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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삶) 로욜라의 이냐시오와 분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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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97회 작성일 23-03-22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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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부터 15세기 후기 사이에 ‘영들의 분별’이라는 주제는 그리스도교 영성가들 사이에서 큰 관심의 주제였습니다. 그들은 어떤 ‘생각들’과 어떤 ‘충동들’이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고, 어떤 것들이 그렇지 않은가를 분별하는 일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다양한 계시들과 예언들을 판단해 내는 기준들을 제시하였습니다. ‘영들의 분별’에 대하여 그들이 만들어 낸 판단 기준들은 크게 세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는 윤리적 기준으로 참된 예언과 거짓 예언은 그 열매를 보고서 알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마태 7:20) 둘째는 심리적 기준들로, 선한 영은 평화, 고요, 기쁨, 위로 등을 중개하는 반면, 악한 영은 그 반대라고 믿었습니다. 셋째는 교의학적 기준들로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밝혀 놓은 것들과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 그리고 교회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기준들과 함께 그들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에 대한 것이 분별의 핵심이지, 체험한 것에 대한 종교의식이 문제의 핵심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사도 요한John the Apostle 역시 영들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고찰할 것을 권하고 있는데(1요한 4:1) 그 점에서 분별은 우리가 성령으로부터 오는 자극들을 어떻게 알아내느냐는 질문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우리는 신약성서 문서들 이후에 바로 나온 교부들의 문헌에서 이같은 고찰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막의 교부들은 선한 영으로 구별할 수 있는 시금석들로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안전, 고요, 사양, 겸손, 진리, 현명, 온순, 순종과 같은 열매들을 자주 언급하였고, 이와 반대되는 요소들은 하느님의 영이 작용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영적 감수성에 대한 이러한 전통은 중세기에 발전되었는데, 보나벤투라Bonaventura에 의해 체계적으로 제시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 분별에 있어 큰 발자취를 남긴 16세기 로욜라의 이냐시오 Ignatius 역시 ‘사물에 대한 내적인 느낌과 맛 봄’을 분별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태도와 덕, 죄와 일반적인 삶의 상태를 관찰하는 것에 무게 중심을 두었던 이전의 분별전통을 행동들을 살피는 것으로 옮기는 좀 더 실천적인 방법을 고안하였습니다. 그는 우리가 어떤 존재이어야 하는가 뿐만 아니라, 무슨 일을 하도록 부름 받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는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어떻게 우리의 삶을 하느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도록 할 것인가에 관심하였고, 특별히 위안과 고독에 대한 관찰을 통해 ‘실존적 인식에 대한 ’이냐시오적 논리’를 형성하였습니다.

이냐시오Ignatius와 분별
이냐시오는 분별을 크게 영분별과 뜻 분별로 나누어 설명하였습니다. 첫째로 영분별이란 우리를 특정한 행동으로 이끌어가는 내적 움직임을 살피어 우리가 체험하는 움직임들 가운데 어느 것이 우리를 주님께로 이끌어주며 그분과 이웃들에게 보다 온전하게 봉사하도록 해주고, 또 어느 것이 목표에서 우리를 멀어지게 만드는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은 분석적이기보다는 우리 마음의 상태와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awareness)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과정은 우리의 자기이해를 촉진시키고, 하느님을 향해 우리를 이끌어 가는 내면의 움직임과 조화를 이루는 응답을 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둘째로 뜻 분별은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는 참 자아에 어울리는 선택을 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냐시오는 영신수련 175번 이하에서는 하느님의 뜻을 쫒아 선택하게 되는 세 시기에 대하여 말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의지가 어떤 주저함도 없는 시점에 이르렀을 때이다. 이 때는 마치 제자들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주님을 따랐던 순간과 같은 때입니다. 이유 없이 누군가를 위한 이타적인 행동을 하고 난 후 돌아보니 그 순간 자신이 성령의 강한 인도하심에 이끌렸음을 알게 될 때가 있는데, 그 순간 저절로 분별이 일어났음 알게 되는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가 기도 가운데 경험하는 ‘아니 계심의 고독’과 ‘함께 하심의 위안’을 성찰하면서 그 가운데 주어지는 빛과 정보를 의식하며 분별하여 결정을 할 수 있는 때입니다, 이냐시오는 이때 중요한 것은 주님에 대한 묵상을 계속하면서 어느 쪽으로 하느님께서 자신을 움직이시는지 점검하여야 한다고 말합니다. 분별에 있어 이냐시오가 기여한 공헌 중에서 괄목할만한 것은 특별히 두 번째 시기의 분별에 대한 설명과 안내입니다. 세 가지 시기 중에 이냐시오가 ‘분별’을 지칭하는 유일한 때가 바로 둘째 시기입니다. 셋째는 고요함의 때인데, 우리 영혼이 고요하게 그 본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때입니다. 이 시기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성을 사용하여 분별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냐시오는 이 시기에 분별을 도울 수 있는 몇 가지 방법에 대해 말하는데, 우리가 내일 죽는다면, 오늘 무슨 선택을 할 것인가? 또는 자신이 분별하고자 하는 같은 질문을 갖고 친한 친구가 자신을 찾아 와 물어볼 때 무어라고 대답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가까울 수 있다고 말합니다. 

