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그들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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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509회 작성일 23-11-01 13:32본문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민 12:7)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막 1:27)
모세가 구스(에티오피아) 여인과 결혼했을 때의 일이다. 미리암과 아론이 이 일을 비난하자 하나님은 이들을 불러 모세를 직접 변호해주셨다.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그런 다음 모세의 “다른 점”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신다.
모세로 말하자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다. … 그는 나의 온 집을 충성스럽게 맡고 있다. 그와는 내가 얼굴을 마주 보고 말한다. 명백하게 말하고 모호하게 말하지 않는다.(민 12:7-8)
겸손한 인격, 충성심, 하나님과의 대면, 명료한 말투만 해도 대단한데 하나님은 한 가지 더 덧붙이신다. “그는 나 주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모세를 다르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었다. 모세는 “주의 모습”(the form of the Lord) 곧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모세는 자신의 “참자아”(true self)를 각성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바로 모세를 겸손하게 만들고, 충성스럽게 하고, 하나님과 대면하게 하고, 명백하게 말하게 한 내면의 힘이었다.
모세
모세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바로의 궁에서 살았던 사십 년은 겉사람(페르소나, P1)이 전부인 줄 알며 살던 시기다. 그는 이집트의 왕자였다. 민족의식도 있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매맞는 것을 봤을 때 이집트 사람을 죽여서 모래 속에 묻어버렸다. 왕자의 오만함이 그를 해결사 노릇을 하게 했고, 분노가 그를 살인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히브리 사람끼리 싸우는 것을 말리려다가 살인이 탄로 나자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살인과 도피 과정의 모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오만한 해결사였다가 분노하는 살인자였다가 두려움에 떠는 도망자였다. 오만과 분노와 두려움이 뒤엉켜 만들어내는 그의 심리현실(마음, R2)은 사정없이 커졌을 것이며, 그러면서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을 것이다. 왕자라는 자의식도 히브리인이라는 민족의식도 더 이상 가질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뿐 아니라 “오만”과 “분노”와 “두려움”이라는 극단적인 감정이 뒤섞이면서 또 다른 악성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것이다. 후회와 실망, 패배감과 좌절감, 극단적인 무기력 같은…. 생활현실(R1)의 실패로 인해 그에게 남은 것은 심리현실(R2)을 지배하는 악성 감정과 그것이 자기인 줄 아는 거짓자아(P2) 뿐이었다.
모세가 그것에서 자유로워지는 데 무려 40년이 걸렸다. 40년은 왕자라는 자의식과 히브리인이라는 민족의식에 기반한 사회적 자아(겉사람, 페르소나, P1)와 거짓자아(옛사람, P2)가 해체되는 데 걸린 세월이다. 그 긴 세월을 그는 “양 떼를 돌보는 목자” 즉 “양치기”로 살았다. 겉으로 보면 실패자로 보였지만 이 시기에 그는 삶의 정수(精髓)를 배운다. 양치기의 정체성을 갖고 살면서 “돌봄”이라는 새로운 삶의 차원에 눈뜬 것이다. 돌봄이 없으면 생명의 탄생도 성장도 불가능함을 체득했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돌봄은 삶의 새로운 화두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모세의 삶의 여정이야말로 돌봄의 과정이었다. 바로의 공주도 모세를 돌봤고, 유모(실제로는 생모)도 모세를 돌봤다. 공주는 왕자의식을 갖게 했고 생모는 민족의식을 갖게 했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모세를 해결사에서 살인자로, 살인자에서 도망자로 만든 것이 바로 그런 돌봄이었기 때문이다. 모세에겐 새로운 돌봄이 필요했다. 이 돌봄이 일어난 곳이 바로 모세의 도피처 미디안 광야였다. 거기에서 모세는 양을 돌봤고, 하나님은 모세를 돌봤다.
