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성령체험에 관한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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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60회 작성일 24-07-22 14:25본문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행 2:4)
하나님께서는 이 성령을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주셨습니다.
(딛 3:6)
“이 목사, 성령 받았어?”
서른 무렵, 신학생들과 기도원에 갔을 때 원장이라는 늙수그레한 여자가 다그치듯 물었다. 상대가 아무리 젊어도 그렇지 초면인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 여자는 무례했고 나는 불쾌했다. 영적 카리스마를 과시하는 듯한 그의 허스키 보이스에서 나는 성령의 향기를 맡지 못했다. 사랑과 기쁨과 화평, 친절과 선함과 온유의 향기를….
묵상1
성령은 한국교회가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는 신앙 주제다. 성령체험은 유별난 신비체험과 거의 동일시된다. 대표적인 게 “방언”이다. 물론 성경은 성령강림 사건을 방언체험으로 묘사한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행 2:4)
방언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변성의식 상태에서 뜻 모를 말을 기괴하게 중얼대는 것쯤으로 여긴다. 그런 현상은 성경적인 의미의 방언이 아니다. 염불을 반복하거나 주문을 외우다가도 일어나니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을 성령세례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오순절 운동의 원조인 윌리엄 시모어(William Joseph Seymour, 1870-1922)나 찰스 파햄(Charles Fox Parham, 1873-1929) 같은 이들이다. 그들이 개최한 집회에서는 턱이 뒤틀리며 혀가 꼬이면서 뜻 모를 소리가 터지는가 하면, 입신入神상태에서 괴성을 지르며 뒹굴거나 춤을 추거나 웃음을 터뜨리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이런 현상들이 성령세례의 증거일까?
헬라어로 방언을 “글롯사”γλωσσα라고 하는데, 이것은 “혀 또는 언어”를 뜻한다. 이때의 언어는 “자연적으로 습득되지 않은 언어”language naturally unacquired를 의미한다. 한 마디로 익숙하지 않은 언어다. 사투리나 외국어가 여기에 속한다. 아람 방언과 유다 방언(왕하 18:26), 아스돗 방언(느 13:24), 루가오니아 방언(행 14:11), 히브리 방언(행 22:2) 등이 그렇다. 성령이 임했을 때 제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알아들었다. 방언은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가 아니라 알아듣게 하는 소통의 언어였다.
아무리 신비한 언어를 해도 그것이 소통을 막는다면 성경의 방언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을 것이다. “방언으로 만 마디 말을 하기보다도 깨친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합니다.”(고전 14:19) 그런데 신비체험을 한 사람은 체험을 절대화하는 경향 때문에 판단과 과시, 비교와 배제의 언어를 남발한다. 소통은 점점 불가능해진다. 성령의 이름으로 성령에 반하는 일이 일어난다. 반대로 성령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용납과 존중, 수용과 포용의 언어를 구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렇다면 신비한 언어를 하느냐 마느냐와 상관없이 그들에겐 성령이 현존하신다.
지난 금요일 감신대 떼제예배 끝난 뒤에 성경공부를 하면서 성령강림 사건의 본질이 “소통”이라고 하자 참석했던 목사님 한 분이 물었다. “그러면 성령충만은 뭘까요?” 나는 대답했다. “그야 소통충만이지요!” 그러면서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소통이 충만할 때 소통communication은 사귐communion으로 깊어집니다. 그것이 성령충만의 표지입니다.” 이 사귐이 종말적으로 실현되는 곳이 성만찬이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모신 그리스도인들은 성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과, 성만찬에 참여한 성도들과의 사귐(교제)에 참여한다. 그래서 성만찬을 영어로 Communion(커뮤니언)이라고 한다. 성만찬은 수직과 수평 차원에서 이뤄지는 사귐의 성사다. 사귐의 성사를 통해 종말론적 공동체community인 교회가 형성된다. 이런 통찰을 사도신경은 이렇게 담고 있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묵상2
성령체험에 관한 두 번째 묵상은 “외향적이며 대상적인” 성령 이해다. 사람들은 성령을 바깥에서 들어오는 초월적 실재나 기적적인 능력으로 생각한다. 그렇기에 성령을 달라고도 하고 받으라고도 한다. 성령은 공처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다. 바깥을 향한다는 점에서 외향적이며, 물건처럼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대상적이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위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린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받겠다는 자세다.
물론 성경은 성령을 주고받는 것에 대해 말한다. 스데반의 순교가 있고 난 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낸다. 두 사람이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했더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행 8:15, 17) 이 대목도 성령체험을 외향적이고 대상적으로 묘사한다.
