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프레즌스, 현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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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10회 작성일 24-07-22 14:27본문
사울과 온 이스라엘은 그 블레셋 사람이 하는 말을 듣고, 몹시 놀라서 떨기만 하였다.
(삼상 17:11)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막 4:38)
거인 골리앗이 도발했을 때 이스라엘은 “몹시 놀라서 떨기만 하였다.”(삼상 17:11) 골리앗은 수시로 엄습하는 생활현실(R1)의 문제들을 상징한다. 골리앗처럼 거대한 문제들을 대면할 때 우리도 몹시 놀라며 떤다. 심리현실(R2)에 어둠이 쌓인다. 몸이 병들 때, 가족 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직장생활이 원만하지 않을 때가 그렇다. 나라에 전쟁이라도 나면 온 국민의 마음에 공포가 쌓인다. 교회생활도 골리앗처럼 힘들게 할 때가 있다.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있다. 첫 번째는 거짓자아(P2)의 횡포에 시달리는 삶의 방식이다. 거짓자아는 심리현실에서 경험하는 자아감이다. 이것은 진짜가 아닌데 주인행세를 하면서 삶을 쥐락펴락한다. 이스라엘이 골리앗의 도발에 떤 것처럼, 생활현실의 문제들(생활고, 질병, 실직 등)이 엄습할 때 심리현실에 어두움(걱정과 염려, 두려움과 불안)이 쌓이고, 심리현실의 어두움은 다시 생활현실을 삭막하게 한다. 이런 삶은 고통스럽고 불행하다. 삶에선 저주의 쳇바퀴가 돌아간다. 대다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
참자아의 방식
두 번째는 참자아(P0)가 주도하는 삶의 방식이다. 참자아는 영성현실에 현존할 때 경험하는 자아감이다. 참자아의 배후는 하나님이기에 참자아가 주도하는 삶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뤄지며,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흘러간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이러한 삶이 “은혜의 질서” 가운데 이뤄지는 삶이다.
영성현실에서 이뤄지는 참자아 경험만이 거짓자아의 횡포를 물리칠 수 있다. 참자아 경험이 없으면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거짓자아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의지를 발휘할수록 심리현실은 더욱 견고해지고 거짓자아는 더욱 강퍅해진다. 거짓자아 상태에서 의지는 고집이나 오기, 객기나 혈기로 변질된다. 변질된 의지야말로 타락의 원흉이며, 삶을 망가뜨리는 주범이다. 변질된 의지는 폭력의 온상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고집이 얼마나 관계를 파탄 내는지를, 오기가 얼마나 상황을 그르치는지를, 객기가 얼마나 난관에 빠지게 하는지를, 혈기가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를 생각해보라.
이와는 달리, 영성현실에서 참자아를 각성할 때 거짓자아의 횡포는 힘을 잃는다. 마침내 심리현실의 덫에서 벗어난다. 강력한 자기중심적 의지는 겸허한 수용성으로 변형된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현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환영하고), 낯선 타자를 기꺼이 영접하고(환대하고), 삶을 그 자체로 즐거워한다.(향유한다.) 삶을 환영하고 타자를 환대하고 삶을 향유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길이다.
이뿐 아니다. 영성현실은 삶에 침묵의 분위기를 제공하고, 평화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이러한 침묵의 분위기와 평화의 기운에 휘감길 때 우리는 쓸데없는 고집을 버리고 자기중심적인 의지를 포기한다. 삶을 은총의 흐름에 맡긴다. 그러다 보면 지혜와 영감이 샘솟는 것을 느낀다. 삶의 문제들도 조금씩 가닥이 잡히고, 막다른 골목 같았던 현실 속에 새로운 희망의 빛이 비친다. 삶의 위기가 새로운 기회이며, 삶의 고통이 행복의 밑거름임을 깨달으며 수시로 감격한다.
고물에서
오늘의 복음은 심리현실에서 거짓자아의 횡포에 시달리는 삶의 방식과 영성현실에서 참자아가 주도하는 삶의 방식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고 있었다. 그런데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왔고, 물이 배에 가득 찼다. 제자들은 두려워하며 예수님께 부르짖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제자들은 거센 바람과 파도가 상징하는 생활현실의 풍파 때문에 겁에 질렸다. 심리현실에서 거짓자아의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다.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막 4:38) 고물은 배 뒤편이다. “고물”은 삶의 이면에 대한 은유이며, 존재의 심층에 대한 상징이다. 한 마디로 영성현실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고물에서 주무셨다는 것은 영성현실의 중심에 참자아가 잠자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을 깨워야 한다. 그것이 깨어나야 한다.
