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상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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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01회 작성일 24-01-23 17:11본문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막 1:14)
시몬과 안드레 두 어부가 고기를 잡고 있다. 예수께서 지나가다가 그들을 보고 부르신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배 안에서 시몬과 안드레 두 형제가 그물을 깁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도 부르신다. 그들은 아버지와 일꾼들을 배에 남겨 두고 예수를 따른다. 예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예수를 따랐다. 그때, 믿음의 풍경이 놀랍다.
그때와 지금
예수님이 요즘의 성도들에게 나타나신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나를 따르라”는 부름을 듣기도 전에 더 좋은 그물을, 잘 찢어지지 않고 튼튼한 그물을 달라고 할 것 같다. 그래야 고기를 더 많이 잡고, 돈을 더 많이 벌 테니 말이다. 어쩌면 최첨단 장비를 갖춘 더 크고 빠른 배를 달라고 조를지도 모른다. 그래야 남들이 엄두도 못 내는 곳까지 가서 고기를 싹쓸이할 수 있을 테니까. 이기적인 속내를 비친 것 같아 민망하다 싶으면 헌금을 많이 하기 위해서라고 둘러댈지도 모른다.
아예 직업을 바꿔달라고 할지도 모른다. 많은 연봉, 좋은 복지, 노후 보장이 확실한 직업으로. 과거의 제자들처럼 한 자리 청탁할지도 모른다. 예수 선생께서 영광 받으실 때에, 나는 선생의 오른쪽에, 쟤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이런 상상이 그렇게 되바라진 상상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주류들의 믿음의 풍경은 여전히 운수대통과 만사형통을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마가가 전해주는 믿음의 풍경은 오늘 우리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그때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주저 없이 따라나섰다. 생존의 도구인 그물과 배도 버리고, 아버지와 일꾼들이라는 인연도 뒤에 남기고. 그들은 능력 많으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절호의 기회에 더 좋은 그물을 바라지도 않았고, 최신식 배를 달라지도 않았고, 더 좋은 직장을 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예수의 부름에 즉시 따라나섰다.
상류에서
신앙생활이 이래야 하는 건가. 생업을 포기해야 하는 건가. 구연舊緣을 정리해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누가 감히 믿겠는가.
오해하지 말자. 신앙이 생업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속단하지 말자. 신앙이 인연을 끊는 것이라고. 세속 인연을 무시했다면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생존을 하찮게 여겼다면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 먹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삶의 일상을 가볍게 여겼다면 예수님은 변모산의 황홀경에서 벗어나 일상의 현실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는 베드로의 말에 “그러자꾸나” 하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가가 전하는 믿음의 풍경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이 이야기는 “사로잡힘”에 관한 이야기다. 제자들은 예수께 사로잡혔다. 제자들은 예수라는 사람에게 그냥 사로잡혔다. 예수님의 부름에는 성공이나 축복에 대한 약속도, 건강이나 기적에 대한 보장도 없었다. 예수님이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그냥 따랐다.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름(소리)에 대한 사로잡힘,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필립 얀시의 책 『기도』에 이런 비유가 나온다. 그는 물방울이 강물을 이루는 과정을 보면서 기도에 대해 오랫동안 갖고 있던 생각을 수정한다.
여태까지는 개인적인 관심사를 상류에 계신 하나님께로 올려보내려고 했었다. 주님이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는 것처럼 나 자신의 상황을 알려드리기에 급급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고 도저히 거부할 수 없도록 몰아붙이려는 듯 강청하며 매달렸다. 그럴 게 아니다. 상류에서 시작해 물길을 탔어야 했다.
필립 얀시는 기도의 방향을 바꾼다. 하류에서 상류에 계신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알리려고 애쓰던 방식에서, 상류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물길을 타는 방식으로….
신앙도 마찬가지다. 하류에서 상류로 뭔가 보내 하류에서 원하는 것을 획득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상류에서 흐르는 물길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상류층”이 되는 것이다. 돈과 명품과 허영에 사로잡힌 상류층이 아니라, 존재의 중심과 삶의 본질에 사로잡힌 영적 상류층이 되는 것이다.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에게 “나를 따르라” 하신 예수님은 생업을 버리라고 하신 게 아니다. 근원으로 초대하신 것이다. 예수를 따르라고, 존재의 중심에서 들려오는 “너의” 예수다움 또는 그리스도성을 따르라고 호소하신 것이다. 겉사람(P1)에 연연하기 전에 속사람(P0)을 먼저 챙기라고, 생활현실(R1)의 노예가 되지 말고 영성현실(R0)에 뿌리내리라고 요청하신 것이다. 생업이나 인연은 그다음이라고….
