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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에세이) 번영에서 변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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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65회 작성일 23-03-14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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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시편 1:1-2)

우리는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게 됩니다.
(고후 3:18)
 
  ※ 1년 전 오늘(2021.9.14) 조용기 목사가 소천했다. 이글은 그 즈음에 썼는데 다시 읽어본다. 번영신앙으로부터 변형신앙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여전히 한국교회에 주어진 시대적 과제이기 때문이다.
 

지난 화요일(2021년 9월 14일)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세운 조용기 목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130년 남짓한 한국교회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의 영향력은 대단했고, 앞으로도 한동안 그럴 것이다. 내가 신학교 다닐 때는 그의 빠르고 자신감 가득한 어투, 그리고 “…것입니다”로 말을 맺는 임팩트 강한 억양을 흉내내는 학생들이 꽤 있었다. 그들은 그의 설교 테이프가 늘어질 때까지 반복해서 들었다.

그의 성공은 많은 신학생들과 목회자들의 가슴에 크기와 양에 대한 욕망의 불을 질렀다. 그이만한 성공의 아이콘은 없었기에, 전국의 교회들에서 새벽기도회나 금요철야기도회 때마다 반복됐던 “성축부성”(성공・축복・부흥・성장)을 부르짖는 기도에는 그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목회하는 사람치고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그를 선망하지 않는 사람은 드물었다.
   
패러다임의 종언
한국교회사에 그가 남긴 흔적이 기억하거나 칭송하고 싶은 업적인지, 아니면 망각하거나 지우고 싶은 얼룩인지는 평가하지 않으려고 한다. 사람에 따라 그에 대한 호불호는 극명하게 나뉜다. 어떤 사람에게 그는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한 구세주 같은 사람일 테지만, 또 어떤 사람에게 그는 기독교 복음을 심각하게 훼손한 적폐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를 찬성하든 반대하든 한 가지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그는 하나의 패러다임을 만든 사람이었다. 그의 영향력이 그만큼 컸다는 뜻이다. 그가 만든 패러다임은 반세기 넘도록 한국교회를 장악했다. 그 패러다임의 영향은 교단과 교파를 가리지 않았다. 그 패러다임으로 한국교회가 하나 됐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니까. 그 패러다임의 이름이 바로 “번영신앙”이다. 조용기 목사가 주창한 “삼박자축복”은 번영신앙의 트레이드마크다.
  삼박자축복은 요한3서 2절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조용기 목사는 이 한 구절로 성경 전체를 꿴다. 삼박자축복은 “영혼의 잘됨”을 영혼구원과 영생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한다. 이러한 영혼의 잘됨은 육체의 건강과 물질 번영의 보증이다. 삼박자축복은 영혼의 잘됨을 말하지만 강조점은 육체의 건강과 물질의 번영 즉 무병장수와 부귀영화에 있다. “삼박자축복은 영혼구원은 얼른 건너뛰고 그와 무관한, 아니 그와 반대인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건강에 집중한다. 원, 투, 쓰리 박자를 맞추는 사이 하늘과 땅이 뒤섞여버린다.”(권수경, 『번영복음의 속임수』) 그렇게 삼박자 축복은 “기복신앙”의 온상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 삼박자축복의 원조가 영면한 것이다. 이것은 번영신앙 패러다임의 종언(終焉)을 의미한다. 인정하기 싫든 좋든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물론 성공과 축복을 향한 욕망의 불길이 꺼지지 않는 한, 번영신앙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대안 패러다임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번영신앙에 더욱 집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예언자적 안목이 있다면 조용기 목사의 죽음이 번영신앙 패러다임의 끝을 알리는 시대의 표징이라는 사실쯤은 알아차려야 한다.
  조용기 목사의 소천이 코로나팬데믹 한가운데에서 일어났다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코로나팬데믹이야말로 인류에게 새로운 삶의 패러다임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신앙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는다면 한국교회는 성장을 멈추고 침체의 길을 걷는 정도가 아니라, 파산을 앞둔 회생 불가능한 종교기업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번영신앙 패러다임을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이 있을까? 있다면 무엇일까?


바라봄의 법칙
시편 1편은 훌륭한 통찰을 제공한다. 이 시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좋아하는 시편이다. 번영신앙도 예외는 아니다. 번영신앙이야말로 이 시편을 좋아할 것이다. 특히 3절은 번연신앙의 헌장에 들어가기에 손색이 없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으니,
      하는 일마다 형통할 것이다.
   
