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왕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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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615회 작성일 23-07-15 13:33본문
-영적 여정에 나선 모든 수행자에게 주는 조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있었다.
(창 1:1-2)
왕후님!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십시오. 왕후님의 겨레와 아버지의 집을 잊으십시오.
(시 45:10)
이 글은 하나님을 찾는 영적 여정에 나선 수행자들에게 주는 조언이다. 조언의 출처는 시편 45편이다. “사랑의 노래”라는 표제가 붙은 시편 45편은 왕실의 혼인 잔치를 노래한다. 서언(1절)에 이어지는 앞부분(2-9절)은 신랑인 임금을 묘사하고, 뒷부분(10-17절)은 신부인 왕후를 묘사한다.
영적 결혼
기독교 영성전통에서 “결혼”은 영적 여정의 최고 경지에 대한 메타포다. 결혼은 하나님과 하나 된 상태다. 하나님과 하나 되려면 “정화”와 “조명”의 과정을 거쳐 수행자의 존재가 변형되어야 한다. 그래서 아빌라의 테레사는 이러한 하나님과 합일 상태를 “변형 일치”라고 불렀다. 그녀가 쓴 『영혼의 성』에서 하나님과의 영적 결혼이 이뤄지는 곳은 일곱째 궁방이다. 일곱째 궁방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 가장 내밀한 곳, 영혼의 심층이다.
사도 바울도 신앙 여정을 결혼에 비유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사역 목적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여러분을 한 분 남편 되실 그리스도와 약혼시켰습니다.”(고후 11:2) 바울은 그리스도를 “남편”이라고 부른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은 신부다. 신앙 여정의 최종 목적은 신부인 그리스도인이 신랑인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 되는 것이다.
합일을 노래하는 책으로 아가서를 빠뜨릴 수 없다. 아가서에서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은 육체적 합일을 갈망한다. 아가서를 펼치자마자 경건한 금욕주의자들이 읽으면 얼굴이 벌게질 야한 표현들이 쏟아진다.
나에게 입맞춰 주세요,
숨막힐 듯한 임의 입술로!
임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달콤합니다.
(…)
나를 데려가 주세요, 어서요.
임금님, 나를 데려가세요,
임의 침실로!”(아 1:1-4)
침실은 사랑에 불타는 연인들이 뜨겁게 합일하는 곳이다. 물론 기독교회는 이 노래를 세속의 육체적 합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합일로 독해했다.
오늘 묵상하려는 시편 45편도 영적으로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신랑인 임금은 하나님이며, 신부인 왕후는 영적 여정에 나선 수행자다. 시인은 왕후 곧 영적 수행자에게 두 가지를 부탁한다. “왕후님!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십시오. 왕후님의 겨레와 아버지의 집을 잊으십시오.”(10절)
천지 창조
첫째,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십시오! 도대체 무엇을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라”는 걸까? 당연히 임금님의 말이다. 영적 수행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가상과 허상으로 속이는 통속의 소리가 아니라 진실을 일깨우는 내면의 소리를! 인정과 칭찬 일색의 사탕발림이 아니라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히 4:12)를 드러내는 쓴소리를! 거짓 겸손으로 자기를 과장하는 정치가들의 확성기 소리가 아니라 수줍어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속 깊은 울림을 고백하는 한 줌의 소리를!(여기서 나는 한국 사회에서 보기 드문 관상적 노래 그룹 “한줌의소리”를 생각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노래를 통해 삶과 신앙의 진실을,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다.)
어쨌거나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라는 시인의 이런 권고를 들으며 우리는 “거룩한독서”lectio divina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거룩한독서야말로 읽고 듣고 깊이 생각하다가 다시 귀를 기울이며 묵상하는 성서독법이기 때문이다. 수도원적 성서읽기로 알려진 거룩한독서는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다가 친밀해지고, 친밀해지다가 하나 되는 좋은 영적 수행이다.
