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순수한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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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39회 작성일 24-07-22 14:26본문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마태 6:6)
-
향심기도를 할 때 이따금 떠오르는 시가 있다. 타고르의 『기탄잘리』(신께 바치는 노래) 일곱 번째 노래다.
나의 노래는 모든 장식을 떼어 냈습니다.
나의 노래는 자랑할 만한 옷과 치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장신구는 우리의 하나됨을 방해합니다.
왜 이 시가 떠오르는 걸까? 향심기도야말로 하나님과 하나됨을 방해하는 모든 장식을 떼어 내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향심기도는 영적 여정에서 종종 경험하는 초자연적 현상에 초연하다. 방언・예언・신유 같은 은사체험도, 텔레파시・투시・유체이탈 같은 초감각지각(ESP)도, 탈혼・환시・환청 같은 신비체험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이런 체험들이 불필요한 건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데 필요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런 체험들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지 하나님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손가락과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성시 〈모든 것〉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어떤 것에 네 마음을 머물러두면
온전하심에 너 자신을 맡기지 못한다.
온전하심에 온전히 다다르려면
모든 것에 대해 너 자신을 온전히 끊어야 한다.
여기서 “온전하심”은 하나님에 대한 은유다. 그 하나님께 온전히 다다르려면 “어떤 것에 마음을 머물러두면” 안 되고 “모든 것에 대해 너 자신을 온전히 끊어야 한다.” 아무리 황홀하고 감미로운 체험이어도 그렇다. 향심기도가 그런 기도다.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기 위해 모든 것을 비운다. 장식을 떼어 내고 손가락을 떠난다. 향심기도는 그 어떤 영적 장식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만큼 단순하고 담백하고 순수한 기도다.
순수한 기도
“순수한 기도”pure prayer에 대한 담론은 4세기 사막 교부 요한 카시아누스(360-435)의 『담화집 Conferences』에 나온다. 이 책은 사막의 수도사들이 나눈 영적 대화를 담고 있다. 아홉 번째 담화에서 압바 이삭은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고 한다.
우리는 마음에서 혼란과 잡념과 걱정을 완전히 비우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복음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순수한 기도는 문제해결이나 소원성취를 비는 기도가 아니다. 마음의 골방에서, 외부 세계를 향한 문을 닫고, 숨어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에 머무르는 기도다. 그러기 위해 “혼란과 잡념과 걱정을” 비운다. 비울수록 기도는 더욱 순수해지며, 기도가 순수해질수록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뜨겁게 불타오른다. 하여, 순수한 기도를 “불의 기도”라고도 한다. 물론 이때의 뜨거움은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사력을 다해 부르짖을 때의 뜨거움이 아니다.
사막 교부들에서 시작한 순수한 기도는 성 베네딕투스(480-547)로 이어진다. 수도원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는 『규칙서』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기도는 순수하고 뜨거워야 하며, 빈말을 장황하게 할 필요가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기보다 마음이 순수하고 눈물 어린 간절함을 지니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는 언제나 짧아야 하고, 영적 열정으로 충만해야 한다.”(20장) 베네딕투스가 수도사들에게 권장하는 기도도 순수한 기도와 뜨거운 기도다. 이런 기도는 중언부언하지 않으며, 간절함과 영적 열정으로 충만한 짧은 기도다.
13세기 영성의 대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도 순수한 기도를 가르친다. “어떤 사람이 세상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한다면, 이때 그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아니고 우상을 향해 비는 것입니다. (…) 나는 기도하되 그저 나를 순수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내가 순수하다면 하나님은 자신을 주시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에 따르면 기도의 목적은 세상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속의 부나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런 기도는 우유나 치즈, 그리고 소가 주는 이익 때문에 소를 사랑하는 것처럼 불순하기 때문이다.