이천 년 전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예수님은 오늘날 삶의 혼돈의 바다에서 우리를 부르신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의 육성肉聲을 듣고 응답했다면, 지금 우리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응답해야 한다. 그 소리를 따를 때, 우리는 하류의 삶을 청산하고 상류의 삶을 시작할 것이다. 세속의 천박을 벗고 신성의 고결함을 덧입을 것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영적 상류층”이 되는 것이다. 신념의 마력으로 성공하고 떼돈 벌어 자랑질 일삼는 “속된 상류층”이 아니라, 내면(영)의 소리를 듣고, 예수다움에 귀 기울이는 “고결한 상류층”이 되는 것이다. 존재의 중심에서 영적 상류의 흐름에 삶을 맡기면, 답답한 삶에 희망의 출구가 열리고, 섭리의 신비가 보인다.
나의 경우
상류의 흐름, 즉 중심의 흐름에 맡기면 사람 보는 눈이 달라진다. 하류에서 껍데기를 보다가 상류에서 알맹이를 본다. 재산, 학벌, 지위를 보다가 사람의 중심과 본질을 본다. 겉모양을 보며 사람을 깔보다가 내면의 예수다움을 보며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회개란 무엇인가. 하류에서 상류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세속의 유혹에 귀를 막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껍데기를 보다가 알맹이를 보는 것이다. 겉모양에 치중하다가 예수다움을 따르는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따르겠다고 결심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 나는 신학교를 졸업했고, 목사가 됐고, 목회를 시작했다. 하지만 상류와 하류를 오락가락했다. 상류의 삶을 살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것은 서른 무렵이었다. 이때가 메타노이아 즉 근본적인 전향 또는 패러다임의 전환으로서 회개한 때다.
회개는 계속됐고, 그럴 때마다 중심이라는 상류에서 하나님과 함께 삶의 물길에 나를 맡겼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다움을 따랐다. 그러자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
상류기도
교회란 어떤 곳인가? 신념의 마력이나 삼박자 축복 따위로 하류의 번영을 약속하는 곳인가. 아니다, 교회란 하류의 성공이 아니라, 상류의 신성함에 사로잡히게 하는 곳이다. 세속의 지위를 높여주는 곳인가. 아니다, 의식의 수준을 높여주는 곳이다. 겉사람의 건강을 책임지는 곳인가. 아니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만들어주는 곳이다. 세속의 허영으로 겉치장하는 곳인가. 아니다,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하는 곳이다.
무엇보다 교회는 재산을 불려주는 곳이 아니라 존재를 확장해주는 곳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크다”는 존재의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곳이며, “삶은 내가 경험하는 것보다 아름답고 신비하다”는 삶의 진실을 경험하게 하는 곳이다. 한쪽 날개로 나는 나비의 불균형과 꼴불견이 아니라 두 날개로 나는 나비의 균형과 아름다운 비상을 배우는 곳이다.
교회란 어떤 곳인가? 신념의 마력이나 삼박자 축복 따위로 하류의 번영을 약속하는 곳인가. 아니다, 교회란 하류의 성공이 아니라, 상류의 신성함에 사로잡히게 하는 곳이다. 세속의 지위를 높여주는 곳인가. 아니다, 의식의 수준을 높여주는 곳이다. 겉사람의 건강을 책임지는 곳인가. 아니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만들어주는 곳이다. 세속의 허영으로 겉치장하는 곳인가. 아니다,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하는 곳이다. (...) 한쪽 날개로 나는 나비의 불균형과 꼴불견이 아니라 두 날개로 나는 나비의 균형과 아름다운 비상을 배우는 곳이다.
그래서 기도해야 한다. 토머스 아퀴나스의 말처럼 기도는 “영성을 현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기도가 없다면 상류에서 시작하는 삶은 결코 현실화되지 않는다. 존재의 중심에서 들려오는 예수(다움)의 소리를 따라갈 수도 없다.
