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어느 가나안 신자의 질문에 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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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66회 작성일 23-03-14 14:23본문
안녕하세요? 현재 기존의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는 가나안신자입니다.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마땅하지 않은 모습 때문에 교회 출석을 망설이고 있었는데, 대면예배를 고집하는 등 코로나 상황에서 일부 교회들이 보여준 대처방식 때문에 교회 출석을 더욱 꺼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열정을 이야기하지만 너무나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기독교영성은 하나님과의 합일이고 그런 경험을 이어가면 더욱 타당하고 보편적인 경지에 이른다는 내용을 읽은 기억이 있는데요, 정말로 궁금합니다. 기독교신앙이 제공하는 영성적 가르침을 따라가면 그렇게 되는 건가요? 코로나 이후로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영성적 방향은 어떠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질문자는 한국교회에 크게 실망한 것 같습니다.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마땅하지 않은 모습” 때문에 교회와 소원해졌으니 말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실망은 기대에 못 미칠 때 하게 됩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그런 처지이지요. 통계만 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14년에 이루어진 〈종교별 이미지 평가〉를 보면, 종교지도자의 자질을 묻는 문항에서 응답자의 43.9%가 천주교 지도자가 우수하다고 대답했고, 불교 지도자에 대해서는 34.5%가, 개신교 지도자에 대해서는 23.8%만 우수하다고 대답했습니다.
같은 조사에서 교세확장의 정도를 물었을 때 개신교(59.3%)가 천주교(22.9%)나 불교(23.7%)에 비해 훨씬 높았습니다. 지도자의 의식 수준이 낮고, 교세 확장에 지나치게 몰두한다는 것이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또 이 조사는 한국교회를 이기주의적이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고, 과도하게 헌금을 강요하며, 목회자의 사리사욕이 심한 집단으로 묘사합니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나빠졌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총회)에서 2020년에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종교별 신뢰도를 묻는 질문에 불교와 천주교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대다수(86.8%와 83%)가 과거와 “비슷하다”고 답한 반면, 개신교의 경우 63.3%가 “더 나빠졌다”고 응답했습니다. 젊은 층에선 수치가 더 올라갑니다. “더 나빠졌다”는 대답이 72.6%나 됐으니까요.
의식
왜 이렇게 됐을까요? 한마디로 말해 한국교회의 의식 수준이 시민사회의 의식 수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수준은 인간의 발달 단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학자들은 의식의 수준을 여럿으로 나눕니다. 다섯으로 나누는 사람도 있고(장 갭서), 일곱으로 나누는 사람도 있고(토머스 키팅), 열로 나누는 사람도 있고(제인 뢰빙거), 열둘로 나누는 사람(켄 윌버)도 있습니다.
몇으로 나누든 의식의 수준은 크게 셋입니다. “합리적”(rational) 의식을 기준으로, 합리성 이전의 “전이성적”(pre-rational) 의식과 그것을 초월하는 “초이성적”(trans-rational) 의식이 그것이지요. 의식의 수준에 따라 신앙 양상도 달라집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성찰하려면 의식의 수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의식이 “전이성” 차원에 머물 때 신앙은 욕망의 지배를 받습니다. 욕망을 통제할 합리적 이성이나 욕망을 변형시킬 신성한 직관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번영신앙”은 전이성 수준의 의식에서 비롯한 신앙 행태입니다. 이기적이며 세속적인 축복을 구하는 기복신앙이나 초자연적 힘의 개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적신앙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번영신앙의 동력은 “성축부성”(성공・축복・부흥・성장)을 향한 강렬한 욕망입니다. “번영신앙은 건강과 부를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교묘하게 신학적으로 포장한 것이며, 그 배후에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물질주의적 세계관이 있다”(류장현)고 볼 수 있지요.
전이성 수준에서 신앙인은 주체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며 자율적으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이성이 발달하지 않고 직관이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율법이라는 초등교사(갈 3:24-25)입니다. 이 수준에서 신앙인은 유아적인 상태에 고착되어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갇혀 있습니다.”(갈 3:23) 율법(또는 교리)은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선과 악, 내 편과 네 편, 정통과 이단 따위의 흑백논리에 쉽게 빠집니다. 여기에서 자기중심성과 배타성이 나오지요. 자신과 다른 것(다른 신앙, 다른 교리)에 대한 독선과 혐오와 배제는 전이성 차원의 전형적인 신앙 행태입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니까요.