16세기의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도 순수한 기도의 탁월한 계승자다. 그는 『사랑의 산 불꽃 Living Flame of Love』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하고, 그분과 완전한 일치를 추구하는 순수한 기도 상태”에 관해 말한다. 그러한 상태에 들려면 영혼이 하나님의 불에 태워져야 한다. 그 불은 “영혼을 완전히 정화하고, 모든 불순물을 태워버리며, 영혼을 순수하게” 만든다. 이런 기도는 말로 할 수가 없고 침묵 한가운데에서 이뤄진다. 영혼의 심층에서 솟아나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망과 사랑인 까닭이다. 이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영혼은 침묵 속에서 부르짖는다.
오, 사랑의 불꽃이여, 나의 영혼 깊은 곳에서 타오르며, 나를 정화하고 나를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소서. 나의 모든 욕망과 갈망을 태워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원하게 하소서.
무지의 구름
순수한 기도는 하나님만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기도다. 마음과 목숨,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드는 기도다. 그러려면 혼란과 잡념과 걱정을 비워야 한다.”(카시아누스)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한다.(베네딕투스) 세속의 부나 내적인 위안 따위 우상을 버려야 한다.(에크하르트) 마음에 있는 모든 욕망과 갈망을 태워버려야 한다.(십자가의 요한) 문제는 “어떻게”다. 어떻게 마음에서 혼란과 잡념과 걱정을, 중언부언을, 세속의 우상들을, 욕망과 갈망들을 비울 수 있을까? 14세기에 익명의 저자가 쓴 『무지의 구름』이 아주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준다.
『무지의 구름』에는 두 가지 “구름”이 나온다. 첫째 구름은 “망각의 구름”이다. 이 구름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피조물들을 덮는 구름이다. 피조물에는 사물과 사람은 물론, 성인이나 천사 같은 영적인 존재도 포함되며, 심지어 하나님의 자비나 천상의 기쁨도 포함된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려면 이 모든 것을 망각의 구름으로 덮어야 한다.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두 번째 구름은 책의 제목이기도 한 “무지의 구름”이다. 무지의 구름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구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로(즉 이성으로)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알려지지 않는 무한한 신비이다. 무한한 신비 앞에서 이성의 인식은 무無에 불과하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해 가는 길에는 언제나 무지의 구름이 자욱하다. 그러면 어찌해야 이 무지의 구름을 뚫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 『구름』의 저자는 그 답을 알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족히 사랑할 수는 있지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 무지의 구름을 뚫을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권고한다.
“겸허한 사랑을 가지고 그대의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십시오.”(3장) “확고한 의지를 갖고 그대와 하나님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이 무지의 구름에다 뜨거운 사랑이라는 날카로운 화살을 날리십시오.”(12장) “하나님을 향한,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한 꾸밈없는 사랑의 의향이면 충분합니다.”(7장)
그런데 문제가 있다. 오만가지 “생각들”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의향을 지속할 수 없는 것이다. 다행히도 『무지의 구름』은 생각들을 물리치는 아주 탁월한 방법을 가르쳐준다. 생각들을 알아차릴 때마다 한 음절로 된 단어를 떠올리면 된다. 그가 추천하는 단어는 “하나님”과 “사랑”이다. 한 음절로 된 단어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보다 하나님의 귀에 훨씬 신속하게 파고든다. 그래서 그는 이런 격언을 들려준다. “짤막한 기도가 천상을 꿰뚫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의향을 한 음절 단어에 담아, 생각에 시달릴 때마다 떠올리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현존에 머무를 수 있다. 『무지의 구름』은 이러한 기도를 “완전한 연인의 길”이라고 부른다.(43장) 하나님과의 사랑이 더욱 그윽해지기 때문이다. 『무지의 구름』이 제시하는 한 낱말 기도를 현대화한 기도가 바로 향심기도다. 이 기도를 수련하면 우리도 “완전한 연인”의 길을 걸을 수 있다.
- 이민재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마태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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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심기도를 할 때 이따금 떠오르는 시가 있다. 타고르의 『기탄잘리』(신께 바치는 노래) 일곱 번째 노래다.
나의 노래는 모든 장식을 떼어 냈습니다.
나의 노래는 자랑할 만한 옷과 치장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모든 장신구는 우리의 하나됨을 방해합니다.