참자아가 깨어나면 참자아의 지혜가 샘솟는다. 참자아의 생명력이 용솟음친다. 참자아의 향기가 감돈다. 참자아의 지혜는 거짓자아의 무지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한다. 참자아의 생명력은 거짓자아의 고집과 혈기를 무너뜨린다. 참자아의 향기는 거짓자아의 불순을 정화한다. 참자아의 지혜와 생명력과 향기가 생활현실에 침투할 때 삶이 섭리의 흐름 속에 있음을 알아차린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삶의 신비를 깨닫는다. 시나브로 삶의 풍파가 고요하고 잠잠해진다. 삶은 고통 속에서도 은총으로 빛난다.
현존
그래서 우리는 영성현실에 늘 머물러야 한다. 영성현실에서 잠자고 있는 참자아를 각성해야 한다. 그러면 어찌해야 삶의 고물인 영성현실에서 잠자고 있는 참자아를 깨울 수 있을까? 기도 만한 게 없다.
기도는 여러 가지다. 청원기도는 통성으로 참자아를 깨워달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중보기도는 지인들이 참자아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감사기도는 참자아를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할 것이다. 묵상기도는 참자아의 심오함을 깊이 새기며 음미할 것이다.
이런 기도들은 모두 중요하다. 청원기도에는 간절함이 있고, 중보기도에는 사랑이 있다. 감사기도에는 은혜가 있고 묵상기도에는 깨달음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가 없다. 프레즌스 곧 “현존”이 없다. 한국교회가 그렇다. 마르다처럼 모든 것을 준비하느라 정신없는데,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치에, 그 신성한 현존에 머무르는 한 가지가 없다.
청원기도에는 간절함이 있고, 중보기도에는 사랑이 있고, 감사기도에는 은혜가 있고, 묵상기도에는 깨달음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가 없다. 프레즌스 곧 “현존”이 없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음식을 먹게 해달라는 간절함도 중요하고, 음식을 못 먹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마음을 품는 것도 중요하고, 음식에 대한 감사도 중요하고, 음식의 독특한 맛에 대한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그것으론 부족하다. 음식을 직접 먹어야 한다. 현존이란 그런 것이다. 시편 시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맛보아 아는”(시 34:8) 것이다.
바다에 빗대어 말한다면, 바다에서 고기를 많이 잡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것도 아니고, 바다에서 일하다가 병든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는 것도 아니고, 바다가 베푸는 은혜에 감사하는 것도 아니고, 바다의 심오한 의미를 묵상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바다에 온몸을 풍덩 빠뜨리는 것이다. 그게 현존이다. 이런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현존에 머무는 기도! 하나님의 현존에 나도 현존하는 기도!
겹현존
현존을 영어로 “프레즌스”presence라고 한다. 형용사형은 “프레즌트”present인데 현재라는 의미와 출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프레즌스 곧 현존은 하나님이 현재 여기에 출석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내 삶에 출석하신다. 결석하는 법이 없으시다. 아마 개근상으로 치면 하나님만큼 받을 자격이 빼어난 존재가 없다. 하나님은 일정 기간이 아니라 평생 우리의 삶에 출석하시니 말이다. 평생뿐일까. 인류의 역사는 물론,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창조와 종말에도 하나님은 늘 출석하신다. 즉 현존하신다.
문제는 우리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출석하시지만, 우리는 늘 하나님께 결석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겠다고 천지사방으로 헤매며 돌아다닌다. 지금 여기에 출석하셨는데도 그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지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는 하나님 바깥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집에 계시지만 우리는 외출 중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알아차리고, 그 현존에 들어가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나에게 현존하시는 하나님 안에 현존한다. 이때의 현존은 두 종류다. 하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현존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나(기도자)의 현존이다. 하나님의 현존에 내가 머무르며 현존한다. 이러한 “겹 현존”(이중 현존) 속에서 하나님과 나는 하나가 된다. 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이러한 겹현존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은 더 이상 대상이 아니다. 무언가를 달라는 청원기도의 대상도, 남을 위한 중보기도의 대상도, 은혜에 대한 감사기도의 대상도, 깨달음을 위한 묵상기도의 대상도 아니다. 하나님은 대상이 아니다.(He is not a thing!) 하나님은 비대상no-thing이다. “활짝 열려 있고 두루 퍼져 있는”open and diffuse 중심이다. 모든 곳이 중심이며, 그 어떤 곳에도 둘레가 없는 무변광대한 실재다. 이러한 비대상적 바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안다. “참여적으로” 만난다. 개념이나 관념이 아니라 “현존으로” 맛본다. 하나님은 사진이 아니라 살아있는 실재다.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존이다.
