다. “인간은 자기가 먹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존재다.”(Man eats what he is.) 나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은 자기가 상상한 것으로 이루어지는 존재다.”(Man imagines what he is.)
인간은 상상한 것을 어떻게든 구현하려고 한다. 그런데 상상력은 길들이지 않은 말과 같아서 내버려 두면 제멋대로 날뛴다. 길들이지 않으면 상상력은 저급한 욕망을 실현하려는 환상에 쉽게 사로잡힌다. 따라서 상상력을 길들이지 않으면 저급한 욕망을 실현하려는 충동이 생의 시간을 갉아먹는다. 바울이 권고하는 것처럼 “세월을 아끼려면”(엡 5:16) 상상력을 지켜야 한다.
사실 세속 문화는 저급한 욕망의 포로가 된 상상력의 산물이다. 천박한 물질만능주의, 음란한 향락문화, 관능적인 외모지상주의, 퇴폐적인 성문화, 선정적인 언론문화, 관음적인 인터넷 문화, 야비한 댓글 문화, 잔인한 폭력문화 따위가 그렇다. 요즘 우리는 대한민국이 더 이상 마약 청정국가가 아니라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이러한 현실은 욕망의 늪에 빠진 상상력과 무관하지 않다. 타락한 문화일수록 욕망에 취한 상상력이 그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육체와 욕망을 매도할 생각은 없다. 육체와 욕망은 인간을 구성하는 실재(reality)다. 성경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그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창 2:7)고 말한다. 인간은 흙과 생기의 통합체다. 육과 영, 욕망과 신성이 통합되어야 비로소 “생명체”(생령)가 된다. 사람다운 사람이 된다. 육과 영, 욕망과 신성이 균형을 잃으면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따라서 사람이라면 육체를 위하는 만큼 영을 존중해야 하며, 욕망을 충족하려는 만큼 신성을 실현해야 한다. 이건 선택 사항이 아니다. 삶이 인간에게 부여한 운명, 다시 말해 하나님이 정해놓은 인간의 운명이다. 영과 신성에 무지하거나 그것을 무시할 때 인간은 온전한 생명체가 되지 못한다. 인간의 요건을 갖추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인간, 영의 은총과 신성의 운명을 거역한 반쪽 인간, “괴물”이다!
상상력의 정화
요즘 세상, 괴물들 천지다. 괴물이 괴물을 낳고, 대물림하여 괴물을 길러낸다. 괴물들끼리 모여 서로의 욕망에 불을 지른다. 신성한 상상력은 고사한 나무처럼 말라비틀어지고, 괴물의 상상력만 독버섯 피어나듯 기승부린다. 저급하고, 저속하고, 천박하고, 경박하고, 음란하고, 음침하고, 잔인하고, 야비하고, 음습하고, 음산한 괴물들의 욕망과 괴물의 상상력은 교회에까지 침투한다. 교회에서조차 인간의 요건을 갖추지 못한 인간, 하나님이 정해주신 신성의 운명을 거역한 반쪽 인간 즉 “괴물”이 활보한다.
기독교가 말하는 구원이란 무엇일까? 예수 믿고 죽은 다음 천당에 가는 거? 그런 믿음을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그 전에 이뤄야 할 것이 있다. 육과 욕망만 비대하게 발달한 반쪽 인간이 온전한 인간 되는 것, 신성의 운명을 거역한 괴물이 참사람 되는 것. 그러려면 욕망에 취한 상상력을 깨워야 하고, 제멋대로 날뛰는 육의 상상력을 영의 상상력으로 길들여야 한다. 저속한 욕망에 오염된 괴물의 상상력을 정결한 신성의 상상력으로 정화해야 한다.
상상력을 지키지 못하고, 상상력을 길들이지 못하고, 상상력을 정화하지 못하면 기독교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영혼구원”은 김빠진 구호에 머물고 만다. 구원받았다면서도 온갖 저속한 상상에 휩싸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상상력을 정화하지 못하는 영혼구원은 종교적 위선으로 인도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그러면 상상력을 어떻게 정화할 수 있을까? 번영신앙과 율법신앙으로는 불가능하다. 한국교회의 상상력을 저속하게 만든 주범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관상기도 수련이다.
알다시피 관상기도란 성 삼위 하나님의 신성한 현존과 사랑의 친교 속에 머무는 기도다. 그렇기에 관상기도는 영을 살리고 신성을 깨운다. 관상기도는 영을 살려 육만 비대한 반쪽 인간을 온전한 인간으로 만든다. 신성을 깨워 삶이 부여한 성스러운 운명을 살아간다. 영과 신성이 활성화됨에 따라 상상력도 달라진다. 괴물의 상상력은 인간의 상상력으로, 더 나아가 천사의 상상력으로 변형된다. 이름하여 “관상적” 상상력이 발달하는 것이다.