돌봄의 선순환 속에서 모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돌봄의 대상에서 돌봄의 주체로 변형되어갔다. 겸손해지면서, 연약한 대상(양)에 충성하면서,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마침내 페르소나의 오만이 벗겨지고, 거짓자아의 두려움에서 벗어났을 때 존재의 심연에선 새로운 얼굴이 빛나기 시작했다. 모세의 진짜 얼굴, 모세 안에 있는 “주의 모습”, 아, 모세의 “참자아” 말이다. 참자아와 하나님은 동일체이므로 참자아가 깨어났을 때 남은 일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모세의 이야기는 정확하게 이 순서를 밟는다. 모세는 호렙산의 불타는 떨기 속에서 세속의 신을 벗었고, 하나님을 만났다.
그래서 참자아를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괜히 하나님을 참자아의 배후요 바탕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참자아를 각성할 때 하나님의 신비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물론 겉사람의 차원에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이때 하나님은 세속적인 “성・축・부・성”을 보장하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존재(Deus ex Machina)일 뿐이다. 거짓자아의 차원에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 이때 하나님은 나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무서운 존재다.
모세가 참자아 차원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달랐다.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는 “연민과 긍휼의” 하나님, 광야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실 것과 먹을 주시는 “양육과 돌봄의”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을 어미 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엄마 같은” 하나님이었다. 바로 이 하나님이 모세가 페르소나라는 신을 벗고, 거짓자아라는 신을 벗고, 참자아 차원에서 만난 하나님이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결국 “사랑의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나는 곧 나다”라고 대답하셨다. 사랑만이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기에!
모세가 참자아 차원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달랐다.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는 “연민과 긍휼의” 하나님, 광야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실 것과 먹을 주시는 “양육과 돌봄의”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을 어미 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엄마 같은” 하나님이었다.
바로 참자아 차원에서 만난 하나님이 모세를 다르게 만들었다. 겸손하게 했고, 주님의 일에 충성하게 했다. 수시로 하나님의 현존에 머물게 했고, 명백하게 말하게 했다. 참자아를 각성한 사람은 이처럼 “다르다!”
예수
예수님이 그런 분이었다. 예수님의 언행의 출처는 참자아였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 종교의 전통이나 교리, 제도나 조직에 매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참자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했고, 참자아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했고, 참자아를 현실 속에서 실현했고, 마침내 참자아 그 자체가 되었다. “참자아의 원형”(the archetype of true self)이 되셨다.
그런데 참자아의 바탕은 하나님이다. 참자아와 하나님은 합일체다. 참자아와 하나님은 떼려야 뗄 수 없이 하나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참자아의 원형이신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라거나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히 1:3)이라고 고백했다. 따라서 참자아를 각성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경험의 지름길이다. 하여,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요 10:38)라거나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 10:30)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참자아를 각성한다면 우리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요 10:38)라거나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 10:30)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참자아를 각성한다면 우리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한 것이 참자아를 통한 하나님 경험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빵의 유혹과 인정 욕구와 권력 의지를 극복할 수 있었다. 지식의 힘이나 도덕적인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과 하나인 참자아의 힘과 생명으로 이룩한 일이었다.
참자아에 뿌리내리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달랐다. 사람들은 그것을 느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 사회를 분리시킨 여러 종파와 달랐다. 율법주의자였던 바리새파와도 달랐고, 전통주의자였던 사두개파와도 달랐고, 혁명주의자였던 젤롯당과도 달랐고, 신비주의자였던 에세네파와도 달랐다. 그에게는 자신만의 고유한 향기가 있었다. 그게 바로 참자아의 향기였다.
그의 가르침은 참자아에서 나온 것이었다. 전통을 통해 배운 율법도 계명도 아니었다. 권위 있는 랍비에게서 들은 말도 아니었다. 그의 가르침은 참자아의 차원에서 스스로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은 당시의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 달리 권위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막 1:21-22)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경이로워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막 1:27)
예수님은 새 가죽부대에만 담을 수 있는 새 포도주였다. 예수님의 인격,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으려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패러다임으로는 담을 수 없었다. 사두개파의 전통주의-패러다임으로는 담을 수 없었다. 젤롯당의 행동주의-패러다임으로도, 에세네파의 신비주의-패러다임으로도 담을 수 없었다. 예수님이 요청하신 것은 “새로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새 포도주를 담으려면 율법주의와 전통주의와 행동주의와 신비주의 이전에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는 당시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초대교회
초대교회도 달랐다. 동방정교회 조직신학자 윌리엄 벤틀리 하트는 『무신론자들의 망상 Atheist Delusions』에서 초대교회가 당시 주류 세계였던 로마와 여러 면에서 달랐음을 강조한다.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혁명적이었다는 것이다. 사상은 심오했고, 감수성은 민감했다. 문화는 신선했고, 도덕은 실질적이었다. 그리고 영적 상상력의 스케일은 땅과 하늘, 현세와 내세, 여기와 저기, 내면과 초월을 통합할 정도로 컸다.