하나님은 대상이 아니다.(He is not a thing!) 하나님은 비대상no-thing이다. “활짝 열려 있고 두루 퍼져 있는”open and diffuse 중심이다. 모든 곳이 중심이며, 그 어떤 곳에도 둘레가 없는 무변광대한 실재다. 이러한 비대상적 바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안다. “참여적으로” 만난다. 개념이나 관념이 아니라 현존으로 맛본다. 하나님은 사진이 아니라 살아있는 실재다.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존이다.
마침내 영성현실이 확연하게 펼쳐지며, 우리의 본래 모습 즉 참자아가 달덩이처럼 떠오른다. 더는 삶의 골리앗이 우리를 어쩌지 못한다. 칼과 창과 투창으로 위협하는 골리앗을 다윗처럼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물리칠 것이기 때문이다. 더는 삶의 폭풍이 우리를 침몰시키지 못한다. 영성현실의 고요함과 침묵의 분위기로 삶의 폭풍을 잠잠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삶은 고요하고 평온해진다.
심리현실에서 거짓자아에 시달리는 삶과 영성현실에서 참자아가 주도하는 삶, 두 가지 삶의 방식 중에서 어떤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 슬기로운 선택이 필요하다.
- 이민재
(삼상 17:11)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를 깨우며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막 4:38)
거인 골리앗이 도발했을 때 이스라엘은 “몹시 놀라서 떨기만 하였다.”(삼상 17:11) 골리앗은 수시로 엄습하는 생활현실(R1)의 문제들을 상징한다. 골리앗처럼 거대한 문제들을 대면할 때 우리도 몹시 놀라며 떤다. 심리현실(R2)에 어둠이 쌓인다. 몸이 병들 때, 가족 간에 문제가 생겼을 때, 직장생활이 원만하지 않을 때가 그렇다. 나라에 전쟁이라도 나면 온 국민의 마음에 공포가 쌓인다. 교회생활도 골리앗처럼 힘들게 할 때가 있다.
두 가지 삶의 방식이 있다. 첫 번째는 거짓자아(P2)의 횡포에 시달리는 삶의 방식이다. 거짓자아는 심리현실에서 경험하는 자아감이다. 이것은 진짜가 아닌데 주인행세를 하면서 삶을 쥐락펴락한다. 이스라엘이 골리앗의 도발에 떤 것처럼, 생활현실의 문제들(생활고, 질병, 실직 등)이 엄습할 때 심리현실에 어두움(걱정과 염려, 두려움과 불안)이 쌓이고, 심리현실의 어두움은 다시 생활현실을 삭막하게 한다. 이런 삶은 고통스럽고 불행하다. 삶에선 저주의 쳇바퀴가 돌아간다. 대다수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살아간다.
참자아의 방식
두 번째는 참자아(P0)가 주도하는 삶의 방식이다. 참자아는 영성현실에 현존할 때 경험하는 자아감이다. 참자아의 배후는 하나님이기에 참자아가 주도하는 삶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이뤄지며,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흘러간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이러한 삶이 “은혜의 질서” 가운데 이뤄지는 삶이다.
영성현실에서 이뤄지는 참자아 경험만이 거짓자아의 횡포를 물리칠 수 있다. 참자아 경험이 없으면 아무리 의지가 강해도 거짓자아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의지를 발휘할수록 심리현실은 더욱 견고해지고 거짓자아는 더욱 강퍅해진다. 거짓자아 상태에서 의지는 고집이나 오기, 객기나 혈기로 변질된다. 변질된 의지야말로 타락의 원흉이며, 삶을 망가뜨리는 주범이다. 변질된 의지는 폭력의 온상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고집이 얼마나 관계를 파탄 내는지를, 오기가 얼마나 상황을 그르치는지를, 객기가 얼마나 난관에 빠지게 하는지를, 혈기가 얼마나 상처를 주는지를 생각해보라.