성령을 외향적이고 대상적으로 이해할 때 우스운 일이 벌어진다.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체험 하는 것을 보고, 시몬이라는 자가 돈을 건네면서 말했다. “내가 손을 얹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도록 내게도 그런 권능을 주십시오.”(행 8:19) 그러자 베드로는 시몬을 매섭게 질책한다. “그대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행 8:20) 성령의 능력을 돈 주고 사려던 이 일은 성령을 외부 대상으로 이해할 때 생긴 웃픈 해프닝이다. 한국교회는 이런 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성경에는 외향적 성령체험만 나오지 않는다. 성령강림 사건이 있고 난 뒤에 베드로가 행한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행 2:38)
베드로의 설교에 따르면, 성령은 회개와 세례, 그리고 죄의 용서(죄사함)와 관련된다. 예수님도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막1:10)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도 빌립에게 세례를 받았을 때 성령을 받았다.(행8:38) 세례받았는데 성령 받지 못했다는 것은 모순이다. 밥을 먹었는데 쌀은 먹지 않았다는 것처럼 말이다.
바울은 또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날인을 받았습니다.”(엡 1:13)
성령체험은 회개, 세례, 죄사함뿐 아니라 믿음과도 관련된다. 회개는 예수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고, 믿음은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고,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고, 죄사람은 “그 아들(그리스도) 안에서”(골 1:14) 이뤄진다. 따라서 성령체험은 철저하게 “기독론적” 사건이다. 신비체험이나 유별난 체험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령을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주셨습니다.(딛 3:6)
그리스도인은 이미 성령의 현존 안에 있는 사람이다. 신비체험의 유무와 상관없이!
묵상3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위해 중보기도 하면서 성령을 “속사람”(참자아)과 관련시킨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엡 3:16)
속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강건해진다. 속사람이 강건해질수록 성령의 활동 또한 활발해진다. 성령과 속사람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다. 성령은 속사람의 뒷배이며, 속사람은 성령의 얼굴이다. 성령과 속사람은 서로에게 침투하고 서로를 북돋운다. 따라서 성령체험은 속사람(또는 참자아)을 각성하는 체험이다. 이것을 “내재적 성령체험”이라 할 수 있겠다.
성령체험은 주술적 힘으로 욕망을 성취하는 경험도 아니며, 기적을 일으키는 유별난 신비체험도 아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과정이며, 참자아를 각성하는 체험이다. 속사람이 강건해질수록 욕망에서 해방되며, 참자아를 각성할수록 신비체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다. 성령체험은 인간의 본질 체험인 셈이다. 이때 일어나는 일들을 바울은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첫째,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된다.(엡 3:19a)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닫는다. 하여,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는다.(엡 3:17c-18) 미움이나 분노, 질투나 원망이 아니라 사랑이 삶의 동력이 된다.
둘째,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해진다.(엡 3:19)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으로 충만해진다. 마침내 무의미와 허무의 심연에서 벗어난다. 외로움과 우울의 이불을 더 이상 덮지 않아도 된다. 삶은 새로운 의미로 빛나기 시작한다.
셋째,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받는다.(엡 3:20) 심지어 실패 속에서도 깨달음을 얻고, 상처 속에서도 은총을 발견한다. 희생자가 치유자로 변형된다. 사랑, 기쁨, 평화, 자비, 착함, 신실함, 온유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벗들, 성령은 속사람의 뒷배로 이미 현존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성령의 사람”이라는 것과 이미 성령의 현존과 능력 안에 있음을 날마다 확인하고 확언하라. 성령을 몇몇 신비체험에 국한하지 말라. 신비체험을 성령체험과 동일시하지 말라. 신비체험을 바라지도 부러워하지도 말라. 그럴수록 진정한 성령 경험에서 멀어질 뿐이다. 햇살처럼 이슬처럼 일상의 모든 순간에 현존하시며, 바람처럼 막힘없이 움직이시는 성령을 제한할 뿐이다. 이것처럼 성령체험을 빈약하게 하고, 성령을 모독하는 일도 없다. 신비체험은 영적 성장과 별로 관계가 없다. 신비체험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가 많이 필요한 사람일 뿐이다.
하니 벗들, 그저 규칙적인 관상수련을 통해 날마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고, 참자아로 깨어나라. 그것이 영적 성숙의 길이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길이다.
- 이민재
(행 2:4)
하나님께서는 이 성령을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주셨습니다.
(딛 3:6)
“이 목사, 성령 받았어?”
서른 무렵, 신학생들과 기도원에 갔을 때 원장이라는 늙수그레한 여자가 다그치듯 물었다. 상대가 아무리 젊어도 그렇지 초면인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니었다. 그 여자는 무례했고 나는 불쾌했다. 영적 카리스마를 과시하는 듯한 그의 허스키 보이스에서 나는 성령의 향기를 맡지 못했다. 사랑과 기쁨과 화평, 친절과 선함과 온유의 향기를….