인간의 숙명론, 우주적 절망, 그리고 신비한 마술적 행위자들의 공포로부터 그리스도교가 제공한 해방, 그리스도교가 인간의 인격에 부여한 무한한 권위, 이방 세계의 가장 잔혹한 측면들을 뒤엎어버린 것, 그리스도교가 이룩한 정치권력에 대한 비신화화, 이기와 탐욕과 잔인의 시대에 도덕적 공동체를 만들어낸 능력, 다른 모든 도덕적 덕목들 위에 적극적인 사랑과 자비를 올려놓은 것 등이다.
초기 기독교는 미신적인 종교가 아니었다. 오히려 두려움을 악용하는 미신적인 종교에서 민중들을 해방시켰다. 또 인간을 새롭게 발견하게 했다. 인간은 계급이 아니었다. 노예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리스도교는 모든 인간의 인격에 똑같이 무한한 권위를 부여했다. 참자아의 차원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는 야만의 시대에 사랑과 자비를 말하고 실천했다.
그리스도교는 서구 역사 속에서 정신ㆍ의지ㆍ상상력 혹은 성취를 이룬 그 어떤 운동보다 도덕적으로 품위가 있었고, 문화적인 창조성에서 더욱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그리스도교가 서서히 그러나 가차 없이 밀어낸 문화(종교)와 얼마나 달랐던가를 인정한다면, 그리스도교는 거의 불가능한 사건이었다.
기독교는 로마 세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종교였다. “그리스도교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도덕적 인간의 가능성, 사회적 인간의 가능성, 지성적 인간의 가능성, 문화적 인간의 가능성, 종교적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발명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실재(현실)에 가담하기 위해서 그때까지 자기가 알아왔던 것뿐 아니라 자기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었고, 그런 요구는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하나의 되돌릴 수 없는 최종적 과정으로서 한 세계를 떠나서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물음이 꼬리를 문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어떤가? 급진적이라고 할만한 다름이 있는가? 혁명적이라고 할만한 새로움이 있는가? 한국교회는 미신적인 종교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종교인가? 인간의 인격에 무한한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종교인가? 오늘의 한국교회에는 도덕적인 품위가 있는가? 이기와 탐욕과 잔인의 시대에 도덕적인 공동체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가?
종교개혁주일에 우리는 물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모세의 다름, 예수의 다름, 초대교회의 다름을 계승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초대교회처럼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발명할 수 있을까?
답은 명확하다.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고, 참자아에 뿌리내리고, 참자아로 살면 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발명이다. 이때 우리는 미신이 조장하는 공포에서 자유로워진다. 이때 우리는 인간의 인격에 무한한 권위를 부여하게 된다. 이때 우리는 도덕적인 품위를 갖고 이기와 탐욕과 잔인의 시대에 도덕적인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름 하여 “참자아의 혁명”이다. 이것이야말로 포스트모던 탈-종교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교회와 세계 기독교가 이룩해야 할 진정한 종교개혁이다.
- 이민재
(민 12:7)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막 1:27)
모세가 구스(에티오피아) 여인과 결혼했을 때의 일이다. 미리암과 아론이 이 일을 비난하자 하나님은 이들을 불러 모세를 직접 변호해주셨다. “나의 종 모세는 다르다!” 그런 다음 모세의 “다른 점”을 구체적으로 열거하신다.