이와는 달리, 영성현실에서 참자아를 각성할 때 거짓자아의 횡포는 힘을 잃는다. 마침내 심리현실의 덫에서 벗어난다. 강력한 자기중심적 의지는 겸허한 수용성으로 변형된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현재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환영하고), 낯선 타자를 기꺼이 영접하고(환대하고), 삶을 그 자체로 즐거워한다.(향유한다.) 삶을 환영하고 타자를 환대하고 삶을 향유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의 길이다.
이뿐 아니다. 영성현실은 삶에 침묵의 분위기를 제공하고, 평화의 기운을 불어넣는다. 이러한 침묵의 분위기와 평화의 기운에 휘감길 때 우리는 쓸데없는 고집을 버리고 자기중심적인 의지를 포기한다. 삶을 은총의 흐름에 맡긴다. 그러다 보면 지혜와 영감이 샘솟는 것을 느낀다. 삶의 문제들도 조금씩 가닥이 잡히고, 막다른 골목 같았던 현실 속에 새로운 희망의 빛이 비친다. 삶의 위기가 새로운 기회이며, 삶의 고통이 행복의 밑거름임을 깨달으며 수시로 감격한다.
고물에서
오늘의 복음은 심리현실에서 거짓자아의 횡포에 시달리는 삶의 방식과 영성현실에서 참자아가 주도하는 삶의 방식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배를 타고 가고 있었다. 그런데 거센 바람이 일어나서, 파도가 배 안으로 덮쳐 들어왔고, 물이 배에 가득 찼다. 제자들은 두려워하며 예수님께 부르짖었다. “선생님, 우리가 죽게 되었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으십니까?” 제자들은 거센 바람과 파도가 상징하는 생활현실의 풍파 때문에 겁에 질렸다. 심리현실에서 거짓자아의 횡포에 속수무책으로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달랐다.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막 4:38) 고물은 배 뒤편이다. “고물”은 삶의 이면에 대한 은유이며, 존재의 심층에 대한 상징이다. 한 마디로 영성현실을 의미한다. 예수님이 고물에서 주무셨다는 것은 영성현실의 중심에 참자아가 잠자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을 깨워야 한다. 그것이 깨어나야 한다.
참자아가 깨어나면 참자아의 지혜가 샘솟는다. 참자아의 생명력이 용솟음친다. 참자아의 향기가 감돈다. 참자아의 지혜는 거짓자아의 무지와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한다. 참자아의 생명력은 거짓자아의 고집과 혈기를 무너뜨린다. 참자아의 향기는 거짓자아의 불순을 정화한다. 참자아의 지혜와 생명력과 향기가 생활현실에 침투할 때 삶이 섭리의 흐름 속에 있음을 알아차린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삶의 신비를 깨닫는다. 시나브로 삶의 풍파가 고요하고 잠잠해진다. 삶은 고통 속에서도 은총으로 빛난다.
현존
그래서 우리는 영성현실에 늘 머물러야 한다. 영성현실에서 잠자고 있는 참자아를 각성해야 한다. 그러면 어찌해야 삶의 고물인 영성현실에서 잠자고 있는 참자아를 깨울 수 있을까? 기도 만한 게 없다.
기도는 여러 가지다. 청원기도는 통성으로 참자아를 깨워달라고 부르짖을 것이다. 중보기도는 지인들이 참자아를 깨닫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이다. 감사기도는 참자아를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기도할 것이다. 묵상기도는 참자아의 심오함을 깊이 새기며 음미할 것이다.
이런 기도들은 모두 중요하다. 청원기도에는 간절함이 있고, 중보기도에는 사랑이 있다. 감사기도에는 은혜가 있고 묵상기도에는 깨달음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가 없다. 프레즌스 곧 “현존”이 없다. 한국교회가 그렇다. 마르다처럼 모든 것을 준비하느라 정신없는데, 마리아처럼 예수님의 발치에, 그 신성한 현존에 머무르는 한 가지가 없다.