관상적 상상력은 앞글에서 살펴본 것처럼 모태에 대한 상상으로 이끌어간다. 다윗은 자기의 몸(형질)이 지어지기 전에 자기의 본질 자아를 보고 계신 하나님의 따뜻한 시선을 상상한다. 얼마나 성스럽고 아름다운 상상인가. 이것이 바로 “근원에 대한 상상력”(imagination of origin)이다. 근원에 대한 상상력은 어머니 태에서 이미 예언자로 부름받았다고 고백하는 예언자들에게서도 볼 수 있고, “아브라함이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에게서도 볼 수 있다.
성서의 성사적 상상력
일단 깨어나면 관상적 상상력은 근원에 대한 상상력에 이어 “성사적 상상력”(sacramental imagination)으로 진화한다. 근원에 대한 상상력이 존재의 본질을 통찰한다면, 성사적 상상력은 만물(萬物)과 만인(萬人)과 만사(萬事)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감지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통찰하며, 하나님이 이루실 일을 꿈꾼다. 예를 들어보자.
예수님은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 하늘의 새와 들에 핀 꽃을 보며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을 알아차린다. 새와 들꽃은 하찮은 사물이기를 멈추고 성사가 된다. 바울은 만물의 성사성(聖事性)을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 창조 때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롬 1:19-20) 만물은 그리스도를 드러낸다. “그리스도는 만물이시며, 만물 안에 계십니다.”(골 3:11)
만물뿐인가, “사람”도 하나님을 드러낸다. 야곱은 자기를 철천지원수로 여기는 형에게서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형님의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합니다.”(창 33:10) 예수님은 무지렁이 같은 사람들에게서 신성의 빛을 보신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 5:14) 예수님이 최후의 심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보잘것없는 사람들 곧 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방황하는 나그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을 때(마 25:40) 성사적 상상력은 절정에 이른다.
요셉에겐 “사건”이 성사였다. 알다시피 요셉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꾼 죄로 형들에게 죽을 뻔했고, 큰형의 만류로 다행히 죽음은 면했지만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가야 했다. 이집트에서는 음탕한 유부녀가 동침하자는 유혹을 뿌리친 죄로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기도 했다. 억울한 일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요셉은 자기의 생을 이렇게 해석한다. “형님들이 나를 이곳에 팔아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창 45:5) 요셉은 자기가 겪은 억울한 일들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 곧 하나님의 삶의 배열을 본다.
시편 시인은 누구보다 성사적 상상력이 발달한 사람이다. 그는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위엄을 본다. “주 우리의 하나님, 주님의 이름이 온 땅에서 어찌 그리 위엄이 넘치는지요?”(시 8:1) 시인은 하늘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준다.”(시 19:1) 하늘뿐 아니라 산과 바다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현존을 느낀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은 하늘에 가득 차 있고, 주님의 미쁘심은 궁창에 사무쳐 있습니다. 주님의 의로우심은 우람한 산줄기와 같고, 주님의 공평하심은 깊고 깊은 심연과도 같습니다.”(시 36:5-6) 공간적 차원에서 펼쳐지던 시인의 성사적 상상력은 시간으로 확장한다. “낮은 낮에게 말씀을 전해주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알려준다.”(시 19:2)
문학과 성사적 상상력
성사적 상상력은 문학 작품에서도 볼 수 있다. 윌리엄 블레이크의 유명한 시 「순수의 전조」는 성사적 상상력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는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지상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상 세계를 본다. 그뿐 아니라 손바닥 안에 무한을 담고, 한순간 속에서 영원을 본다.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을 쥐고 / 한순간 속에서 영원을 보라.”
이러한 성사적 상상력이 있기에 블레이크는 새장에 갇힌 새를 보면서 천국의 분노를 느끼고, 굶주린 개를 보면서 한 나라의 파멸을 감지한다.
새장에 갇힌 한 마리 로빈새는
천국을 온통 분노케 하며,
주인집 문 앞에 굶주림으로 쓰러진 개는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
주인집 문 앞에서 굶어 죽은 개가 한 나라의 멸망을 예고한다면, 이태원의 어느 거리를 걷다가 쓰러진 백쉰여덟 명의 젊은이들은 무엇을 예고할까? 그들의 죽음을 추상화하려고 기를 쓰고,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에 대한 구체적 상상을 불허하는 관 주도의 추모는 얼마나 괴물스러운가?
시인 정호승은 「쌀 한 톨」을 통해 성사적 상상력을 펼쳐 보인다. 아주 작고 하찮아 보이는 쌀 한 톨을 통해 그는 생을 경건하게 대하는 법을 배운다.