묵상1
성령은 한국교회가 가장 크게 오해하고 있는 신앙 주제다. 성령체험은 유별난 신비체험과 거의 동일시된다. 대표적인 게 “방언”이다. 물론 성경은 성령강림 사건을 방언체험으로 묘사한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행 2:4)
방언이란 무엇일까. 사람들은 변성의식 상태에서 뜻 모를 말을 기괴하게 중얼대는 것쯤으로 여긴다. 그런 현상은 성경적인 의미의 방언이 아니다. 염불을 반복하거나 주문을 외우다가도 일어나니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을 성령세례라고 주장한 사람들이 오순절 운동의 원조인 윌리엄 시모어(William Joseph Seymour, 1870-1922)나 찰스 파햄(Charles Fox Parham, 1873-1929) 같은 이들이다. 그들이 개최한 집회에서는 턱이 뒤틀리며 혀가 꼬이면서 뜻 모를 소리가 터지는가 하면, 입신入神상태에서 괴성을 지르며 뒹굴거나 춤을 추거나 웃음을 터뜨리는 현상들이 나타났다. 이런 현상들이 성령세례의 증거일까?
헬라어로 방언을 “글롯사”γλωσσα라고 하는데, 이것은 “혀 또는 언어”를 뜻한다. 이때의 언어는 “자연적으로 습득되지 않은 언어”language naturally unacquired를 의미한다. 한 마디로 익숙하지 않은 언어다. 사투리나 외국어가 여기에 속한다. 아람 방언과 유다 방언(왕하 18:26), 아스돗 방언(느 13:24), 루가오니아 방언(행 14:11), 히브리 방언(행 22:2) 등이 그렇다. 성령이 임했을 때 제자들은 자기도 모르게 이런 말을 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거기 모였던 사람들이 저마다 태어난 지방의 말로 알아들었다. 방언은 알아듣지 못하는 소리가 아니라 알아듣게 하는 소통의 언어였다.
아무리 신비한 언어를 해도 그것이 소통을 막는다면 성경의 방언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과 같이 경고했을 것이다. “방언으로 만 마디 말을 하기보다도 깨친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기를 원합니다.”(고전 14:19) 그런데 신비체험을 한 사람은 체험을 절대화하는 경향 때문에 판단과 과시, 비교와 배제의 언어를 남발한다. 소통은 점점 불가능해진다. 성령의 이름으로 성령에 반하는 일이 일어난다. 반대로 성령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용납과 존중, 수용과 포용의 언어를 구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 그렇다면 신비한 언어를 하느냐 마느냐와 상관없이 그들에겐 성령이 현존하신다.
지난 금요일 감신대 떼제예배 끝난 뒤에 성경공부를 하면서 성령강림 사건의 본질이 “소통”이라고 하자 참석했던 목사님 한 분이 물었다. “그러면 성령충만은 뭘까요?” 나는 대답했다. “그야 소통충만이지요!” 그러면서 이런 설명을 덧붙였다. “소통이 충만할 때 소통communication은 사귐communion으로 깊어집니다. 그것이 성령충만의 표지입니다.” 이 사귐이 종말적으로 실현되는 곳이 성만찬이다. 성만찬에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모신 그리스도인들은 성 삼위 하나님과의 사귐과, 성만찬에 참여한 성도들과의 사귐(교제)에 참여한다. 그래서 성만찬을 영어로 Communion(커뮤니언)이라고 한다. 성만찬은 수직과 수평 차원에서 이뤄지는 사귐의 성사다. 사귐의 성사를 통해 종말론적 공동체community인 교회가 형성된다. 이런 통찰을 사도신경은 이렇게 담고 있다.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교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묵상2
성령체험에 관한 두 번째 묵상은 “외향적이며 대상적인” 성령 이해다. 사람들은 성령을 바깥에서 들어오는 초월적 실재나 기적적인 능력으로 생각한다. 그렇기에 성령을 달라고도 하고 받으라고도 한다. 성령은 공처럼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다. 바깥을 향한다는 점에서 외향적이며, 물건처럼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대상적이다. 그래서 기도할 때도 위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린다.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나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을 받겠다는 자세다.
물론 성경은 성령을 주고받는 것에 대해 말한다. 스데반의 순교가 있고 난 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그들에게 보낸다. 두 사람이 성령을 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사마리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했더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행 8:15, 17) 이 대목도 성령체험을 외향적이고 대상적으로 묘사한다.
