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회개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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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31회 작성일 24-01-11 18:14본문
세례자 요한이 광야에 나타나서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마가복음 1:4)
예수의 오심은 “복음의 시작”(막 1:1)이다. 복음의 시작은 천국(또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기도 하다. 천국은 세속나라의 모순과 부조리가 사라진 행복한 세상이며, 인간통치의 불의와 불공정이 극복된 “새 하늘과 새 땅”이다. 복음의 시작은 세속왕국의 불완전함과 인간통치의 어리석음을 극복한 새로운 행복의 시작을 뜻한다. 예수는 그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벗들, 그 길을 걷고 있는가. 대림절에 우리는 그 길을 우리의 삶 속에 “닦아야” 한다. 일상 속에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해야” 한다. 그러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다. 새로운 행복에 이르는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었다. 좋은 학벌과 스펙을 쌓는 게 아니었다. 인기와 명예와 권력을 거머쥐는 것도 아니었다. 회개의 세례였다!
죄의 종류
회개란 무엇일까? 잘못된 행위를 성찰하고, 후회하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일까? 물론 회개에는 자기성찰의 측면이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회개는 자기성찰보다 훨씬 심오하다. 세례 요한이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자(막 1:4) 사람들은 죄를 고백하고 나서 세례를 받았다. 회개는 죄의 고백과 관련되며, 세례는 그것을 확증한다.
회개가 죄를 고백하는 것이라면 죄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다. 죄란 무엇일까? 첫째, “행위”와 관련된 죄. 이 죄는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죄이면서도 진정한 죄의 자각(죄의식)에서 멀어지게 하는 죄다. 예를 들어 살인이나 도둑질은 죄이지만 보통 사람들은 거의 짓지 않는다. 그렇기에 죄를 행위와 관련지으면 죄 인식은 피상적 수준에 머문다. 이때 머리로는 죄인임을 알지만 “실제로” 죄인임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죄에서 구원 받으려는 갈망도 약하다.
둘째, “마음”과 관련된 죄. “악의, 시기, 살의, 적의, 교만, 오만, 자만, 뽐냄, 질투, 분냄, 탐욕, 무정함, 난폭함, 무모함, 무절제”(롬 1:29-31) 같이 내면의 상태와 관련된 죄다. 평생 치유되지 않은 상처와 중독, 방아쇠를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하는 악성감정, 이기적인 욕망에 뿌리내린 행복프로그램,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열등감이나 수치심, 삶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도 빼놓을 수 없다.
마음과 관련된 이러한 죄를 사도 바울은 “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죄”(롬 7:20)라고 표현했다. 행위 차원에서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빌 3:6)이었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내적 현실(심리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미움, 증오, 적의, 살의라는 “지속적인 죄의 상태”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게 그를 “훼방자, 박해자, 폭행자”(딤전 1:13)로 만들었음을 깨달았을 때, “죄인의 우두머리(괴수)”라고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딤전 1:15)
죄인의 괴수
이런 물음이 생긴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로 짓는 죄보다 내면의 지속적인 상태인 마음의 죄가 더 문제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죄인의 괴수”라고까지 할 이유가 뭔가? 마음의 세 가지 성격 때문이다.
첫째, 마음은 자란다.
둘째, 마음은 어둡다.
셋째, 마음은 전염된다.
첫째, 갓 태어난 아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는 과정은 마음이 자라는 과정이기도 하다. 갓난아이의 마음이 무심(無心)에 가깝다면 어른의 마음은 혼란의 아수라장이나 다름없다. 둘째, 마음은 어둡다. 좋은 감정과 생각은 쉽게 발설하고 나쁜 감정과 생각은 숨기는 성향 때문이다.