뜻 분별에서 중요한 다른 한 가지는 자기에 대한 이해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성향, 어떤 신앙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가? 성장과정에서 받은 교육과 문화에 의해서 형성된 자기(Ego) 이해를 기초로, 이고(Ego)로부터의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일입니다. 그래야 집착과 편견에 기울지 않은 불편심의 자리에서 하느님의 뜻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자기이해가 내적 자유의 전제조건이라고 말하지만 로즈메리 도어티Rose Mary Dougherty는 그것은 선후의 문제가 아니라 동시적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냐시오의 분별은 크게 세 단계의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지는데  첫 단계는 우리의 모범이신 그리스도의 삶에 비추어 식별하고자 하는 주제를 살펴보고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방향을 감지하는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사리사욕과 편견, 내적 불안으로 인한 고정관념에서의 자유.  그리스도의 빛에 의한 조명을 받습니다.  둘째 단계는 분별하려는 주제에 대한 정보들을 살펴보는 단계로서 수집된 정보들을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눈으로 주의 깊게 고려하면서 기도하는 단계입니다. 구체적인 결정을 내리기 위하여 말씀을 기도 중에 성찰하면서 필요한 정보와 지식, 그리고 상황의 징표들을 올바르게 읽어야 합니다. 특별히 공동분별인 경우에는 정보들이 합당한 경로를 통하여 획득된 것이어야 합니다.  셋째 단계는 결정한 것에 대해 하느님께서 확인해 주시고 인정해 주시도록 구하는 단계인데 하느님께서 보여주시는 여러 확증들을 찾아보는 분별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위안 consolation과 고독 desolation
젊은 시절 세속적이고 허영심에 가득 찼던 이냐시오는 성인들의 전기를 읽으면서 일어나는 생각이 이전에 세속적 야망의 주인공 이야기를 읽을 때 다가왔던 생각들과 다른 면을 발견하게 되었고, 다른 생각들 뒤에 따라오는 서로 다른 감정들을 알아채고는 신기하고 놀라워했습니다. 그는 계속 이같은 움직임들에 대해 곰곰이 생각한 끝에 점차적으로 서로 다른 생각과 감정 뒤에는 서로 다른 영들의 움직임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경험을 통해 이냐시오는 하느님이 모든 사람을 내적으로 자극하여 움직이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우리 존재의 중심이 하느님을 향하고 있을 때는 창조적인 기분과 느낌, 행동과 결정으로 평화와 안정과 기쁨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이를 위안(consolation)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우리 안밖의 파괴적인 요소들은 우리 내면에 초조와 불안, 슬픔과 내적 혼란을 유발하는데 그는 이같은 상태를 고독(desolation)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자서전에서 자신이 경험한 위안의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창조주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고, 그 결과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하느님을 위해 그 모든 것을 사랑할 수 있게 되고, 죄로 인한 비통함이나 예수의 고난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는데, 이는 자신을 하느님의 사랑을 향해 움직이게 하며, 영혼은 믿음과 희망, 그리고 내적 기쁨이 증가하여 평온과 고요함으로 채워진다.’