그러면 거룩한독서란 무엇인가? 토머스 머튼은 거룩한독서를 “정보 습득을 위한 읽기”informational reading가 아니라 “영성형성을 위한 읽기”formational reading라고 했다. 거룩한독서의 목적은 성경에 “관해” 많이 아는 게 아니라 성경을 “통해”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 시작이 바로 영성형성spiritual formation이다. 영성형성이 이루어져야 인격과 삶이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은 이러한 거룩한독서의 핵심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잘 아는 대로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이야기다. 거룩한독서가 바로 하나님의 창조를 지금 여기에서 계속한다.
성경은 먼저 창조 이전의 상태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다”고 묘사한다. 구약성서신학자 폰 라트가 말한 것처럼 창조 이전의 상태는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뒤범벅된 “무정형의 물 덩어리”다. 창조 과정은 이 상태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영은 물(무정형의 물 덩어리)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구약성서신학자 폰 라트가 말한 것처럼 창조 이전의 상태는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뒤범벅된 “무정형의 물 덩어리”다. 창조 과정은 이 상태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첫째 날에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신다. 앞으로 계속될 창조 작업을 위해 우주 조명을 밝히신 것이다. 어두운 곳에선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인간의 소박한 경험이 반영됐다고나 할까. 어쨌든 빛의 창조를 통해 창조 이전의 어둠이 극복된다.
둘째 날엔 혼돈과 공허와 어둠으로 뒤범벅인 무정형의 물 덩어리 한가운데에 창공을 만드시고, 이 창공을 하늘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마다 “좋다!”고 탄성을 지르셨는데 이때만큼은 그러지 않으신다. 아직 뭔가 부족하다는 뜻이겠다. 그래서 독자는 그다음 날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다.
셋째 날에 하나님은 물을 한곳으로 모아 뭍이 드러나게 하신다. 드러난 뭍을 땅이라 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고 하신다. 마침내 하늘・땅・바다라는 우주적 질서가 확립된다. 이제 무질서 상태인 창조 이전의 혼돈이 극복된다. 이때에야 하나님은 “좋다!”고 탄성을 지르신다.
셋째 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하신다. 각 영역을 있어야 할 존재들로 “채우는” 일이다. 하나님은 먼저 땅을 식물로 채우신다.
넷째 날에 하나님은 “하늘 창공에 빛나는 것들” 곧 “두 큰 빛”인 해와 달을 창조하시고, 별들도 만드신다. 하늘을 해・달・별로 채우신다.
다섯째 날엔 바다를 “커다란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는 움직이는 모든 생물”로 채우시고, 하늘을 “날개 달린 모든 새”로 채우신다. 이로써 하늘과 바다에 있어야 할 존재들이 모두 창조된다.
여섯째 날엔 땅을 동물들로 채우신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다.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하늘・땅・바다를 있어야 할 존재들로 다 채우신다. 마침내 창조 이전의 공허가 극복된다.
살펴본 것처럼, 창조 과정은 빛에 의해 흑암이 물러가고, 하늘・땅・바다라는 우주적 질서를 통해 혼돈이 극복되며, 각 영역에 있어야 할 존재를 채움으로써 공허의 상태가 충만한 상태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창조 과정은 빛에 의해 흑암이 물러가고, 하늘・땅・바다라는 우주적 질서를 통해 혼돈이 극복되며, 각 영역에 있어야 할 존재를 채움으로써 공허의 상태가 충만한 상태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삶의 창조
성서 저자와 편집자들은 창조 이야기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물리적 세계의 기원을 밝히려는 우주생성론일까? 그렇다면 창조 이야기의 함의가 너무 빈약해진다. 창조 이야기는 우주생성론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다! 삶의 어둠이 빛으로, 혼돈이 질서로, 공허가 충만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이야기다!