“하는 일마다 형통할 것”이라니 할렐루야다! 영어로 하면 “올 데이 두 쉘 프로스퍼”(all they do shall prosper)다. “prosper”가 번영한다는 뜻이니 이처럼 번영신앙의 헌장과 어울리는 구절이 또 있을까?
  그간 한국교회는 하는 일이 형통하게 해달라고 얼마나 부르짖었는가. 교회가 부흥하고 사업이 번창하기를 얼마나 부르짖었는가. 그래, 한국교회 목회자들은 “철따라 열매를 맺”는 나무처럼 헌금이 규칙적으로 풍성하게 들어오게 해달라고 간구했고, “잎이 시들지 아니함 같”이 만사가 형통하기를 빌고 또 빌었다. “성축부성”을 얻기 위해서라면 “악인의 꾀”도 눈 감았고, “죄인의 길”도 주저하지 않고 밟았다. 교회를 크게 건축하는 “주님의 일”을 위해서라면 탈법도 불법도 불사했다. 마침내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굽신거리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의 맛이란 정말이지 삼삼한 것이었다.
  하지만 “성축부성”은 소수에게 허락된 천행이었을 뿐,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가능성이 희박할수록 “성축부성”을 향한 욕망의 불길은 세차게 타올랐고, 오만한 자리에 대한 탐심은 마음의 단지를 가득 채웠다. 여기에서 유명한 신념의 법칙이 등장한다. “바라봄의 법칙”이 그것이다. 원하는 것을 바라보며 꿈꾸고 믿으면 이루어진다는 법칙 말이다.
  조용기 목사는 창세기 13장 14-15절에서 바라봄의 법칙을 끌어낸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창 13:14-15) 『번영복음의 속임수』의 저자 권수경은 조용기 목사의 베스트셀러 『4차원 영성』에 나오는 “바라봄의 법칙”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저자가 굳이 땅 이야기로 ‘바라봄의 법칙’을 만든 이유는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땅은 이 세상 재물의 표본이다. 저자는 아브라함이 바라본 땅을 아예 ‘부동산’(real estate)이라 부른다. 저자는 아브라함이 가졌던 막대한 재산을 광대한 부동산과 엮어 ‘아브라함의 축복과 형통’이라 부르며 독자를 유혹한다. 약속의 땅을 바라본 아브라함의 믿음의 눈이 졸지에 탐욕의 눈으로 변했다. 그리스도를 배제한 채 거부(巨富) 아브라함의 부동산을 중심으로 전개하는 바라봄의 법칙은 결국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정말로 바라보라 하신 영원한 본향을 잊어버리게 만든다. ‘나도 부동산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이 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결국 한국교회 성도들이 밤낮으로 묵상한 것은 주님의 율법이 아니었다. 주님의 교훈도, 주님의 말씀도, 주님의 진리도 아니었다. 육화된 말씀인 그리스도도, 그리스도의 약속도 아니었다. 부동산이었고, “성축부성”이었다. 성공하는 것과 부자되는 것을 밤낮으로 묵상했고 바라보았다. 조용기 목사는 그렇게 하라고 설교했다.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아브라함의 자녀들이 눈을 들어 약속의 부동산을 바라본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영원한 참된 번영은 시야에서 사라진지 오래다. 번영복음 전도자들이 교회 안으로 이교사상을 들여놓고는 성경 말씀을 왜곡하여 하나님의 언약과 구원을 효과적으로 덮어버린 덕분이다.”