하느님 부재의 경험을 나타내는 ‘고독 desolation’이라는 용어는 라틴어 'desolare' - '홀로 남겨짐', '버려짐'-에서 유래하였는데 이는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이 사라진 느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독은 첫째로 감정에 영향을 미치는데, 불안과 분노, 권태, 짜증, 사랑받지 못하고 버려진 존재로서 깊은 두려움으로 경험됩니다. 기도는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이고 우울증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둘째로 고독은 의지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에너지가 없고, 무기력하며, 타성과 나태함, 묵직한 불쾌감에 빠지게 됩니다. 원하는 것과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에 심히 고통스럽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영혼과 감정의 어두운 밤이 찾아 올 수도 있습니다. 고독은 우리의 의지로 위안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음에 대한 낙담과 좌절에 의해 더 심해질 수 있는데, 만약에 우리가 진정한 삶의 근원으로서 하느님을 고백했다면, 고독의 시기에 경험하는 하느님의 전적인 부재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속은 것은 아닐까?’하는 의문까지 들게 합니다.

하지만 이같은 내적 느낌과 상태만으로 분별이 완성되는 것은 아닙니다. 평화로 이끌어 주고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하는 생각을 영적인 생각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분별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게 되면 평화,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감정과 느낌, 그 자체보다 그것이 어떤 종류의 평화이며, 무엇에 의해 야기되는지, 무엇보다 특히 그 평화에 동반되는 생각들을 검증하고 그것들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 또는 나로 하여금 무엇을 행하게 하는지 확인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로즈메리 도어티Rose Mary Dougherty는 그녀의 저서 ‘분별’에서 십자가의 성 요한John of the Cross도 위안을 하느님을 향해 이끌리지만 슬픔이나 고통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움직임으로 이해하였음을 지적하며, 우리가 위안과 고독을 인식했다고 하여 우리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판단해거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그녀는 ‘갈망이 분별의 열쇠이며, 그것이야말로 느낌이나 내적 평화보다 신뢰할 만한 기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고독과 위안은 우리와 하느님 관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통찰할 수 있게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 자체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적 스승들은 우리가 경험하는 위안에는 거짓 위안과 참된 위안이 있음을 분명히 하였습니다. 거짓 위안은 청량음료 같은 발포성 기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종류의 기쁨은 오래 지속되지 않으며 갑자기 사라지면서 내면에 커다란 공허감을 남겨 놓습니다. 반면 참된 위안은 마치 땅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인간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겸손한 무언의 기쁨입니다. 우리는 출처가 어디인지 모를 기쁨으로 가득 차오르고, 문득 마음이 평온해 짐을 느끼는가 하면,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 마음이 훨씬 선해지는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이 기쁨의 뚜렷한 특징은 모든 것을 밝고, 분명하고, 아름답게 드러내는 데 있습니다. 또한 어두운 악의 그림자를 지워버리며 모든 사물의 존재를 투명하게 하고, 그 사물들이 우리의 소유 이상임을 보여줍니다. 이 기쁨은 우리를 묵상으로 이끌어 주며, 하느님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 기쁨에 젖게 되면 완전하지 않을지라도 두려움이 사라지고 불안한 마음이 멀어지며 걱정이 줄어듭니다. 이 기쁨이 크면 클수록 그것을 표현할 필요를 그만큼 덜 느끼게 되고, 이 기쁨에서 나오는 생각은 대단히 사려 깊고 낙천적입니다. 이 기쁨은 오래 지속되며 몇 시간, 몇일, 심지어 몇 달도 지속될 수 있습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그것이 정말 하느님께서 주시는 순수한 체험이라면 때로 10년, 20년 동안 우리의 믿음을 흔들림 없이 지켜주기도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그 체험의 순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하느님 임재의 기쁨을 다시 경험할 수 있습니다.

영적여정에서 우리는 이같은 위안과 고독을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는데, 위안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기질을 닮게 하고, 그리스도께 응답하기 위한 정신적이고 감정적인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또한 우리를 세속으로부터 초탈하게 하고, 우리의 주의를 하느님을 향해 전환하도록 합니다. 이냐시오는 참된 분별의 길에서 전제가 되는 것은 성령님의 움직임에 대한 우리의 전적인 개방성과 그 움직임에 기꺼이 응답하려는 태도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같은 태도를 모든 피조물들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불편심(不偏心, indifference)이라고 하였습니다. 영적여정에서 우리가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위안과 고독은 실질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며, 영혼을 ‘개성화하고 부드럽게 합니다.

