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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세이) 풀-콤플렉스에서 나무의 영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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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15회 작성일 23-10-25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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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인은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높이 치솟을 것이다.
(시 92:12)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황지우)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말했다.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요 8:39)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에서 시작되는 구원 공동체에 속해 있음을 자랑으로 여겼다. 예수께서 대답했다. “너희는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말하지 말아라. 하나님께서는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다 찍어서 불 속에 던지신다.”(눅 3:8)



풀과 나무
어느 집단에 속해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구원은 개인의 문제다. 좋은 열매를 맺는 하나의 나무가 되어야 한다. 시인 황지우가 노래한 것처럼,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큰 교회, 유명한 교회, 역사 깊은 교회에 소속했다고 구원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구원의 길에서 집단적(교회적) 정체성은 무용하다. 교회는 “자기 온몸으로 나무가 된” 이들의 모임이다. 구원의 길을 홀로, 단독으로, 외로이, 치열하게 걷는 이들이 모여 연대하는 공동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가 되는 과정은 만만치 않다. 오랜 세월이 걸리기 때문이다. 그 세월을 견디지 못해 사람들은 빠른 길을 찾는다. “풀의 길”을 모색한다. 그런 사람들은 나쁜 사람들이다. “악인들은 풀처럼 돋아난다.”(시 92:7) 그래서 시편 다른 곳에서 이렇게 권고한다. “악한 자들이 잘 된다고 해서 속상해하지 말며, 불의한 자들이 잘 산다고 해서 시새워하지 말아라. 그들은 풀처럼 빨리 시들고, 푸성귀처럼 사그라지고 만다.”(시 37:1-2)

“의인”은 그렇지 않다. “종려나무 같이 우거지고,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치솟는다(성장한다).”(시 92:12) 종려나무는 제대로 자라면 키가 20~30m 정도나 되며, 잎사귀는 2~3m 정도까지 자란다. 수명은 100~200년에 이른다. 백향목은 40-50m 정도의 높이로 자라며 지름은 3m, 수명 2천~3천 년이나 된다. 그래서 백향목은 성전의 나무로 쓰인다.

의인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종려나무처럼 백향목처럼 성장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 수십 수백 년의 세월이 흘러야 아름드리나무로 자란다. 빨리 자라게 하려고 줄기나 가지를 억지로 잡아당긴다면 나무는 자라지 못한다. 생명은 억지로 자라게 할 수도, 뻥튀기할 수도 없다. 물론 인조의 세계나 허위의 세계에서는 가능하겠지만…. 하지만 생명 세계의 법칙은 그냥 참으며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뿐이다. 황지우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풀-콤플렉스
교회도 그렇다. 의인 되는 과정이 그렇듯 나무처럼 자라야 한다. 그래야 삶이 곤한 사람들이 쉴 둥지가 될 수 있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풀처럼 성장하기를 바란다. 목회자들은 자신이 목회하는 당대에 부흥하기를 바란다. 그러다 보니 가시적인 성과에 집착한다. 성과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하다. 이때 비본질적인 행태가 출현한다. 대표적인 것이 세속적인 성공과 축복을 바라는 번영신앙이고, 양적인 부흥과 성장을 추구하는 성장주의다.

교회는 풀처럼 자라서는 안 된다. 하지만 한국교회는 지독한 “풀-컴플렉스”에 사로잡혀 있다. 풀처럼 빨리 자라면 우월감에 사로잡힌다. 목회에 성공한 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풀처럼 빨리 자라지 않으면 열등감에 빠진다. 목회에 실패한 것이기 때문이다. 해서, 많은 목회자가 풀-콤플렉스 즉 성장강박증에 시달리면서 초조해한다.