주님의 말씀
이러한 번영신앙의 일탈에서 벗어나려면 어찌해야 할까? 번영신앙 패러다임을 극복할 새로운 패러다임은 무엇일까? 2절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복있는 사람은…) 오로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율법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 어떤 사람일까? 시편에서 율법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주님의 법, 주님의 증거, 주님의 교훈, 주님의 법도, 주님의 계명, 주님의 율례, 주님의 규례 따위…. “주님의 말씀”도 빼놓을 수 없다. 율법은 주님의 말씀이다. 이게 포인트다.
  말씀에는 네 가지가 있다. “기록된”(written) 말씀, “선포된”(spoken) 말씀, “육화된”(incarnate) 말씀, “내적”(inner) 말씀이 그것이다. 기록된 말씀도 중요하고 선포된 말씀도 중요하지만, 기독교인이 망각해서는 안 되는 말씀이 바로 “육화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다. 기록된 말씀과 선포된 말씀과 내적 말씀은 모두 육화된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밤낮으로 묵상한다는 뜻을 함축한다. (내적 말씀에 대한 설명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이것이 바로 번영신앙 패러다임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 패러다임의 기초다.
  번영신앙 패러다임이 만사형통을 밤낮으로 바라볼 때,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리스도”를 바라본다. 번영신앙 패러다임이 성공과 축복, 부흥과 성장을 꿈꿀 때, 새로운 패러다임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꿈꾼다. 번영신앙 패러다임이 부자가 되어 오만한 자리에 앉는 것을 꿈꿀 때, 새로운 패러다임은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여, 점점 더 큰 영광에 이르는”(고후 3:18) 것을 꿈꾼다.  따라서 “번영신앙”을 대체할 새로운 패러다임의 이름은 “변형신앙”이 적절하다.
  한국교회는 조용기 목사의 명복을 빌면서 번영신앙 패러다임과 과감하게 이별해야 한다. 그동안 우리를 강력하게 사로잡았고 중독시켰던 패러다임을 떠난다는 것은 매우 두렵고 고통스러운 일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번영신앙 패러다임이 오늘의 한국교회를 만들었고, 그러한 한국교회가 동시대인들의 가슴에 울림을 주기보다 울화를 유발하고 있다면,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번영”으로부터 “변형”으로의 전향을 서둘러야 한다. 그리고 전향은 단호해야 한다.


변형신앙
변형신앙의 기초와 목표는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알파요 오메가다.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그리스도를 통해(through Christ), 그리스도처럼(like Christ), 마침내 그리스도로(as Christ) 사는 것”이다. 그래야 “정욕 때문에 부패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벧후 1:4)이 될 수 있다. 예수님도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고.(마 5:48) 예수님은 일찍이 “변형신앙”의 주창자이셨던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편지의 수신인들에게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보라”(히 12:2)고 권고했는데, 예수께서 창시하고 완성한 그 믿음이바로 “변형신앙”이다.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그리스도를 통해(through Christ),
그리스도처럼(like Christ),
그리스도로(as Christ)
사도 바울은 변형신앙의 강력한 대변자였다. 그가 바랐던 것은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르”는 것이었다.(빌 3:10-11) 그래서 그는 “이로웠던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운 것으로” 여길 수 있었다.(빌 3:7)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기를” 원했다.(빌 3:9)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렸다.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켜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빌 3: 21)
  감리교회 창시자인 존 웨슬리도 변형신앙의 훌륭한 계승자다. 웨슬리 구원론의 꽃인 “그리스도인의 완전” 교리는 변형신앙의 탁월한 변주(變奏)였다. 죄인이 깨닫기 전에도 하나님의 사랑은 온 누리에 현존하며 그리스도 안에 충만하다.(선행은총) 하므로, 생의 어느 시점에 선행은총을 깨닫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께 귀의하지 않을 수 없다.(회개) 이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가 형성된다.(믿음과 칭의)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닮게 한다. 하나님을 사랑할수록 하나님을 닮고 싶다.(성화)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지극하고, 닮음이 점차 깊어지면 신자는 마침내 사랑으로 충만한 그리스도가 된다.(그리스도인의 완전)
  웨슬리는 오늘날 우리가 되살려야 할 변형신앙의 거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웨슬리 영성은 코로나팬데믹 이후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분명한 이정표를 갖고 있다. 웨슬리 영성의 뿌리는 변형신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웨슬리의 후예인 감리교회에서조차 변형신앙에 관한 설교를 들어볼 수 없다. 감리교회의 강단도 번영신앙에 물들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강단에서 그리스도인의 완전 곧 신화(deification)에 대한 설교를 들어본 적 있는가? 평생을 감리교회의 목사로 섬겼지만 글쎄다. 잘 알려진 대로 초기 감리교도들은 메토디스트(Methodist)라고 불렸다. 경멸과 조롱이 섞인 이름이었지만,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르기 위한 금욕과 영적 훈련에 치열했고 철저했고 규칙적이었기 때문이다.
  코로나 시대는 시대의 표징을 읽을 수 있는 예언자적 상상력을 요구하고 있다. 코로나는 우리에게 “성축부성”에 혈안이 된 번영신앙이 아니라, 침묵・독거・금욕・절제・단순성 같은 수도원적 영성을 요구하고 있다. 변형신앙 패러다임을 연습할 수 있는 좋은 때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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