이냐시오 영 분별의 첫째 규범
이냐시오는 그의 저서 ‘영신수련“Spiritual Exercises’에서 ‘영들을 분별하는 두 종류의 규범’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규범은 영신수련을 시작하는 입장에서 죄를 깨닫고, 회개의 마음을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보다 적합한 것이며, 둘째 규범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관상하는 사람들에게 보다 적합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냐시오는 우리의 이성적 요소와 감정적 요소가 같은 대상을 지향할 때, 평화를 느끼는 반면 감정이 지향하는 것과 이성이 지향하는 것이 다를 때는 불안, 혼란, 고뇌, 의기소침 등을 겪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마음이 평화롭다는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올바른 대상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확신할 수는 없다는 것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는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느끼는가 보다는 그 감정들이 어디서 오며,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 가는지, 그 감정들에서 비롯되는 생각들이 어떤 열매를 맺게 하는지 살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점에서 첫째 단계의 분별에서 중요한 질문은 ‘그리스도냐?’ 아니면 ‘나 자신이냐?’ 하는 물음입니다.
 
아직 영적으로 초보적 상태에 있는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향한 악한 영의 활동은 주로 감정을 매개로 다가오는데, 악한 영은 감각적인 느낌과 세속적 위로와 즐거움으로 우리의 감정을 만족시킵니다. 악한 영은 우리의 감정을 만족시키는 한편, 우리 이성을 향해서는 우리가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이성적으로 입증할 수많은 핑계를 찾도록 합니다. 그리스 교부들은 이를 ‘디카이오마 δικαίωμα’라고 하였는데 그것은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하여 성경이든 법규든 영적 저자들의 글이든 닥치는 대로 동원하여 우리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뜻합니다.

반면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을 향한 성령의 활동은 이성과 감정을 분리함으로써 그 사람 내면에 불편하고 불안한 심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가던 길을 멈추고 깊이 생각하게 하여 자신의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성령께서는 이때 이성을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이성이 가고 있던 방향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향하기 시작할 때, 마음은 뭔가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이 때, 우리가 복음에 대한 내적 확신을 갖고 머물면, 두려움과 슬픔의 시간을 지나 우리 자신을 되찾고 다시 위안의 상태로 옮겨갈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규범에서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고독에서 나오는 생각과 판단은 위안에서 나오는 것과 상반되는 까닭에 고독의 상태에서는 위안을 회복할 때까지 이전에 내린 결정을 철회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독의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고독의 반대 방향으로 의지를 갖고 행동해야 하며, 고독의 원인을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고독의 원인을 고찰하면서 제일 먼저 물어야 할 질문 가운데 하나는 이 감정이 육체적 피로, 또는 정신적 피로에서 기인하고 있지 않은가 하는 질문입니다. 하느님은 일할 때와 쉴 때, 놀 때와 기도할 때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경험하는 고독이 피로로 인한 것이 아니라면, 휴식과 오락으로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며, 이럴 때 우리는 기도와 성찰 가운데 그 원인을 찾아내야 합니다.