그런데 삶의 과정에서 점점 커지는 어두운 마음은 관계를 통해 서로 전염되기까지 한다.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 존재하고 있으며, 미래에 존재할 모든 사람은 관계의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두운 마음의 상태 또한 통시적으로나 공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바로 이것, 통시적・공시적인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서 마음을 통해 이뤄지는 “어둠(죄, 불의)의 연대”는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확장된다. “마음을 통한 어둠의 우주적 연대”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엡 2:2)이다. 이것이 죄와 어둠과 사탄의 “권세”다. 이러한 죄의 실상을 깨달을 때 그 누가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지한 죄
유감스럽지만 죄에 대한 기독교 담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행위로 드러나는 죄보다도, 지속적 내면 상태인 마음의 죄보다도 더욱 심각한 죄가 있다. “본질에 무지한 죄”다. 그리스어로 죄를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한다. 화살이 과녁을 벗어났다는 뜻이다. 따라서 죄란 목표(과녁)를 빗나가는 것이며, 원래 도달해야 할 곳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도달해야 할 곳은 어디일까?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도달해야 할 곳/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참자아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죄다. 본질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과 단절되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존재의 과녁에서 빗나갈 때 우리 안에 있는 신성은 퇴화하고 악마성이 발화發火한다. 마음을 통한 “죄와 불의의 우주적 연대”(곧 죄와 사탄의 권세)는 막강한 힘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온갖 악행을 저지르게 한다. 신의 형상은 물론 인간의 얼굴을 잃은 채 우리는 차츰 야수野獸의 몰골이 되어간다. 이런 처지를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은 자기들 속에 있는 무지와 자기들의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지각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들은 수치의 감각을 잃고, 자기들의 몸을 방탕에 내맡기고, 탐욕을 부리며, 모든 더러운 일을 합니다.”
(엡 4:18-19)
이 구절에서 바울은 죄의 세 차원을 모두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라는 본질 차원에 대한 “무지”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죄(본질 차원의 죄), 수치의 감각을 잃고 탐욕을 부리는 죄(마음 차원의 죄), 몸을 방탕에 내맡기고 모든 더러운 일을 하는 죄!(행동 차원의 죄) 따라서 모든 죄의 시작은 “본질에 무지한” 죄다. 이때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되며, 하나님의 형상(참자아)을 잃기 때문이다. 이게 가장 심각한 죄다.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을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큰 죄인가.
본질에서 떠나 있는 우리의 모습을 깨달으면 절규하지 않을 수 없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 이때 어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회개란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이아”는 가던 길을 멈추고 반대 방향으로 뒤돌아서서 새로운 길을 걷는 것이다. 죄에 세 차원이 있는 것처럼 회개에도 세 차원이 있다. 첫째, 행위 차원의 회개. 잘못된 행실을 성찰하고, 후회하고, 교정한다. 그런데 작심삼일일 때가 많다. 이유가 있다. 마음의 죄를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때 회개는 “마음의 정화”라는 새로운 차원에 돌입한다. 하지만 이런 회개는 끝이 없다. 마음이라는 심리현실에 쌓여 있는 죄, 즉 부정성의 크기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깊기 때문이다. 각 사람의 생의 과정을 통하여 쌓이고, 가족을 통해 대를 이어 쌓이고, 관계의 네트워크를 통해 쌓이고, 역사와 문화, 관습과 전통을 통해 쌓인 부정성의 크기는 한 사람의 개인의지self-will로는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 차원의 회개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본질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참자아를 각성하여, 참자아로 전향하고, 그것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이것이 근본적인 회개다. 그리고 이것이 심리현실에서 이뤄지는 죄와 불의의 우주적 연대를 해체하는 결정적인 길이다. 이때 우리는 신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 이때 무한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삶에 휘돌기 시작한다.
세 번째 차원의 회개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본질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참자아를 각성하여, 참자아로 전향하고, 그것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이것이 근본적인 회개다. 그리고 이것이 심리현실에서 이뤄지는 죄와 불의의 우주적 연대를 해체하는 결정적인 길이다.
물론 이러한 회개도 자기-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런 회개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기독교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in 그리스도와 함께with 그리스도를 통하여through 그리스도처럼like, 지속적으로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고, 참자아에 뿌리내리고, 참자아로 살아갈 수 있다. 이때 우리는 그리스도로as 살아간다.
하나님의 성품은 존재에 스며들고, 하나님의 생명은 삶의 구석구석을 적신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이 새로운 습관이 되고, 하나님의 생명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새로운 운명이 된다. 세속에 물들고 죄의 사슬에 매였을 때와 비교하면 행복 추구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래서 토머스 키팅은 말했을 것이다. “회개는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라고.