청원기도에는 간절함이 있고, 중보기도에는 사랑이 있고, 감사기도에는 은혜가 있고, 묵상기도에는 깨달음이 있다. 하지만 한 가지가 없다. 프레즌스 곧 “현존”이 없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음식을 먹게 해달라는 간절함도 중요하고, 음식을 못 먹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마음을 품는 것도 중요하고, 음식에 대한 감사도 중요하고, 음식의 독특한 맛에 대한 깨달음도 중요하지만, 그것으론 부족하다. 음식을 직접 먹어야 한다. 현존이란 그런 것이다. 시편 시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을 “맛보아 아는”(시 34:8) 것이다.
바다에 빗대어 말한다면, 바다에서 고기를 많이 잡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것도 아니고, 바다에서 일하다가 병든 사람들을 위해 중보하는 것도 아니고, 바다가 베푸는 은혜에 감사하는 것도 아니고, 바다의 심오한 의미를 묵상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바다에 온몸을 풍덩 빠뜨리는 것이다. 그게 현존이다. 이런 기도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현존에 머무는 기도! 하나님의 현존에 나도 현존하는 기도!
겹현존
현존을 영어로 “프레즌스”presence라고 한다. 형용사형은 “프레즌트”present인데 현재라는 의미와 출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따라서 프레즌스 곧 현존은 하나님이 현재 여기에 출석하고 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내 삶에 출석하신다. 결석하는 법이 없으시다. 아마 개근상으로 치면 하나님만큼 받을 자격이 빼어난 존재가 없다. 하나님은 일정 기간이 아니라 평생 우리의 삶에 출석하시니 말이다. 평생뿐일까. 인류의 역사는 물론,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창조와 종말에도 하나님은 늘 출석하신다. 즉 현존하신다.
문제는 우리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출석하시지만, 우리는 늘 하나님께 결석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안 계시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겠다고 천지사방으로 헤매며 돌아다닌다. 지금 여기에 출석하셨는데도 그런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 가까이 계시지만, 우리는 그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계시지만, 우리는 하나님 바깥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집에 계시지만 우리는 외출 중입니다.
하나님의 현존을 알아차리고, 그 현존에 들어가는 기도를 통해 우리는 나에게 현존하시는 하나님 안에 현존한다. 이때의 현존은 두 종류다. 하나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현존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향한 나(기도자)의 현존이다. 하나님의 현존에 내가 머무르며 현존한다. 이러한 “겹 현존”(이중 현존) 속에서 하나님과 나는 하나가 된다. 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이러한 겹현존 상태에 있을 때 하나님은 더 이상 대상이 아니다. 무언가를 달라는 청원기도의 대상도, 남을 위한 중보기도의 대상도, 은혜에 대한 감사기도의 대상도, 깨달음을 위한 묵상기도의 대상도 아니다. 하나님은 대상이 아니다.(He is not a thing!) 하나님은 비대상no-thing이다. “활짝 열려 있고 두루 퍼져 있는”open and diffuse 중심이다. 모든 곳이 중심이며, 그 어떤 곳에도 둘레가 없는 무변광대한 실재다. 이러한 비대상적 바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안다. “참여적으로” 만난다. 개념이나 관념이 아니라 “현존으로” 맛본다. 하나님은 사진이 아니라 살아있는 실재다.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존이다.
하나님은 대상이 아니다.(He is not a thing!) 하나님은 비대상no-thing이다. “활짝 열려 있고 두루 퍼져 있는”open and diffuse 중심이다. 모든 곳이 중심이며, 그 어떤 곳에도 둘레가 없는 무변광대한 실재다. 이러한 비대상적 바탕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직접” 안다. “참여적으로” 만난다. 개념이나 관념이 아니라 현존으로 맛본다. 하나님은 사진이 아니라 살아있는 실재다.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실존이다.
마침내 영성현실이 확연하게 펼쳐지며, 우리의 본래 모습 즉 참자아가 달덩이처럼 떠오른다. 더는 삶의 골리앗이 우리를 어쩌지 못한다. 칼과 창과 투창으로 위협하는 골리앗을 다윗처럼 “만군의 주님의 이름”으로 물리칠 것이기 때문이다. 더는 삶의 폭풍이 우리를 침몰시키지 못한다. 영성현실의 고요함과 침묵의 분위기로 삶의 폭풍을 잠잠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삶은 고요하고 평온해진다.
심리현실에서 거짓자아에 시달리는 삶과 영성현실에서 참자아가 주도하는 삶, 두 가지 삶의 방식 중에서 어떤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 슬기로운 선택이 필요하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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