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세이) 그 여자의 생에 대한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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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국샬렘 댓글 0건 조회 420회 작성일 24-03-18 14:34본문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요 4:28-29)
그 여자는 매일 정오에 물 길으러 우물에 갔다. 살인적인 더위 때문에 숨쉬기 힘들 때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그래야만 비루한 삶일지언정 버텨낼 수 있었으니까.
사실 정오는 물 긷기에 적절한 시간이 아니다. 아낙들은 보통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에 우물에 모인다. 우물은 배움의 장소다. 물을 길을 뿐 아니라 살림 정보도 교환하고 생활의 지혜도 얻기 때문이다. 우물은 치유의 성소다. 남편 흉도 보고 시어머니 흉도 보면서 수다를 쏟아내고 박장대소하는 동안 가슴에 맺힌 응어리들이 풀리기 때문이다. 우물은 사회적 유대의 공간이다. 아낙들의 우물가 소통을 통해 마을 공동체의 결속력이 더욱 공고해지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정오에 우물을 찾았다면 우물 공동체에 합류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당연히 마을 공동체에서도 소외되었을 것이다. 배척과 고립이 일상화되면서 여자의 소외감은 깊어졌을 것이다. 사람들이 입방아 찧기에 좋은 이력의 소유자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과거에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도 한 남자와 동거하는 여자라면 뻔할 뻔 자 아닌가.
여자의 소외감과 외로움은 뼛속까지 깊었을 것이고, 그럴수록 남자에게 집착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디서부터 삶의 단추가 잘못 끼워졌는지 모호해졌을 것이고, 그저 몸에 밴 “구습舊習”(엡 4:22)의 노예가 되어 희망 없는 삶을 체념적으로 지속했을 것이다. 그날도 정오쯤에 하루살이를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우물을 향해 옮기고 있었을 것이다.
변화
이처럼 이야기의 시작은 무거워도 이야기의 결말은 경이롭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요 4:28-29) 여자의 변화가 놀랍다. 첫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렸다. 물동이는,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물은 외롭고 무기력한 (그리고 음습하고 부도덕한?) 삶을 지탱하는 원료였다. 그런데 그것을 버렸다. 삶의 근본이 바뀌었다는 뜻이겠다.
둘째, 여자는 동네로 뛰어 들어갔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던 여자가 제 발로 사람들을 찾아갔다. 그동안 참아왔던 고립과 소외의 울분을 터뜨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회・문화・종교적으로 규정된 자아상에서 벗어나 영적인 발돋움을 하게 한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야)로 증언하기 위해서였다. 정오에 물 길으러 우물에 갈 때의 무기력함과는 달리 여자의 발걸음은 활기찼고 몸에선 희망의 향기가 났다.
셋째, 여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말을 섞지 않던 마을 사람들에게 여자가 먼저 말을 건다. 여자가 말한 “내가 한 일”이 뭘 의미하는지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일은 입에 담기 거북한 일이었다. 그런데 여자에겐 용기가 있었다. 자기의 삶의 실상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용기가. 일종의 커밍아웃이었다.
너머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변화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당연히 예수님의 영성지도 덕택이다. 예수님은 영성지도를 통해 여자가 생활현실 너머를 보게 하신다. 심리현실의 실상을 인정하게 하신다. 영성현실의 경이를 깨닫게 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영성지도는 “마실 물을 좀 달라”는 요청과 함께 시작된다. 사마리아 여자는 유대 남자가 어떻게 물을 달라냐며 놀란다.(요 4:9a)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 4:10)
예수님은 여자가 그동안 못 보던 것을 보기 원하신다. 첫째, 예수님이 사회문화적으로 규정된 존재(유대 남자) 이상의 존재임을 보기 원하신다. 둘째, 여자가 사용한 “물”이라는 단어를 “생수”라는 말로 바꿈으로써 물질세계 너머를 보기 원하신다.