향심기도
향심기도 수행은 이러한 회개와 구원, 행복에 관한 담론을 실제 현실로 경험하게 한다. 어떻게? 향심기도는 침묵 속에서 존재의 중심에 현존하시고 거기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고요히 바라보는(지향하는) 기도다. 그런데 수시로 생각들이 출몰하면서 그러한 바라봄(지향)을 방해한다. 수행자는 그런 상태를 알아차릴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 하나님의 내적 현존과 활동을 다시 지향한다.
생각에 붙들려 있던 상태에서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을 지향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회개의 실현이다. 그것이야말로 근본적인 돌아섬(메타노이아)이기 때문이다.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을 지향할 때, 수행자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다.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 되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로운 습관을 만들고, 새로운 운명을 짓는다.
새로운 행복이 시작된다. 답답해하는 이웃의 사정을 들어주는 경청의 행복이, 작은 것이지만 아낌없이 베푸는 나눔의 행복이, 곤경에 처한 사람을 힘닿는 대로 돕는 섬김의 행복이, 마침내 야만의 얼굴이 사람의 얼굴로, 사람의 얼굴이 신의 형상으로 변형되는 성화의 행복이….
아, 마침내 “비범한 사랑을 품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Live ordinary life with extraordinary love 소박한 이타利他의 행복이 마음과 일상을 꽃밭으로 만든다. 복음은 이렇게 완성되고, 천국은 이렇게 현실이 된다.
- 이민재
(마가복음 1:4)
예수의 오심은 “복음의 시작”(막 1:1)이다. 복음의 시작은 천국(또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기도 하다. 천국은 세속나라의 모순과 부조리가 사라진 행복한 세상이며, 인간통치의 불의와 불공정이 극복된 “새 하늘과 새 땅”이다. 복음의 시작은 세속왕국의 불완전함과 인간통치의 어리석음을 극복한 새로운 행복의 시작을 뜻한다. 예수는 그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벗들, 그 길을 걷고 있는가. 대림절에 우리는 그 길을 우리의 삶 속에 “닦아야” 한다. 일상 속에서 “주님의 길을 예비하고, 그의 길을 곧게 해야” 한다. 그러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다. 새로운 행복에 이르는 길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돈을 많이 버는 게 아니었다. 좋은 학벌과 스펙을 쌓는 게 아니었다. 인기와 명예와 권력을 거머쥐는 것도 아니었다. 회개의 세례였다!
죄의 종류
회개란 무엇일까? 잘못된 행위를 성찰하고, 후회하고, 똑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일까? 물론 회개에는 자기성찰의 측면이 있다. 하지만 기독교의 회개는 자기성찰보다 훨씬 심오하다. 세례 요한이 “죄를 용서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자(막 1:4) 사람들은 죄를 고백하고 나서 세례를 받았다. 회개는 죄의 고백과 관련되며, 세례는 그것을 확증한다.
회개가 죄를 고백하는 것이라면 죄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이다. 죄란 무엇일까? 첫째, “행위”와 관련된 죄. 이 죄는 우리가 가장 잘 아는 죄이면서도 진정한 죄의 자각(죄의식)에서 멀어지게 하는 죄다. 예를 들어 살인이나 도둑질은 죄이지만 보통 사람들은 거의 짓지 않는다. 그렇기에 죄를 행위와 관련지으면 죄 인식은 피상적 수준에 머문다. 이때 머리로는 죄인임을 알지만 “실제로” 죄인임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당연히 죄에서 구원 받으려는 갈망도 약하다.
둘째, “마음”과 관련된 죄. “악의, 시기, 살의, 적의, 교만, 오만, 자만, 뽐냄, 질투, 분냄, 탐욕, 무정함, 난폭함, 무모함, 무절제”(롬 1:29-31) 같이 내면의 상태와 관련된 죄다. 평생 치유되지 않은 상처와 중독, 방아쇠를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하는 악성감정, 이기적인 욕망에 뿌리내린 행복프로그램,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열등감이나 수치심, 삶에 대한 두려움이나 불안도 빼놓을 수 없다.