그러면 어떻게 삶의 어둠・혼돈・공허가 빛・질서・충만으로 재창조될 수 있을까? 창세기 1장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메시지는 간단하고 확실하다. 창조는 “말씀을 통해” 일어난다! 따라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는 말씀이 삶을 새롭게 창조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거룩한독서를 말씀을 통한 삶의 새로운 창조라고 말한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사건・사고・관계를 통해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고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는다. 그렇게 해서 어둡고 우울한 심리현실이 형성된다. 이러한 심리현실은 언어와 마음을 통해 전염되고 증폭된다. 심리현실은 거대하고 강력해진다. 한 번 빠지면 스스로의 힘으로 헤어날 길이 없다. 감정과 상처의 노예가 된다. 지옥이 따로 없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신성한 에너지를 갖고 있는 말씀이다. 말씀은 에너지 수준이 높기 때문에 말씀이 인풋되기만 하면 내면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마음의 결이 바뀌기 시작한다. 조금씩 어둠이 빛으로, 혼돈이 질서와 평정으로, 공허가 충만으로 변형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창조가 지금, 여기, 나의 내면과 삶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제 창조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현재의 실존적 이야기로 살아난다.
말씀은 에너지 수준이 높기 때문에 말씀이 인풋되기만 하면 내면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어둠이 빛으로, 혼돈이 질서와 평정으로, 공허가 충만으로 변형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창조가 지금, 여기, 나의 내면과 삶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제 창조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현재의 실존적 이야기로 살아난다.
하니 벗들, 새로 발행한 영성노트 『내 마음의 꽃밭』을 가지고 거룩한독서에 힘쓰기 바란다. 말씀을 듣고 생각하고 귀 기울이다 보면 마음이 새로워질 것이다. 심리현실에서 혼란스러웠던 우리는 영성현실에서 고요와 평정을 회복할 것이다. 이처럼 내면이 새로워지면 삶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 불행한 현실 속에서 은총의 별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우울한 얼굴은 웃기 시작할 것이다.
사람도 새롭게 보인다. 미움 속에서 사랑이 싹튼다. 원수 같던 사람이 친구로 변한다. 원망과 실망의 대상이 감사와 신뢰의 대상으로 바뀐다. 이런 변화는 의지로 일으킬 수 없다. 말씀이 창조하는 완전히 새로운 현실인 까닭이다.
거룩한독서는 쉽지 않다. 처음엔 힘들지만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화・수・목요일에 줌으로 하는 〈슬기로운 기도생활〉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함께 하면 혼자 할 때보다 모든 게 쉽고 즐겁다.
자기 망각
시인은 왕후에게 두 번째로 권고한다. “왕후님의 겨레와 아버지의 집을 잊으십시오.” 겨레와 아버지의 집은 무엇일까? “겨레”가 인격을 형성하는 문화적 조건을 상징한다면, “아버지의 집”은 가정환경과 성장과정을 상징한다. 가정환경과 성장과정과 문화적 조건을 통해 페르소나(사회적 자아, 겉사람)가 형성되고, 거짓자아(옛사람)가 발달하며 견고해진다.
그래서 영적 여정에 나선 수행자가 임금 곧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면 겨레와 아버지의 집을 잊어야 한다. 다시 말해 가정환경과 성장과정과 문화조건을 통해 형성된 겉사람과 거짓자아를 잊어야 하는 것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똑같은 말을 했다.
영혼이 하나님을 알려면 자기를 망각하거나 잊거나 잃어야 합니다. 자기의식을 갖는 한 영혼은 하나님을 볼 수도 의식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의식을 갖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면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되찾습니다.(에크하르트,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자기의식은 겉사람에 몰입하고 거짓자아에 매몰된 상태다. 그래서 “자기의식을 갖는 한 하나님을 볼 수도 의식할 수도 없다.” 자기의식에서 벗어나야, 즉 겉사람과 거짓자아를 잊을 때 우리는 에크하르트가 말하듯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되찾는다.” 우리의 참된 얼굴을 깨닫는 것이다. 그게 바로 참자아true self다!