의식이 “합리적” 차원에 이를 때 신앙은 욕망보다 이성의 영향을 받습니다. 신앙은 더 이상 욕망 성취의 수단이기를 멈춥니다. 이 수준에서 신앙인은 기복신앙과 기적추구에서 벗어나 사랑・정의・평화・생명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합니다. 합리적 의식 수준에서 진리는 전통과 권위를 통해 전달되는(deliver) 게 아니라 이성의 힘으로 발견하는(discover)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모든 주제(신론, 기독론 등)를 전통적인 신학이나 교리의 틀로 보지 않고 이성의 렌즈로 보려고 합니다.
합리적 의식 수준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하늘에서 떨어진 절대 무오(無誤)의 경전이 아닙니다. 종교적 권위가 승인한 무시간적인 계시도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삶의 문서일 뿐이지요. 그래서 성경을 이성의 조명을 받아 비판적으로 읽습니다. 신화적인 요소는 가능한 한 배제하려고 하며, 기적 이야기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합리적 수준의 신앙은 지나치게 머리 중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간파한 대로 지식은 교만에 이르게 하지요.(고전 8:1) 그래서 머리 중심의 신앙은 이념적・논리적 우월성에 빠지기 쉽습니다. 율법적(교리적) 신앙이 배타성에 빠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의식이 “초이성” 차원으로 상승할 때 신앙은 욕망의 수렁에서 벗어나고, 무서운 교사로 군림했던 율법(교리)의 굴레에서도 해방될 뿐 아니라, 머리 중심 신앙의 이념적 경직성에서도 벗어납니다. 욕망의 수렁과 율법의 굴레, 그리고 머리의 경직에서 벗어날 때 가슴이 열리고, 감수성이 살아납니다. 무엇보다 새로운 인식 능력이 싹틉니다. 그게 바로 “직관”이지요. 직관은 욕망의 수렁과 율법의 굴레와 머리의 경직에서 벗어날 때 깨어나는 통합적인 알아차림의 능력입니다. 비로소 영적 의식이 싹틉니다. 하나님 경험도 새로워지지요. 하나님은 저기 바깥에 존재하는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대상이기보다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신성한 현존입니다. 이런 하나님 경험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행 17:28)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 10:30)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런 경험을 반영합니다. 초이성 단계의 의식 수준에서 신앙인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신비로 경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성한 현존에 둘러싸여 있음을 감지하기에 하나님을 더욱 가깝게 느낍니다. 질문자께서 언급하신 “하나님과의 합일”은 이 수준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신앙의 경지이지요.
직관이 깨어나면 만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만유시며 만유 안에 계심”(골 3:11)을 담론이 아니라 리얼리티로 알아차립니다. 이때 만물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성사(聖事)가 됩니다. 새와 들꽃이 예수님께 하나님 현존의 통로가 된 것처럼 말이지요. 하나님과의 합일에 이르면 만물뿐 아니라 만인과도 하나임을 느낍니다. 하나님과 만물, 그리고 만인과 하나임을 깨달을수록 욕망은 비워지고, 상상은 정화되며, 생각과 감정은 신성에 조율됩니다. 번영신앙의 탐욕과 율법신앙의 배타성, 집단적 맹신의 광기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의식은 대양처럼 활짝 열려 낯선 것이나 다른 것들까지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스러워졌기 때문이지요.
성찰
이제 우리는 한국교회가 어떻게 해서 동시대인들에게 실망을 주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의식의 수준이라는 거울에 비춰보면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의식 수준이 뚜렷이 보입니다. 한국사회는 근대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봉건적・마술적・신화적 의식 수준을 벗어나 이성적・합리적 의식 수준으로 이행했습니다. 물론 사적 영역에서 전이성 의식은 여전히 활개치고 있습니다. 갑질, 데이트 폭력, 스토킹, 가짜뉴스 등이 그렇지요. 하지만 공적 영역의 모든 기구(정부, 국회, 법원, 언론, 기업, 학교, 병원, 시민단체)는 합리성을 기초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공정”이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한국사회가 합리적 의식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한국교회는 어떨까요? 여전히 봉건적・마술적・미신적・신화적 의식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기적인 축복을 바라는 기복신앙,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을 바라는 기적신앙, 하나님을 무서운 재판관으로 여기는 상벌신앙, 다름을 틀림으로 단죄하는 근본주의 신앙, 행위와 업적 중심의 율법적 신앙은 합리적 의식 수준에 미치지 못한 한국교회의 자화상입니다.
합리적 의식이 실종되면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비상식적 행태가 창궐합니다. 봉건적이며 가부장적인 권위주의, 타종교에 대한 독선과 배타성, 반공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극우성향, 사회적 약자나 성소수자들에 대한 야만적인 혐오, 교주 같은 지도자들에 대한 집단적 맹신과 추종 따위가 그렇습니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번영신앙의 탐욕과 율법신앙의 독선, 그리고 집단적 맹신의 광기로 오염되어왔지요. 이러한 슬픈 자화상이 질문자를 실망시킨, 그래서 교회 출석을 망설이게 한 한국교회의 “마땅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한국교회의 몰상식은 코로나 상황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통계(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이 코로나가 위중한 상황에서도 한국교회는 모임과 행사와 식사를 자제하지 않고(78.1%), 방역과 예방수칙을 준수하지 않으며(69.5%), 정부와 사회의 요구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는다(74.5%)고 응답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비상식적임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지표지요.