마음과 관련된 이러한 죄를 사도 바울은 “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죄”(롬 7:20)라고 표현했다. 행위 차원에서 바울은 “율법의 의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빌 3:6)이었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내적 현실(심리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미움, 증오, 적의, 살의라는 “지속적인 죄의 상태”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게 그를 “훼방자, 박해자, 폭행자”(딤전 1:13)로 만들었음을 깨달았을 때, “죄인의 우두머리(괴수)”라고 실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딤전 1:15)
죄인의 괴수
이런 물음이 생긴다.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로 짓는 죄보다 내면의 지속적인 상태인 마음의 죄가 더 문제라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다고 “죄인의 괴수”라고까지 할 이유가 뭔가? 마음의 세 가지 성격 때문이다.
첫째, 마음은 자란다.
둘째, 마음은 어둡다.
셋째, 마음은 전염된다.
첫째, 갓 태어난 아이가 성장하여 어른이 되는 과정은 마음이 자라는 과정이기도 하다. 갓난아이의 마음이 무심(無心)에 가깝다면 어른의 마음은 혼란의 아수라장이나 다름없다. 둘째, 마음은 어둡다. 좋은 감정과 생각은 쉽게 발설하고 나쁜 감정과 생각은 숨기는 성향 때문이다.
그런데 삶의 과정에서 점점 커지는 어두운 마음은 관계를 통해 서로 전염되기까지 한다. 과거에 존재했고, 현재 존재하고 있으며, 미래에 존재할 모든 사람은 관계의 네트워크를 통해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어두운 마음의 상태 또한 통시적으로나 공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바로 이것, 통시적・공시적인 관계의 네트워크 속에서 마음을 통해 이뤄지는 “어둠(죄, 불의)의 연대”는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확장된다. “마음을 통한 어둠의 우주적 연대”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엡 2:2)이다. 이것이 죄와 어둠과 사탄의 “권세”다. 이러한 죄의 실상을 깨달을 때 그 누가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무지한 죄
유감스럽지만 죄에 대한 기독교 담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행위로 드러나는 죄보다도, 지속적 내면 상태인 마음의 죄보다도 더욱 심각한 죄가 있다. “본질에 무지한 죄”다. 그리스어로 죄를 “하마르티아”hamartia라고 한다. 화살이 과녁을 벗어났다는 뜻이다. 따라서 죄란 목표(과녁)를 빗나가는 것이며, 원래 도달해야 할 곳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도달해야 할 곳은 어디일까?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고 한다. 바로 이것이 인간이 도달해야 할 곳/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참자아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가장 심각한 죄다. 본질에서 벗어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과 단절되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 존재의 과녁에서 빗나갈 때 우리 안에 있는 신성은 퇴화하고 악마성이 발화發火한다. 마음을 통한 “죄와 불의의 우주적 연대”(곧 죄와 사탄의 권세)는 막강한 힘으로 우리를 사로잡아 온갖 악행을 저지르게 한다. 신의 형상은 물론 인간의 얼굴을 잃은 채 우리는 차츰 야수野獸의 몰골이 되어간다. 이런 처지를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은 자기들 속에 있는 무지와 자기들의 마음의 완고함 때문에 지각이 어두워지고,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들은 수치의 감각을 잃고, 자기들의 몸을 방탕에 내맡기고, 탐욕을 부리며, 모든 더러운 일을 합니다.”
(엡 4:18-19)
이 구절에서 바울은 죄의 세 차원을 모두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라는 본질 차원에 대한 “무지”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죄(본질 차원의 죄), 수치의 감각을 잃고 탐욕을 부리는 죄(마음 차원의 죄), 몸을 방탕에 내맡기고 모든 더러운 일을 하는 죄!(행동 차원의 죄) 따라서 모든 죄의 시작은 “본질에 무지한” 죄다. 이때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게 되며, 하나님의 형상(참자아)을 잃기 때문이다. 이게 가장 심각한 죄다. 온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을 잃어버렸으니 얼마나 큰 죄인가.