참자아가 빛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것을 시인은 이렇게 묘사한다. “임금님께서 그대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하나님은 권력이나 명예나 재물 때문에 우리에게 매혹당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참자아에 매혹당하신다.
시인은 왕후에게 또 이렇게 말한다. “임금님이 그대의 주인이시니 그대는 임금님을 높이십시오.” 참자아의 주인은 하나님뿐이다. 참자아가 하는 일은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다. 참자아는 세속의 명예도 권력도 재물도 탐하지 않는다. 참자아는 하나님으로 만족한다. 하나님은 참자아의 배후요 바탕이기 때문이다.
참자아의 주인은 하나님뿐이다. 참자아가 하는 일은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다. 참자아는 세속의 명예도 권력도 재물도 탐하지 않는다. 참자아는 하나님으로 만족한다. 하나님은 참자아의 배후요 바탕이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다. “두로의 사신들이 선물을 가져오고, 가장 부유한 백성들이 왕후의 총애를 구합니다.”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고, 참자아에 뿌리내린 삶을 살아가다 보면 사람들이 찾아온다. “선물을 가져오고, 총애를 구한다.” 소울 프렌드를 만난다. 새로운 만남이 이뤄진다. 혁명의 동지를 만난다. 하나님은 그런 얼굴로 우리를 찾아오신다.
- 이민재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물 위에 움직이고 있었다.
(창 1:1-2)
왕후님!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십시오. 왕후님의 겨레와 아버지의 집을 잊으십시오.
(시 45:10)
이 글은 하나님을 찾는 영적 여정에 나선 수행자들에게 주는 조언이다. 조언의 출처는 시편 45편이다. “사랑의 노래”라는 표제가 붙은 시편 45편은 왕실의 혼인 잔치를 노래한다. 서언(1절)에 이어지는 앞부분(2-9절)은 신랑인 임금을 묘사하고, 뒷부분(10-17절)은 신부인 왕후를 묘사한다.
영적 결혼
기독교 영성전통에서 “결혼”은 영적 여정의 최고 경지에 대한 메타포다. 결혼은 하나님과 하나 된 상태다. 하나님과 하나 되려면 “정화”와 “조명”의 과정을 거쳐 수행자의 존재가 변형되어야 한다. 그래서 아빌라의 테레사는 이러한 하나님과 합일 상태를 “변형 일치”라고 불렀다. 그녀가 쓴 『영혼의 성』에서 하나님과의 영적 결혼이 이뤄지는 곳은 일곱째 궁방이다. 일곱째 궁방은 영혼의 가장 깊은 곳, 가장 내밀한 곳, 영혼의 심층이다.
사도 바울도 신앙 여정을 결혼에 비유했다.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사역 목적을 이렇게 말한다. “나는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여러분을 한 분 남편 되실 그리스도와 약혼시켰습니다.”(고후 11:2) 바울은 그리스도를 “남편”이라고 부른다. 당연히 그리스도인은 신부다. 신앙 여정의 최종 목적은 신부인 그리스도인이 신랑인 그리스도와 온전히 하나 되는 것이다.
합일을 노래하는 책으로 아가서를 빠뜨릴 수 없다. 아가서에서 사랑에 빠진 두 연인은 육체적 합일을 갈망한다. 아가서를 펼치자마자 경건한 금욕주의자들이 읽으면 얼굴이 벌게질 야한 표현들이 쏟아진다.
나에게 입맞춰 주세요,
숨막힐 듯한 임의 입술로!
임의 사랑은 포도주보다 더 달콤합니다.
(…)
나를 데려가 주세요, 어서요.
임금님, 나를 데려가세요,
임의 침실로!”(아 1:1-4)
침실은 사랑에 불타는 연인들이 뜨겁게 합일하는 곳이다. 물론 기독교회는 이 노래를 세속의 육체적 합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영적 합일로 독해했다.