의식 수준이 낮은 집단(한국교회)이 상대적으로 의식 수준이 높은 집단(한국사회)을 선도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선교의 위기입니다. 기독교대한감리회만 해도 코로나 시기(2019~2020)에 교인수가 6만 명 이상 감소하고, 헌금 수입도 1천억 원 이상 감소했다고 합니다.(뉴스앤조이) 이러한 위기는 감리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개신교 거의 모든 교단의 공통된 현실입니다.
대안
어찌해야 할까요? 답은 문제 속에 이미 들어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동시대인들에게 실망을 준 이유 속에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곧 질문자께서 궁금해하신 “코로나 이후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영성적 방향”의 실마리가 들어있는 것이지요. 간단히 말해 한국교회의 위신 회복과 선교 위기 극복은 의식의 수준을 높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종교 본연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Putting on the Mind of Christ의 저자 제임스 마리온의 말처럼 “종교에 단 하나의 본질적인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의식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귀담아듣고 가슴에 새겨야 할 격언 같은 문장입니다.
의식의 수준을 높이는 것은 기독교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르치고 몸소 실천하신 복음의 본질은 영적 의식의 수준에서 가능한 경지이니까요. 예를 들어 공생애 첫 설교(마 5:1-12)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복 있다고 선언하신 인간상은 번영신앙과 율법신앙의 의식 수준에서는 꿈도 꿀 수 없습니다. 합리적 의식 수준에서도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이지요. 이성의 차원에서 원수 사랑이 가능한가요? 복음의 요구는 초이성 의식 수준 곧 영적 의식에 다다른 사람만이 이룰 수 있습니다. 합일의식에 이른 사람에게 원수 사랑은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합니다. 이기적이며 세속적인 욕망을 성취하려는 “번영신앙”이 아니라 의식의 성장에 따라 새로운 존재가 되는 “변형신앙”이 그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성축부성”의 욕망을 비우고(가난한 사람), 성축부성의 달콤함과 결별하는 슬픔을 이겨야 하며(애통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의식 수준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온유한 사람), 성축부성 대신 하나님의 뜻을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지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운명적으로 맞이해야 하는 한국교회는 주저할 시간이 없습니다. 신앙의 패러다임을 “번영”신앙에서 “변형”신앙으로 바꾸는 모험에 서둘러 나서야 합니다. “부흥, 어게인 1907” 같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애써봐야 소용없습니다. 흐르는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영성에서 재현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의 요구에 맞는 영적 부흥이 있었습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1900년대 초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받던 한국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였다면, 우리는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변형신앙입니다.
변형신앙의 기초와 목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그리스도를 통해(through Christ), 그리스도처럼(like Christ), 마침내 그리스도로(as Christ) 사는 것”이지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은 변형신앙의 주창자였습니다.
변형
사도 바울은 변형신앙의 강력한 대변자였습니다. 그는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간곡하게 권고했지요.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입니다.(엡 4:22-24)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르라고 말입니다.(엡 3:14-15) 그가 바란 것은 “우리의 비천한 몸이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는 것”(빌 3: 21)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하기 위함”(벧후 1:3)이라고 하면서 변형신앙을 웅변적으로 증언합니다. 번영신앙처럼 무병장수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베드로는 대담한 발언을 서슴지 않습니다. 정욕 때문에 부패하지 말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입니다.(벧후 1:4)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라니요! 하나님스러워지라는 말 아닌가요? 베드로는 선언만 하지 않고, 실현과정을 단계적으로 제시합니다.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입니다.(벧후 1:5-7)
감리교회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변형신앙의 훌륭한 계승자였습니다. 감리교회 구원론의 꽃인 “그리스도인의 완전” 교리는 변형신앙의 탁월한 변주(變奏)였습니다. 죄인이 깨닫기 전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온 누리에 현존하며 그리스도 안에 충만합니다.(선행은총) 그러므로 생의 어느 시점에 선행은총을 깨닫는 순간 그리스도께 귀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회개) 이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형성됩니다.(믿음과 칭의)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닮게 하므로,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하나님을 닮고 싶습니다.(성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지극하고, 닮음이 점차 깊어지면 신자는 마침내 사랑으로 충만한 그리스도가 됩니다.(그리스도인의 완전) 웨슬리는 오늘날 우리가 되살려야 할 변형신앙의 거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웨슬리 영성은 코로나팬데믹 이후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이정표를 갖고 있습니다. 웨슬리 영성의 뿌리는 예수님에게서 비롯한 변형신앙이니까요.