고독의 시기에 필요한 지침은 첫째로, 고독은 반드시 지나간다는 것이고, 둘째는, 관심의 초점을 하느님께 맞추면 설령 우리가 그 분의 현존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더라도 고독을 통해 그 분께서 우리에게 가르침을 베푸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요함을 유지할 수 있다면, 고독은 고통스럽지만 우리에게 생명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진흙이 옹기장이 손에 있듯이 우리가 하느님의 손 안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진흙이 빚어지지 않은 상태로는 결코 담을 수 없는 생명수를 담아낼 그릇으로 변형되는 과정으로 고독의 시간을 보낼 수 있습니다. 반면 우리가 위안을 받을 때는 이를 최대한으로 활용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위안 속에서 선물처럼 받은 소중한 체험들과 진리의 희미한 빛들은 우리로 하여금 고독의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하고, 희망을 가질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냐시오 영 분별의 둘째 분별 규범 
분별의 둘째 규범은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는 사람들에게 보다 적합한 것으로 내면 깊이에서 하느님을 향하는 그들은 성령의 위로를 받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생각과 감정이 주님을 향하게 되면, 이 때 악한 영은 무엇보다 우리 생각을 매개로 유혹하는데, 감정은 사랑을 느끼고 즐기는 일에 전념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기 전에는 악한 영도, 성령도 다 같이 우리 안에 불안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반면, 우리의 삶을 오로지 그리스도께로 향한 후에 우리를 혼란케 하는 것은 악한 영뿐입니다. 따라서 이 단계의 사람들이 겪는 불안하고 슬픈 생각들은 악한 영에 의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둘째 단계분별 전체의 핵심이 있습니다. 자신의 행동방식 자체에서 정체가 드러나기에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악한 영은 영적인 사람의 내면에 침투하기 위해 자신을 빛의 천사로 위장합니다.(고후 11:14) 이 상태의 사람들은 뚜렷한 악의 유혹에는 넘어가지 않기 때문에 악한 영은 영적인 것처럼 보이는 생각과 정신 상태로 자신을 위장하여 영적인 사람의 세계에 슬그머니 파고들어 하느님과 그 사람의 관계를 이간질 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생기는 유혹은 주님과의 화해 이전에 체험하는 유혹들과는 매우 다릅니다. 앞 단계에서는 유혹의 목적이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의 체험을 통해 신앙의 초석을 다지는 일을 방해하는 것이었다면, 이 단계에서의 유혹은 우리가 들어 선 영적 여정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새사람이 되게 하는 자비로운 사랑을 체험하기 이전에 가졌던 삶의 성향이나 방식으로 우리를 돌아가게 만드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유혹을 일으키는 유명한 여덟 가지 주요한 죄들(질투, 음욕, 탐욕, 악의, 분노, 나태, 자만, 교만)이 계속해서 활동합니다. 그중 가장 으뜸이 되는 것은 자기애(自己愛)입니다. 유혹들은 영적이고 긍정적인 빛으로 자신들을 위장함으로써 본질적으로 악에 속하는 부정적인 것을 영적인 포장으로  위장합니다. 예를 들어 ‘자만’은 악한 영에 의해 ‘사도적 열성’이나 ‘경건’으로 포장될 수 있습니다. 악한 영은 각 사람의 영적 세계에 적합할 것 같은 그런 생각들로 공격할 것입니다.

악한 영은 그 사람이 가고 있던 길에서 서서히 멀어지게 함으로써, 그 사람이 생각으로는 그리스도와 가깝다고 여기면서도 실재적으로는 더 이상 그리스도와 함께 하지 못하도록 유도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다시 자신의 자아 속에 갇히게 되고 그리스도는 환상이 되고 맙니다. 악한 영은 우리가 사랑의 길, 곧 십자가와 부활의 여정을 거부하게 하고, 자기희생이라는 ‘죽음’이 생명에 이르는 길임을 믿지 않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길을 헛되게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둘째 규범에서 완고함은 자기애(自己愛)라고 하는 영적인 병의 한 가지 징후로써 흔히 자기 의지에 대한 집착의 형태를 취합니다. 이 역시 ‘다카이오마 Dakaio-ma’ 곧 자신이 올바른 길에 있다는 환상에 머물기 위해 자신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입니다. 그 생각이 함정이라는 사실을 가장 잘 드러내는 징후는 내가 그 생각에 몰두하거나 생각을 표현할 때, 나의 시선이 근본적으로 나 자신을 향하고 있으며, 나의 관심에 의해, 나 자신의 계획이나 생각을 이행하는 데 있습니다. 더 이상 하느님이 첫 번째 자리에 계시지 않습니다. 

악한 영의 활동의 또 다른 징후는 과장입니다. 과장은 늘 일치와 조화와 아름다움에 대한 공격인데, 조화가 공격당하게 되면 가슴이 느낄 수 있습니다. 가슴은 인간의 전체성, 총체성, 아름다움을 보호하는 기관이기 때문입니다. 부조화에서 생겨나는 생각들은 서서히 자신의 뜻에 대한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나 영성수련 과정에서 생겨나는 생각들을 관찰할 때는 그것들의 발전과정을 주시해야 합니다.