오늘 묵상하려는 시편 45편도 영적으로 읽을 수 있다. 여기서 신랑인 임금은 하나님이며, 신부인 왕후는 영적 여정에 나선 수행자다. 시인은 왕후 곧 영적 수행자에게 두 가지를 부탁한다. “왕후님!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십시오. 왕후님의 겨레와 아버지의 집을 잊으십시오.”(10절)
천지 창조
첫째,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십시오! 도대체 무엇을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라”는 걸까? 당연히 임금님의 말이다. 영적 수행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다. 가상과 허상으로 속이는 통속의 소리가 아니라 진실을 일깨우는 내면의 소리를! 인정과 칭찬 일색의 사탕발림이 아니라 “마음에 품은 생각과 의도”(히 4:12)를 드러내는 쓴소리를! 거짓 겸손으로 자기를 과장하는 정치가들의 확성기 소리가 아니라 수줍어하시는 성령님과 함께 속 깊은 울림을 고백하는 한 줌의 소리를!(여기서 나는 한국 사회에서 보기 드문 관상적 노래 그룹 “한줌의소리”를 생각하고 있다. 나는 그들의 노래를 통해 삶과 신앙의 진실을,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 유튜브에서 들을 수 있다.)
어쨌거나 듣고 생각하고 귀를 기울이라는 시인의 이런 권고를 들으며 우리는 “거룩한독서”lectio divina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거룩한독서야말로 읽고 듣고 깊이 생각하다가 다시 귀를 기울이며 묵상하는 성서독법이기 때문이다. 수도원적 성서읽기로 알려진 거룩한독서는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다가 친밀해지고, 친밀해지다가 하나 되는 좋은 영적 수행이다.
그러면 거룩한독서란 무엇인가? 토머스 머튼은 거룩한독서를 “정보 습득을 위한 읽기”informational reading가 아니라 “영성형성을 위한 읽기”formational reading라고 했다. 거룩한독서의 목적은 성경에 “관해” 많이 아는 게 아니라 성경을 “통해”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 시작이 바로 영성형성spiritual formation이다. 영성형성이 이루어져야 인격과 삶이 새로워지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은 이러한 거룩한독서의 핵심을 명쾌하게 보여준다. 잘 아는 대로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이야기다. 거룩한독서가 바로 하나님의 창조를 지금 여기에서 계속한다.
성경은 먼저 창조 이전의 상태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어둠이 깊음 위에 있다”고 묘사한다. 구약성서신학자 폰 라트가 말한 것처럼 창조 이전의 상태는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뒤범벅된 “무정형의 물 덩어리”다. 창조 과정은 이 상태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하나님의 영은 물(무정형의 물 덩어리) 위에 움직이고 계셨다.”
구약성서신학자 폰 라트가 말한 것처럼 창조 이전의 상태는 혼돈과 공허와 어둠이 뒤범벅된 “무정형의 물 덩어리”다. 창조 과정은 이 상태를 극복하는 과정이다.
첫째 날에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신다. 앞으로 계속될 창조 작업을 위해 우주 조명을 밝히신 것이다. 어두운 곳에선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인간의 소박한 경험이 반영됐다고나 할까. 어쨌든 빛의 창조를 통해 창조 이전의 어둠이 극복된다.
둘째 날엔 혼돈과 공허와 어둠으로 뒤범벅인 무정형의 물 덩어리 한가운데에 창공을 만드시고, 이 창공을 하늘이라고 하신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마다 “좋다!”고 탄성을 지르셨는데 이때만큼은 그러지 않으신다. 아직 뭔가 부족하다는 뜻이겠다. 그래서 독자는 그다음 날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된다.
셋째 날에 하나님은 물을 한곳으로 모아 뭍이 드러나게 하신다. 드러난 뭍을 땅이라 하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고 하신다. 마침내 하늘・땅・바다라는 우주적 질서가 확립된다. 이제 무질서 상태인 창조 이전의 혼돈이 극복된다. 이때에야 하나님은 “좋다!”고 탄성을 지르신다.