하지만 기도하더라도 “하류기도”가 아니라 “상류기도”를 해야 한다. 하류기도는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튼튼한 그물과 더 좋은 배를 달라고. 최신 시설을 갖춘 배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튼튼한 그물로 수많은 고기를 잡아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하류에서 상류로 기도를 올려보내려고 애쓸 것이다.
상류기도는 다르다. 상류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흐르기 위해 힘을 뺀다. 그래서 그물과 배를 비우고, 아버지와 일꾼들을 내려놓는다. 생존과 생계에 대한 염려에 사로잡힐 때마다, 혈연과 지연과 관련된 복잡한 생각에 빠질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렇게 향심하면서 존재의 중심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 맡긴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함께 흐른다.
상류기도는 다르다. 상류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흐르기 위해 힘을 뺀다. 그래서 그물과 배를 비우고, 아버지와 일꾼들을 내려놓는다. 생존과 생계에 대한 염려에 사로잡힐 때마다, 혈연과 지연과 관련된 복잡한 생각에 빠질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렇게 향심하면서 존재의 중심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 맡긴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함께 흐른다.
욕망의 지배를 받던 사람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 감정의 노예로 살던 사람이 성령의 감동으로 살아간다. 마음의 어둠에 예속됐던 사람이 영의 광채를 따라 살아간다. 삶의 여러 속박에서 벗어나니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다. 불행해 보이던 삶이 어느 날 문득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삶이 그렇게 희망찰 수가 없다.
하류에서 상류로 전향했을 뿐인데, 바깥에서 중심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내면에서 들리는 예수의 부름에 응답했을 뿐인데 하나님 나라가 아주 가깝다. 아니, 이미 하나님 나라다!
- 이민재
(막 1:14)
시몬과 안드레 두 어부가 고기를 잡고 있다. 예수께서 지나가다가 그들을 보고 부르신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들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른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배 안에서 시몬과 안드레 두 형제가 그물을 깁고 있다. 예수께서 그들도 부르신다. 그들은 아버지와 일꾼들을 배에 남겨 두고 예수를 따른다. 예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예수를 따랐다. 그때, 믿음의 풍경이 놀랍다.
그때와 지금
예수님이 요즘의 성도들에게 나타나신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까? “나를 따르라”는 부름을 듣기도 전에 더 좋은 그물을, 잘 찢어지지 않고 튼튼한 그물을 달라고 할 것 같다. 그래야 고기를 더 많이 잡고, 돈을 더 많이 벌 테니 말이다. 어쩌면 최첨단 장비를 갖춘 더 크고 빠른 배를 달라고 조를지도 모른다. 그래야 남들이 엄두도 못 내는 곳까지 가서 고기를 싹쓸이할 수 있을 테니까. 이기적인 속내를 비친 것 같아 민망하다 싶으면 헌금을 많이 하기 위해서라고 둘러댈지도 모른다.
아예 직업을 바꿔달라고 할지도 모른다. 많은 연봉, 좋은 복지, 노후 보장이 확실한 직업으로. 과거의 제자들처럼 한 자리 청탁할지도 모른다. 예수 선생께서 영광 받으실 때에, 나는 선생의 오른쪽에, 쟤는 선생님의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이런 상상이 그렇게 되바라진 상상은 아닐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주류들의 믿음의 풍경은 여전히 운수대통과 만사형통을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마가가 전해주는 믿음의 풍경은 오늘 우리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그때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들었을 때 주저 없이 따라나섰다. 생존의 도구인 그물과 배도 버리고, 아버지와 일꾼들이라는 인연도 뒤에 남기고. 그들은 능력 많으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절호의 기회에 더 좋은 그물을 바라지도 않았고, 최신식 배를 달라지도 않았고, 더 좋은 직장을 구하지도 않았다. 다만 예수의 부름에 즉시 따라나섰다.
상류에서
신앙생활이 이래야 하는 건가. 생업을 포기해야 하는 건가. 구연舊緣을 정리해야 하는 건가. 그렇다면 누가 감히 믿겠는가.