하지만 여자에게 예수님은 유대 남자일 뿐이었고, 물은 물질로서의 물 즉 우물물일 뿐이었다. 여자는 유대 남자 이면의 예수와 우물물 너머의 영적 생수에 대해 무지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생수”를 언급했을 때도 이렇게 묻는다. “선생님에게는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선생님은 어디에서 생수를 구하신다는 말입니까?”(12절) 여자의 머릿속엔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는 우물물밖에 없다. 그러자 예수님은 또 다른 물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요 4:14)
“이 물”과 “내가 주는 물”의 대비를 통해 예수님은 또 다른 물에 대해 말씀하신다.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물도 있지만, 영혼의 심연에서 샘솟는 물도 있다. 육체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물도 있지만,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는 물도 있다. 예수님은 물의 의미를 “생수”로 변형시켰다가, 그다음엔 “내가 주는 물”로 바꿨다가, 이제는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로 의미를 확장하셨다. 이러한 의미의 변환과 확장을 통해 예수님은 여자가 영적으로 눈 뜨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여자는 답답하리만치 생활현실의 생존에 집착한다.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게 해주십시오.”(요 4:15) 여자는 꺼내도 꺼내도 재물이 줄어들지 않는 화수분처럼 마셔도 마셔도 물이 줄어들지 않는 우물 하나 소유하고 싶어 할 뿐이다. 여자에겐 생활현실이 삶의 전부다.
실상
예수님은 대화의 주제를 바꾸신다. 물을 주제로 대화하다가 갑자기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 것이다. 여자의 대답이 뜻밖이다.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요 4:17a) 엄밀히 말해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여자에겐 이미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도 한 남자와 같이 살고 있다. 이런 사실을 예수님도 잘 알고 계셨다.(요 4:17b) 그런데 예수님은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고 맞장구칠 뿐만 아니라, “바로 말하였다(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추어올리기까지 하신다.
예수님과 여자의 생각이 처음으로 일치한다. 과거에 남편이 있었고 지금도 동거하는 남자가 있다는 게 팩트인데, 예수님과 여자는 그 팩트를 긍정하면서도 부정한다. 하나의 팩트를 동시에 긍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한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남편”의 중의적重義的 의미를 이해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남편은 생활현실을 공유하는 “남자 사람”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남편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삶의 방식”을 은유하기도 한다. 예수와의 대화를 통해, 다시 말해 예수님의 영성지도를 통해 여자에게서는 이면・심층・너머에 대한 감수성이 깨어난 것 같다. 그래선지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 어쩌면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이 보인다. 남편 중심으로 이뤄진 삶의 방식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제 그것에 대해 “아니오!” 하려는 것 같다. 과거의 삶의 방식은 이제 신물이 난 걸까, 더이상 남편은 없다!
남편 중심의 삶의 방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본능적인 욕구인 “생존과 안전” 욕구와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곧 “애정과 존중” 욕구를 남편이라는 대상을 통해 채우려는 것이다. (남편 이외에 권위적 존재나 지위, 권력, 재물 같은 것도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사람을 의존적으로 만든다. 종속적이며 비주체적으로 만든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대상(남편)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이때는 아마 “권력과 통제” 욕구가 강력하게 작동할 것이다.
여자는 예수와 대화하면서 자기 삶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본능적 욕망에 기초한 행복프로그램을 간파한 것 같다. 여자는 그러한 삶의 허망함과 씁쓸함을, 집착과 예속의 악순환을 진저리나게 경험한 것 같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산 세월과 이력은 긍정하지만, 남편에 집착하면서 “허망한 욕정을 따라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의 방식에 대해 “아니오!” 하려는 것이다.
경이
여자가 생활현실 너머를 보고 심리현실의 실상을 깨닫자 경이로운 차원이 열리기 시작했다. 여자가 생활현실의 지겨움, 심리현실에서 작동하는 욕망의 행복프로그램(구습)을 자각하자 더 깊고 본질적인 무언가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예배 욕구였다! 우리는 여자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서 예배 욕구를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사마리아의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요 4:20)
물을 주제로 얘기하다가 예수님이 불쑥 남편 이야기를 꺼내더니, 남편 얘기하다가 여자가 느닷없이 예배 이야기를 꺼낸다. 자기도 명료하게 자각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표출이다. 의식 차원에서는 논리적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처음으로 영성현실을 각성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여자는 난생 처음 성스러움과 경이로움을 향한 예배 욕구를 느낀다.
