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점사고에서 바탕사고로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41회 작성일 24-05-14 13:11본문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고전 13: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엡 2:6)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피조물의 표상이 아무리 작아도 그것은 하나님만큼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작은 표상이 하나님 전체를 빼앗기 때문입니다.”(에크하르트, 『설교』, “하나님의 사랑”)
“피조물의 표상”이란 무엇일까.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존재다. 이 외에도 인간이 욕망하는 모든 것, 이를테면 돈과 권력과 쾌락도 피조물의 표상에 속하며, 취업・육아・주거 등 생활현실의 걱정거리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부정적인 자아상이나 마음의 상처처럼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심리현실의 응어리도 피조물의 표상이다. 피조물의 표상은, 때로는 분심・잡념・사념 같은 생각의 형태로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때로는 분노・증오・억울함 같은 감정의 형태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때로는 탐식・음욕・탐욕 같은 욕망의 형태로 우리를 속박한다.
점과 바탕
피조물의 표상은 흰 바탕에 찍혀있는 점點에 비유할 수 있다. 흰 여백에 비해 점은 아주 작지만 그것에 정신을 팔면 흰 바탕은 의식에서 사라진다. 점에 집착하면 바탕은 보이지 않는다. 바탕은 작은 점에 완전히 점령당한다.(아래 그림 참조) 에크하르트의 말처럼, 마음속에 있는 아무리 작은 피조물의 표상이라도 그것은 하나님만큼 크고, 하나님 전체를 빼앗는다. 이것이 “점사고”point thinking다.
하지만 바탕에서 보면 점은 아주 작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삶의 문제나 상처도 마찬가지다. 그것에 집착하면 그것이 나를 온통 지배하지만 존재의 근원이며 참자아의 바탕이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것들은 작게 느껴진다. 그것이 “바탕사고”ground thinking다.
점사고가 바탕사고로 바뀌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삶의 문제 때문에 겪는 고통이 줄어든다. 문제가 사라지지 않았는데도 그렇다. 점사고가 불행을 증가시키는 사고라면, 바탕사고는 불행을 행복으로 변형시키는 사고다. 이를 수학의 분수分數로 표현할 수 있다.
∙ 삶의 고통 = 문제 / 바탕
분자가 일정할 때 분모가 커지면 분수의 값은 작아지고, 반대로 분모가 작아지면 분수의 값은 커진다. 삶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바탕이라는 분모가 작으면─즉, 하나님이 사라진다면─삶의 고통은 점점 커진다. 바탕이라는 분모가 아예 없다면 삶의 문제는 무한대의 횡포를 부리기 시작한다.
∙ 1 / 0 = ∞
반대로 하나님이라는 분모가 커지면 삶의 문제는 덜 고통스럽다. 하나님과 합일 상태라면 삶의 염려와 걱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
∙ 1 / ∞ = 0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분모 없이 삶의 문제들을 대할 때가 많다. 하지만 하나님이라는 분모가 커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피조물의 표상들(삶의 문제들)은 힘을 잃고, 마침내 우리는 그 굴레에서 벗어난다. 물론 문제가 없어지진 않는다. 그래도 그것의 위력과 횡포는 예전 같지 않다.
관상기도는 참자아의 배후요 바탕이신 하나님의 현존에 머무르는 기도다. 생각에 붙들린 것을 알아차릴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때 생각과 생각 사이에 틈이 생긴다. 그 틈이 바로 바탕이 드러나는 순간이며, 하나님이 얼굴을 내미는 순간이다.(위 그림 참조) 이때 점사고가 바탕사고로 바뀐다. 우리는 생각이나 감정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난다. 다시 말해 삶의 문제라는 피조물의 표상에서 벗어난다. 자극과 반응의 악순환에서 벗어난다.
관상기도를 한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바탕에 머물기 때문에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저주스러웠던 삶은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삶의 과제로 변하고, 그동안 몰랐던 것을 깨닫는 배움의 기회가 되며, 마침내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로 경험된다. 놀랍게도 바탕으로부터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린다. 먹구름 사이로 햇빛 비치듯 말이다.
삶의 문제에 대한 경험
저주
과제
배움
은총
하나님 의식 =바탕(%)
0~25
25~50
50~75
75~100
전향
사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졌다. 그는 자기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눈을 갖게 되었다. 이때 점사고에서 바탕사고로의 전향이 이뤄졌다. 그러자 눈엣가시 같은 그리스도인이 다르게 보였다. 그들을 없애버려야겠다며 살기등등했던 사람(행 9:1)이 사랑 충만한 사람으로 변했다.(고전 13장) “교회를 없애려고 날뛰었던” 사람(행 8:3)이 여러 교회를 개척한 사람이 되었다. 저주와 혐오로 가득한 입에서 사랑의 찬가가 흘러나왔다.