왜 이 시가 떠오르는 걸까? 향심기도야말로 하나님과 하나됨을 방해하는 모든 장식을 떼어 내는 기도이기 때문이다. 향심기도는 영적 여정에서 종종 경험하는 초자연적 현상에 초연하다. 방언・예언・신유 같은 은사체험도, 텔레파시・투시・유체이탈 같은 초감각지각(ESP)도, 탈혼・환시・환청 같은 신비체험도 예외는 아니다.
물론 이런 체험들이 불필요한 건 아니다.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데 필요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그런 체험들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지 하나님 자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손가락과 사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영성시 〈모든 것〉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어떤 것에 네 마음을 머물러두면
온전하심에 너 자신을 맡기지 못한다.
온전하심에 온전히 다다르려면
모든 것에 대해 너 자신을 온전히 끊어야 한다.
여기서 “온전하심”은 하나님에 대한 은유다. 그 하나님께 온전히 다다르려면 “어떤 것에 마음을 머물러두면” 안 되고 “모든 것에 대해 너 자신을 온전히 끊어야 한다.” 아무리 황홀하고 감미로운 체험이어도 그렇다. 향심기도가 그런 기도다. 하나님 자체를 사랑하기 위해 모든 것을 비운다. 장식을 떼어 내고 손가락을 떠난다. 향심기도는 그 어떤 영적 장식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그만큼 단순하고 담백하고 순수한 기도다.
순수한 기도
“순수한 기도”pure prayer에 대한 담론은 4세기 사막 교부 요한 카시아누스(360-435)의 『담화집 Conferences』에 나온다. 이 책은 사막의 수도사들이 나눈 영적 대화를 담고 있다. 아홉 번째 담화에서 압바 이삭은 기도할 때 이렇게 하라고 한다.
우리는 마음에서 혼란과 잡념과 걱정을 완전히 비우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서 숨어서 계시는 아버지께 기도하라”는 복음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순수한 기도는 문제해결이나 소원성취를 비는 기도가 아니다. 마음의 골방에서, 외부 세계를 향한 문을 닫고, 숨어 계시는 하나님의 현존에 머무르는 기도다. 그러기 위해 “혼란과 잡념과 걱정을” 비운다. 비울수록 기도는 더욱 순수해지며, 기도가 순수해질수록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뜨겁게 불타오른다. 하여, 순수한 기도를 “불의 기도”라고도 한다. 물론 이때의 뜨거움은 필요한 것을 얻으려고 사력을 다해 부르짖을 때의 뜨거움이 아니다.
사막 교부들에서 시작한 순수한 기도는 성 베네딕투스(480-547)로 이어진다. 수도원의 아버지라 불리는 그는 『규칙서』에서 이렇게 가르친다. “하나님께 기도할 때 기도는 순수하고 뜨거워야 하며, 빈말을 장황하게 할 필요가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기보다 마음이 순수하고 눈물 어린 간절함을 지니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도는 언제나 짧아야 하고, 영적 열정으로 충만해야 한다.”(20장) 베네딕투스가 수도사들에게 권장하는 기도도 순수한 기도와 뜨거운 기도다. 이런 기도는 중언부언하지 않으며, 간절함과 영적 열정으로 충만한 짧은 기도다.
13세기 영성의 대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도 순수한 기도를 가르친다. “어떤 사람이 세상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한다면, 이때 그는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 아니고 우상을 향해 비는 것입니다. (…) 나는 기도하되 그저 나를 순수하게 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내가 순수하다면 하나님은 자신을 주시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에 따르면 기도의 목적은 세상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세속의 부나 마음의 위안을 얻기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런 기도는 우유나 치즈, 그리고 소가 주는 이익 때문에 소를 사랑하는 것처럼 불순하기 때문이다.