웨슬리는 오늘날 우리가 되살려야 할 변형신앙의 거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웨슬리 영성은 코로나팬데믹 이후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이정표를 갖고 있습니다. 웨슬리 영성의 뿌리는 예수님에게서 비롯한 변형신앙이니까요.
수행
번영신앙과 율법신앙이 설교담론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교회의 주류 신앙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와는 달리 훨씬 복음적이고 개혁적인 신앙 담론들이 한국교회의 저변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수행 때문입니다! 번영신앙은 “통성기도”라는 수행기제가 있었기에 한국교회 신도들의 머리와 가슴과 골수에 박힐 수 있었습니다. 통성기도는 번영신앙 담론을 내면화하고 현실화하면서 욕망에 충실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복음적인 신앙 담론을 내면화하고 현실화할 수 있는 수행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복음적인 신앙 담론을 현실화하려면 의식의 성장과 존재의 변형이 필수인데 그것을 이뤄낼 수 있는 수행이 부족한 것이지요. 수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담론이 아무리 훌륭해도 변혁의 동력을 얻기 힘듭니다. 이것은 레시피와 음식의 관계와 같습니다. 아무리 레시피가 훌륭해도 조리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주린 배를 음식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이때 레시피는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레시피를 음식으로 만들려면 조리과정이 필요하듯 복음적인 담론을 현실화하려면 영적 조리과정이 필요합니다. 담론을 현실화하는 영적 조리과정, 그게 바로 수행(修行)이지요.
그러면 변형신앙 담론을 내면화하고 현실화할 수행은 무엇일까요? 관상기도가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관상기도는 통성기도처럼 욕망 충족을 위해 부르짖지 않습니다. 관상기도는 “성축부성”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깊은 침묵 속에서 성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현존 속에 머무르는 기도지요. 그렇기에 관상기도를 꾸준히 하면 의식의 결이 바뀝니다. 초이성 수준의 신성한 영적 의식으로 말입니다. 관상기도 수행을 통해 영적 의식 수준에 다다를 때 수행자는 성화와 완전의 과정을 거쳐 시나브로 복음의 요구에 적합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이때 예수의 길처럼 뜻깊고 즐거운 삶의 길도 없지요.
25시의 작가 비르질 게오르규의 『25시에서 영원으로』에 나오는 아름다운 장면을 소개하며 글을 맺겠습니다. 비르질이 어렸을 때 정교회 사제인 아버지와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아버지는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하나님이 되라는, 신이 되라는 명령을 받고 잉태되었단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신이 되게 하려고 육화하셨지.”
이제 나는 이 명령, 하나님이 되라는 이 명령이 나 자신에게도 주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장군, 장관, 왕이 되라는 사명을 받았다는 말만 들어도 엄청나게 기쁠 텐데, 하나님이 되라는 사명을 받았다니, 이것은 정말 최고였다!
성화(신화)를 가르치는 아버지와 그것을 벅차게 받아들이는 아들의 모습에 덩달아 가슴이 뜁니다. 비르질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여 하나님스러워지는 것을 경험하고 나서 그 감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신성한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 모두가 변화된 모습이었고, 이 땅의 모든 근심 걱정을 다 벗어난 모습이었으며, 성화된 모습이었다. 성화를 넘어서 모두가 신화(神化)된 모습이었다. 얼굴은 아름다웠고 눈에서는 빛이 났다. 거친 벌목꾼들도 그 볼과 그 이마에 성인들의 후광과 유사한 빛들을 지니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천사 같았다. 신성한 예배를 마치고 나올 때면, 우리 마을의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가 “테오포리”(Théophoroi) 즉 “하나님을 지닌 자들”이 되었다. 그들의 혈관에는 하나님의 피가 흘렀다.”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테오포리”가 되어 하나님스러워진다면 학개 예언자가 희망한 대로(학 2:9) 한국교회의 나중 영광은 이전 영광보다 훨씬 커질 것입니다.
- 이민재
질문자는 한국교회에 크게 실망한 것 같습니다.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마땅하지 않은 모습” 때문에 교회와 소원해졌으니 말입니다. 안타깝습니다. 실망은 기대에 못 미칠 때 하게 됩니다. 한국교회가 지금 그런 처지이지요. 통계만 봐도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14년에 이루어진 〈종교별 이미지 평가〉를 보면, 종교지도자의 자질을 묻는 문항에서 응답자의 43.9%가 천주교 지도자가 우수하다고 대답했고, 불교 지도자에 대해서는 34.5%가, 개신교 지도자에 대해서는 23.8%만 우수하다고 대답했습니다.