쌀 한 톨 앞에 무릎을 꿇다
고마움을 통해 인생이 부유해진다는
아버님의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쌀 한 톨 안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해 질 녘
어깨에 삽을 걸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
쌀 한 톨, 얼마나 하찮고 가벼운 질량인가? 하지만 시인은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하찮고 가벼운 질량을 통해 태산보다 무거운 삶의 무게를 느낀다. 성사적 상상력을 통해 쌀 한 톨 “안으로 난 길을 따라 걷다가” “해 질 녘 어깨에 삽을 걸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이다. 아, 쌀 한 톨은 저절로 생겨난 게 아니라 누군가의 땀으로 빚어진 경건한 물질이었던 것이다. 하여 시인은 그들을 향해, 그리고 그들의 배후에 있는 신성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함민복의 「사과를 먹으며」는 성사적 상상력의 백미다. 시인은 사과를 먹으면서 사과꽃에 내려앉던 햇살을 먹고, 사과를 푸르게 하던 장맛비를 먹고,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고, 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도 먹고, 사과나무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도 먹고, 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도 먹는다. 그뿐 아니다. 사과나무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고, (그 딸이 하늘을 바라보면서 꾸었을 꿈도 먹는다.)
시인의 성사적 상상력은 시공으로 한없이 뻗어간다. 하여, 사과나무의 세월을 먹고, 사과나무의 나이테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자양분인 흙을 먹고, 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있는 지구의 중력을 먹고,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 사과를 먹으며 지구의 중력과 우주를 먹는 시인은 틀림없이 하나님도 먹었을 것이다. 사과를 먹으며 우주를 먹는, 심지어 하나님을 먹는 시인은 불행할까 행복할까? 빈곤할까 부유할까?
성사 중의 성사
성사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성사 중의 성사가 있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고,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경험했고, 하나님이 하실 일을 꿈꿨다. 하나님의 사랑의 현존은 나사렛 예수 안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났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탁월한 성사”(sacramentum par excellence)였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을 상상했다. 신성의 운명을 거역한 반쪽 인간, 욕망의 수렁에 빠진 괴물 같은 인간이 참사람 되는 것을 상상했다. 그리스도를 닮은 온전한 사람, 곧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경지에까지 다다른 사람이 되는 것을 상상했다.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신성하게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는 것을 상상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관계가 새로워지는 것을 상상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상상했다. 죄인들을 조건 없이 사랑한 예수를 통해 그들도 조금씩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원수된 것이 십자가로 소멸되어 한 몸이 되는 것을 상상했다. 그리스도 안에서 혐오가 용납으로 변하고 배제가 포용으로 변하는 새로운 관계를 상상했다.
그들은 새로운 공동체를 상상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위선자들이 아니라 어린아이 같이 순진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천국을 상상했고, 오후에 일을 시작한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임금이 지불되는 평등한 세상을 상상했다. 그들은 세리도 인간 취급받고 창녀도 사람대접받는 연민의 나라를 상상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회복되는 치유의 공간을 상상했다. 혈연을 넘어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 한 가족 되는 신성한 가족공동체를 상상했다.
그들은 “탁월한 성사”였던 나사렛 예수를 통해 교리와 율법에 갇힌 창백하고 완고한 하나님에서 해방되었다. 하나님은 심판과 징벌이기 전에 연민과 사랑이었다. 하나님은 아빠가 되기도 하고, 연인이 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하고, 엄마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 종이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탁월한 성사”였던 나사렛 예수를 통해 교리와 율법에 갇힌 창백하고 완고한 하나님에서 해방되었다. 하나님은 심판과 징벌이기 전에 연민과 사랑이었다. 탁월한 성사인 예수를 바라보며 그들의 성사적 상상력이 자유롭게 날아올랐을 때, 하나님은 아빠가 되기도 하고, 연인이 되기도 하고, 친구가 되기도 하고, 엄마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 종이 되기도 했다. 예수님이 보여준 모든 동작과 행위와 언어들은 하나님의 신비를 구체적인 모습으로 보여주는 성사였다.(mysteria et sacramenta carnis Christi)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었다.(골 1:15)
대림절에 한국교회는 무엇을 상상하고 있을까? 안타깝게도, 새로운 존재에 대한 상상력은 메마르고, 탐욕스럽고 고집스러운 인간들이 큰소리 지르는 것 같다. 새로운 관계에 대한 상상력은 간데없고, 이분법적 편 가르기와 혐오가 판을 치는 것 같다. 엄마의 품 같은 치유공동체에 대한 상상력은 고갈되고, 비교와 경쟁으로 운영하는 권위적인 조직이 활개를 치는 것 같다. 사람을 신화(神化)하기 위해 즐거이 사람이 되신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상상력은 퇴화하고, 정죄와 처벌에 능한 무서운 하나님이 군림하는 것 같다.
새로운 존재에 대한 상상력, 새로운 관계에 대한 상상력,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상상력이 메마른 한국교회, 무엇보다 사랑의 하나님과 하나님의 연민에 대한 성사적 상상력이 고갈된 한국교회를 보는 것이 고통스럽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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