그러나 예배 욕구를 느끼자마자 여자는 고민에 빠진다. 예루살렘에서는 유대인의 배척 때문에 예배할 수 없고, 사마리아에서는 마을 공동체의 따돌림 때문에 예배할 수 없다. 여자의 영적 고뇌와 절망을 꿰뚫어 보신 걸까, 장소를 고민하는 여자에게 예수님은 예배의 본질을 가르쳐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 4:24)
이 말을 들었을 때 여자의 심정은 어땠을까. 자유와 해방감 이외에 무슨 단어로 그 심정을 묘사할 수 있을까. 생활현실에서 경험한 집단 따돌림에서의 자유, 생존을 위한 비루함과 지겨움으로부터의 자유, 사회문화적으로 규정된 부정적인 자아상에서의 자유, 남자에 의존하는 노예적 비주체성에서의 자유, 소외감과 공허와 어둠이 가득한 심리현실에서의 자유, 심리현실에 똬리 튼 욕망 중심 행복프로그램에서의 자유, 장소 때문에 예배가 불가능하다는 영적 절망에서의 자유, 오오, 얼마나 크고 깊은 자유였을까. 얼마나 시원하고 홀가분한 해방감이었을까.
예수님의 영성지도를 통해 여자가 생활현실 너머를 보고, 심리현실의 실상을 인정하고, 영성현실의 경이를 감지했을 때 일어난 구원 경험이었다. 내면에서 뭔가 폭발할 것 같았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활력이 용솟음쳤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 이민재
(요 4:28-29)
그 여자는 매일 정오에 물 길으러 우물에 갔다. 살인적인 더위 때문에 숨쉬기 힘들 때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그래야만 비루한 삶일지언정 버텨낼 수 있었으니까.
사실 정오는 물 긷기에 적절한 시간이 아니다. 아낙들은 보통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에 우물에 모인다. 우물은 배움의 장소다. 물을 길을 뿐 아니라 살림 정보도 교환하고 생활의 지혜도 얻기 때문이다. 우물은 치유의 성소다. 남편 흉도 보고 시어머니 흉도 보면서 수다를 쏟아내고 박장대소하는 동안 가슴에 맺힌 응어리들이 풀리기 때문이다. 우물은 사회적 유대의 공간이다. 아낙들의 우물가 소통을 통해 마을 공동체의 결속력이 더욱 공고해지기 때문이다.
그 여자가 정오에 우물을 찾았다면 우물 공동체에 합류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당연히 마을 공동체에서도 소외되었을 것이다. 배척과 고립이 일상화되면서 여자의 소외감은 깊어졌을 것이다. 사람들이 입방아 찧기에 좋은 이력의 소유자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과거에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도 한 남자와 동거하는 여자라면 뻔할 뻔 자 아닌가.
여자의 소외감과 외로움은 뼛속까지 깊었을 것이고, 그럴수록 남자에게 집착했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어디서부터 삶의 단추가 잘못 끼워졌는지 모호해졌을 것이고, 그저 몸에 밴 “구습舊習”(엡 4:22)의 노예가 되어 희망 없는 삶을 체념적으로 지속했을 것이다. 그날도 정오쯤에 하루살이를 위해 무거운 발걸음을 우물을 향해 옮기고 있었을 것이다.
변화
이처럼 이야기의 시작은 무거워도 이야기의 결말은 경이롭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요 4:28-29) 여자의 변화가 놀랍다. 첫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렸다. 물동이는, 그리고 그 속에 담긴 물은 외롭고 무기력한 (그리고 음습하고 부도덕한?) 삶을 지탱하는 원료였다. 그런데 그것을 버렸다. 삶의 근본이 바뀌었다는 뜻이겠다.
둘째, 여자는 동네로 뛰어 들어갔다.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던 여자가 제 발로 사람들을 찾아갔다. 그동안 참아왔던 고립과 소외의 울분을 터뜨리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사회・문화・종교적으로 규정된 자아상에서 벗어나 영적인 발돋움을 하게 한 예수를 그리스도(메시야)로 증언하기 위해서였다. 정오에 물 길으러 우물에 갈 때의 무기력함과는 달리 여자의 발걸음은 활기찼고 몸에선 희망의 향기가 났다.