같은 조사에서 교세확장의 정도를 물었을 때 개신교(59.3%)가 천주교(22.9%)나 불교(23.7%)에 비해 훨씬 높았습니다. 지도자의 의식 수준이 낮고, 교세 확장에 지나치게 몰두한다는 것이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입니다. 또 이 조사는 한국교회를 이기주의적이고, 언행이 일치하지 않고, 과도하게 헌금을 강요하며, 목회자의 사리사욕이 심한 집단으로 묘사합니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개신교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나빠졌습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총회)에서 2020년에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종교별 신뢰도를 묻는 질문에 불교와 천주교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대다수(86.8%와 83%)가 과거와 “비슷하다”고 답한 반면, 개신교의 경우 63.3%가 “더 나빠졌다”고 응답했습니다. 젊은 층에선 수치가 더 올라갑니다. “더 나빠졌다”는 대답이 72.6%나 됐으니까요.
의식
왜 이렇게 됐을까요? 한마디로 말해 한국교회의 의식 수준이 시민사회의 의식 수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수준은 인간의 발달 단계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납니다. 학자들은 의식의 수준을 여럿으로 나눕니다. 다섯으로 나누는 사람도 있고(장 갭서), 일곱으로 나누는 사람도 있고(토머스 키팅), 열로 나누는 사람도 있고(제인 뢰빙거), 열둘로 나누는 사람(켄 윌버)도 있습니다.
몇으로 나누든 의식의 수준은 크게 셋입니다. “합리적”(rational) 의식을 기준으로, 합리성 이전의 “전이성적”(pre-rational) 의식과 그것을 초월하는 “초이성적”(trans-rational) 의식이 그것이지요. 의식의 수준에 따라 신앙 양상도 달라집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을 성찰하려면 의식의 수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의식이 “전이성” 차원에 머물 때 신앙은 욕망의 지배를 받습니다. 욕망을 통제할 합리적 이성이나 욕망을 변형시킬 신성한 직관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에 만연한 “번영신앙”은 전이성 수준의 의식에서 비롯한 신앙 행태입니다. 이기적이며 세속적인 축복을 구하는 기복신앙이나 초자연적 힘의 개입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기적신앙은 여기에서 나옵니다. 번영신앙의 동력은 “성축부성”(성공・축복・부흥・성장)을 향한 강렬한 욕망입니다. “번영신앙은 건강과 부를 소유하려는 인간의 욕망을 교묘하게 신학적으로 포장한 것이며, 그 배후에는 천박한 자본주의의 물질주의적 세계관이 있다”(류장현)고 볼 수 있지요.
전이성 수준에서 신앙인은 주체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고 합리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며 자율적으로 행동하지 못합니다. 이성이 발달하지 않고 직관이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때 등장하는 것이 율법이라는 초등교사(갈 3:24-25)입니다. 이 수준에서 신앙인은 유아적인 상태에 고착되어 “율법의 감시를 받으면서 갇혀 있습니다.”(갈 3:23) 율법(또는 교리)은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판단합니다. 그래서 선과 악, 내 편과 네 편, 정통과 이단 따위의 흑백논리에 쉽게 빠집니다. 여기에서 자기중심성과 배타성이 나오지요. 자신과 다른 것(다른 신앙, 다른 교리)에 대한 독선과 혐오와 배제는 전이성 차원의 전형적인 신앙 행태입니다. 다른 것은 틀린 것이니까요.
의식이 “합리적” 차원에 이를 때 신앙은 욕망보다 이성의 영향을 받습니다. 신앙은 더 이상 욕망 성취의 수단이기를 멈춥니다. 이 수준에서 신앙인은 기복신앙과 기적추구에서 벗어나 사랑・정의・평화・생명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합니다. 합리적 의식 수준에서 진리는 전통과 권위를 통해 전달되는(deliver) 게 아니라 이성의 힘으로 발견하는(discover) 것입니다. 따라서 신앙의 모든 주제(신론, 기독론 등)를 전통적인 신학이나 교리의 틀로 보지 않고 이성의 렌즈로 보려고 합니다.