모세로 말하자면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겸손한 사람이다. … 그는 나의 온 집을 충성스럽게 맡고 있다. 그와는 내가 얼굴을 마주 보고 말한다. 명백하게 말하고 모호하게 말하지 않는다.(민 12:7-8)
겸손한 인격, 충성심, 하나님과의 대면, 명료한 말투만 해도 대단한데 하나님은 한 가지 더 덧붙이신다. “그는 나 주의 모습까지 볼 수 있다.” 이것이야말로 모세를 다르게 만든 결정적 요인이었다. 모세는 “주의 모습”(the form of the Lord) 곧 하나님의 형상을 보는 사람이었다. 다시 말해 모세는 자신의 “참자아”(true self)를 각성한 사람이었다. 이것이 바로 모세를 겸손하게 만들고, 충성스럽게 하고, 하나님과 대면하게 하고, 명백하게 말하게 한 내면의 힘이었다.
모세
모세가 처음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리되기까지 오랜 세월이 걸렸다. 바로의 궁에서 살았던 사십 년은 겉사람(페르소나, P1)이 전부인 줄 알며 살던 시기다. 그는 이집트의 왕자였다. 민족의식도 있었다. 그래서 히브리 사람이 이집트 사람에게 매맞는 것을 봤을 때 이집트 사람을 죽여서 모래 속에 묻어버렸다. 왕자의 오만함이 그를 해결사 노릇을 하게 했고, 분노가 그를 살인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히브리 사람끼리 싸우는 것을 말리려다가 살인이 탄로 나자 미디안 광야로 도망쳤다. 두려웠기 때문이다.
살인과 도피 과정의 모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오만한 해결사였다가 분노하는 살인자였다가 두려움에 떠는 도망자였다. 오만과 분노와 두려움이 뒤엉켜 만들어내는 그의 심리현실(마음, R2)은 사정없이 커졌을 것이며, 그러면서 심각한 정체성의 위기를 겪었을 것이다. 왕자라는 자의식도 히브리인이라는 민족의식도 더 이상 가질 수 없었을 테니 말이다. 그뿐 아니라 “오만”과 “분노”와 “두려움”이라는 극단적인 감정이 뒤섞이면서 또 다른 악성 감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을 것이다. 후회와 실망, 패배감과 좌절감, 극단적인 무기력 같은…. 생활현실(R1)의 실패로 인해 그에게 남은 것은 심리현실(R2)을 지배하는 악성 감정과 그것이 자기인 줄 아는 거짓자아(P2) 뿐이었다.
모세가 그것에서 자유로워지는 데 무려 40년이 걸렸다. 40년은 왕자라는 자의식과 히브리인이라는 민족의식에 기반한 사회적 자아(겉사람, 페르소나, P1)와 거짓자아(옛사람, P2)가 해체되는 데 걸린 세월이다. 그 긴 세월을 그는 “양 떼를 돌보는 목자” 즉 “양치기”로 살았다. 겉으로 보면 실패자로 보였지만 이 시기에 그는 삶의 정수(精髓)를 배운다. 양치기의 정체성을 갖고 살면서 “돌봄”이라는 새로운 삶의 차원에 눈뜬 것이다. 돌봄이 없으면 생명의 탄생도 성장도 불가능함을 체득했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돌봄은 삶의 새로운 화두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모세의 삶의 여정이야말로 돌봄의 과정이었다. 바로의 공주도 모세를 돌봤고, 유모(실제로는 생모)도 모세를 돌봤다. 공주는 왕자의식을 갖게 했고 생모는 민족의식을 갖게 했다. 그런데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모세를 해결사에서 살인자로, 살인자에서 도망자로 만든 것이 바로 그런 돌봄이었기 때문이다. 모세에겐 새로운 돌봄이 필요했다. 이 돌봄이 일어난 곳이 바로 모세의 도피처 미디안 광야였다. 거기에서 모세는 양을 돌봤고, 하나님은 모세를 돌봤다.
돌봄의 선순환 속에서 모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돌봄의 대상에서 돌봄의 주체로 변형되어갔다. 겸손해지면서, 연약한 대상(양)에 충성하면서, 운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마침내 페르소나의 오만이 벗겨지고, 거짓자아의 두려움에서 벗어났을 때 존재의 심연에선 새로운 얼굴이 빛나기 시작했다. 모세의 진짜 얼굴, 모세 안에 있는 “주의 모습”, 아, 모세의 “참자아” 말이다. 참자아와 하나님은 동일체이므로 참자아가 깨어났을 때 남은 일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모세의 이야기는 정확하게 이 순서를 밟는다. 모세는 호렙산의 불타는 떨기 속에서 세속의 신을 벗었고, 하나님을 만났다.