본질에서 떠나 있는 우리의 모습을 깨달으면 절규하지 않을 수 없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주겠습니까?” 이때 어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이시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회개란
회개를 뜻하는 “메타노이아”는 가던 길을 멈추고 반대 방향으로 뒤돌아서서 새로운 길을 걷는 것이다. 죄에 세 차원이 있는 것처럼 회개에도 세 차원이 있다. 첫째, 행위 차원의 회개. 잘못된 행실을 성찰하고, 후회하고, 교정한다. 그런데 작심삼일일 때가 많다. 이유가 있다. 마음의 죄를 다스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때 회개는 “마음의 정화”라는 새로운 차원에 돌입한다. 하지만 이런 회개는 끝이 없다. 마음이라는 심리현실에 쌓여 있는 죄, 즉 부정성의 크기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깊기 때문이다. 각 사람의 생의 과정을 통하여 쌓이고, 가족을 통해 대를 이어 쌓이고, 관계의 네트워크를 통해 쌓이고, 역사와 문화, 관습과 전통을 통해 쌓인 부정성의 크기는 한 사람의 개인의지self-will로는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다.
세 번째 차원의 회개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본질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참자아를 각성하여, 참자아로 전향하고, 그것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이것이 근본적인 회개다. 그리고 이것이 심리현실에서 이뤄지는 죄와 불의의 우주적 연대를 해체하는 결정적인 길이다. 이때 우리는 신성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 이때 무한한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의 삶에 휘돌기 시작한다.
세 번째 차원의 회개가 있다. 그것은 자신의 본질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참자아를 각성하여, 참자아로 전향하고, 그것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이것이 근본적인 회개다. 그리고 이것이 심리현실에서 이뤄지는 죄와 불의의 우주적 연대를 해체하는 결정적인 길이다.
물론 이러한 회개도 자기-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런 회개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기독교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다.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in 그리스도와 함께with 그리스도를 통하여through 그리스도처럼like, 지속적으로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고, 참자아에 뿌리내리고, 참자아로 살아갈 수 있다. 이때 우리는 그리스도로as 살아간다.
하나님의 성품은 존재에 스며들고, 하나님의 생명은 삶의 구석구석을 적신다.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이 새로운 습관이 되고, 하나님의 생명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새로운 운명이 된다. 세속에 물들고 죄의 사슬에 매였을 때와 비교하면 행복 추구의 방향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래서 토머스 키팅은 말했을 것이다. “회개는 행복을 추구하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라고.
향심기도
향심기도 수행은 이러한 회개와 구원, 행복에 관한 담론을 실제 현실로 경험하게 한다. 어떻게? 향심기도는 침묵 속에서 존재의 중심에 현존하시고 거기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고요히 바라보는(지향하는) 기도다. 그런데 수시로 생각들이 출몰하면서 그러한 바라봄(지향)을 방해한다. 수행자는 그런 상태를 알아차릴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 하나님의 내적 현존과 활동을 다시 지향한다.
생각에 붙들려 있던 상태에서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을 지향하는 것, 이것이 바로 근본적인 회개의 실현이다. 그것이야말로 근본적인 돌아섬(메타노이아)이기 때문이다. 생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현존과 활동을 지향할 때, 수행자는 옛사람을 벗고 새사람을 입는다. 하나님의 생명과 하나 되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 새로운 존재가 되어, 새로운 습관을 만들고, 새로운 운명을 짓는다.
새로운 행복이 시작된다. 답답해하는 이웃의 사정을 들어주는 경청의 행복이, 작은 것이지만 아낌없이 베푸는 나눔의 행복이, 곤경에 처한 사람을 힘닿는 대로 돕는 섬김의 행복이, 마침내 야만의 얼굴이 사람의 얼굴로, 사람의 얼굴이 신의 형상으로 변형되는 성화의 행복이….
아, 마침내 “비범한 사랑을 품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Live ordinary life with extraordinary love 소박한 이타利他의 행복이 마음과 일상을 꽃밭으로 만든다. 복음은 이렇게 완성되고, 천국은 이렇게 현실이 된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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