셋째, 여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말을 건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말을 섞지 않던 마을 사람들에게 여자가 먼저 말을 건다. 여자가 말한 “내가 한 일”이 뭘 의미하는지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일은 입에 담기 거북한 일이었다. 그런데 여자에겐 용기가 있었다. 자기의 삶의 실상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용기가. 일종의 커밍아웃이었다.
너머
묻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변화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당연히 예수님의 영성지도 덕택이다. 예수님은 영성지도를 통해 여자가 생활현실 너머를 보게 하신다. 심리현실의 실상을 인정하게 하신다. 영성현실의 경이를 깨닫게 하신다.
이러한 예수님의 영성지도는 “마실 물을 좀 달라”는 요청과 함께 시작된다. 사마리아 여자는 유대 남자가 어떻게 물을 달라냐며 놀란다.(요 4:9a)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상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너에게 물을 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았더라면, 도리어 네가 그에게 청하였을 것이고, 그는 너에게 생수를 주었을 것이다.(요 4:10)
예수님은 여자가 그동안 못 보던 것을 보기 원하신다. 첫째, 예수님이 사회문화적으로 규정된 존재(유대 남자) 이상의 존재임을 보기 원하신다. 둘째, 여자가 사용한 “물”이라는 단어를 “생수”라는 말로 바꿈으로써 물질세계 너머를 보기 원하신다.
하지만 여자에게 예수님은 유대 남자일 뿐이었고, 물은 물질로서의 물 즉 우물물일 뿐이었다. 여자는 유대 남자 이면의 예수와 우물물 너머의 영적 생수에 대해 무지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생수”를 언급했을 때도 이렇게 묻는다. “선생님에게는 두레박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선생님은 어디에서 생수를 구하신다는 말입니까?”(12절) 여자의 머릿속엔 두레박으로 길어 올리는 우물물밖에 없다. 그러자 예수님은 또 다른 물에 대해 말씀하신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이 될 것이다.(요 4:14)
“이 물”과 “내가 주는 물”의 대비를 통해 예수님은 또 다른 물에 대해 말씀하신다. 우물에서 길어 올리는 물도 있지만, 영혼의 심연에서 샘솟는 물도 있다. 육체의 목마름을 채워주는 물도 있지만, 영혼의 갈증을 채워주는 물도 있다. 예수님은 물의 의미를 “생수”로 변형시켰다가, 그다음엔 “내가 주는 물”로 바꿨다가, 이제는 “영생에 이르게 하는 샘물”로 의미를 확장하셨다. 이러한 의미의 변환과 확장을 통해 예수님은 여자가 영적으로 눈 뜨기를 바라신다.
그러나 여자는 답답하리만치 생활현실의 생존에 집착한다. “그 물을 나에게 주셔서,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게 해주십시오.”(요 4:15) 여자는 꺼내도 꺼내도 재물이 줄어들지 않는 화수분처럼 마셔도 마셔도 물이 줄어들지 않는 우물 하나 소유하고 싶어 할 뿐이다. 여자에겐 생활현실이 삶의 전부다.
실상
예수님은 대화의 주제를 바꾸신다. 물을 주제로 대화하다가 갑자기 남편을 불러오라고 하신 것이다. 여자의 대답이 뜻밖이다. “나에게는 남편이 없습니다.”(요 4:17a) 엄밀히 말해 이 말은 사실이 아니다. 여자에겐 이미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도 한 남자와 같이 살고 있다. 이런 사실을 예수님도 잘 알고 계셨다.(요 4:17b) 그런데 예수님은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고 맞장구칠 뿐만 아니라, “바로 말하였다(네 말이 참되도다)”라고 추어올리기까지 하신다.