하지만 우월감에 사로잡히든 열등감에 찌들든 이는 거짓자아의 표지일 뿐이다. 기분 나쁜 얘기겠지만, 한국교회는 거짓자아의 집단적 놀이터다. 본질과 정도에서 벗어나는 건 시간문제이며, 편법과 불법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건 당연지사다. 교회를 그렇게 운영하며, 성도를 욕심과 이념의 노예로 만든다. 예수께서 집단적 정체성에 홀린 유대인들을 향해 말씀하신 대로다.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으며, 또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요 8:44)

한국교회는 거짓자아의 집단적 놀이터다. 본질과 정도에서 벗어나는 건 시간문제이며, 편법과 불법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건 당연지사다. 교회를 그렇게 운영하며, 성도를 욕심과 이념의 노예로 만든다.

한국교회에 정도를 벗어난 것이 많지만 기도만큼 그런 것도 없다. 한국교회의 기도는 “복음의 향연”(에바그리우스)이 아니다. 기도는 성서적이며 복음적이며 기독교적인 삶의 가치와 방식을 구현하는 “담론-현실화 기제”가 아니다. 한국교회의 기도는 소원성취의 주술에 불과하며, 자기 뜻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경건을 가장한 폭력에 불과하다.

하여, 기도의 혁명이 시급하다. 욕망에서 저절로 분출되는 기도가 아니라, 삶을 복음적 가치로 변형시키는 기도를 시작해야 한다. 무속 종교의 기도가 아니라, “기독교적인” 기도를 해야 한다. 기도를 통해 복음의 향연이 일상 속에서 신나게 일어나야 한다.

한국교회의 복음화도 풀-콤플렉스의 소산이다. 모든 교회가 풀처럼 빨리 성장하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사람들을 모아야 했다. 사람들을 모으려고 세속적인 성공과 축복을 약속했고, 기적을 간증했다. 복음도, 십자가도, 산상설교도, 케노시스도, 무심・무념・무아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도 사라졌다. 그 결과 큰 교회가 속출했지만 선한 영향력은 감소하고, 가나안 성도는 증가하고 있다. 재복음화가 시급하다.




 
나무의 영성
이제 한국교회는 “풀-콤플렉스”와 결별하고 “나무의 영성”을 배워야 한다. 풀-콤플렉스에서 나무의 영성으로 전향하여 나무를 키우는 마음으로 교회를 세워야 한다. 그러려면 빨리 성장하려는 조급증과 강박증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갑자기 단기간에 부흥한 것을 목회의 성공이라고 여기는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생명 세계에는 뻥튀기가 없다. 천천히, 오랜 기다림 속에서 속으로 영글면서 자라야 한다.

나는 은명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어떤 한 시기에 풀처럼 자랐다가 푸성귀처럼 사그러지는 교회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종려나무처럼 우거지고 백향목처럼 자라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요즘 그런 교회들이 여기저기에서 생기고 있다. 성장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성서적・복음적・기독교적인 교회를 모색하는 교회들이 연대하고 있다. 풀-콤플렉스에 매몰되지 않고 자기만의 교회적・시대적・선교적 사명을 찾고, 살고, 나눈다.

미국의 세이비어 교회도 그런 교회다. 그 교회를 개척한 고든 코스비 목사는 군목이었다. 부대에서 집단 세례예식을 여러 번 거행했지만 세례 후에도 삶에 변화가 없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았다. 그는 제대하고 25년 안에 세계적인 대형교회를 세우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 자금을 구하기 위해 뉴욕 리버사이드 교회를 건축한 당대의 재벌 존 록펠러를 방문했지만 거절당했다. 그 일을 계기로 그는 대형교회의 꿈을 접는다.

그는 새로운 목회를 꿈꾸기 시작했다. 누룩처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회, 그러기 위해 고도의 영적 훈련을 받은 “성도들saints의” 교회, 수많은 사람이 모인 대형교회가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소그룹공동체가 그가 생각한 새로운 교회였다. 그렇게 해서 개척한 교회가 세이비어교회다.

누룩처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회, 그러기 위해 고도의 영적 훈련을 받은 “성도들saints의” 교회, 수많은 사람이 모인 대형교회가 아니라 자신을 온전히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소그룹공동체가 그가 생각한 새로운 교회였다.