셋째 날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은 새로운 일을 하신다. 각 영역을 있어야 할 존재들로 “채우는” 일이다. 하나님은 먼저 땅을 식물로 채우신다.
넷째 날에 하나님은 “하늘 창공에 빛나는 것들” 곧 “두 큰 빛”인 해와 달을 창조하시고, 별들도 만드신다. 하늘을 해・달・별로 채우신다.
다섯째 날엔 바다를 “커다란 바다 짐승들과 물에서 번성하는 움직이는 모든 생물”로 채우시고, 하늘을 “날개 달린 모든 새”로 채우신다. 이로써 하늘과 바다에 있어야 할 존재들이 모두 창조된다.
여섯째 날엔 땅을 동물들로 채우신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신다. “당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으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하늘・땅・바다를 있어야 할 존재들로 다 채우신다. 마침내 창조 이전의 공허가 극복된다.
살펴본 것처럼, 창조 과정은 빛에 의해 흑암이 물러가고, 하늘・땅・바다라는 우주적 질서를 통해 혼돈이 극복되며, 각 영역에 있어야 할 존재를 채움으로써 공허의 상태가 충만한 상태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창조 과정은 빛에 의해 흑암이 물러가고, 하늘・땅・바다라는 우주적 질서를 통해 혼돈이 극복되며, 각 영역에 있어야 할 존재를 채움으로써 공허의 상태가 충만한 상태로 변해가는 과정이다.
삶의 창조
성서 저자와 편집자들은 창조 이야기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물리적 세계의 기원을 밝히려는 우주생성론일까? 그렇다면 창조 이야기의 함의가 너무 빈약해진다. 창조 이야기는 우주생성론이 아니라 삶의 이야기다! 삶의 어둠이 빛으로, 혼돈이 질서로, 공허가 충만으로 새롭게 창조되는 이야기다!
그러면 어떻게 삶의 어둠・혼돈・공허가 빛・질서・충만으로 재창조될 수 있을까? 창세기 1장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메시지는 간단하고 확실하다. 창조는 “말씀을 통해” 일어난다! 따라서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이야기는 말씀이 삶을 새롭게 창조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거룩한독서를 말씀을 통한 삶의 새로운 창조라고 말한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수많은 사건・사고・관계를 통해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이고 회복하기 힘든 상처를 입는다. 그렇게 해서 어둡고 우울한 심리현실이 형성된다. 이러한 심리현실은 언어와 마음을 통해 전염되고 증폭된다. 심리현실은 거대하고 강력해진다. 한 번 빠지면 스스로의 힘으로 헤어날 길이 없다. 감정과 상처의 노예가 된다. 지옥이 따로 없다.
이때 필요한 것이 바로 신성한 에너지를 갖고 있는 말씀이다. 말씀은 에너지 수준이 높기 때문에 말씀이 인풋되기만 하면 내면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마음의 결이 바뀌기 시작한다. 조금씩 어둠이 빛으로, 혼돈이 질서와 평정으로, 공허가 충만으로 변형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창조가 지금, 여기, 나의 내면과 삶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제 창조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현재의 실존적 이야기로 살아난다.
말씀은 에너지 수준이 높기 때문에 말씀이 인풋되기만 하면 내면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어둠이 빛으로, 혼돈이 질서와 평정으로, 공허가 충만으로 변형되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창조가 지금, 여기, 나의 내면과 삶 속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이제 창조 이야기는 우리의 이야기, 나의 이야기, 현재의 실존적 이야기로 살아난다.