합리적 의식 수준에 있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하늘에서 떨어진 절대 무오(無誤)의 경전이 아닙니다. 종교적 권위가 승인한 무시간적인 계시도 아닙니다. 역사적으로 형성된 삶의 문서일 뿐이지요. 그래서 성경을 이성의 조명을 받아 비판적으로 읽습니다. 신화적인 요소는 가능한 한 배제하려고 하며, 기적 이야기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합리적 수준의 신앙은 지나치게 머리 중심입니다. 사도 바울이 간파한 대로 지식은 교만에 이르게 하지요.(고전 8:1) 그래서 머리 중심의 신앙은 이념적・논리적 우월성에 빠지기 쉽습니다. 율법적(교리적) 신앙이 배타성에 빠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의식이 “초이성” 차원으로 상승할 때 신앙은 욕망의 수렁에서 벗어나고, 무서운 교사로 군림했던 율법(교리)의 굴레에서도 해방될 뿐 아니라, 머리 중심 신앙의 이념적 경직성에서도 벗어납니다. 욕망의 수렁과 율법의 굴레, 그리고 머리의 경직에서 벗어날 때 가슴이 열리고, 감수성이 살아납니다. 무엇보다 새로운 인식 능력이 싹틉니다. 그게 바로 “직관”이지요. 직관은 욕망의 수렁과 율법의 굴레와 머리의 경직에서 벗어날 때 깨어나는 통합적인 알아차림의 능력입니다. 비로소 영적 의식이 싹틉니다. 하나님 경험도 새로워지지요. 하나님은 저기 바깥에 존재하는 초월적이며 절대적인 대상이기보다 지금 여기에 현존하는 신성한 현존입니다. 이런 하나님 경험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고 있습니다.”(행 17:28)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요 10:30)라는 예수님의 말씀도 이런 경험을 반영합니다. 초이성 단계의 의식 수준에서 신앙인은 하나님을 알 수 없는 신비로 경험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신성한 현존에 둘러싸여 있음을 감지하기에 하나님을 더욱 가깝게 느낍니다. 질문자께서 언급하신 “하나님과의 합일”은 이 수준에서 경험할 수 있는 신앙의 경지이지요.
직관이 깨어나면 만물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만유시며 만유 안에 계심”(골 3:11)을 담론이 아니라 리얼리티로 알아차립니다. 이때 만물은 하나님을 드러내는 성사(聖事)가 됩니다. 새와 들꽃이 예수님께 하나님 현존의 통로가 된 것처럼 말이지요. 하나님과의 합일에 이르면 만물뿐 아니라 만인과도 하나임을 느낍니다. 하나님과 만물, 그리고 만인과 하나임을 깨달을수록 욕망은 비워지고, 상상은 정화되며, 생각과 감정은 신성에 조율됩니다. 번영신앙의 탐욕과 율법신앙의 배타성, 집단적 맹신의 광기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의식은 대양처럼 활짝 열려 낯선 것이나 다른 것들까지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스러워졌기 때문이지요.
성찰
이제 우리는 한국교회가 어떻게 해서 동시대인들에게 실망을 주고 있는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지를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을 갖게 되었습니다. 의식의 수준이라는 거울에 비춰보면 한국사회와 한국교회의 의식 수준이 뚜렷이 보입니다. 한국사회는 근대화와 민주화를 거치면서 봉건적・마술적・신화적 의식 수준을 벗어나 이성적・합리적 의식 수준으로 이행했습니다. 물론 사적 영역에서 전이성 의식은 여전히 활개치고 있습니다. 갑질, 데이트 폭력, 스토킹, 가짜뉴스 등이 그렇지요. 하지만 공적 영역의 모든 기구(정부, 국회, 법원, 언론, 기업, 학교, 병원, 시민단체)는 합리성을 기초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공정”이라는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한국사회가 합리적 의식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한국교회는 어떨까요? 여전히 봉건적・마술적・미신적・신화적 의식 수준에 머물러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기적인 축복을 바라는 기복신앙,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을 바라는 기적신앙, 하나님을 무서운 재판관으로 여기는 상벌신앙, 다름을 틀림으로 단죄하는 근본주의 신앙, 행위와 업적 중심의 율법적 신앙은 합리적 의식 수준에 미치지 못한 한국교회의 자화상입니다.
합리적 의식이 실종되면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비상식적 행태가 창궐합니다. 봉건적이며 가부장적인 권위주의, 타종교에 대한 독선과 배타성, 반공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극우성향, 사회적 약자나 성소수자들에 대한 야만적인 혐오, 교주 같은 지도자들에 대한 집단적 맹신과 추종 따위가 그렇습니다. 이렇게 한국교회는 번영신앙의 탐욕과 율법신앙의 독선, 그리고 집단적 맹신의 광기로 오염되어왔지요. 이러한 슬픈 자화상이 질문자를 실망시킨, 그래서 교회 출석을 망설이게 한 한국교회의 “마땅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한국교회의 몰상식은 코로나 상황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통계(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사람이 코로나가 위중한 상황에서도 한국교회는 모임과 행사와 식사를 자제하지 않고(78.1%), 방역과 예방수칙을 준수하지 않으며(69.5%), 정부와 사회의 요구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는다(74.5%)고 응답했습니다. 한국교회가 비상식적임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지표지요.