내가 모든 소유를 나눠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고전 13:4-7)
이 아름다운 노래는 문학적 창작이 아니다. 점사고에서 바탕사고로 전향한 사람의 고백이다. 바탕사고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저주스러운 운명에 희망의 꽃을 심으며, 칠흑같이 어두운 현실에서 은총의 별들을 본다. 삶의 가시들 속에 깃들어있는 행복의 향기를 맡기 시작한다.
승천
오늘은 예수승천주일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이렇게 묘사한다.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 지를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발휘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엡 1:19-20)
승천은 그리스도의 삶에서 십자가와 부활에 이어지는 중요한 사건이다. 승천하심으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고,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셨다. 한적한 곳에서 늘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했고(관상했고), 겟세마네에서 하늘을 우러르며 기도하던 예수는 승천하여 마침내 하늘에서 하늘이 되었다.
승천하심으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고,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셨다. 한적한 곳에서 늘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했고(관상했고), 겟세마네에서 하늘을 우러르며 기도하던 예수는 승천하여 마침내 하늘에서 하늘이 되었다.
승천하여 하늘에서 하늘이 된 그를 하나님은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엡 1:21) 하셨다. 이뿐 아니다.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셨다.”(엡 1:22) 하늘에서 바탕사고를 하는 사람, 하늘이 된 사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런 사람은 힘세다는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뿐 아니라, “만물도 굴복시킨다.” 다시 말해 모든 피조물의 표상을 극복한다. 하여, 수많은 삶의 문제도 극복한다. 돈・권력・쾌락 등 인간이 욕망하는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 취업・육아・주거 등 생활현실의 걱정거리에서 해방된다. 부정적인 자아상이나 관계의 상처처럼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심리현실의 고통에서도 벗어난다. 때로는 분심・잡념 같은 생각의 형태로, 때로는 분노・증오 같은 감정의 형태로, 때로는 음욕・탐욕 같은 욕망의 형태로 우리를 지배하는 모든 피조물의 표상에서 해방된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도 하늘로 초대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앉게 하셨습니다.”(엡 2:6)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할 자리는 “하늘”이다. 그리스도인은 문제에 집착하는 점사고에서 벗어나 하늘에 앉아 바탕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 이민재
(고전 13:4)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
(엡 2:6)
“여러분 마음속에 있는 피조물의 표상이 아무리 작아도 그것은 하나님만큼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작은 표상이 하나님 전체를 빼앗기 때문입니다.”(에크하르트, 『설교』, “하나님의 사랑”)
“피조물의 표상”이란 무엇일까.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존재다. 이 외에도 인간이 욕망하는 모든 것, 이를테면 돈과 권력과 쾌락도 피조물의 표상에 속하며, 취업・육아・주거 등 생활현실의 걱정거리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부정적인 자아상이나 마음의 상처처럼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심리현실의 응어리도 피조물의 표상이다. 피조물의 표상은, 때로는 분심・잡념・사념 같은 생각의 형태로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때로는 분노・증오・억울함 같은 감정의 형태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때로는 탐식・음욕・탐욕 같은 욕망의 형태로 우리를 속박한다.
점과 바탕
피조물의 표상은 흰 바탕에 찍혀있는 점點에 비유할 수 있다. 흰 여백에 비해 점은 아주 작지만 그것에 정신을 팔면 흰 바탕은 의식에서 사라진다. 점에 집착하면 바탕은 보이지 않는다. 바탕은 작은 점에 완전히 점령당한다.(아래 그림 참조) 에크하르트의 말처럼, 마음속에 있는 아무리 작은 피조물의 표상이라도 그것은 하나님만큼 크고, 하나님 전체를 빼앗는다. 이것이 “점사고”point thinking다.
하지만 바탕에서 보면 점은 아주 작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삶의 문제나 상처도 마찬가지다. 그것에 집착하면 그것이 나를 온통 지배하지만 존재의 근원이며 참자아의 바탕이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그것들은 작게 느껴진다. 그것이 “바탕사고”ground thinking다.
점사고가 바탕사고로 바뀌면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삶의 문제 때문에 겪는 고통이 줄어든다. 문제가 사라지지 않았는데도 그렇다. 점사고가 불행을 증가시키는 사고라면, 바탕사고는 불행을 행복으로 변형시키는 사고다. 이를 수학의 분수分數로 표현할 수 있다.
∙ 삶의 고통 = 문제 / 바탕
분자가 일정할 때 분모가 커지면 분수의 값은 작아지고, 반대로 분모가 작아지면 분수의 값은 커진다. 삶의 문제도 마찬가지다. 바탕이라는 분모가 작으면─즉, 하나님이 사라진다면─삶의 고통은 점점 커진다. 바탕이라는 분모가 아예 없다면 삶의 문제는 무한대의 횡포를 부리기 시작한다.