이 교회의 지향은 은명교회와 똑같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것이다. 이 교회는 하나님 사랑을 “내면을 향한 여행”inward journey이라고 하고, 이웃 사랑을 “바깥을 향한 여행”outward journey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간단히 “영성”과 “사역”이라고 줄여서 말하기도 한다. 이 교회는 모든 모임을 시작할 때 20분간 향심기도를 하고 시작한다. 영적 기초가 튼튼하다.

내가 방문했을 때 세이비어 교회는 8가지 사역을 하고 있었다. 주거사역, 치유사역, 영성사역, 어린이와 가족들을 위한 사역, 취업보조와 성인교육 사역 등이 그것이다. 고든 코스비 목사가 영성과 사역, 관상과 활동이 균형을 이룬 교회의 기초를 다지는 데 50년이 걸렸다. 나무처럼 자랐다. 종려나무처럼, 백향목처럼!



 숨빛
은명교회의 기초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영적인 숨을 쉬어야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기에 하나님 사랑을 “숨”이라는 한 단어에 담았고, 어두운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는 것이 진정한 이웃 사랑이기에 이웃 사랑을 “빛”이라는 한 단어에 담았다.

“숨”과 “빛”은 아름다운 순우리말일 뿐 아니라 지극히 성서적인 용어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생기가 바로 사람을 생령으로 만드는 신성한 숨이다.(창 2:7) 에스겔 골짜기에 널브러져 있는 메마른 뼈들을 살린 것도 생기 곧 신성한 숨이었다.(겔 37:10)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시면서 “성령을 받아라”라고 말씀하셨다.(요 20:22) 성령은 창조 이전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질서와 충만과 빛으로 변형시킨 신성한 숨이다.

빛이야말로 핵심적인 성서 용어다. 예수님은 우리더러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 5:3)라고 하셨다. 이 한마디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소명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은 존재 자체가 빛이며, 그 존재의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물리친다. 사도 바울도 그리스도인을 빛이라고 말한다. “여러분이 전에는 어둠이었으나 지금은 주님 안에서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사십시오.”(엡 5:8)




은명교회도 이런 교회로 자라면 좋겠다. 숨빛의 숲을 이루면 좋겠다. 이것은 패러다임이 완전히 다른 교회이기 때문에 본질에 기초한 교회에 대한 열망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하지만 열망만으로도 안 된다. 열망과 함께 실력과 동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세이비어 교회는 〈섬김의 리더십 학교〉Servant Leadership School 를 운영한다. 온전히 헌신할 그리스도인을 발굴하고 양성하는 3년간의 교육과정이다. 이 과정을 거친 사람들이 세이비어 교회의 정식 구성원이 된다.

이 교회가 운영하는 많은 시설이 있고, 많은 공동체가 있지만, 본부 교회에 가면 5,60명이 예배를 드릴 뿐이다. 세이비어교회 본부는 150년 된 낡은 건물을 사용한다. 백 명 이상이 모일 수 있는 공간도 없다. 하지만 본부 교회를 중심으로 네트워크로 연결된 시설과 연대를 통해 미국 사회에 의로운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수많은 네트워크로 연결된 시설과 공동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들을 보면 오늘의 시인처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 주님께서 하신 일이 어찌 이렇게도 큽니까?”(시 92:5)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네트워크다. 이 시간 우리도 은명교회가 종려나무와 백향목처럼 자라는 꿈을 갖자. 풀처럼 빨리 자라지 않는다고 조급해하지는 말자. 나 자신이, 길벗들이, 우리가 함께 아름드리나무로 자랄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자. 기다리며 기도하고, 기도하며 공부하고, 공부하며 연대하자.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름드리나무가 되고, 나무의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숨빛의 숲을 이루자.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零下 十三도
    零下 二十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두 손 올리고 벌받는 자세로 서서
    아 벌받은 몸으로, 벌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 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零下에서
    零上으로 零上 五度 零上 十三度 地上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피는 나무이다
 
                      ─ 황지우, “겨울나무에서 봄나무에게로”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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