하니 벗들, 새로 발행한 영성노트 『내 마음의 꽃밭』을 가지고 거룩한독서에 힘쓰기 바란다. 말씀을 듣고 생각하고 귀 기울이다 보면 마음이 새로워질 것이다. 심리현실에서 혼란스러웠던 우리는 영성현실에서 고요와 평정을 회복할 것이다. 이처럼 내면이 새로워지면 삶이 새롭게 보일 것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갖게 될 것이다. 불행한 현실 속에서 은총의 별이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우울한 얼굴은 웃기 시작할 것이다.
사람도 새롭게 보인다. 미움 속에서 사랑이 싹튼다. 원수 같던 사람이 친구로 변한다. 원망과 실망의 대상이 감사와 신뢰의 대상으로 바뀐다. 이런 변화는 의지로 일으킬 수 없다. 말씀이 창조하는 완전히 새로운 현실인 까닭이다.
거룩한독서는 쉽지 않다. 처음엔 힘들지만 하다 보면 익숙해진다. 화・수・목요일에 줌으로 하는 〈슬기로운 기도생활〉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함께 하면 혼자 할 때보다 모든 게 쉽고 즐겁다.
자기 망각
시인은 왕후에게 두 번째로 권고한다. “왕후님의 겨레와 아버지의 집을 잊으십시오.” 겨레와 아버지의 집은 무엇일까? “겨레”가 인격을 형성하는 문화적 조건을 상징한다면, “아버지의 집”은 가정환경과 성장과정을 상징한다. 가정환경과 성장과정과 문화적 조건을 통해 페르소나(사회적 자아, 겉사람)가 형성되고, 거짓자아(옛사람)가 발달하며 견고해진다.
그래서 영적 여정에 나선 수행자가 임금 곧 하나님과 가까워지려면 겨레와 아버지의 집을 잊어야 한다. 다시 말해 가정환경과 성장과정과 문화조건을 통해 형성된 겉사람과 거짓자아를 잊어야 하는 것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가 똑같은 말을 했다.
영혼이 하나님을 알려면 자기를 망각하거나 잊거나 잃어야 합니다. 자기의식을 갖는 한 영혼은 하나님을 볼 수도 의식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의식을 갖지 않고 하나님을 위해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다면 영혼은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되찾습니다.(에크하르트,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자기의식은 겉사람에 몰입하고 거짓자아에 매몰된 상태다. 그래서 “자기의식을 갖는 한 하나님을 볼 수도 의식할 수도 없다.” 자기의식에서 벗어나야, 즉 겉사람과 거짓자아를 잊을 때 우리는 에크하르트가 말하듯 “하나님 안에서 자기를 되찾는다.” 우리의 참된 얼굴을 깨닫는 것이다. 그게 바로 참자아true self다!
참자아가 빛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것을 시인은 이렇게 묘사한다. “임금님께서 그대의 아름다움에 사로잡힐 것입니다.” 하나님은 권력이나 명예나 재물 때문에 우리에게 매혹당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참자아에 매혹당하신다.
시인은 왕후에게 또 이렇게 말한다. “임금님이 그대의 주인이시니 그대는 임금님을 높이십시오.” 참자아의 주인은 하나님뿐이다. 참자아가 하는 일은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다. 참자아는 세속의 명예도 권력도 재물도 탐하지 않는다. 참자아는 하나님으로 만족한다. 하나님은 참자아의 배후요 바탕이기 때문이다.
참자아의 주인은 하나님뿐이다. 참자아가 하는 일은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다. 참자아는 세속의 명예도 권력도 재물도 탐하지 않는다. 참자아는 하나님으로 만족한다. 하나님은 참자아의 배후요 바탕이기 때문이다.
이뿐 아니다. “두로의 사신들이 선물을 가져오고, 가장 부유한 백성들이 왕후의 총애를 구합니다.”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고, 참자아에 뿌리내린 삶을 살아가다 보면 사람들이 찾아온다. “선물을 가져오고, 총애를 구한다.” 소울 프렌드를 만난다. 새로운 만남이 이뤄진다. 혁명의 동지를 만난다. 하나님은 그런 얼굴로 우리를 찾아오신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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