그래서 참자아를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괜히 하나님을 참자아의 배후요 바탕이라고 하는 게 아니다. 따라서 참자아를 각성할 때 하나님의 신비에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물론 겉사람의 차원에서도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이때 하나님은 세속적인 “성・축・부・성”을 보장하는 도깨비방망이 같은 존재(Deus ex Machina)일 뿐이다. 거짓자아의 차원에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 이때 하나님은 나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심판하는 무서운 존재다.
모세가 참자아 차원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달랐다.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는 “연민과 긍휼의” 하나님, 광야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실 것과 먹을 주시는 “양육과 돌봄의”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을 어미 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엄마 같은” 하나님이었다. 바로 이 하나님이 모세가 페르소나라는 신을 벗고, 거짓자아라는 신을 벗고, 참자아 차원에서 만난 하나님이었다. 모세가 만난 하나님은 결국 “사랑의 하나님”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나는 곧 나다”라고 대답하셨다. 사랑만이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기에!
모세가 참자아 차원에서 경험한 하나님은 달랐다. 고통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에 귀 기울이시는 “연민과 긍휼의” 하나님, 광야 사십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실 것과 먹을 주시는 “양육과 돌봄의”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을 어미 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가나안으로 인도하신 “엄마 같은” 하나님이었다.
바로 참자아 차원에서 만난 하나님이 모세를 다르게 만들었다. 겸손하게 했고, 주님의 일에 충성하게 했다. 수시로 하나님의 현존에 머물게 했고, 명백하게 말하게 했다. 참자아를 각성한 사람은 이처럼 “다르다!”
예수
예수님이 그런 분이었다. 예수님의 언행의 출처는 참자아였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 종교의 전통이나 교리, 제도나 조직에 매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참자아 안에서 하나님과 교제했고, 참자아를 통해 하나님의 일을 했고, 참자아를 현실 속에서 실현했고, 마침내 참자아 그 자체가 되었다. “참자아의 원형”(the archetype of true self)이 되셨다.
그런데 참자아의 바탕은 하나님이다. 참자아와 하나님은 합일체다. 참자아와 하나님은 떼려야 뗄 수 없이 하나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참자아의 원형이신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골 1:15)이라거나 “하나님의 본체대로의 모습”(히 1:3)이라고 고백했다. 따라서 참자아를 각성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경험의 지름길이다. 하여,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요 10:38)라거나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 10:30)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참자아를 각성한다면 우리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요 10:38)라거나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 10:30)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참자아를 각성한다면 우리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하나님과 나는 하나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한 것이 참자아를 통한 하나님 경험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빵의 유혹과 인정 욕구와 권력 의지를 극복할 수 있었다. 지식의 힘이나 도덕적인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하나님과 하나인 참자아의 힘과 생명으로 이룩한 일이었다.
참자아에 뿌리내리고 있었기에 예수님은 달랐다. 사람들은 그것을 느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 사회를 분리시킨 여러 종파와 달랐다. 율법주의자였던 바리새파와도 달랐고, 전통주의자였던 사두개파와도 달랐고, 혁명주의자였던 젤롯당과도 달랐고, 신비주의자였던 에세네파와도 달랐다. 그에게는 자신만의 고유한 향기가 있었다. 그게 바로 참자아의 향기였다.