예수님과 여자의 생각이 처음으로 일치한다. 과거에 남편이 있었고 지금도 동거하는 남자가 있다는 게 팩트인데, 예수님과 여자는 그 팩트를 긍정하면서도 부정한다. 하나의 팩트를 동시에 긍정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한다.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남편”의 중의적重義的 의미를 이해하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남편은 생활현실을 공유하는 “남자 사람”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남편을 중심으로 이뤄지는 “삶의 방식”을 은유하기도 한다. 예수와의 대화를 통해, 다시 말해 예수님의 영성지도를 통해 여자에게서는 이면・심층・너머에 대한 감수성이 깨어난 것 같다. 그래선지 이전에 보지 못했던 것, 어쩌면 보지 않으려 했던 것이 보인다. 남편 중심으로 이뤄진 삶의 방식이 보이기 시작했고, 이제 그것에 대해 “아니오!” 하려는 것 같다. 과거의 삶의 방식은 이제 신물이 난 걸까, 더이상 남편은 없다!
남편 중심의 삶의 방식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본능적인 욕구인 “생존과 안전” 욕구와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 곧 “애정과 존중” 욕구를 남편이라는 대상을 통해 채우려는 것이다. (남편 이외에 권위적 존재나 지위, 권력, 재물 같은 것도 대상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사람을 의존적으로 만든다. 종속적이며 비주체적으로 만든다.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대상(남편)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이때는 아마 “권력과 통제” 욕구가 강력하게 작동할 것이다.
여자는 예수와 대화하면서 자기 삶 속에서 작동하고 있는 본능적 욕망에 기초한 행복프로그램을 간파한 것 같다. 여자는 그러한 삶의 허망함과 씁쓸함을, 집착과 예속의 악순환을 진저리나게 경험한 것 같다. 그래서 남편과 함께 산 세월과 이력은 긍정하지만, 남편에 집착하면서 “허망한 욕정을 따라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의 방식에 대해 “아니오!” 하려는 것이다.
경이
여자가 생활현실 너머를 보고 심리현실의 실상을 깨닫자 경이로운 차원이 열리기 시작했다. 여자가 생활현실의 지겨움, 심리현실에서 작동하는 욕망의 행복프로그램(구습)을 자각하자 더 깊고 본질적인 무언가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예배 욕구였다! 우리는 여자가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서 예배 욕구를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 조상은 이 산[사마리아의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요 4:20)
물을 주제로 얘기하다가 예수님이 불쑥 남편 이야기를 꺼내더니, 남편 얘기하다가 여자가 느닷없이 예배 이야기를 꺼낸다. 자기도 명료하게 자각하지 못하는 무의식의 표출이다. 의식 차원에서는 논리적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처음으로 영성현실을 각성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여자는 난생 처음 성스러움과 경이로움을 향한 예배 욕구를 느낀다.
그러나 예배 욕구를 느끼자마자 여자는 고민에 빠진다. 예루살렘에서는 유대인의 배척 때문에 예배할 수 없고, 사마리아에서는 마을 공동체의 따돌림 때문에 예배할 수 없다. 여자의 영적 고뇌와 절망을 꿰뚫어 보신 걸까, 장소를 고민하는 여자에게 예수님은 예배의 본질을 가르쳐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요 4:24)
이 말을 들었을 때 여자의 심정은 어땠을까. 자유와 해방감 이외에 무슨 단어로 그 심정을 묘사할 수 있을까. 생활현실에서 경험한 집단 따돌림에서의 자유, 생존을 위한 비루함과 지겨움으로부터의 자유, 사회문화적으로 규정된 부정적인 자아상에서의 자유, 남자에 의존하는 노예적 비주체성에서의 자유, 소외감과 공허와 어둠이 가득한 심리현실에서의 자유, 심리현실에 똬리 튼 욕망 중심 행복프로그램에서의 자유, 장소 때문에 예배가 불가능하다는 영적 절망에서의 자유, 오오, 얼마나 크고 깊은 자유였을까. 얼마나 시원하고 홀가분한 해방감이었을까.
예수님의 영성지도를 통해 여자가 생활현실 너머를 보고, 심리현실의 실상을 인정하고, 영성현실의 경이를 감지했을 때 일어난 구원 경험이었다. 내면에서 뭔가 폭발할 것 같았다.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활력이 용솟음쳤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 여자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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