번번이 일어나는 또 다른 유혹은 거짓 완전에 대한 유혹입니다. 악한 영은 부요한 영적상태는 자신이 일구어 낸 것이며. 자신들의 능력과 성실함의 결실이고, 자신의 정의와 용기의 결실이라고 믿게 합니다. 하지만 그 거룩함은 근본적으로 자기만족일 뿐입니다. 이같은 자기기만에 빠지게 되면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이나 원만하지 못한 관계들로 기분이 나빠지고, 그 관계들을 깊이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비난합니다. 하지만 자신은 결코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무서운 악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약은 교회와 공동체입니다. 진지하게 교회와 공동체 생활을 하는 것은 주관주의를 극복하는 최선의 방법입니다. 현실적으로 우리 마음의 정화를 돕는 사람들은 공동체이며 다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 여정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위대한 영성가들의 저술을 읽는 영적독서가 큰 도움이 됩니다. 영적독서의 또 다른 텍스트는 거룩한 삶을 산 성인(聖人)들의 전기(傳記)인데, 성인들과의 우정은 우리가 참으로 근본적인 길을 따라 성장하도록 도움을 줍니다. 유혹을 이기는 또 다른 방법은 영적 대화와 지도입니다. 영적으로 서로를 이해하는 사람들 사이에 우정과 친교는 영적여정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또 다른 방법은 하느님의 일에 대한 기억인데, 영적 저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활동하신 일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유지하고, 그 기초가 되는 사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기억을 계속적으로 상기할 것을 강력히 권합니다. 교부들은 우리가 묵상하는 대로 된다고 믿었습니다. 분별의 둘째 단계에서 기도는 하느님에 대한 기억의 훈련이고, 주님의 이름을 가능한 자주 부르는 훈련입니다.

영적여정에서 고독과 위안
우리가 영적여정에서 위안과 고독을 번갈아서 체험하는 이유의 중에 하나는 우리의 정신에  의식의 여러 층들이 존재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어떤 한 의식 층에서 우리는 모든 힘이 하느님에게서 나오며, 하느님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충만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다가 우리의 안전이 어떤 형태로든 위협을 받게 되면 아직까지 신앙이 스며들지 못한 의식층, 즉 무의식 속에서 무신론적 입장을 견지해 온 의식층에 도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 깊은 의식층에서 몇 년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또 다른 위기가 찾아오고, 그 결과 우리는 앞서보다 더 깊은 무신론의 의식층을 내면에서 인지하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서 위안과 고독이라는 곡선을 반복하여 그리며 나는 작은 새처럼 전진합니다.

그런 점에서 디아도코스 Diadochos가 이름 붙인 ‘교육적인 고독’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영적인 사람들이 거쳐야 하는 여러 단계에서 강조해야 할 또 다른 중요한 내용입니다. 교육적인 고독은 주님께서 인간의 마음에서 은총의 지각적 효과를 거두어들이시는 순간을 뜻하는데 이 때 영혼은 비탄에 휩싸이게 되며, 그 유혹의 시간을 허락하시는 분은 하느님입니다. 그러나 이 순간에도 은총은 실재하기에 우리가 자제력을 잃지 않고 악한 영의 함정이나 고통스런 상태에서 떠오르는 생각들을 무시한 채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인내한다면, 악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럴 때 고독의 순간은 은총의 순간이 되며,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깊어지는 순간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순간에 우리는 그분의 은총으로 감각적인 만족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그분을 따르는 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가 그분을 따르는 동기는 두려움이나 이익이 아니라, 오직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서 그분의 사랑을 획득하거나 거래할 수 있다는 위험한 생각이 사라질 때 까지, 곧 더 이상 쉽게 악마의 유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 그것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주님께서 우리의 선익을 위해 일으키시는 고독의 특징은 혼란을 야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슬픔이나 공허함을 느끼기는 하지만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리라는 확신이 내면 깊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통스럽거나 유쾌하거나 간에 우리를 하느님께로 이끌어 가는 기분과 내적 느낌은 모두 위안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반대로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를 하느님으로부터 떼어 놓게 만드는 기분과 내적 느낌은 모두 고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안의 체험은 우리에게서 하느님을 향한 갈망을 깨어나게 하고, 갈망의 초점을 세상에서 하느님을 향하여 전환하도록 하는데, 이같은 갈망의 전환을 그리스도교는 초연(detachment)이라고 하였습니다, 위안의 체험이 없다면 우리는 영혼의 정화가 진행되는 동안 요구되는 자기-인식과 변화를 껴안을 힘이 없을 것입니다. 특히 격렬한 정화의 기간 동안 우리는 하느님의 격려가 필요하고, 희망과 갈망의 초점을 다시 재정비 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나벤투라는Bonaventure는 위안이 거룩한 생각으로 우리의 기억을 채우고, 우리에게 하느님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준다고 하였습니다. 종교적 앎의 경험적인 기초로서, 그것들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제공하고, 고독의 시기에도 힘과 확신을 가지게 합니다. 때문에 리차드Richard of Victor는 위안을 하느님께서 이집트를 떠난 사람들에게 광야에서 제공하였던 꿀과 만나에 비유하였습니다.(호세아 2장 14)

- 김홍일 (기도하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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