∙ 1 / 0 = ∞
반대로 하나님이라는 분모가 커지면 삶의 문제는 덜 고통스럽다. 하나님과 합일 상태라면 삶의 염려와 걱정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
∙ 1 / ∞ = 0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분모 없이 삶의 문제들을 대할 때가 많다. 하지만 하나님이라는 분모가 커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피조물의 표상들(삶의 문제들)은 힘을 잃고, 마침내 우리는 그 굴레에서 벗어난다. 물론 문제가 없어지진 않는다. 그래도 그것의 위력과 횡포는 예전 같지 않다.
관상기도는 참자아의 배후요 바탕이신 하나님의 현존에 머무르는 기도다. 생각에 붙들린 것을 알아차릴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갈 때 생각과 생각 사이에 틈이 생긴다. 그 틈이 바로 바탕이 드러나는 순간이며, 하나님이 얼굴을 내미는 순간이다.(위 그림 참조) 이때 점사고가 바탕사고로 바뀐다. 우리는 생각이나 감정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난다. 다시 말해 삶의 문제라는 피조물의 표상에서 벗어난다. 자극과 반응의 악순환에서 벗어난다.
관상기도를 한다고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바탕에 머물기 때문에 문제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저주스러웠던 삶은 도전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삶의 과제로 변하고, 그동안 몰랐던 것을 깨닫는 배움의 기회가 되며, 마침내 하나님의 은총의 통로로 경험된다. 놀랍게도 바탕으로부터 새로운 삶의 가능성이 열린다. 먹구름 사이로 햇빛 비치듯 말이다.
삶의 문제에 대한 경험
저주
과제
배움
은총
하나님 의식 =바탕(%)
0~25
25~50
50~75
75~100
전향
사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졌다. 그는 자기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눈을 갖게 되었다. 이때 점사고에서 바탕사고로의 전향이 이뤄졌다. 그러자 눈엣가시 같은 그리스도인이 다르게 보였다. 그들을 없애버려야겠다며 살기등등했던 사람(행 9:1)이 사랑 충만한 사람으로 변했다.(고전 13장) “교회를 없애려고 날뛰었던” 사람(행 8:3)이 여러 교회를 개척한 사람이 되었다. 저주와 혐오로 가득한 입에서 사랑의 찬가가 흘러나왔다.
내가 모든 소유를 나눠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 (…)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고전 13:4-7)
이 아름다운 노래는 문학적 창작이 아니다. 점사고에서 바탕사고로 전향한 사람의 고백이다. 바탕사고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저주스러운 운명에 희망의 꽃을 심으며, 칠흑같이 어두운 현실에서 은총의 별들을 본다. 삶의 가시들 속에 깃들어있는 행복의 향기를 맡기 시작한다.
승천
오늘은 예수승천주일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승천을 이렇게 묘사한다. “믿는 사람들인 우리에게 강한 힘으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 지를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 발휘하셔서 그분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쪽에 앉히셨습니다.”(엡 1:19-20)
승천은 그리스도의 삶에서 십자가와 부활에 이어지는 중요한 사건이다. 승천하심으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고,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셨다. 한적한 곳에서 늘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했고(관상했고), 겟세마네에서 하늘을 우러르며 기도하던 예수는 승천하여 마침내 하늘에서 하늘이 되었다.
승천하심으로써 예수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앉으셨고,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셨다. 한적한 곳에서 늘 하늘을 바라보며 기도했고(관상했고), 겟세마네에서 하늘을 우러르며 기도하던 예수는 승천하여 마침내 하늘에서 하늘이 되었다.
승천하여 하늘에서 하늘이 된 그를 하나님은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 위에, 그리고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오는 세상에서 일컬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엡 1:21) 하셨다. 이뿐 아니다.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아래 굴복시키셨다.”(엡 1:22) 하늘에서 바탕사고를 하는 사람, 하늘이 된 사람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런 사람은 힘세다는 “모든 정권과 권세와 능력과 주권”뿐 아니라, “만물도 굴복시킨다.” 다시 말해 모든 피조물의 표상을 극복한다. 하여, 수많은 삶의 문제도 극복한다. 돈・권력・쾌락 등 인간이 욕망하는 모든 것에서 해방된다. 취업・육아・주거 등 생활현실의 걱정거리에서 해방된다. 부정적인 자아상이나 관계의 상처처럼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심리현실의 고통에서도 벗어난다. 때로는 분심・잡념 같은 생각의 형태로, 때로는 분노・증오 같은 감정의 형태로, 때로는 음욕・탐욕 같은 욕망의 형태로 우리를 지배하는 모든 피조물의 표상에서 해방된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우리도 하늘로 초대하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앉게 하셨습니다.”(엡 2:6) 그리스도인이 있어야 할 자리는 “하늘”이다. 그리스도인은 문제에 집착하는 점사고에서 벗어나 하늘에 앉아 바탕사고를 하는 사람이다.
- 이민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