의식 수준이 낮은 집단(한국교회)이 상대적으로 의식 수준이 높은 집단(한국사회)을 선도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국교회가 겪고 있는 선교의 위기입니다. 기독교대한감리회만 해도 코로나 시기(2019~2020)에 교인수가 6만 명 이상 감소하고, 헌금 수입도 1천억 원 이상 감소했다고 합니다.(뉴스앤조이) 이러한 위기는 감리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개신교 거의 모든 교단의 공통된 현실입니다.
대안
어찌해야 할까요? 답은 문제 속에 이미 들어있습니다. 한국교회가 동시대인들에게 실망을 준 이유 속에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곧 질문자께서 궁금해하신 “코로나 이후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영성적 방향”의 실마리가 들어있는 것이지요. 간단히 말해 한국교회의 위신 회복과 선교 위기 극복은 의식의 수준을 높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종교 본연의 임무이기도 합니다. Putting on the Mind of Christ의 저자 제임스 마리온의 말처럼 “종교에 단 하나의 본질적인 목적이 있다면 그것은 의식의 성장을 촉진하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귀담아듣고 가슴에 새겨야 할 격언 같은 문장입니다.
의식의 수준을 높이는 것은 기독교 복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가르치고 몸소 실천하신 복음의 본질은 영적 의식의 수준에서 가능한 경지이니까요. 예를 들어 공생애 첫 설교(마 5:1-12)에서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한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복 있다고 선언하신 인간상은 번영신앙과 율법신앙의 의식 수준에서는 꿈도 꿀 수 없습니다. 합리적 의식 수준에서도 불가능하기는 마찬가지이지요. 이성의 차원에서 원수 사랑이 가능한가요? 복음의 요구는 초이성 의식 수준 곧 영적 의식에 다다른 사람만이 이룰 수 있습니다. 합일의식에 이른 사람에게 원수 사랑은 자연스러운 일이지요.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분명합니다. 이기적이며 세속적인 욕망을 성취하려는 “번영신앙”이 아니라 의식의 성장에 따라 새로운 존재가 되는 “변형신앙”이 그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성축부성”의 욕망을 비우고(가난한 사람), 성축부성의 달콤함과 결별하는 슬픔을 이겨야 하며(애통하는 사람), 그리스도의 의식 수준에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온유한 사람), 성축부성 대신 하나님의 뜻을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려고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로운 사람, 평화를 이루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지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운명적으로 맞이해야 하는 한국교회는 주저할 시간이 없습니다. 신앙의 패러다임을 “번영”신앙에서 “변형”신앙으로 바꾸는 모험에 서둘러 나서야 합니다. “부흥, 어게인 1907” 같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려고 애써봐야 소용없습니다. 흐르는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영성에서 재현은 불가능합니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의 요구에 맞는 영적 부흥이 있었습니다. 평양대부흥운동이 1900년대 초 일본제국주의의 식민통치를 받던 한국사회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였다면, 우리는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변형신앙입니다.
변형신앙의 기초와 목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가 알파요 오메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그리스도를 통해(through Christ), 그리스도처럼(like Christ), 마침내 그리스도로(as Christ) 사는 것”이지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던 예수님은 변형신앙의 주창자였습니다.
변형
사도 바울은 변형신앙의 강력한 대변자였습니다. 그는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간곡하게 권고했지요.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입니다.(엡 4:22-24)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살면서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에게까지 다다르라고 말입니다.(엡 3:14-15) 그가 바란 것은 “우리의 비천한 몸이 변화되어 주님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는 것”(빌 3: 21)이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가 “하나님의 영광과 덕을 누리게 하기 위함”(벧후 1:3)이라고 하면서 변형신앙을 웅변적으로 증언합니다. 번영신앙처럼 무병장수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베드로는 대담한 발언을 서슴지 않습니다. 정욕 때문에 부패하지 말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입니다.(벧후 1:4)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라니요! 하나님스러워지라는 말 아닌가요? 베드로는 선언만 하지 않고, 실현과정을 단계적으로 제시합니다. 믿음에 덕을 더하고, 덕에 지식을 더하고, 지식에 절제를 더하고, 절제에 인내를 더하고, 인내에 경건을 더하고, 경건에 신도간의 우애를 더하고, 신도간의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입니다.(벧후 1:5-7)
감리교회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변형신앙의 훌륭한 계승자였습니다. 감리교회 구원론의 꽃인 “그리스도인의 완전” 교리는 변형신앙의 탁월한 변주(變奏)였습니다. 죄인이 깨닫기 전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온 누리에 현존하며 그리스도 안에 충만합니다.(선행은총) 그러므로 생의 어느 시점에 선행은총을 깨닫는 순간 그리스도께 귀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회개) 이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형성됩니다.(믿음과 칭의)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닮게 하므로,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하나님을 닮고 싶습니다.(성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지극하고, 닮음이 점차 깊어지면 신자는 마침내 사랑으로 충만한 그리스도가 됩니다.(그리스도인의 완전) 웨슬리는 오늘날 우리가 되살려야 할 변형신앙의 거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웨슬리 영성은 코로나팬데믹 이후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이정표를 갖고 있습니다. 웨슬리 영성의 뿌리는 예수님에게서 비롯한 변형신앙이니까요.