16세기의 신비가 십자가의 성 요한도 순수한 기도의 탁월한 계승자다. 그는 『사랑의 산 불꽃 Living Flame of Love』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갈망하고, 그분과 완전한 일치를 추구하는 순수한 기도 상태”에 관해 말한다. 그러한 상태에 들려면 영혼이 하나님의 불에 태워져야 한다. 그 불은 “영혼을 완전히 정화하고, 모든 불순물을 태워버리며, 영혼을 순수하게” 만든다. 이런 기도는 말로 할 수가 없고 침묵 한가운데에서 이뤄진다. 영혼의 심층에서 솟아나는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열망과 사랑인 까닭이다. 이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영혼은 침묵 속에서 부르짖는다.
오, 사랑의 불꽃이여, 나의 영혼 깊은 곳에서 타오르며, 나를 정화하고 나를 하나님과 하나 되게 하소서. 나의 모든 욕망과 갈망을 태워버리고, 오직 주님만을 원하게 하소서.
무지의 구름
순수한 기도는 하나님만을 “순수하게” 사랑하는 기도다. 마음과 목숨, 힘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드는 기도다. 그러려면 혼란과 잡념과 걱정을 비워야 한다.”(카시아누스) 중언부언하지 말아야 한다.(베네딕투스) 세속의 부나 내적인 위안 따위 우상을 버려야 한다.(에크하르트) 마음에 있는 모든 욕망과 갈망을 태워버려야 한다.(십자가의 요한) 문제는 “어떻게”다. 어떻게 마음에서 혼란과 잡념과 걱정을, 중언부언을, 세속의 우상들을, 욕망과 갈망들을 비울 수 있을까? 14세기에 익명의 저자가 쓴 『무지의 구름』이 아주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준다.
『무지의 구름』에는 두 가지 “구름”이 나온다. 첫째 구름은 “망각의 구름”이다. 이 구름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피조물들을 덮는 구름이다. 피조물에는 사물과 사람은 물론, 성인이나 천사 같은 영적인 존재도 포함되며, 심지어 하나님의 자비나 천상의 기쁨도 포함된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려면 이 모든 것을 망각의 구름으로 덮어야 한다. 하나님 이외의 것들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다.
두 번째 구름은 책의 제목이기도 한 “무지의 구름”이다. 무지의 구름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구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로(즉 이성으로)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알려지지 않는 무한한 신비이다. 무한한 신비 앞에서 이성의 인식은 무無에 불과하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해 가는 길에는 언제나 무지의 구름이 자욱하다. 그러면 어찌해야 이 무지의 구름을 뚫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을까? 『구름』의 저자는 그 답을 알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족히 사랑할 수는 있지만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 무지의 구름을 뚫을 수 있는 것은 사랑뿐이다. 그래서 저자는 권고한다.
“겸허한 사랑을 가지고 그대의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리십시오.”(3장) “확고한 의지를 갖고 그대와 하나님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이 무지의 구름에다 뜨거운 사랑이라는 날카로운 화살을 날리십시오.”(12장) “하나님을 향한, 오로지 하나님만을 향한 꾸밈없는 사랑의 의향이면 충분합니다.”(7장)
그런데 문제가 있다. 오만가지 “생각들”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의향을 지속할 수 없는 것이다. 다행히도 『무지의 구름』은 생각들을 물리치는 아주 탁월한 방법을 가르쳐준다. 생각들을 알아차릴 때마다 한 음절로 된 단어를 떠올리면 된다. 그가 추천하는 단어는 “하나님”과 “사랑”이다. 한 음절로 된 단어는 중언부언하는 기도보다 하나님의 귀에 훨씬 신속하게 파고든다. 그래서 그는 이런 격언을 들려준다. “짤막한 기도가 천상을 꿰뚫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의향을 한 음절 단어에 담아, 생각에 시달릴 때마다 떠올리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현존에 머무를 수 있다. 『무지의 구름』은 이러한 기도를 “완전한 연인의 길”이라고 부른다.(43장) 하나님과의 사랑이 더욱 그윽해지기 때문이다. 『무지의 구름』이 제시하는 한 낱말 기도를 현대화한 기도가 바로 향심기도다. 이 기도를 수련하면 우리도 “완전한 연인”의 길을 걸을 수 있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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