성령을 외향적이고 대상적으로 이해할 때 우스운 일이 벌어진다. 베드로와 요한이 안수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체험 하는 것을 보고, 시몬이라는 자가 돈을 건네면서 말했다. “내가 손을 얹는 사람마다 성령을 받도록 내게도 그런 권능을 주십시오.”(행 8:19) 그러자 베드로는 시몬을 매섭게 질책한다. “그대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사려고 생각하였으니 그대는 돈과 함께 망할 것이오.”(행 8:20) 성령의 능력을 돈 주고 사려던 이 일은 성령을 외부 대상으로 이해할 때 생긴 웃픈 해프닝이다. 한국교회는 이런 일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성경에는 외향적 성령체험만 나오지 않는다. 성령강림 사건이 있고 난 뒤에 베드로가 행한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물었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행 2:38)
베드로의 설교에 따르면, 성령은 회개와 세례, 그리고 죄의 용서(죄사함)와 관련된다. 예수님도 세례를 받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했다.(막1:10)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도 빌립에게 세례를 받았을 때 성령을 받았다.(행8:38) 세례받았는데 성령 받지 못했다는 것은 모순이다. 밥을 먹었는데 쌀은 먹지 않았다는 것처럼 말이다.
바울은 또 에베소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구원하는 복음을 듣고서 그리스도를 믿었으므로, 약속하신 성령의 날인을 받았습니다.”(엡 1:13)
성령체험은 회개, 세례, 죄사함뿐 아니라 믿음과도 관련된다. 회개는 예수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고, 믿음은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고,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고, 죄사람은 “그 아들(그리스도) 안에서”(골 1:14) 이뤄진다. 따라서 성령체험은 철저하게 “기독론적” 사건이다. 신비체험이나 유별난 체험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령을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주셨습니다.(딛 3:6)
그리스도인은 이미 성령의 현존 안에 있는 사람이다. 신비체험의 유무와 상관없이!
묵상3
바울은 에베소교회를 위해 중보기도 하면서 성령을 “속사람”(참자아)과 관련시킨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주시기를 바랍니다.(엡 3:16)
속사람은 “성령을 통하여” 강건해진다. 속사람이 강건해질수록 성령의 활동 또한 활발해진다. 성령과 속사람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다. 성령은 속사람의 뒷배이며, 속사람은 성령의 얼굴이다. 성령과 속사람은 서로에게 침투하고 서로를 북돋운다. 따라서 성령체험은 속사람(또는 참자아)을 각성하는 체험이다. 이것을 “내재적 성령체험”이라 할 수 있겠다.
성령체험은 주술적 힘으로 욕망을 성취하는 경험도 아니며, 기적을 일으키는 유별난 신비체험도 아니다. 속사람이 강건해지는 과정이며, 참자아를 각성하는 체험이다. 속사람이 강건해질수록 욕망에서 해방되며, 참자아를 각성할수록 신비체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다. 성령체험은 인간의 본질 체험인 셈이다. 이때 일어나는 일들을 바울은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첫째,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된다.(엡 3:19a)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닫는다. 하여,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는다.(엡 3:17c-18) 미움이나 분노, 질투나 원망이 아니라 사랑이 삶의 동력이 된다.
둘째,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해진다.(엡 3:19)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의 충만함으로 충만해진다. 마침내 무의미와 허무의 심연에서 벗어난다. 외로움과 우울의 이불을 더 이상 덮지 않아도 된다. 삶은 새로운 의미로 빛나기 시작한다.
셋째,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받는다.(엡 3:20) 심지어 실패 속에서도 깨달음을 얻고, 상처 속에서도 은총을 발견한다. 희생자가 치유자로 변형된다. 사랑, 기쁨, 평화, 자비, 착함, 신실함, 온유 같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
벗들, 성령은 속사람의 뒷배로 이미 현존하신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성령의 사람”이라는 것과 이미 성령의 현존과 능력 안에 있음을 날마다 확인하고 확언하라. 성령을 몇몇 신비체험에 국한하지 말라. 신비체험을 성령체험과 동일시하지 말라. 신비체험을 바라지도 부러워하지도 말라. 그럴수록 진정한 성령 경험에서 멀어질 뿐이다. 햇살처럼 이슬처럼 일상의 모든 순간에 현존하시며, 바람처럼 막힘없이 움직이시는 성령을 제한할 뿐이다. 이것처럼 성령체험을 빈약하게 하고, 성령을 모독하는 일도 없다. 신비체험은 영적 성장과 별로 관계가 없다. 신비체험이 많은 사람은 하나님의 위로가 많이 필요한 사람일 뿐이다.
하니 벗들, 그저 규칙적인 관상수련을 통해 날마다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고, 참자아로 깨어나라. 그것이 영적 성숙의 길이며, 성령의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길이다.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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