오해하지 말자. 신앙이 생업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속단하지 말자. 신앙이 인연을 끊는 것이라고. 세속 인연을 무시했다면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생존을 하찮게 여겼다면 예수님은 안식일 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제자들이 밀이삭을 잘라 먹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삶의 일상을 가볍게 여겼다면 예수님은 변모산의 황홀경에서 벗어나 일상의 현실로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는 베드로의 말에 “그러자꾸나” 하셨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가가 전하는 믿음의 풍경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이 이야기는 “사로잡힘”에 관한 이야기다. 제자들은 예수께 사로잡혔다. 제자들은 예수라는 사람에게 그냥 사로잡혔다. 예수님의 부름에는 성공이나 축복에 대한 약속도, 건강이나 기적에 대한 보장도 없었다. 예수님이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그냥 따랐다.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예수의 부름(소리)에 대한 사로잡힘,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필립 얀시의 책 『기도』에 이런 비유가 나온다. 그는 물방울이 강물을 이루는 과정을 보면서 기도에 대해 오랫동안 갖고 있던 생각을 수정한다.
여태까지는 개인적인 관심사를 상류에 계신 하나님께로 올려보내려고 했었다. 주님이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는 것처럼 나 자신의 상황을 알려드리기에 급급했다. 하나님의 마음을 바꾸고 도저히 거부할 수 없도록 몰아붙이려는 듯 강청하며 매달렸다. 그럴 게 아니다. 상류에서 시작해 물길을 탔어야 했다.
필립 얀시는 기도의 방향을 바꾼다. 하류에서 상류에 계신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알리려고 애쓰던 방식에서, 상류에 계신 하나님과 함께 물길을 타는 방식으로….
신앙도 마찬가지다. 하류에서 상류로 뭔가 보내 하류에서 원하는 것을 획득하려고 애쓰는 게 아니라, 상류에서 흐르는 물길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영적인 의미에서 “상류층”이 되는 것이다. 돈과 명품과 허영에 사로잡힌 상류층이 아니라, 존재의 중심과 삶의 본질에 사로잡힌 영적 상류층이 되는 것이다.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에게 “나를 따르라” 하신 예수님은 생업을 버리라고 하신 게 아니다. 근원으로 초대하신 것이다. 예수를 따르라고, 존재의 중심에서 들려오는 “너의” 예수다움 또는 그리스도성을 따르라고 호소하신 것이다. 겉사람(P1)에 연연하기 전에 속사람(P0)을 먼저 챙기라고, 생활현실(R1)의 노예가 되지 말고 영성현실(R0)에 뿌리내리라고 요청하신 것이다. 생업이나 인연은 그다음이라고….
이천 년 전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을 부르셨던 예수님은 오늘날 삶의 혼돈의 바다에서 우리를 부르신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의 육성肉聲을 듣고 응답했다면, 지금 우리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응답해야 한다. 그 소리를 따를 때, 우리는 하류의 삶을 청산하고 상류의 삶을 시작할 것이다. 세속의 천박을 벗고 신성의 고결함을 덧입을 것이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영적 상류층”이 되는 것이다. 신념의 마력으로 성공하고 떼돈 벌어 자랑질 일삼는 “속된 상류층”이 아니라, 내면(영)의 소리를 듣고, 예수다움에 귀 기울이는 “고결한 상류층”이 되는 것이다. 존재의 중심에서 영적 상류의 흐름에 삶을 맡기면, 답답한 삶에 희망의 출구가 열리고, 섭리의 신비가 보인다.
나의 경우
상류의 흐름, 즉 중심의 흐름에 맡기면 사람 보는 눈이 달라진다. 하류에서 껍데기를 보다가 상류에서 알맹이를 본다. 재산, 학벌, 지위를 보다가 사람의 중심과 본질을 본다. 겉모양을 보며 사람을 깔보다가 내면의 예수다움을 보며 사람을 귀하게 여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회개란 무엇인가. 하류에서 상류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세속의 유혹에 귀를 막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껍데기를 보다가 알맹이를 보는 것이다. 겉모양에 치중하다가 예수다움을 따르는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내면의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를 따르겠다고 결심한 것은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그 사이에 나는 신학교를 졸업했고, 목사가 됐고, 목회를 시작했다. 하지만 상류와 하류를 오락가락했다. 상류의 삶을 살겠다고 단단히 결심한 것은 서른 무렵이었다. 이때가 메타노이아 즉 근본적인 전향 또는 패러다임의 전환으로서 회개한 때다.