그의 가르침은 참자아에서 나온 것이었다. 전통을 통해 배운 율법도 계명도 아니었다. 권위 있는 랍비에게서 들은 말도 아니었다. 그의 가르침은 참자아의 차원에서 스스로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은 당시의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가르침과 달리 권위가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에 놀랐다. “예수께서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권위 있게 가르치셨기 때문이다.”(막 1:21-22)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경이로워했다. “이게 어찌된 일이냐?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막 1:27)
예수님은 새 가죽부대에만 담을 수 있는 새 포도주였다. 예수님의 인격, 예수님의 가르침을 담으려면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했다.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패러다임으로는 담을 수 없었다. 사두개파의 전통주의-패러다임으로는 담을 수 없었다. 젤롯당의 행동주의-패러다임으로도, 에세네파의 신비주의-패러다임으로도 담을 수 없었다. 예수님이 요청하신 것은 “새로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예수라는 새 포도주를 담으려면 율법주의와 전통주의와 행동주의와 신비주의 이전에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는 당시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초대교회
초대교회도 달랐다. 동방정교회 조직신학자 윌리엄 벤틀리 하트는 『무신론자들의 망상 Atheist Delusions』에서 초대교회가 당시 주류 세계였던 로마와 여러 면에서 달랐음을 강조한다. 급진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혁명적이었다는 것이다. 사상은 심오했고, 감수성은 민감했다. 문화는 신선했고, 도덕은 실질적이었다. 그리고 영적 상상력의 스케일은 땅과 하늘, 현세와 내세, 여기와 저기, 내면과 초월을 통합할 정도로 컸다.
인간의 숙명론, 우주적 절망, 그리고 신비한 마술적 행위자들의 공포로부터 그리스도교가 제공한 해방, 그리스도교가 인간의 인격에 부여한 무한한 권위, 이방 세계의 가장 잔혹한 측면들을 뒤엎어버린 것, 그리스도교가 이룩한 정치권력에 대한 비신화화, 이기와 탐욕과 잔인의 시대에 도덕적 공동체를 만들어낸 능력, 다른 모든 도덕적 덕목들 위에 적극적인 사랑과 자비를 올려놓은 것 등이다.
초기 기독교는 미신적인 종교가 아니었다. 오히려 두려움을 악용하는 미신적인 종교에서 민중들을 해방시켰다. 또 인간을 새롭게 발견하게 했다. 인간은 계급이 아니었다. 노예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리스도교는 모든 인간의 인격에 똑같이 무한한 권위를 부여했다. 참자아의 차원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는 야만의 시대에 사랑과 자비를 말하고 실천했다.
그리스도교는 서구 역사 속에서 정신ㆍ의지ㆍ상상력 혹은 성취를 이룬 그 어떤 운동보다 도덕적으로 품위가 있었고, 문화적인 창조성에서 더욱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그리스도교가 서서히 그러나 가차 없이 밀어낸 문화(종교)와 얼마나 달랐던가를 인정한다면, 그리스도교는 거의 불가능한 사건이었다.
기독교는 로마 세계에서 완전히 새로운 종교였다. “그리스도교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 도덕적 인간의 가능성, 사회적 인간의 가능성, 지성적 인간의 가능성, 문화적 인간의 가능성, 종교적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발명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새로운 실재(현실)에 가담하기 위해서 그때까지 자기가 알아왔던 것뿐 아니라 자기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었고, 그런 요구는 절대적이었다. 그래서 하나의 되돌릴 수 없는 최종적 과정으로서 한 세계를 떠나서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물음이 꼬리를 문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어떤가? 급진적이라고 할만한 다름이 있는가? 혁명적이라고 할만한 새로움이 있는가? 한국교회는 미신적인 종교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자유로운 종교인가? 인간의 인격에 무한한 권위를 부여하고 있는 종교인가? 오늘의 한국교회에는 도덕적인 품위가 있는가? 이기와 탐욕과 잔인의 시대에 도덕적인 공동체를 만들어낼 능력이 있는가?
종교개혁주일에 우리는 물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모세의 다름, 예수의 다름, 초대교회의 다름을 계승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초대교회처럼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완전히 새로운 차원을 발명할 수 있을까?
답은 명확하다. 참자아를 각성하고, 참자아로 전향하고, 참자아에 뿌리내리고, 참자아로 살면 된다. 이것이야말로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발명이다. 이때 우리는 미신이 조장하는 공포에서 자유로워진다. 이때 우리는 인간의 인격에 무한한 권위를 부여하게 된다. 이때 우리는 도덕적인 품위를 갖고 이기와 탐욕과 잔인의 시대에 도덕적인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름 하여 “참자아의 혁명”이다. 이것이야말로 포스트모던 탈-종교 시대를 살아가는 한국교회와 세계 기독교가 이룩해야 할 진정한 종교개혁이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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