웨슬리는 오늘날 우리가 되살려야 할 변형신앙의 거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웨슬리 영성은 코로나팬데믹 이후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이정표를 갖고 있습니다. 웨슬리 영성의 뿌리는 예수님에게서 비롯한 변형신앙이니까요.
수행
번영신앙과 율법신앙이 설교담론으로 끝나지 않고 한국교회의 주류 신앙으로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와는 달리 훨씬 복음적이고 개혁적인 신앙 담론들이 한국교회의 저변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수행 때문입니다! 번영신앙은 “통성기도”라는 수행기제가 있었기에 한국교회 신도들의 머리와 가슴과 골수에 박힐 수 있었습니다. 통성기도는 번영신앙 담론을 내면화하고 현실화하면서 욕망에 충실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복음적인 신앙 담론을 내면화하고 현실화할 수 있는 수행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복음적인 신앙 담론을 현실화하려면 의식의 성장과 존재의 변형이 필수인데 그것을 이뤄낼 수 있는 수행이 부족한 것이지요. 수행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담론이 아무리 훌륭해도 변혁의 동력을 얻기 힘듭니다. 이것은 레시피와 음식의 관계와 같습니다. 아무리 레시피가 훌륭해도 조리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주린 배를 음식으로 채울 수 없습니다. 이때 레시피는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레시피를 음식으로 만들려면 조리과정이 필요하듯 복음적인 담론을 현실화하려면 영적 조리과정이 필요합니다. 담론을 현실화하는 영적 조리과정, 그게 바로 수행(修行)이지요.
그러면 변형신앙 담론을 내면화하고 현실화할 수행은 무엇일까요? 관상기도가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관상기도는 통성기도처럼 욕망 충족을 위해 부르짖지 않습니다. 관상기도는 “성축부성”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깊은 침묵 속에서 성 삼위일체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현존 속에 머무르는 기도지요. 그렇기에 관상기도를 꾸준히 하면 의식의 결이 바뀝니다. 초이성 수준의 신성한 영적 의식으로 말입니다. 관상기도 수행을 통해 영적 의식 수준에 다다를 때 수행자는 성화와 완전의 과정을 거쳐 시나브로 복음의 요구에 적합한 사람으로 변합니다. 이때 예수의 길처럼 뜻깊고 즐거운 삶의 길도 없지요.
25시의 작가 비르질 게오르규의 『25시에서 영원으로』에 나오는 아름다운 장면을 소개하며 글을 맺겠습니다. 비르질이 어렸을 때 정교회 사제인 아버지와 대화하는 장면입니다.
아버지는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하나님이 되라는, 신이 되라는 명령을 받고 잉태되었단다. 그리스도는 사람이 신이 되게 하려고 육화하셨지.”
이제 나는 이 명령, 하나님이 되라는 이 명령이 나 자신에게도 주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장군, 장관, 왕이 되라는 사명을 받았다는 말만 들어도 엄청나게 기쁠 텐데, 하나님이 되라는 사명을 받았다니, 이것은 정말 최고였다!
성화(신화)를 가르치는 아버지와 그것을 벅차게 받아들이는 아들의 모습에 덩달아 가슴이 뜁니다. 비르질은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여 하나님스러워지는 것을 경험하고 나서 그 감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신성한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 모두가 변화된 모습이었고, 이 땅의 모든 근심 걱정을 다 벗어난 모습이었으며, 성화된 모습이었다. 성화를 넘어서 모두가 신화(神化)된 모습이었다. 얼굴은 아름다웠고 눈에서는 빛이 났다. 거친 벌목꾼들도 그 볼과 그 이마에 성인들의 후광과 유사한 빛들을 지니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천사 같았다. 신성한 예배를 마치고 나올 때면, 우리 마을의 모든 남자와 모든 여자가 “테오포리”(Théophoroi) 즉 “하나님을 지닌 자들”이 되었다. 그들의 혈관에는 하나님의 피가 흘렀다.”
한국교회의 성도들이 “테오포리”가 되어 하나님스러워진다면 학개 예언자가 희망한 대로(학 2:9) 한국교회의 나중 영광은 이전 영광보다 훨씬 커질 것입니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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