회개는 계속됐고, 그럴 때마다 중심이라는 상류에서 하나님과 함께 삶의 물길에 나를 맡겼다.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다움을 따랐다. 그러자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다가왔다.
상류기도
교회란 어떤 곳인가? 신념의 마력이나 삼박자 축복 따위로 하류의 번영을 약속하는 곳인가. 아니다, 교회란 하류의 성공이 아니라, 상류의 신성함에 사로잡히게 하는 곳이다. 세속의 지위를 높여주는 곳인가. 아니다, 의식의 수준을 높여주는 곳이다. 겉사람의 건강을 책임지는 곳인가. 아니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만들어주는 곳이다. 세속의 허영으로 겉치장하는 곳인가. 아니다,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하는 곳이다.
무엇보다 교회는 재산을 불려주는 곳이 아니라 존재를 확장해주는 곳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보다 크다”는 존재의 진실을 깨닫게 해주는 곳이며, “삶은 내가 경험하는 것보다 아름답고 신비하다”는 삶의 진실을 경험하게 하는 곳이다. 한쪽 날개로 나는 나비의 불균형과 꼴불견이 아니라 두 날개로 나는 나비의 균형과 아름다운 비상을 배우는 곳이다.
교회란 어떤 곳인가? 신념의 마력이나 삼박자 축복 따위로 하류의 번영을 약속하는 곳인가. 아니다, 교회란 하류의 성공이 아니라, 상류의 신성함에 사로잡히게 하는 곳이다. 세속의 지위를 높여주는 곳인가. 아니다, 의식의 수준을 높여주는 곳이다. 겉사람의 건강을 책임지는 곳인가. 아니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만들어주는 곳이다. 세속의 허영으로 겉치장하는 곳인가. 아니다, “마음에 숨은 사람”을 단장하는 곳이다. (...) 한쪽 날개로 나는 나비의 불균형과 꼴불견이 아니라 두 날개로 나는 나비의 균형과 아름다운 비상을 배우는 곳이다.
그래서 기도해야 한다. 토머스 아퀴나스의 말처럼 기도는 “영성을 현실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기도가 없다면 상류에서 시작하는 삶은 결코 현실화되지 않는다. 존재의 중심에서 들려오는 예수(다움)의 소리를 따라갈 수도 없다.
하지만 기도하더라도 “하류기도”가 아니라 “상류기도”를 해야 한다. 하류기도는 이렇게 기도할 것이다. 튼튼한 그물과 더 좋은 배를 달라고. 최신 시설을 갖춘 배로 사업 영역을 확장하고, 튼튼한 그물로 수많은 고기를 잡아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고.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하류에서 상류로 기도를 올려보내려고 애쓸 것이다.
상류기도는 다르다. 상류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흐르기 위해 힘을 뺀다. 그래서 그물과 배를 비우고, 아버지와 일꾼들을 내려놓는다. 생존과 생계에 대한 염려에 사로잡힐 때마다, 혈연과 지연과 관련된 복잡한 생각에 빠질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렇게 향심하면서 존재의 중심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 맡긴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함께 흐른다.
상류기도는 다르다. 상류기도는 하나님과 함께 흐르기 위해 힘을 뺀다. 그래서 그물과 배를 비우고, 아버지와 일꾼들을 내려놓는다. 생존과 생계에 대한 염려에 사로잡힐 때마다, 혈연과 지연과 관련된 복잡한 생각에 빠질 때마다, 거룩한 단어로 돌아가 주님의 이름을 부른다. 그렇게 향심하면서 존재의 중심에 현존하시는 하나님께 모든 것 맡긴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함께 흐른다.
욕망의 지배를 받던 사람이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 감정의 노예로 살던 사람이 성령의 감동으로 살아간다. 마음의 어둠에 예속됐던 사람이 영의 광채를 따라 살아간다. 삶의 여러 속박에서 벗어나니 그렇게 자유로울 수가 없다. 불행해 보이던 삶이 어느 날 문득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대던 삶이 그렇게 희망찰 수가 없다.
하류에서 상류로 전향했을 뿐인데, 바깥에서 중심으로 들어왔을 뿐인데, 내면에서 들리는 예수의 부름에 응답했을 뿐인데 하나님 나라가 아주 가깝다. 아니, 이미 하나님 나라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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